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52nd. 잔칫상은 나눠먹어야지 (4)
잠시 후.
장호경은 조영찬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
“이번 인수전에 안 들어오시겠다고요?”
장호경은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나라에서 돈이 가장 썩어나는 금융회사인 해동그룹 금융계열이 대주그룹 금융계열사 인수전에 나설 생각이 없다니?
“사실입니까, 조 부회장···님?”
[그렇습니다, 장 회장님. 우리 이 이사가 고려호텔 장 대표 부탁받고 인수전에 나서지 말라고 했소. 고모님도 사업을 키워야 하지 않겠냐고 말이오.]
또 한 번의 충격이 장호경의 뒤통수를 세게 쳤다. 자신이 장호건의 속을 긁을 때마다 써먹었던 장하연이 자신을 생각해줬다니?
미간을 좁힌 채 눈을 가늘게 뜬 장호경이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나중에···.”
[믿고 삽시다, 장 회장님. 이 이사가 장 대표 부탁이라고 사정사정해서 접었는데 조카 분 내외의 성의를 무시하는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장호경은 조카 내외가 왜 자신을 배려해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조영찬의 말이 들렸다.
[듣기로는 장 대표가 처가 쪽 형제들과 친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장 회장님 가족 분들과라도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양보한 거겠지요.]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혼외자식인 장하연이 장용재, 장민재, 장수연과 각을 세우는 것도, 장호경 자신의 자식들과 더 친하게 지내는 것도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해동이 안 나서면 우리야 편하지.’
신문에 올리면서까지 대주그룹 금융계열사 인수를 천명한 이상 자존심 때문에라도 대주그룹 금융계열사를 인수할 생각이었다. 그런 마당에 조카 내외가 알아서 빠져주겠다니 장호경은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조 부회장님. 조카 내외에겐 고맙다고 전해주시죠. 앞으로는 자주 봤으면 좋겠다는 말도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동생을 털어먹은 조카의 시댁에 경계심을 늦출 필요는 없었지만 아예 적으로 돌릴 필요도 없었다. 조영찬에게 안부를 부탁한 장호경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
회사에서 일을 보던 나는 약속시간에 맞춰 선해철, 박태진과 함께 GK그룹 사옥으로 넘어갔다.
“대주금속을 인수하자고?”
“네, 회장님. 대주그룹이 무너지긴 했지만 복수의 완성은 상대방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일이잖습니까?”
내 입에서 나올 거라 상상도 못할 독설이었는지 오현무와 해수찬, 오현준의 눈이 커졌다. 나는 세 사람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단순히 복수만을 위한 일은 아닙니다. 해동그룹 수뇌부에서도 사업적인 시너지를 고려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하하.”
“이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회장님. GK금속이 대주금속을 합병하면 주요 비철금속 3개를 가공하게 되니 사업 포트폴리오 면에서도 유리해집니다. 해동물산의 호주 아연광산과도 연계가 될 겁니다.”
박태진의 지원사격에 고개를 끄덕이던 세 사람 중 해수찬이 입을 열었다.
“문제는 자금이오, 박 전무. 공적자금을 일부 끌어들인다고 해도 인수 비용이 8천억이나 될 텐데···.”
자금 문제를 담당하는 해수찬의 우려에 이번에는 선해철이 나섰다.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되십니다. 스탠더드에서 연이율 5퍼센트 20년 만기 채권을 인수해드리죠, 하하.”
후한 조건으로 돈을 빌려주겠다는 선해철의 제안에 해수찬의 눈이 번쩍거렸다. 해수찬은 오현무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봤고, 오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번번이 신세만 져서 미안합니다, 선 대표.”
“아닙니다, 회장님. 대신에 저희 스탠더드가 트라이엄프와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대주중공업을 인수하는 것을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선해철의 공손한 부탁에 오현무가 반색했다.
“우리 그룹과 중공업은 거리도 먼 사업이고 도움을 주시는 분의 일에 어깃장을 놓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요. 대주금속 인수에 필요할 채권 발행도 해동증권에 맡기겠습니다. 다른 건 없으십니까?”
오현무의 사람 좋은 미소에 선해철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게··· 조금, 아니 많이 민감한 이야기라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보다 이 이사가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이사.”
“네, 대표님.”
나는 가방에서 서류봉투와 녹음기를 꺼내서 탁자에 올려놨다.
“이게 뭔가, 이 이사?”
“미국 출장 때 IT사업 시장 조사 차원에서 입수한 자료입니다, 회장님. 이것부터 보시고 본제로 들어갔으면 합니다.”
“흠···.”
오현무가 침음성을 멈추고는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살펴봤다.
“‘메모리 반도체 산업 전망’?”
“네. 얼마 전 출장 차 미국에 갔다가 IT산업 투자 건 때문에 힐스브로에 갔는데 그곳의 인텔 연구소 사람들과 만나서 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녹취 자료부터 틀어드리겠습니다.”
나는 탁자에 놓인 녹음기 버튼을 눌렀다.
[RD램은 스펙만 보면 성능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같은 규격의 램을 짝수 개로 꽂지 않으면 제 성능이 안 나옵니다. 발열 문제도 DDR램보다 심하고 CPU와의 호환 안정성도 떨어지며···]
녹음기에 담긴 엔지니어들의 증언이 흘러나오자 오현무와 해수찬, 오현준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불쌍한 양반들···.’
세 사람의 허망한 얼굴을 본 나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GK그룹의 반도체 사업은 시작부터 잘못됐다.
장병호 시절의 신성그룹에게서 반도체 사업 진출을 방해받은 바람에 진출 시기가 상당히 늦었다.
뒤처진 시간을 만회하느라 RD램을 만들던 히타치 반도체 설비를 들여와야 했으며, 그 관성을 못 이겨 DDR램을 외면하고 RD램에만 집중했으니 망조가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RD램은 가망이 없단 말인가?”
애써 침착해보이려고 해도 오현무의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오현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 그렇다고 미국 램버스가 RD램 로열티를 인하할 리도 없으니 가격 경쟁에서도 밀릴 겁니다. 그러니 RD램은 시장에서 도태되고 사장될 겁니다.”
“그래도 GK반도체는 RD램에서만 매출이 나오는 게 아니네, 이 이사. 비메모리 반도체가 주력이란 말일세.”
오현준이 절박함과 분노가 뒤엉킨 표정으로 내게 소리쳤다. 나는 그런 오현준에게 화를 내지도, 서운해하지도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외삼촌이 얼마나 반도체를 아끼는지요.’
GK반도체는 오현준이 손수 챙길 만큼 애착을 가진 사업이었다. 그런 속사정을 알지만 나는 차가운 눈길로 오현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편중된 사업 비중을 개선하겠다고 RD램 설비 증설과 연구개발에 투입한 자금이 수조 원입니다. RD램이 몰락하면 그 수조 원의 투자가 휴지조각이 되고 그룹 전체에도 짐이 될 텐데 감당, 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 이사!”
오현준이 화를 못 참고 소리쳤지만 나는 여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지금 GK그룹의 전략 컨설턴트로서 현실적인 조언을 해드리는 겁니다. GK반도체가 RD램 사업뿐만 아니라 비메모리 반도체를 만드는 것도 알고 있지만 RD램 때문에 발생될 악성부채 수조 원을 그룹 전체가 떠안는 건 비효율적인 조치입니다. 다른 사업들도 키우셔야 하잖습니까?”
재벌그룹은 계열사끼리 서로 밀고 당겨주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다. 방향만 잘 잡으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비상(飛上)하지만 그 반대가 되면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니 양날의 검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외환위기를 초래한 원인이 아닌가?
방향을 잘못 잡은 이상 피해가 확대되는 걸 막으려면 신속하게 철수하고 전열을 재정비해서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한다. 그런 판단을 내리는 것이야말로 조직을 이끄는 자의 덕목이니까.
‘죄송합니다, 외삼촌들.’
나 또한 마음 같아서는 GK반도체를 살리고 싶었지만 그건 또 다른 기회를 버리는 일이었다. 내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사이, 오현무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오현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미안하네, 오 대표. 자네가 반도체 사업에 애착이 큰 건 알고 있지만 지금 이 이사가 전해준 사실대로면 GK반도체는 무너지게 될 걸세. 다른 계열사 사업들도 생각해야지.”
“회장님 말씀이 맞네, 오 대표. 미안하지만 잘라낼 땐 잘라내야 해. 새로운 사업을 찾아보세.”
다행히도 우리 외삼촌들은 리더의 덕목을 갖춘 것 같았다. 오현무에 이어서 해수찬까지 포기를 종용하자 오현준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소, 성님들. 그룹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겠지요.”
“죄송합니다, 외삼촌.”
고개를 숙이고 사과한 내게 오현준이 손을 내저었다.
“미안해 할 거 없다. 넌 네 역할을 충실하게 해준 거니까. 오히려 고맙구나.”
오현준은 GK그룹 전략 컨설턴트이기도 한 내 역할을 인정해준 뒤,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대신에 태현그룹도 곱게 먹지는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최소한 우리 빚을 전부 떠안고 인수하게 할 거다. 매각대금도 챙겨야 하고.”
어차피 팔아야 할 사업이고 망할 사업이라면 경쟁자를 거꾸러뜨리겠다는 각오를 굳힌 걸까? 점잖은 외가에서 유별나게 한 성격 하는 사람답게 오현준의 눈에서 독기가 넘실거렸다.
“물론입니다, 대표님. 그래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GK반도체를 넘겨줄 테니 태현전자 디스플레이 사업부를 넘겨달라고 하십시오.”
“디스플레이?”
“네. 반도체를 정리하면서 없어질 차세대 성장 동력의 대안으로 충분한 사업입니다.”
“흠···.”
오현준뿐만 아니라 오현무와 해수찬까지 침음성을 흘렸다. 나는 그들을 보며 애를 태웠다.
‘태현전자 디스플레이 사업까지 먹으면 GK그룹의 디스플레이 경쟁사는 한 곳도 없을 겁니다, 외삼촌들.’
참다못한 나는 세 사람에게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말했다.
“태현전자 디스플레이 사업부는 태현그룹답게 자력으로 개발한 특허기술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어느 각도에서 화면을 봐도 화질이 선명하게 보이는 광시야각 기술은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죠.”
원래대로면 태현전자 디스플레이 사업부는 태현전자가 부도를 맞을 때 타이디스로 분리, 중국 BOE에게 인수당하고 기술만 쭉쭉 빨리고 버려진다. 그렇지만 외가에서 인수하면 중국과 신성 양쪽을 견제할 수 있게 된다.
“물론, 태현전자 디스플레이 공장의 생산설비가 노후했지만 생산량 증대에 따른 시장점유율과 매출 증가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GK전자와 태현전자 디스플레이 사업을 합치고 나면 태현전자에 디스플레이 독점 납품권도 달라고 하십시오.”
디스플레이 사업을 빌미로 태현그룹을 완전히 벗겨먹자는 내 제안에 오현준의 눈이 커졌다.
“자네, 디스플레이에 미래가 있다고 보는 건가?”
“네. GK그룹에서 태현전자 디스플레이 사업을 가져오시겠다면 급한 대로 제 개인현금 중 1조 원을 투자하겠습니다.”
GK그룹은 디스플레이 사업을 본격적으로 키울 때 자금 문제로 네덜란드의 필립스에서 투자를 받았다. 이번에는 내가 필립스 대신에 자금을 밀어줄 생각이었는데 ‘급한 대로’라는 말에 오현준뿐만 아니라 오현무, 해수찬의 눈도 커졌다.
“이, 이 이사?”
“자네 대체 얼마나···?”
체면 때문에 말을 잇지 못하는 두 사람을 보며 나는 빙긋 웃었다.
“외가에서 디스플레이 사업을 성공시킬 거란 확신도 크고, 제 개인재산도 많습니다. 그렇죠, 대표님?”
“물론이지. 이 이사는 우리 스탠더드의 임직원이기도 하지만 주요 투자자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국내외에서의 일로 성과분배금도 투자수익도 꽤 많이 쌓였습니다, 하하.”
껄껄 웃는 선해철과 달리 오현무, 해수찬, 오현준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
그 뒤로도 나는 GK그룹의 숙원사업 중 하나였던 통신사업 진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반도체 사업 조기매각 보상으로 데이콤을 가져오자고?”
“지금이 아니면 불가능할 겁니다. 우호지분만 확보해서는 확실히 진출했다고 할 수가 없죠.”
외가에서는 오래 전부터 통신사업 진출을 원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GK반도체를 매각할 때 외가에서는 데이콤의 우호지분을 전부 거둬들여서 최대주주가 되지 않았나.
잠시 고민하던 오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주금속에 태현전자 디스플레이 사업, 데이콤까지 가져오면 반도체 사업 매각 손실은 어느 정도 채우겠군.”
“그뿐만이 아닙니다, 회장님. 해동그룹에서도 GK반도체 조기매각을 태현자동차와의 대주자동차 분할에 활용하려 합니다.”
오현무가 기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 이사가 독한 사람이었군. 태현그룹만 바보 되겠어, 허허.”
해수찬, 오현준도 내가 이런 놈일 줄은 몰랐는지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GK반도체 조기매각을 외가에서만 우려먹기에는 아까웠다. 기왕 우려먹는 거라면 해동그룹도 한 번쯤은 우려먹어야 하지 않겠나?
음침하게 웃는 나를 보며 오현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이사를 우리 그룹 전략 컨설턴트로 들이길 잘한 것 같네. 해동그룹은 몰라도 다른 그룹에 넘겼으면 낭패를 볼 뻔했겠어.”
“과찬이십니다, 회장님. 해동그룹이 태현그룹과 접촉할 때까지 GK그룹에서는 GK반도체의 몸값을 최대한 높여주시기 바랍니다. 해동그룹에서도 지원해드리겠습니다, 하하.”
***
협상을 마친 우리는 GK그룹 사옥을 나와서 해동그룹 본관으로 넘어갔다. 회의 소집을 요청한 우리는 미국에서의 하락장 배팅에 해동그룹 자금을 끌어들이기로 한 것과 GK그룹과의 빅딜 협상 결과를 알렸다.
“그룹 살림 챙기느라 자네들 고생이 크군.”
해동그룹 본관에서의 연장자인 배재훈의 위로에 나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닙니다, 부회장님. 욕심을 버리신 외삼촌들의 결정이 컸습니다.”
재벌들의 욕심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 중에서도 사업 확장에 대한 욕심이 제일인데 이번 생의 외삼촌들은 반도체 사업이라는 욕심을 꺾어낸 자리에 디스플레이와 이동통신, 제련사업을 접붙이하겠다고 결정하지 않았나?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던 중 고승주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 이사와 선 대표, 박 전무가 태현과의 협상에 나서야겠군. 우리는 GK와 연합해서 GK반도체의 몸값을 최대한 부풀려야 할 테고.”
“네, 본부장님. 여론전부터 대정부 로비까지··· 뭐든 좋습니다. 우리와 GK의 요구가 전부 관철될 수 있도록 최대한도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우리의 공작질로 태현자동차까지 망가질 수도 있겠지만 태현자동차를 쥐고 있는 명선구는 절대로 태현전자의 빅딜에 협력하지 않을 것이다. 해동자동차가 아도 간판을 달고 있던 시절에도 하동제철소 공사를 빌미로 현금을 숨겨뒀을 만큼 여우같은 곰이 아닌가? 명선구라는 남자는.
그 여우같은 곰을 상대로 대주자동차에 걸린 판돈을 얼마나 가져오느냐가 관건이겠지만 그 또한 재미있는 싸움이 될 것이다. 우리에겐 협상에 내밀 카드가 여러 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