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53rd. 세기말을 대비한 동맹 (1)
출장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선 나는 공항에 가기 전에 고려호텔 본점에 들렀다. 나보다 먼저 회사에 출근한 장하연을 보고 가기 위해서였다.
집무실 앞에 도착한 나를 보고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사님?”
“출장 가기 전에 장 대표님 얼굴 보려고 왔습니다. 안에 계십니까?”
“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인터폰으로 내가 왔다는 것을 알린 비서는 내게 와서 손을 내밀었다.
“캐리어는 제가 받아두겠습니다.”
“아닙니다. 놓을 자리 알려주면 제가 놔두고 들어가죠.”
재벌은 기업의 소유와 경영만 할 뿐 왕족처럼 군림하는 자가 아니다. 나는 우물쭈물하던 비서를 보며 빙긋 웃고는 비서의 책상 옆에 캐리어를 놔두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여보?”
“이 이사?”
소파에 앉아서 차를 마시던 장하연과 정창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두 사람을 보며 머쓱한 미소를 띠었다.
“일하시는데 방해가 됐네요, 하하.”
“아닐세. 방금 전에 일 끝내고 숨 좀 돌리고 있었네. 난 그만 가볼 테니 편안한 시간 보내게, 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정창호가 집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힌 방에서 나는 장하연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고 빙긋 웃었다.
“바로 공항에 가는 거 아니었어?”
“시간이 조금 남아서 우리 자기 보러왔지. 이번 출장, 장기 출장이잖아.”
장하연에게는 미안했지만 이번에 가면 서너 달 정도는 뉴욕에 머물러야 했다. 해동그룹의 향후 사업방향도 잡아뒀고 굵직굵직한 인수합병을 끝낸 이상 디테일은 그룹 어른들에게 맡겨도 충분했다.
“나만 보러온 건 아니지?”
“들켰네? 우리 동동이도 보려고 왔는데, 후후.”
‘동동이’는 우리 마느님이 품고 있는 우리 아이의 태명(胎名)이었다. 빙긋 웃던 나는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장하연의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동동아, 아빠 미국 다녀오는 동안 엄마 힘들게 하면 안 돼. 알았지?”
말을 하는 와중에도 내 입꼬리는 내려갈 줄을 몰랐다. 그렇게 갖고 싶었던 자식을 내 사랑과 만나고서야 갖게 됐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쁘고 감사할 뿐이었다.
무릎을 펴고 일어선 나를 보며 장하연이 살풋 웃었다.
“자기도 참. 얼른 가 봐, 삼촌하고 선배님 기다리시겠다.”
“알았어, 자기야. 사랑해.”
쪽 소리를 내며 가볍게 입술만 맞춘 나는 집무실을 나섰다. 곧 있으면 태어날 우리 아이 때문에라도 미국에서 열심히 벌어와야지.
***
미국에 도착한 우리는 하루 정도 휴식을 취하고 스탠더드 캐피털 사옥으로 들어갔다.
간단한 인사를 마친 우리는 우리가 35퍼센트 지분을 확보한 스타벅스의 카페라떼를 마시며 미국 증시 풋옵션 투자를 위한 환경자료 분석부터 시작했다.
“러시아 국채,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세이렌 로고가 그려진 스타벅스 컵을 입에서 떼고 내려놓은 내 질문에 이사진들이 대답을 시작했다.
“조니 말이 맞았습니다. JP모건, 골드만삭스, 메릴린치, 베어스턴스, 리먼 브라더스 할 것 없이 러시아 국채에 대한 부정적인 리포트를 내고 있습니다.”
“S&P와 무디스 내부에서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러시아의 신용등급 강등을 검토 중이라고 합니다. 공식발표는 없었지만 얘기가 나온 이상 시간문제입니다.”
“국제유가도 여전히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겨울이 다가오니 동절기 수요 때문에 잠깐 반등하겠지만 장기적인 시세반등은 어려울 겁니다. 석유에 의존하는 러시아 정부의 재정도 곤궁해질 거고요.”
“다우존스지수도 이번 달 3일을 기점으로 100포인트 가까이 하락했습니다. 다른 정보들을 토대로 보면 하락장의 신호일 듯합니다.”
하나 같이 비관적인 소식들이지만 이사진들이 내놓은 보고와 의견은 전부 우리의 풋옵션 배팅 성공확률이 높다는 것에 힘을 실어주는 내용들이었다.
‘근거자료는 충분히 모았군. 그렇다면···.’
보고를 모두 들은 나는 칼을 빼들기로 결심했다.
“10억 달러 전부 하락에 배팅합시다. 다우존스 30, 나스닥 100, S&P 500, 닛케이225든 8월물부터 10월물까지 각 월별 풋옵션을 균등매수하세요. 만기가 가장 빠른 풋옵션을 정리하면 바로 다음 월물을 매수하고요.”
하락이 예정된 이상 8월물 풋옵션을 매각해서 벌 돈으로 9월물 풋옵션을 매수하고 그 9월물 풋옵션을 정리해서 10월물을 매수한 뒤, 10월물까지 매각한다.
이 같은 시나리오대로 재투자를 거듭하면 수익은 옵션 배수인 30배를 가볍게 넘으니 돈방석에 앉는 건 금방이었다.
투자 지침을 정리한 나는 클레어와 함께 헨리를 만나러 갔다. 인사를 주고받은 우리는 헨리의 뒤를 따라 응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네 덕분에 한국에서 좋은 거래를 건졌네, 조니. 선물, 고맙네.”
“아닙니다, 헨리. 제가 받은 선물에 비하면 약소한 거래입니다, 하하.”
헨리는 한국에서의 은행 인수에 나를 끼워줬고 나는 헨리를 대주중공업 인수에 끌어들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준 선물 아닌 선물을 얘기하던 나는 홍차 한 모금을 축였다.
“오자마자 월가 동향을 체크했는데 러시아 파산이 초읽기에 들어간 것 같더군요. 저희 측에서는 오늘부터 바로 배팅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회의에서 나온 정보와 풋옵션 투자 지침을 알려주자 헨리가 가벼운 침음성을 흘렸다.
“흠··· 우리 쪽에서도 조용히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했는데 스탠더드와 의견이 똑같았네. 자네가 10억 달러, 내가 10억 달러씩 배팅하면 주가하락 손실은 어느 정도 만회하겠어.”
“그럴 겁니다. 저희 집안 식구들도 상속재원을 마련하고 해동그룹은 사업자금을 마련하는 일이고요, 후후.”
이번 풋옵션 투자에는 나를 포함한 우리집안 사람들의 국내 개인자금 총 2억 달러, 해동물산과 해동종금, 해동증권의 자금 총 3억 달러가 투입됐다. 이 투자가 끝나면 우리집안은 상속자금, 해동그룹은 사업자금을 넉넉히 확보할 것이다.
빙긋 웃으며 차를 마시던 나는 헨리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이작 록펠러에게는 얘기하셨습니까?”
“러시아 국채 말인가?”
“예.”
이번에는 헨리가 내 눈치를 슬쩍 보고 입을 열었다.
“JP모건이든 골드만삭스든 어느 쪽과도 거래하지 마라고만 했네. 코주부 모건 영감 핏줄들이나 어음장사로 큰 잡종들한테 고개 숙이지 말라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더군.”
러시아 국채 판매는 JP모건과 골드만삭스가 꽉 잡고 있다. 헨리의 대답을 듣고 나는 미소를 띠었다.
“그러셨군요.”
“그렇다고 아이작이 풋옵션에 투자할 리는 없을 걸세.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은 자네만 예측한 일이고 월가에서는 나만 자네를 믿고 따라갈 테니 걱정 말게.”
지금의 그 누구도 천하의 러시아가 배를 쨀 거라 믿을 리 없다. 당연히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그 여파로 인해 미국 증시가 폭락할 거라는 데 배팅할 인간은 지금 이 세상에서 나와 헨리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일이 끝나면 아이작과의 미팅을 주선해주셨으면 합니다.”
내 부탁을 듣고 헨리가 빙긋 미소를 띠었다.
“2년 전에 진 빚을 갚겠다는 건가?”
“대출은 나중에 갚겠지만 우릴 속인 건 갚아줘야죠. 그렇죠, 삼촌?”
내 지목에 선해철이 씩 웃었다.
“당연하지. 조카뻘 되는 놈이 감쪽같이 속였는데 한 번은 주고받아야지 않겠어? 흐흐.”
“나도 갚아줘야겠어, 조니. 그때 주눅 들었던 거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니까?”
“이사님이 스탠더드의 주인이라는 걸 알려주면 미스터 록펠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보고 싶군요, 후후.”
클레어뿐만 아니라 박태진까지 아이작 록펠러를 제대로 맥이고 싶은 기색을 짙게 내비쳤다. 헨리는 그런 우릴 보며 껄껄 웃었다.
“아이작 그 친구, 이번엔 자네들한테 한 방 제대로 먹겠군, 허허.”
“받은 만큼 갚아주는 게 인지상정이니까요, 흐흐.”
석 달 뒤에 이번 거래를 끝나고 만나면 아이작 록펠러가 날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했다. 그 전에 할아버지에게 전화부터 넣어둬야겠군.
***
헨리와의 미팅을 마친 나는 매일같이 스탠더드 캐피털 본사에 출근했다. 미국과 일본 증시 공매도 현황을 챙기던 나는 할아버지에게도 미국에서의 소식을 알렸다.
[월가 놈들이 러시아 국채를 후려칠 거라고?]
“네, 할아버지. 미국 증시가 폭락하면 스탠더드가 매수해 둔 풋옵션의 가치가 폭등할 겁니다. 헨리와 저 모두 10억 달러씩 이 판에 걸었는데···.”
투자 전망 보고를 마친 나는 숨을 죽이며 할아버지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길 기다렸다. 내가 원하는 대답을.
잠시 고민하던 끝에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렸다.
[내가 쥔 그룹 주식 대부분을 지금 넘겨야겠구나. 집안사람들이 스탠더드에 맡긴 투자금도 나중에 찾으라고 해두마.]
‘척하면 척이라니까, 흐흐.’
우리집안 사람들과 해동그룹이 수백억 달러를 벌어들이면 그룹의 주가가 높아지면서 할아버지가 물려줄 주식의 증여세도 덩달아 불어난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익이 확정되고 나서 상속을 진행하면 미국과 일본에서 번 돈을 한국 원화로 바꿔서 수조 원의 세금을 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환율은 크게 낮아질 터. 수출로 겨우 다시 일어서는 한국의 크고 작은 기업들은 대규모의 환율 손실을 보게 되고, 해동그룹 또한 예외일 수는 없다.
나는 이 점을 우려했지만 주식을 물려주라고 할아버지를 채근할 수도 없었다. ‘회장을 계승하는 중입니다, 할아버지.’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모 게임의 타락한 왕자도 아니고.
그래서 할아버지의 합리적인 판단력을 믿고 최대한 돌려서 말했는데··· 당신의 권위보다 가문과 그룹의 존속을 먼저 생각한 할아버지 현명한 결정에 고맙기만 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감사는 무슨. 모양새를 갖춰도 챙길 건 챙겨야하지 않겠느냐? 흐흐.]
할아버지의 웃음에서 후련함이 묻어났다. 다른 그룹들보다 깔끔한 승계로 위신도 챙기고 나중에 비하면 훨씬 싼값으로 경영승계 작업을 마치니 실리도 챙기지 않았나?
이처럼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우리 집안의 해동그룹 승계 작업이 진행되는 중에도 러시아 금융시장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100억 달러가 훨씬 넘는 러시아 국채를 전 세계에 팔아치운 골드만삭스와 JP모건이 8월이 시작되자 액면가 100달러짜리 러시아 국채를 종전의 80달러보다 더 낮은 50달러가 아니면 구입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었다.
미국 월가가 러시아 국채를 반 토막 낸 여파는 무시할 수 없었다. 러시아 경제에 대한 불안 심리가 전 세계 금융가로 퍼지면서 외국에서 투자된 돈이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러시아 정부는 특단의 조치를 발표했다.
[8월 17일 금일부로 우리 러시아는 90일간 모라토리엄을 선언합니다. 또한, 종전의 1달러당 6.3루블의 고정 환율을 9.5루블까지 허용, 34퍼센트의 평가절하를···.]
대형 스크린을 통해 나오는 CNN 뉴스를 보던 직원들은 입을 떡 벌렸다. 우리의 풋옵션 배팅이 성공했다는 신호탄이 아닌가?
“와아아!”
직원들은 책상에 쌓인 서류도 모자라 옆구리에 낀 휴지통에서 꼬깃꼬깃 뭉친 휴지를 손으로 흩뿌리며 미친 사람들처럼 소리를 질렀다.
“다들 난리도 아니네요, 후후.”
회의실에 있던 나는 블라인드를 살짝 내려서 밖을 내다보며 빙긋 웃었고, 선해철은 날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뉴욕하고 도쿄가 뒤집어지겠어, 흐흐.”
“그 중에서도 일본에서의 수익률이 더 높을 겁니다. 스탠더드 일본 법인을 통해 엔화로 투자했으니 환차익까지 챙기겠군요, 후후.”
러시아 모라토리엄은 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
당연히 미국 증시도 자유로울 수 없고 안전자산을 선호하는 투자자들은 대체제인 일본 엔화로 자산을 옮기니 엔화 가치는 올라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10억 달러 중 5억 달러를 700억 엔으로 바꿔서 일본 증시 폭락에 배팅한 우리에겐 좋은 일이었다. 옵션에 약정된 30배 수익에 환율 차익까지 먹는 일이 아닌가?
이 점을 노리고 일본에 투자했지만 박태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클레어에게 물었다.
“엔 달러 환율, 어느 정도까지 떨어질까요?”
“달러당 145엔은 월가 투기꾼들한테 달러 털려서 벌어진 특수상황이야. 엔화는 안전자산으로 취급되니까 수요가 몰릴 테고··· 110엔대까지 복구되지 않을까 싶은데?”
실제로도 엔 달러 환율은 10월쯤 되면 달러 당 115엔 수준에서 저점을 찍고 반등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일본에서 거둬들일 수익은 전액 일본 증시 인덱스 펀드에 묻어두죠. 엔 달러 환율이 더 내려갈 수도 있으니까요.”
지금의 폭락이 10월 초에 멈추면 전 세계 증시의 주가는 미칠 듯이 올라가고 엔 달러 환율도 내려가면서 세기말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우리는 세기말을 화려하게 장식할 광기를 보게 될 것이다.
***
얼마 뒤.
이성민이 미국 증시와 일본 증시 폭락 속에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며 세기말의 광기를 향해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헨리는 응접실에서 한 남자와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피해가 적었다니 다행이네, 아이작.”
“아저씨 조언 덕분에 마음을 굳힐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아저씨.”
헨리의 조언이 없었다면 아이작은 러시아 국채 투자를 결정할 가능성이 높았다.
당연히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지금쯤 전부 휴지조각이 돼서 체이스맨해튼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을 터. 아이작 록펠러 주니어는 헨리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면서도 자신이 피해간 끔찍한 상황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헨리는 그런 아이작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록펠러 가문의 가주인 사람이 월가에서 그런 일로 몸까지 떨면 어쩌자는 겐가, 아이작?”
“이번 일이 잘못 됐으면 체이스맨해튼을 빼앗겼을 테니까요.”
아이작이 굳은 표정으로 털어놓은 말에 헨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친구의 아들이 체이스맨해튼 은행을 뺏길 뻔했다니?
“당치 않은 소리? 누가 감히 체이스맨해튼을 집어삼키려 든단 말인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소리친 헨리는 아이작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네집안 사람들은 아니겠지? 자네 부친 돌아가시고부터 자네가 그 친구 연기하면서 잘 단속하고 있지 않은가?”
헨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어도 아이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코주부 모건 영감의 핏줄들을 아시잖습니까? 모건 놈들, 틈만 나면 우리 체이스맨해튼을 집어삼키려는 놈들입니다.”
“모건 놈들이?”
‘모건’이라는 이름이 아이작의 입에서 나오자 헨리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마지막 양키금융가’의 후예라며 모가지를 뻣뻣하게 세우고 다니는 모건 가문.
온갖 텃세를 부리며 로이스 가문을 월가에서 쫓아내려고 한 놈들이 친구 집안의 재산을 빼앗으려 들다니··· 록펠러 가문과 모건 가문의 충돌은 이제 헨리도 방관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