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53rd. 세기말을 대비한 동맹 (2)
‘모건’이라면 이를 박박 가는 헨리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아이작 록펠러 주니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들려온 정보에 따르면 이번에 우리가 러시아 국채를 인수해서 고꾸라졌으면 오히려 우릴 먹으려 들 계획이었다고 하더군요. 죽일 놈들.”
대답을 마친 아이작이 홍차 한 모금을 마시며 격앙된 감정을 추스르고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가 체이스맨해튼을 잃든 모건 놈들이 JP모건을 토해내든 어느 한 쪽이 월가에서 물러나기 전까진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이러다 아저씨보다 제가 먼저 아버지를 뵈러 갈 것 같네요, 하하.”
아이작의 쓴웃음에 헨리가 버럭 소리쳤다.
“헛소리 말게, 아이작! 자네가 약한 소리 하는 꼴 보려고 먼저 간 내 친구가 나한테 자네 후견인을 맡긴 줄 아나?”
헨리는 자신의 친구인 아이작 록펠러 시니어에게서 그의 아들인 아이작 록펠러 주니어의 후견인을 부탁받았다.
아이작 록펠러 주니어 또한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헨리를 만나왔고 헨리에게서 경영과 인생에 대한 조언을 받아왔기에 헨리의 다그침에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저씨. 하지만 워싱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내년이 지나기 전에 글래스-스티걸 법이 폐지되면 금융회사들은 고삐가 풀리게 됩니다.”
“그러겠지. 의회 놈들이 그간 월가에서 받아먹은 돈값을 하고 있으니.”
지난 5월에 미국 의회의 하원에서는 상업은행, 증권사, 보험사가 업종을 넘어 합병하는 것을 허용하는 법을 통과시켰고 상원 금융위원회에서도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모두가 금융 업무를 조각조각 낸 ‘글래스-스티걸 법’ 폐지의 사전작업인 걸 헨리와 아이작은 잘 알고 있었다. 반대 성향의 새 법이 생기면 옛 법은 시대에 맞지 않으니 없어져야 하는 논리를 의회에서 내세워 법을 폐지하지 않겠나?
그러나.
말을 꺼낸 아이작이나 대답한 헨리나 월가에 발을 담은 사람답지 않게 글래스-스티걸 법의 폐지를 반기는 표정이 아니었다.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중 헨리가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입을 열었다.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워싱턴 정치꾼들에게 돈을 줬지만 월가에서 고삐가 풀리면 파멸로 향하게 될 걸세.”
헨리는 자신이 믿어마지않는 친구 ‘조니’의 ‘손실은 보전해야죠.’라는 권유가 없으면 투기에 손을 대는 사람이 아니다. 이 점을 알기에 아이작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럴 겁니다. 온갖 위험상품이 나돌아 다니고 최소한의 품격과 정도도 모르고 돈만 좇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잠시 머뭇거리던 아이작이 헨리에게 토로하듯 말했다.
“그래도 아저씨 집안의 트라이엄프 캐피털은 우호지분까지 합쳐서 50퍼센트가 넘지만 저와 제 가문은 다 합쳐도 30퍼센트가 전부입니다.”
“허나 모건 놈들의 JP모건 지분도 26퍼센트 정도밖에 안 되네. 내가 자네 뒤를 받쳐주면 해볼 만한 싸움일 텐데?”
트라이엄프가 보유한 지분까지 보태면 아이작이 결집할 수 있는 체이스맨해튼 지분은 40퍼센트에 육박한다. 그럼에도 아이작은 헨리의 반문에 고개를 저었다.
“나머지 60퍼센트의 체이스맨해튼 지분이 합병에 찬성하고 모건 놈들의 손을 들어줄 겁니다. 그러니 우리 록펠러 가문은 합병될 회사에서 밀려나겠죠. 그나마 가문의 재산들 중 체이스맨해튼을 지원해줄 수 있는 건 석유회사들뿐인데 엑손과 모빌은 지금···.”
말끝을 흐리는 아이작의 얼굴에 아쉬움이 남았다.
록펠러 가문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석유업계의 불황에 따른 비용 절감을 내세워 스탠더드 오일의 후신인 엑손과 모빌, 셰브런의 합병을 야심차게 추진했지만 오히려 독이 되지 않았나? 체이스맨해튼이 위태롭게 됐으니.
그런 아이작을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던 헨리가 입을 열었다.
“그나마 셰브런을 합치지 못한 게 전화위복이라지만 엑손과 모빌에 비하면 자금력이 부족하니 힘든 싸움이 되겠군.”
엑손과 모빌은 록펠러 가문이 쥔 패들 중 에이스와 킹이다. 그 에이스와 킹을 합쳐 엑손모빌이라는 조커를 만들었지만 그 엑손모빌은 합병에 따른 구조조정이 마무리될 2001년부터나 쓸 수 있다.
그때까지 록펠러 가문은 잘 쳐줘야 잭이나 텐 밖에 안 되는 셰브런의 자금력에 의존해야 한다. 아이작은 쓴웃음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넬슨 조부님 때의 일도 있으니 가문의 유동자금을 동원하는 것도 어려울 겁니다.”
넬슨 록펠러가 대통령 한 번 하겠다고 가문의 비밀을 일부나마 폭로한 바람에 록펠러 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세상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그런데 대규모 자금이 전쟁에 투입되면 세간의 이목이 쏠리고 그간의 노력이 무의미해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실에 가문을 책임져야하는 아이작은 답답할 뿐이었다.
“흠···.”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던 헨리가 침음성을 멈췄다.
“길게 고민해서 답이 안 나올 일이면 잠시라도 접어두는 게 좋다고 생각하네. 오늘은 여기까지만 얘기하지.”
“네, 아저씨.”
아버지의 친구였다면 도움은 아니라도 조언 정도는 받을 거라 여겼는데···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아이작은 헨리와 함께 소파에서 일어났다.
***
모라토리엄이 터진 날부터 우리는 시나리오에 따라 풋옵션을 거래했다.
9월이 됐을 때 클레어는 해산일(解産日)이 다가와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며칠 뒤에 분만실로 실려 갔다.
[아흐윽!]
선해철만 들어간 분만실 앞의 의자에 앉은 나와 박태진은 클레어의 신음소리에 두 손을 모아 쥔 채 마른침을 삼켰다.
“힘든 가 봐요.”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 마느님들의 해산(解産)도 아니지만 우리는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댔다. 곧 있으면 우리도 아빠가 될 사람들이 아닌가?
12시간 뒤.
[으앙! 으앙!]
클레어의 비명소리가 멈추면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리 일도 아닌데 왜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모르겠다.
***
클레어와 선해철이 산후조리 때문에 잠시 일에서 빠졌지만 우리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두 사람의 빈자리를 채운 나와 박태진의 지휘하에 스탠더드는 만기가 빨리 돌아오는 풋옵션을 매각해서 재투자를 거듭했고, 10월 2일 오늘에야 모든 거래가 끝났다.
“얼마 벌었죠?”
“미국 증시에서 180억 달러, 일본 증시에서 2조 3천억 엔.”
산후조리를 마친 며칠 전부터 클레어와 함께 회사에 출근한 선해철은 스스로가 보고 말한 숫자가 믿기지 않았는지 결산서 맨 하단을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바라봤고···
“대박이야, 대박! 일본 환율 떨어진 거까지 반영하면 200억 달러가 훨씬 넘는다구!”
두 쌍둥이 아들들의 엄마가 된 클레어는 40배가 넘는 일본 시장 수익에 방방 뛰었으며···
“그 중 반절이 스탠더드의 몫이니 한국에 투자하느라 월가에서 빌린 돈은 충분히 갚을 것 같군요. 해동그룹이 체이스맨해튼에서 빌린 40억 달러 상환도 문제없겠습니다, 하하.”
박태진은 한결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밝게 웃었다. 나는 세 사람을 보며 미소를 띠었다.
“이번 투자 수익의 2퍼센트는 스탠더드 캐피털 전 임직원들의 특별성과급과 주주 배당금으로 지급될 겁니다. 나머지 자금은 좀 더 묵혀두세요.”
지시를 마친 나는 곧바로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올렸다.
“할아버지, 성민입니다.”
[오, 그래. 뉴욕에서의 일은 잘 했느냐?]
“네, 할아버지. 정산 결과, 확정된 수익이 약 400억 달러입니다. 그 중 절반이 우리집안 사람들과 해동그룹 몫이고요.”
담담한 목소리로 전한 내 대답에 할아버지의 낮은 탄성이 돌아왔다.
[허어··· 너란 놈은 정상(頂上)이 없는 게냐? 400억 달러면 우리나라 예산의 거즌 반인데도 기뻐하는 티가 없다니···.]
“돈은 그저 숫자이고 수단일 뿐입니다. 돈 자체를 번 것보다는 그 돈으로 더 좋은 일들을 많이 할 수 있다는 게 기쁘죠, 하하.”
이번 프로젝트로 번 400억 달러 중 반절이 한국계좌로 된 내 돈과 우리집안 사람들, 해동물산, 해동종금, 해동증권의 돈이다. 스탠더드가 한국에 자리 잡은 이상 앞으로는 거리낌 없이 필요한 만큼 벌어올 수 있다.
여유 있게 웃던 내게 할아버지의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네가 이 할애비와 마주선 것 같구나. 돈 보기를 돌보듯 하다니.]
이번 생을 시작하면서 내게 돈은 도구에 불과했다. 그래도 늘 큰 산 같던 할아버지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기에 감개가 무량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감사는 무슨. 출장 마치고 돌아오면 새아가하고 얼굴 좀 비추거라. 우리 동동이도 함께 오겠구나, 으허허.]
나는 그 뒤로도 할아버지와 함께 집안 이야기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박태진이 전화를 끊은 내게 물었다.
“회장님 전화였습니까?”
“네. 이젠 제가 할아버지와 마주선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후후.”
빙긋 웃는 나를 박태진이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사님 나이에 이만큼 이루셨으니 회장님도 이제는 이사님을 똑같은 눈높이로 바라보시는 게 합당하지요. 축하드립니다, 이사님.”
“고마워요, 형.”
박태진과 서로의 손을 굳게 잡으며 미소를 띠던 내게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시죠?”
[날세, 조니. 이번에 많이 벌었는가?]
“일 단위로 정보를 공유하면서 거래했으니 똑같이 벌었을 겁니다, 하하.”
이번 풋옵션 배팅 기간 동안 헨리의 트라이엄프와 나의 스탠더드는 매일같이 우리 둘의 대포폰 통화로 정보를 공유하며 풋옵션을 거래했다. 헨리는 껄껄 웃으며 내 말을 받았다.
[양쪽이 벌어들인 돈이 각각 400억 달러씩이니 원 없이 돈을 벌었군. 자넨 그 돈으로 뭘 할 건가?]
“일본에서의 수익금은 인덱스 펀드에 묻어둘 겁니다. 미국에서의 수익금은 대출 상환에 대비해서 남겨둘 거고요.”
이번 풋옵션 배팅으로 우리는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지만 여전히 월가 은행에 60억 달러가 넘는 부채를 끼고 있다. 전부 주식을 담보로 빌린 만큼 주가폭락에 따라 추가담보를 내놓거나 이자가 비싸질 수 있으니 현금을 쟁여둬야 했다.
[그러겠군. 그럼 지금은 별로 할 일이 없을 테니 일전에 자네가 부탁한 걸 들어주고 싶은데 괜찮겠나?]
헨리의 제안에 나는 잠시 눈이 커졌다. 금세 평소의 눈매로 돌아온 나는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아이작과의 미팅입니까?”
[그렇다네. 장소는 우리 집이고 오늘 저녁 5시 30분에 보도록 하지. 아이작은 밤 9시에 올 걸세.]
“오늘 밤이요?”
의외였다. 헨리는 늘 여유 있게 약속을 잡는 사람인데 대뜸 오늘 보자고 하다니?
‘그 일 때문인가.’
한 가지 짚이는 게 있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수화기에 말했다.
“알겠습니다, 헨리.”
***
헨리의 저택에 도착한 우리 넷은 예전처럼 식당에서 화려한 만찬을 즐겼다. 1시간 반에 걸쳐 식사를 마친 우리는 응접실로 장소를 옮겨서 식후주로 코냑을 마셨다.
“오늘 마신 샴페인,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하하.”
오늘 마신 샴페인은 1959 돔 페리뇽 로제 빈티지였다.
총 306병만 생산된 이 샴페인은 산유국인 이란의 옛 왕실도 단 몇 병만 주문했을 만큼 전설적인 술인데 오늘 그 술을 두 병이나 마셨다. 모유 수유 기간 중인 클레어를 빼고.
환대에 감사를 표한 내게 헨리는 손을 내저어 보였다.
“친구에게 그깟 술 몇 병 대접하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한가? 자네 덕분에 번 돈은 둘째 치고 썬과 클레어가 결혼해서 애도 가졌는데 이제야 내주게 돼서 미안할 뿐이네, 허허.”
헨리는 껄껄 웃었지만 우리가 마신 술은 단순히 가격만으로 가치를 논할 수 있는 술이 아니다. 비즈니스든 인간적인 관계든 헨리는 나를 굳게 믿는 모양이었다.
그 뒤로 한국에서 있었던 일로 이야기꽃을 피우던 우리에게 헨리의 집사장이 다가왔다.
“주인어른, 아이작 록펠러 주니어 씨가 도착했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모시게.”
“예.”
응접실을 나간 집사장은 은발머리의 젊은 남성과 함께 돌아왔다.
“저 왔습니다, 아저씨. 아저씨가 만나게 해주겠다던 존 데이비슨 리는···?”
이웃집에 온 것처럼 스스럼없이 자신이 왔다는 걸 알린 아이작 록펠러 주니어는 소파에 앉은 나와 박태진, 선해철, 클레어를 보고 눈이 커졌다. 모두가 씩 웃는 가운데 나는 아이작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입니다, 미스터 록펠러. 아니, 아이작 록펠러 주니어 씨.”
내가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줄 알았는지 아이작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입이 벌어진 채로.
“미스터 리가··· 존 데이비슨 리?”
“그렇습니다. 내가 그 존 데이비슨 리입니다, 아이작.”
눈을 껌뻑거리던 아이작은 헨리를 보며 물었다.
“사실입니까, 아저씨?”
“사실이네, 아이작. 여기 있는 존 성민 리가 나와 우리 로이스 가문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도와줬고 내 친구와 내 딸이 연을 맺게 해준 내 친구 존 데이비슨 리라네.”
한 점 흐트러짐이 없는 헨리의 표정과 목소리에 아이작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거 당신에게 한 방 제대로 먹었군요. 당신이 존 데이비슨 리인 줄 알았다면 2년 전에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눴을 텐데.”
“그땐 서로가 가면을 쓰고 서로를 대했으니 공평하게 서로 주고받았다고 생각하시죠, 하하.”
껄껄 웃던 나를 보며 아이작이 내가 내민 손을 잡았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기분 좋은 악력에 똑같이 힘을 주며 악수를 나누던 나는 아이작과 함께 소파에 앉았다.
코냑을 한두 모금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아이작이 밝힌 체이스맨해튼의 현실에 눈이 커졌다.
“JP모건이 체이스맨해튼을 먹을 거라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우리는 아이작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체이스맨해튼의 시가총액이나 자금력이 JP모건을 훨씬 앞서는데 JP모건이 체이스맨해튼을 잡아먹다니?
내가 아는 JP모건과 체이스맨해튼의 합병은 체이스맨해튼이 JP모건을 잡아먹은 사건이었다.
난 그 사실을 알고 해동물산이 체이스맨해튼에서 대출을 받게 했고, 그 과정에서 나에 대한 기억을 남긴 뒤 아이작의 JP모건 인수합병을 도우면서 관계를 만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JP모건이 합병의 주체가 될 거라니··· 무슨 뜻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