192화. 54th. 세기말 이후를 위한 준비 - 미국 편 (2)
잡스와의 협상을 마친 나는 호텔에서 쉬고 있던 선해철과 박태진을 불러서 투자 계약을 체결했다. 호텔로 돌아온 나는 두 사람과 함께 맥주를 마셨다.
“크으!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잡스가 애플에 복귀하다니.”
“복귀할 만했으니까 복귀한 거죠, 삼촌.”
선해철을 보며 빙긋 웃던 내게 박태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반도체까지 거래에 넣으신 거면 태현전자를 염두에 두신 겁니까?”
‘우리 형, 촉이 많이 날카로워졌네. 내 생각을 알아채다니.’
박태진의 또 한 번 성장한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GK반도체 인수한다고 어음 발행해서 GK전자에 던져줬잖아요. 2조 원 전부요.”
“자금 경색에 빠질 거란 말씀이군요. IT버블이 붕괴되면 반도체 판매량도 줄어들 테니.”
박태진의 말대로 IT버블이 무너지면 수많은 IT기업들이 도산하고 그들이 구축하려는 데이터센터에 들어갈 메모리 반도체 발주물량도 대폭 감소한다.
다시 말해 IT버블 붕괴는 인텔의 RD램 호환 포기 선언과 함께 반도체 치킨게임의 트리거가 된다.
“그러니 태현전자는 무너질 거예요. 우린 그때까지 미국과 일본에서 최대한 많은 밑천을 만들어야 하고요.”
맥주 한 모금을 삼킨 나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세기말의 승자가 되는 건 나, 그리고 내 사람들뿐일 겁니다.”
지금의 나는 나와 내 사람들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내가 할 몫을 다하는 거다. 차가운 미소를 띤 나를 보며 선해철이 피식 웃었다.
“너랑 함께 하면 아포칼립스 속에서도 돈을 벌겠어, 하하.”
“뉴욕 추기경 전하 앞에서 혼인성사 치른 분이 너무 불경하신 거 아닙니까? 흐흐.”
박태진은 선해철에게 농담을 던졌지만 나 또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 재벌로 태어난 이상 천당에 가긴 글렀으니 이 생에서라도 최선을 다해 살아갈 것이다.
***
다음 날.
캔 맥주 여섯 캔에 양주 세 병을 비웠음에도 우리 셋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체크아웃을 했다. 체크아웃을 한 우리가 간 곳은 멘로파크의 산타 마가리타 애비뉴 232번지였다.
“여기야? 제리하고 데이비드가 알려줬다는 곳이?”
“네.”
차에서 내린 나에겐 아주 익숙한 곳이었다.
‘예전에 와봤었지. 구글의 요람.’
전생에 신성그룹의 개로써 애플과의 소송전을 현지에서 지휘하느라 캘리포니아에 머물렀던 나는 바람이나 쐴 겸 구글의 출발점을 찾았었다. 두 청춘의 꿈을 먹고 자란 구글의 요람에서 기운이라도 얻을까 해서 말이다.
그 기억, 어제 있었던 제리 양, 데이비드 필로와의 미팅 덕분에 편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발걸음을 옮긴 우리는 차고로 향했다.
차고 안을 보니 몇 개의 책상과 컴퓨터, 그리고 미국의 가난한 벤처사업가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음료수, 맥주 깡통과 피자 상자, 핫도그 포장지 따위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햐아, 이거, 이거 어디서부터 구제를 해줘야 될지 모르겠네. 저기 저 피자 박스에 파리 꼬이는 거 봐라.”
“미국 벤처사업가들이 차고 창업을 한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열악할 줄은 몰랐습니다.”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선해철, 딱하다는 눈길로 차고 안을 둘러보는 박태진과 달리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울 수 없었다.
‘이게 진짜 창업이지, 후후.’
이번 생의 야후는 나를 만나서 아주 편하게 시작했지만 구글은 몇 달이나마 빛 한줄기 안 들어오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왔다.
이제는 내가 그 한줄기 빛이 되어주고 싶었다. 구글, 그리고 구글의 아버지인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나의 빛줄기를 원 없이 맞아도 충분한 사람들이 아닌가?
“계십니까?”
잠깐의 감상을 접어두고 두 사람을 불렀지만 인기척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우리 셋은 벽에 기댄 채 서거나 쭈그려 앉는 등 제각각의 방식으로 두 사람이 오길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두 젊은 백인 남성이 커다란 종이봉투와 피자 박스를 들고 차고로 걸어왔다. 두 남자는 우릴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 누구십니까?”
“여긴 사유지입니다! 당장 나가지 않으면 무단침입으로···!”
잔뜩 경계하는 두 젊은 청년을 보며 나는 두 손을 들어 위아래로 흔들었다.
“워워, 진정하고 얘기부터 하자고. 우리가 어딜 봐서 도둑질할 놈들로 보이는 거야? 하하.”
너스레를 떨며 웃는 내 모습에 두 사람의 날카로운 눈길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럼, 뭐 때문에 온 건데?”
“음, 날개를 달아주러 온 천사들 정도로 해둘까?”
“날개를 달아주러 온 천사들?”
“천사들이라기엔 시커먼 남자들이라 맘에 안 들겠지만 우린 너희들에게 날개를 달아줄 천사들이야, 하하.”
분위기를 풀기 위해 어설픈 농담까지 던져가며 웃던 나는 양 손에 쥔 명함 두 장을 한 장씩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스탠더드··· 캐피털?”
“존 데이비슨··· 리?”
명함을 보던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금세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응. 내 회사 이름이고 내 영어 이름이야.”
“저, 정말로 스탠더드 캐피털이 네 회사야?”
“설마··· 투자하러 여기까지 온 거야?”
말을 더듬는 세르게이 브린과 조심스럽게 묻는 래리 페이지를 보며 나는 빙긋 웃었다.
“물론. 삼촌, 형, 두 사람하고 얘기 좀 할게요.”
“오케이. 친구들, 우리 조니 말 들으면 자다가도 대박이 터질 겁니다, 하하.”
“후회할 선택은 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하하.”
옆에 있던 선해철과 박태진은 멍한 표정의 세르게이와 래리에게 조언 아닌 조언을 던져주며 자리를 비켜줬다. 그럼 시작해볼까?
***
차고로 들어간 나는 세르게이, 래리와 마주보며 책상에 걸터앉았다.
“야후의 제리하고 만났는데 구글 인수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들었거든. 그 이유를 듣고 나니 흥미가 생겨서 오게 됐어.”
제리 양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자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검색이 잘 된다고 인수를 거절했다고?”
“야후의 베이스는 검색엔진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믿지 못하는 두 사람을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야후는 이제 광고회사나 마찬가지야. 배너 광고로 먹고 사는 광고회사. 그러니 접속자가 오래 머무를수록 수익이 올라가거든.”
“그래도··· 기본은 검색엔진이잖아.”
잠시 머뭇거리던 래리의 대답에 이어 세르게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래리 말이 맞아, 조니. 검색엔진은 검색이 잘 돼야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잖아?”
래리와 세르게이의 말하는 모습을 보니 처음 만났을 때의 제리와 데이비드를 보는 것 같았다. 그땐 두 사람도 이런 모습이었는데···.
씁쓸함을 뒤로 한 채 나는 이 두 꿈나무들에게 현실을 알려줬다.
“의결권을 넘겨받았어도 제리와 데이비드는 창업자일 뿐이야. 두 사람도 초심을 잃었지만 경영은 닳고 단 직장인들이 하니 어쩔 수 없겠지. 먹여 살려야 할 사람들도 많아졌고.”
이제 야후는 제리와 데이비드 둘이서 지지고 볶던 회사가 아니라 만 명이 훨씬 넘는 직원들을 둔 거대기업이다. 더 많은 매출, 더 많은 수익을 좇는 건 불가피하다.
무엇보다.
내가 이 자리까지 올라오는 데는 제리와 데이비드에게 먼저 접근해서 야후의 초기 투자자가 된 게 큰 힘이 됐다.
내게 도움을 준 그들을 욕할 수 없기에 적당히 포장해줬고,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세르게이와 래리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투자 협상을 시작해볼까? 뭐부터 투자해야 해?”
침울한 분위기를 밀어내고 본제를 꺼내자 세르게이와 래리의 입에서 조건반사처럼 하나의 단어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서버!”
“여기 있는 컴퓨터들로는 제대로 된 퍼포먼스를 내지 못할 것 같았어. 그러면···.”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을 보며 말끝을 흐리던 나는 손뼉을 펑 쳤다.
“한 큐에 전부 시작하자. 서버부터 오피스, 직원, 너희가 쓸 고급차와 집··· 전부 합쳐서 1억 달러 투자할게. 콜?”
“1억 달러?”
1억 달러라는 숫자에 세르게이와 래리의 눈이 커졌다. 나는 빙긋 웃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놀라기엔 아직 이른데? 내후년까지 너희와 합이 맞을 경영인도 영입해주고 구글에 딱 맞는 수익모델도 짜줄게. 어때?”
벤처사업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난제 두 가지가 경영과 수익모델이다. 그 두 개를 해결해주겠다는 말에 두 사람은 입까지 떡 벌렸지만 내겐 별 거 아니었다.
“어떡할래? 투자, 받을래?”
뿌듯한 표정을 지은 나와 달리 두 사람은 반응이 영 시원치가 않았다. 왜지?
“무슨 문제라도···?”
“그렇게 많은 돈을 투자하면 지분이···.”
말끝을 흐린 세르게이 브린과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래리 페이지를 보며 나는 엄지만 접은 손을 들었다.
“40퍼센트. 딱 40퍼센트만 받을게. 의결권도 너희한테 반절씩 나눠서 다 넘겨줄 거고.”
“40퍼센트?”
“의결권까지?”
고개를 끄덕인 내게 세르게이가 소리쳤다.
“너 지금 제정신이야? 사업 아이템 빼면 네가 전부 세팅해주겠다는 건데 겨우 40퍼센트?”
“의결권까지 주면 넌 아무 것도 못해. 그러니까 45퍼센트 받는 게 어때?”
래리까지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 조건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아니, 딱 40퍼센트만 줘. 다른 쪽 펀딩도 받고. 대신에 우리 쪽 지분은 어떤 경우라도 40퍼센트를 맞출 수 있게 추가투자를 열어줘.”
“1억 달러나 쏴주겠다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래리 넌 어때?”
세르게이의 질문에 래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만 해주면 안 되지 않을까? 우리한테 1억 달러나 투자해주고 경영까지 도와주겠다는데.”
“오케이. 다른 거 또 없어?”
‘이 녀석들, 내 제안에 완전히 뿅가버린 모양이네.’
사랑에 빠진 것처럼 나를 바라보는 세르게이와 래리의 모습에 입맛을 다시던 나는 눈 딱 감고 내 양심을 뭉개버리기로 했다.
“나중에 내가 반도체 회사를 인수하면 너희 회사에서 필요한 물량의 50퍼센트를 내가 대게 해줘. 값은 다른 곳보다 싸게 해줄게.”
“음···.”
내가 내민 조건에 세르게이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역시 이건 어려운가 보군.’
내가 생각해도 무리한 요구 같아서 손을 내저으려고 할 때 세르게이가 래리에게 말했다.
“난 찬성. 나중에 우리 회사 커질 거 생각하면 좋은 거래처를 만들어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세르게이 말이 맞아. 우릴 알아봐줬으니까 조니 네가 투자할 반도체 회사라면 괜찮지 않을까? 값도 싸게 팔아주겠다잖아, 흐흐.”
‘훗, 이래야 내 파트너들이지.’
두 사람은 얼마나 자신들의 회사가 커질지 모르겠지만 회사가 클 거란 확신과 자신감은 갖고있는 것 같았다. 적당히 자신들의 이익도 챙기는 모습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이건 서로 주고받는 거니까 네게 원하는 걸 말해봐.”
“음···.”
세르게이의 제안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금단의 영역을 건드리기로 결심했다.
***
“배당금.”
“배당금?”
세르게이와 래리의 반응이 좋지 않을 건 예상하고 있었다. 배당은 기업의 미래 투자 재원을 주주들에게 뿌리는 일이 아닌가? 무엇보다···.
‘구글은 그 많은 돈을 기술개발, 임직원들 인건비, 복지에 썼지. 나중에는 인수합병에 무게추가 쏠리고.’
과거를 떠올린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나중에 구글 순이익이 100억 달러 넘어가면 그때부터 딱 10퍼센트만 배당해줘. 투자자들한테 십일조 준다고 생각해.”
무배당 주식은 투자자들에게 갈증을 일으키는 주식이다. 백날 주가가 올라봐야 뭐하나? 내 손에 따박따박 들어오는 현금이 있어야 먹고 살지.
내 부탁에 세르게이와 래리의 눈이 또 커졌다. 또 왜?
“조니 너, 우리 회사가 그만큼 커질 거라고 믿는 거야?”
“말해봐, 조니! 진짜야? 순이익 100억 달러 말이야!”
소리치는 세르게이와 래리의 기대가 가득한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이 녀석들, 완전 덤 앤 더머가 따로 없었다.
‘하긴, 지금이야 자기들 회사가 얼마나 커질지 모르니 내 말이 믿기지가 않겠지.’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넘어갈 구글의 창업자인 두 사람의 이런 모습은 나만의 추억이 될 것이다. 나는 빙긋 웃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좋은 서비스를 개발하고 내가 경영과 자금을 뒷받침해주면 못할 것도 없겠지. 안 그래?”
“너, 우리가 진짜 성공할 거라 믿는구나?”
“야후에서 그런 거절을 당할 만큼 좋은 검색엔진인데 성공하지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후후.”
빙긋 웃던 나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야. 배당금 주기 싫어서 이상하게 회계처리하면 안 봐줄 거다?”
“말이라고! 투자 계약, 언제 할까?”
“내일 아침에.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사장님들. 흐흐.”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르게이와 래리는 낄낄 웃는 내게 달려들어 어깨동무를 걸고 뱅글뱅글 돌았다. 오늘만큼 유쾌하고 즐거운 날은 손에 꼽힐 것이다.
***
다음 날 아침.
계약서를 꾸민 우리는 세르게이와 래리를 찾아갔다. 계약서를 살펴본 세르게이와 래리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후회 안 하는 거지?”
“당연히!”
힘차게 대답하는 두 친구를 보니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에 비하면 착한 녀석들인데···.
“두 친구 폼이 맘에 드네요. 우리 조카가 이 정도 조건까지 걸고 배팅하는 거면 정말 기대가 큰 겁니다, 하하.”
“사업 모델이 잘못 돼서 망할 일도, 돈이 부족해서 망할 일도 없을 겁니다. 조니의 경영 감각과 투자 감각은 한 번도 빗나간 일이 없으니까요, 하하.”
선해철과 박태진의 격려에 고개를 끄덕인 세르게이와 래리는 서류를 들어 보이며 우리에게 물었다.
“학교 창업지원센터에 보내도 되죠? 자랑할 겸 확인해보고 싶은데.”
“얼마든지요. 아마 그쪽 변호사들이 보면 말도 안 되는 계약이라고 할 겁니다, 하하.”
선해철의 선선한 수락에 나와 박태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재빨리 서류를 팩스로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걸려온 통화를 받았다.
두 사람이 편히 통화하라고 잠시 자리를 비켜준 사이, 세르게이와 래리가 차고에서 나왔다.
“세상에서 제일 황당한 계약이라는데요? 하하.”
“스탠더드 캐피털에서 이런 투자를 할 줄은 몰랐다고 하네요, 흐흐.”
두 녀석이 씩 웃을만했다. 보통 사람들에겐 검색엔진 하나만으로 월스트리트의 대형 투자회사인 스탠더드 캐피털의 풀 서포트를 받는 계약이 아닌가? 나와 우리 집안, 해동그룹, 스탠더드에는 엄청난 화수분이 될 계약이지만.
'앞으로의 구글을 생각하면 좀 미안하지만···.’
나만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는 일은 아니었기에 나는 두 사람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애써 외면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