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52nd. 잔칫상은 나눠먹어야지 (5)
그 뒤로도 회의를 하던 나는 퇴근 시각에 맞춰 집에 돌아왔다.
“나 왔어, 자기야.”
집에 돌아오자마자 돌아왔다고 알리자 장하연이 앞치마를 맨 채로 주방에서 나왔다.
“···왔어?”
평소와 달리 장하연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왜 그래, 자기야?”
머뭇거리던 장하연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에 신문에서···.”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빙긋 웃으며 장하연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자기야. 대주아연, 대주중공업, 대주자동차만 챙겨도 많이 먹는 거고 종금하고 증권 올해 예상수익 알잖아? 후후.”
“그래도··· 금융회사 두 개만으로는 구색이 안 맞잖아. 금융은 우리 자기가 직접 이끌어갈 회산데.”
자기 남자가 더 번듯해지길 원하고 응원하는 이 여자의 자상함이 너무 좋았다. 그런 장하연에게 나는 사실을 알려줬다.
“진짜로 관심이 없어서 그래. 미안해 할 거 없어, 자기야.”
“무슨 소리야?”
“보험사야 따박따박 현금 들어오는 거 때문에 인수하려는 건데 그럴 거면 종금 지점만 열심히 내도 돼. 해동종금 잘 나가는 거, 자기도 알잖아?”
“나도 알아. 관련법 바뀌고 금모으기 건으로 해동종금 잘 나가는 거. 그래도 증권이나 카드는 어떡하려고?”
세상에서 사업 때문에 내 걱정 하는 게 가장 쓸데없는 일이지만 아무 것도 모르니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는 이 여자를 어찌 하리오. 차분히 얘기해줘야지.
“증권은 사람만 데려올 거고 카드는 사채놀이 같아서 영 내키지가 않아. 우리 집안 옛날이야기 또 나올까봐 걱정되기도 하고.”
장하연에게서 미안함을 덜어내고자 댄 핑계지만 우리 집안이 아직도 명동 사채시장의 지배자라는 사실을 아는 건 우리 그룹 수뇌부뿐이다. 내 말을 들은 장하연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우리 자기 말이 맞네. 우리 집안 옛날이야기 돌면 할아버님이나 다른 어른들도 불편해하시겠어.”
“그것도 그렇고 언제까지 처가 사람들하고 싸울 수만은 없잖아. 자기 부탁으로 안 나설 거라는 말만 전해달라고 조 부회장님한테 부탁했어. 어때?”
“야?”
어찌나 놀랐는지 장하연이 예전 버릇처럼 나를 불렀다. 내가 자신을 남편 쥐어짜는 악처로 만들려는 것처럼 보일까 걱정되겠지만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 할아버지하고 독대했을 때도 쓸데없이 덩치 부풀리는 거 관심 없다고 확실히 밝혔거든.”
“정말···이야?”
장하연은 여전히 믿기지가 않는 듯했지만 사실이었다.
“지금은 자체확장이 더 급해. 종금은 지점 늘리고 증권은 증시에 나온 주식 사들이는 것만으로도 바쁘거든, 흐흐.”
내 말을 듣고 장하연이 가볍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남편 말이 맞네. 지금만큼 두 회사가 사업 키우기 좋은 때도 없으니.”
저 또순이 마느님도 동의할 만큼 해동종금과 해동증권의 미래는 이번 정권 동안의 성과로 결정된다.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온갖 자산들의 가치가 밑바닥인 건 둘째 치고 외환위기 관리체제를 벗어나면 정치권의 재벌 조이기가 시작될 테니 목 좋은 지점과 우량주를 하나라도 더 손에 넣어야 하지 않겠나?
하나 더 보태자면.
장호경에게 넘어갈 대주그룹 금융계열사는 신세기그룹 계열사들까지 이자로 얹어서 나중에 가져올 수 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랑스러운 마느님에게는 말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걱정 붙들어 매둬. 나 빨리 씻고 올 테니까 저녁부터 먹자, 히히.”
개구진 표정으로 웃는 나를 보며 장하연이 피식 웃었다. 우리 마느님은 웃는 얼굴이 제일 예쁜 것 같다.
***
얼마 뒤.
나와 선해철, 박태진, 금석호는 고려호텔의 팔룡에 있는 VIP룸에서 식전차로 보이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흠··· 확실히 대주라는 브랜드가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먹히긴 하지. 다른 곳은 몰라도 폴란드와 베트남, 우즈벡 공장은 포기하기도 아깝고. 국내에서는 군산, 창원, 평택공장 그리고 대주자동차와 미룡자동차의 기술과 디자인, 상표권까지 가져오면 더 바랄 게 없겠어, 허허.”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산증인 아니랄까봐 금석호는 대주자동차, 그리고 그 밑에 딸려 있는 미룡자동차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빚으로 쌓아올렸다고 해도 동유럽과 동남아에서 대주라는 브랜드의 파워는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여기에 기술이든 차종별 라인업이든 잘 나가는 차종으로 전부 통폐합해서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태현자동차는 맨주먹으로 일어선 명진호의 태현그룹 계열사 아니랄까봐 자체개발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의 분할 제안에 큰 반발이 없을 터.
“무엇보다 우리는 해동증권과 스탠더드 캐피털을 통해 태현자동차와 태현정밀 지분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습니다. 채찍도 휘둘러야겠지만 반도체 빅딜에서 GK반도체의 조기매각을 설득해주겠다고 하면 명선구 사장으로서는 그룹 내에서 정통성을 굳히게 될 겁니다.”
나에 이어서 선해철도 의견을 피력했다.
“이 이사 말이 맞습니다, 회장님. 태현그룹은 지금 후계자 경쟁이 한창입니다. 지분 경쟁 외에도 내부 임원들과 우호주주들의 지지까지 확보하려면 후계자로서 그룹에 기여하는 모습도 보여줘야 하니 우리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물론, 반도체와 얽힌 전자사업이 명선구 사장의 소관이 아니지만 우리 제안을 받아들이면 손해는 안 볼 겁니다. 우호지분도 확보하고 그룹 사업에 힘을 쓴 걸 내세워 자동차 사업을 들고 나올 수 있을 테니까요.”
박태진까지 선해철에 이어서 태현그룹 내부의 알력관계를 들어가며 낙관론을 들었지만 금석호는 내심 아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부평공장을 포기하면 투자 대비 이익은 많이 떨어질 걸세. 괜찮겠나?”
“괜찮습니다, 회장님.”
미룡자동차까지 먹은 대주자동차의 국내 생산량 절반을 책임지는 부평공장을 포기해도 아쉽지가 않았다. 대주자동차의 해외 생산기지와 기술, 상표권을 얻을 수 있다면 말이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내 대답에 선해철도 맞장구를 쳤다.
“걱정 마십시오, 회장님. 이 이사 이 녀석 돈 많은 거, 회장님도 아시잖습니까? 조만간 미국에서 또 한 탕 거하게 땡겨올 테니 걱정 마십시오, 흐흐.”
“무슨 소린가? 또 땡겨 올 게 있다니?”
금석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내가 스탠더드 캐피털에 넣어둔 돈만 해도 한국에서 따라올 사람이 손 안에 꼽히는데 돈을 또 땡겨 오겠다니 얼마나 놀라울까?
“제가 아는 이 이사님은 지금껏 금융시장에서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미국에 갔을 때 배팅한 게 있으니 걱정 붙들어 매두십시오, 하하.”
박태진까지 나서서 껄껄 웃었다. 두 사람, 내가 미국 증시 하락과 엔고 배팅을 지시한 데서 돈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내 투자가 전부 백발백중이었으니 오죽하겠냐마는···.
두 사람의 자신 있는 모습에 금석호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물주가 돈 대주겠다는데 쫄리면 안 돼지. 명 사장 상대로 제대로 패 돌려보세, 흐흐.”
“그러시죠, 흐흐.”
금석호와 내가 낄낄 웃던 사이 노크 소리가 들렸다.
[태현자동차 명선구 사장님 오셨습니다.]
호랑이인지 양반이 못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명선구가 왔다니 작전회의는 여기까지 해야겠다.
***
종업원의 알림에 우리 모두 웃음기를 싹 지우고 보이차를 마시며 점잖을 떨었다.
“모시도록 해요.”
연장자인 금석호의 말에 문이 열리면서 거대한 덩치의 명선구가 들어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금 회장님.”
“오랜만이오, 명 사장. 잘 지내셨소?”
자리에서 일어난 금석호와 인사를 주고받던 명선구가 쓴웃음을 지었다.
“잘 지내긴요? 둘도 없는 기회를 놓쳐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후후.”
“세상사라는 게 알 수가 없더이다. 자! 여기 있는 친구들과도 인사부터 하시오.”
손을 뻗어 권한 통성명에 선해철이 품 안에서 꺼낸 지갑에서 명함을 끄집어냈다.
“스탠더드 캐피털 코리아 선해철 대표입니다.”
“태현자동차 명선구요. 아버지께 정면으로 들이박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선 대표밖에 없을 거요.”
명선구가 건넨 첫 인사부터 날이 잔뜩 서있었지만 선해철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옛일은 묻어두시죠, 명 사장님. 그런데··· 우리 스탠더드가 보유한 태현자동차 주식 9.2퍼센트, 태현정밀 주식 12.8퍼센트가 어느 분의 우호지분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뭐, 뭐요?”
스탠더드 캐피털이 매입해온 재벌 그룹 지분 중 태현자동차와 태현정밀 주식은 명선구의 본인 명의 주식보다 많다.
순환출자 때문에 치고 들어가는 게 어렵지만 태현정밀은 명선구 회장의 본진이니 내가 스탠더드를 앞세워 다른 명 씨 가문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면 태현그룹 자동차 계열의 주인을 바꿀 수도 있었다.
‘저 양반이 놀랄 때가 다 있네? 흐흐.’
명선구가 남의 눈치를 보다니··· 예전의 나였으면 상상도 못할 상황에 속으로 웃음을 참는 중에도 명선구는 선해철을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해철은 어깨를 으쓱했다.
“농담입니다, 농담. 우리는 명 씨 집안에서 태현자동차와 태현정밀의 주인이 누가 되던 간에 우리는 배당금만 잘 챙겨주면 만사 오케이입니다.”
손을 휘휘 내저은 선해철에게 명선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말, 사실이오?”
“배당금만 잘 챙겨주시면 건드릴 일도 없으니 말싸움은 여기까지 하시죠. 한 대씩 주고받았으니까요.”
선해철의 심드렁한 대꾸에 명선구의 미간이 다시 좁아졌다.
“마지막 말이 영 거슬립니다그려.”
한 대씩 주고받았다.
별 거 아닌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명선구에게는 상당히 거슬릴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재벌가의 후계자인 자신과 마주서도 밀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가?
두 사람이 눈싸움으로 허공에서 불꽃을 튀길 때 박태진이 나섰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명선구 사장님. 해동그룹 총괄전략본부의 박태진 전무입니다.”
눈싸움을 멈춘 명선구가 다소 풀린 표정으로 박태진이 내민 명함을 받으면서 자신의 명함을 건네줬다.
“명선구라고 하네. 선 대표보다는 자네가 낫군, 하하.”
박태진을 아랫사람이라 여겼는지 애써 관대한 모습을 보이려 웃던 명선구는 박태진 옆에 있던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자네는···.”
“이성민입니다. 스탠더드 캐피털 코리아 이사와 해동그룹 금융부문 최대주주, 해동그룹 전략 컨설턴트, GK그룹 전략 컨설턴트를 겸하고 있습니다.”
장황한 소개와 함께 내가 내민 명함을 건네받고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던 명선구가 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젊은 친구 감투가 꽤나 거창하군. 그런데···.”
잠시 말끝을 흐리던 명선구가 피식 웃었다.
“이 회장님께서 많이 서운해 하시겠어. 해동그룹 장손이 외국 투자회사 감투를 가장 앞에 내세우다니.”
자신을 소개할 때 직함을 밝히는 건 그 순서도 중요하다. 자신의 관심과 정체성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보여주는 일이 아닌가?
‘완벽히 먹혔군.’
나는 명선구의 비웃는 태도가 만족스러웠다. 내가 돈놀이에 혈안이 된 놈으로 보일 테니 해동자동차의 키맨이라는 것도, 그 외의 내 본모습은 생각도 못 할 터.
소개를 마친 우리는 자리에 앉아서 협상을 시작했다. 금석호를 앞세운 내 제안을 받고 명선구가 턱을 매만졌다.
“어째 저희가 믿지는 것 같군요.”
“믿질 게 뭐 있나? 대주자동차와 미룡자동차 기술진이야 태현자동차보다 한 끗발 떨어지고 국내공장은 생산량, 효율성, 입지 조건 상 자네가 부평공장 가져가는 게 훨씬 이득인데.”
금석호의 느물느물한 대꾸에 명선구가 미간을 좁혔다.
“그래도 폴란드와 우즈벡, 베트남 공장까지 가져가시겠다는 건···.”
“가져가고 싶으시면 가져가도 되십니다. 그에 비례해서 돈만 내신다면요, 명선구 사장님.”
중간에 내가 난입하자 명선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자네 지금 무슨 버릇인가? 어른들 얘기하는 거 안 보이나?”
명선구는 지금 내가 이 자리에 기업 경영을 배우러 온 줄 아는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아주 만족스러운 착각이었다.
“저는 이 자리에 해동그룹의 전략 컨설턴트 겸 해동자동차의 공동 대주주인 스탠더드 캐피털의 이사로 나왔습니다. 이미 두 회사는 금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자산을 미화 기준 25억 달러를 내고 인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말씀드리지 못할 것도 없죠.”
“25억 달러?”
명선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지금 같은 시기에 25억 달러는 태현그룹 자동차 계열에서 동원할 수 없는 돈이 아닌가?
“칩만 따지면 해동자동차는 태현자동차를 앞섭니다. 그리고 제가 최대주주인 해동증권은 태현자동차 지분 7.7퍼센트, 태현정밀 지분 9.8퍼센트를 쥐고 있습니다. 현명하게 판단하시죠, 명선구 사장님.”
‘당장이라도 스탠더드 캐피털과 해동증권의 지분을 합치면 깽판을 못 칠 것도 없지. 그래도···.’
대한민국 자동차 업계의 간판인 태현자동차를 흔들면 지금껏 스탠더드 캐피털이 쌓아온 긍정적인 이미지가 연기처럼 사라진다.
어디 그뿐인가, 라이벌이 있어야 해동자동차도 자극을 받아 자생력을 키우고 금융부문과 스탠더드는 투자수익을 챙기지 않겠나.
그래서 가만있을 뿐인 내 속내를 숨긴 채 까칠한 경고를 날린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명선구가 갑자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예전의 물렁물렁했다는 이성민이 아니군그래?”
우디르도 울고 갈 태세전환에 나뿐만 아니라 세 사람도 벙찐 표정으로 명선구를 쳐다봤다. 명선구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내게 말했다.
“알고 있네. 해동그룹과 스탠더드 캐피털이 뭉치면 대주자동차를 전부 먹는 건 어려워도 날 쫓아내는 건 일도 아니지. 나로서는 부평공장만 가져가는 게 훨씬 남는 장사야, 하하.”
명선구가 자신의 현실을 정확히 인정하며 껄껄 웃었다. 나는 명선구가 왜 이리 저자세로 나오는지 금방 깨달았다.
“우호지분이 필요하신 거군요.”
“정확히 봤네. 스탠더드 캐피털과 자네가 내 편을 들어주면 난 부평공장만 먹고 깔끔히 빠지겠네. 공적자금도 각자 가져가는 만큼에 비례해서 나누도록 하지.”
‘주식을 사들이길 잘한 것 같군, 후후.’
속으로 미소를 그리던 나는 선해철과 금석호에게 물었다.
“어떠십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는 두 사람이 해동자동차를 대표하니 모양새는 갖춰야 했다. 내 표정을 본 선해철이 잠시 고민하는 체하더니 빙긋 미소를 띠었다.
“명선구 사장님 결정이 빨라서 좋군요. 그렇게 하죠. 어떠십니까, 회장님?”
“좋게 해결하는 게 상책이니 반대할 이유가 있겠나. 그리하지.”
협상이 아주 쉽게 풀렸다. 그렇다면 미국에 다녀오고 외가 어른들을 만나서 준비한 무기는 명선구에게 지울 빚이 될 것 같았다.
***
“GK반도체 조기매각을 주선해주겠다고?”
“네, 명선구 사장님. 스탠더드는 해동그룹과 GK그룹의 전략적 투자자이고 저 또한 해동그룹과 GK그룹의 전략 컨설턴트를 겸하고 있습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명선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걸 보고 나는 좀 더 힘을 줬다.
“세간에는 포스트 명진호 시대의 태현을 누가 이끌지 떠들썩합니다. 우리가 딜을 만들고 그 딜을 명선구 사장님께서 가져가시면 포스트 명진호 시대의 태현을 이끄실 겁니다.”
“그래도 전자와 반도체는 내 소관이 아니야. 오히려 내 동생의 세가 더 불어나지 않을까?”
곰처럼 생긴 양반이 의외로 조심해하는 모습을 보이니 위화감이 일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명선구에게 말했다.
“적어도 자동차 계열을 온전히, 정당하게 가져올 방편은 될 겁니다. GK반도체 조기매각의 공을 사장님의 것으로 포장하시면 자동차 계열에 철강까지 묶어서 깔끔하게 분리해달라고 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모든 일에는 실력만큼이나 명분도 중요하다. 명선구가 태현그룹 내부의 순환출자를 끊고 독립하려면 돈뿐만 아니라 그에 준하는 공을 세우는 건 당연하니 거절하기 어려울 터.
명선구는 나를 신기한 놈 보듯 바라봤다.
“맘에 안 드십니까?”
“아니. 내 아들이 자네 반이라도 따라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먼저 간 자네 부친이 부럽구먼.”
명선구의 아들 명의진은 지금 미국 유학 중이다. 자기 아들은 아직도 공부 중인데 나란 놈은 벌써 자신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거래를 주고받으니 얼마나 부러울까?
가볍게 숨을 내쉬며 명선구가 말했다.
“자네가 전해준 해동그룹과 스탠더드의 제안, 받도록 하지.”
어려울 줄 알았던 거래가 쉽게 풀리니 맥이 빠질 정도였다. 그래도 명선구가 곰의 탈을 쓴 여우라는 점은 확인했으니 소득이라면 소득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