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51st. 늦은 만큼 화려하게
리모컨을 쥔 할아버지가 강오중의 장렬한 산화를 보여주던 TV를 껐다.
“어리석은 사람··· 진즉에 정신 차렸으면 좋았을 것을···.”
리모컨을 내려놓은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착잡함이 가득했다. 금모으기 운동 때라도 정신을 차리고 내실을 기했다면 이 지경까지 올 일도 없었을 텐데···.
“어쩔 수 없잖습니까, 회장님. 그래도 예상보다 피해가 적었으니 불행 중 다행입니다.”
대답을 한 고승주와 다른 어른들도 착잡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러나저러나 대한민국 경제의 산증인이 아닌가? 강오중이란 사람은.
‘저 사람한테 저런 면이 있었을 줄은···.’
나 역시 강오중이 스스로 맞은 뜻밖의 최후에 놀람을 숨길 수 없었다.
내가 알던 강오중은 끝까지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살던 파렴치한이었다. 그랬던 강오중이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지며 대주그룹을 살리려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할아버지는 내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띠며 물었다.
“후회하는 게냐?”
“아닙니다, 할아버지. 강 회장님의 폭주는 막아야 했습니다. 시대의 조류가 변했음에도 구태를 답습했으니 수십만 명의 생계를 책임지는 그룹의 총수로서 실격 아닙니까?”
사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강오중은 멈춰 세워야 했다. 냉정한 내 평가에 할아버지와 다른 어른들이 잠시 흠칫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빅딜이 추진되던 중에 대주그룹이 주인을 잃어버렸습니다. 앞으로 벌어질 빅딜은 대주그룹 계열사들 때문에라도 더욱 치열해질 겁니다.”
빅딜 과정에서 각 그룹들은 서로가 서로의 살림을 뺏고 빼앗긴다. 살림을 뺏긴 곳은 대주그룹의 거대한 시체를 뜯어먹어서 손실을 메우려 들 것이다.
할아버지 또한 내 말을 듣고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다. 대주그룹에서 강 회장이 물러난 이상 채권단에서도 하루빨리 대주그룹 계열사들에게 주인을 찾아주려고 할 게야. 그래도··· 박 전무.”
잠시 뜸을 들이던 할아버지가 박태진을 불렀다.
“예, 회장님.”
“그룹 일 때문에 계속 식 미뤄왔지?”
“회, 회장님?”
그룹 이야기를 하던 중 개인사가 나온 탓인지 박태진이 말을 더듬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박태진을 보며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룹 일도 중요하지만 대주그룹 일 때문에 우리 박 전무 혼사가 늦어졌다. 늦어진 만큼 화려하게 식을 치르게 해줬으면 하는데··· 이 이사.”
“네, 회장님.”
“고려호텔 장 대표한테 말해서 박 전무 내외하고 미팅 잡으라고 해. 본점 영빈관 정도면 좋겠구먼, 허허.”
할아버지라면 절대 박태진의 결혼식을 방관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당신의 막내아들처럼 키워온 박태진 아닌가? 껄껄 웃는 할아버지를 보며 나 또한 미소를 띠었다.
“네, 회장님.”
“아, 아닙니다, 회장님! 저희가 알아서 준비해도···!”
소스라치게 놀란 박태진이 손까지 들어 내저으려 했지만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해동물산 주주씩이나 돼서 고만고만한 예식장에서 식을 올리게 할 수는 없지?”
“회, 회장님···.”
“유 부장 혼주 분들께는 부담 없이 오시라고 전해. 대관료부터 식대 전부 이 이사 저놈이 댈 게야, 으허허.”
내가 생색내려고 했는데 선수를 뺏기다니··· 껄껄 웃는 할아버지가 얄미웠다. 젠장.
###
삼청동에서 나온 나와 박태진은 곧바로 유현정과 합류해서 고려호텔로 찾아갔다.
“어서 오세요, 선배님. 결혼 축하드려요, 후훗.”
“감사합니다, 대표님.”
겸연쩍은 미소의 박태진을 보며 살풋 웃던 장하연은 유현정에게도 축하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려요, 언니.”
장하연의 입에서 나온 호칭에 유현정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네? 어, 언니라뇨, 대표님?”
“선배님하고 결혼하시니까 언니잖아요. 아니에요?”
“그, 그래도 대표님은···.”
유현정이 머뭇거렸다. 장하연은 해동그룹 장손며느리인데다 계열사 대표지만 자신은 박태진의 와이프에 하이마트의 일개 부장에 불과하지 않은가?
입술을 열지 못하는 유현정에게 장하연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공적인 자리는 몰라도 지금은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거잖아요. 사석에서는 편하게 대해주세요, 언니.”
“···알겠습니다, 대표님.”
유현정은 여전히 어색해했지만 나는 장하연의 저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장수연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소탈함··· 재벌이되 재벌 같지 않은 저 마음이 너무 좋았다.
나와 눈웃음을 주고받던 장하연이 서류를 넘겨봤다.
“영빈관은 이달 중에 언제든 쓸 수 있어요. 편하신 날로 고르면 언제든 세팅해드릴게요. 비용 청구는 제 남편한테 할 거지만요. 괜찮지, 자기야?”
장하연이 날 보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내가 이 맛에 사니 받아줘야지.
“할아버지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 나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선수를 뺏겨버렸네, 후후.”
“오케이. 그럼 그날 식사는 우리 본점 식당 셰프들 전부 동원해서 준비해야겠다.”
고려호텔 본점 식당의 셰프들은 전부 이 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일류 셰프들이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기에 박태진과 유현정이 깜짝 놀랐다.
“대, 대표님?”
“선배님 결혼식이니까 최고급으로 꾸며드리고 싶어요. 그렇지, 자기야?”
“물론이지. 우리 형 결혼식 화려하게 꾸며줘, 흐흐.”
나와 장하연은 서로를 보며 미소를 활짝 띠었고, 박태진과 유현정은 할 말을 잊고 멍한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기만 했다.
***
며칠 뒤.
토요일 오전을 맞은 고려호텔 영빈관은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회장님. 현정이 부모 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우리 태진이 혼주로서 두 분을 뵙는 겁니다. 태진이가 현정이 울릴 일은 없을 테니 잘 봐주십시오, 허허.”
정장을 입고 가슴께의 포켓에 꽃을 꽂은 이대수는 유현정의 부모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다른 그룹 회장들이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이대수는 위세를 부리기는커녕 아들을 장가보내는 아버지처럼 두 사람을 정중히 대했다.
그렇지만 인사를 건넨 건 이대수만이 아니었다.
배재훈, 태재호, 조영찬도 유현정의 부모에게 와서 박태진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건넸고, 고승주와 이명진까지 와서 인사를 건네는 통에 유현정의 부모는 정신이 없었다.
###
이러한 분위기는 신부대기실에서 직장동료들을 맞고 있던 유현정도 마찬가지였다.
“유 부장, 괜찮아?”
“···모르겠어요, 전무님.”
나창석의 조심스러운 질문에도 유현정은 머리가 핑핑 돌 것 같았다. 해동그룹 임직원들 중 삼청동 서재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전부 박태진의 하객으로 오지 않았나?
“아직 안 늦은 것 같은데 청심환이라도 하나 사다줄까?”
“아침에 태진 씨하고 반 개씩 나눠먹었어요. 그런데도 진정이 안 돼요. 두 개 사서 하나씩 먹을 걸 그랬나···.”
직장에서는 늘 씩씩했지만 결혼식장에서의 유현정은 오늘처럼 부담되는 적은 처음이었다.
###
바늘 가는 데 실 따라간다고 유현정의 반려가 될 박태진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야, 밖에 봤어?”
“뭘?”
애써 태연하게 대꾸하는 박태진의 모습이 재밌는지 민주형이 짓궂은 미소를 띠었다.
“회장님 말고도 부회장님들 전부 다 오셨어. 총괄전략본부 사람들에 계열사 대표님들까지 싹싹 몰려왔다, 흐흐.”
“민 전무님 말이 맞습니다, 박 전무님. 축의금 걱정은 없으시겠는데요? 흐흐.”
옆에 있던 주승빈까지 놀려대는 모습에 박태진이 피식 웃었다.
“같이 있으면 물 든다더니 주 상무도 민 전무한테 옮았나봐? 흐흐.”
박태진이 웃는 모습을 보고서야 민주형이 박태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 동기 얼굴 펴는 거 보니까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 편하게 해, 편하게. 결혼 선배로서 해주는 말이다, 흐흐.”
“맞아요, 전무님. 이럴 때일수록 편하게 생각하세요. 남들은 누리지도 못할 호사잖습니까? 하하.”
민주형과 주승빈의 응원에 박태진이 미소를 띠었다.
“고맙다, 주형아. 주 상무도 고마워, 후후.”
###
예식장에 있던 나와 장하연은 선해철, 클레어와 함께 박태진의 대기실로 갔다. 대기실 입구에 도착한 우리는 밖으로 나오는 민주형과 주승빈을 만났다.
“찰리? 제이슨?”
“보스?”
민주형과 주승빈을 본 클레어가 반가운 미소를 띠며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죠?”
“네, 보스. 그런데···?”
갸름한 얼굴과 팔다리에 비해 유독 도드라진 클레어의 배를 본 민주형과 주승빈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 두 사람을 보고 선해철이 클레어의 곁에 다가왔다.
“우리, 결혼한 사이입니다. 하하.”
“예?”
“우리 둘, 트라이엄프에서 같이 일하던 시절부터 사귀던 사이입니다. 그렇지, 클레어?”
“···몰라요.”
선해철은 클레어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클레어는 그런 선해철의 품에 고개를 기대며 세상 행복한 미소를 띠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당황한 민주형과 주승빈을 본 나는 얼른 앞으로 나왔다.
“와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이사님. 같이 고생한 동기 결혼식인데 오는 게 당연하죠, 하하.”
“그렇습니다, 이사님. 박 전무님, 그리고 이사님도 홍콩에서 저희와 찐하게 고생하셨잖습니까? 하하.”
넉살좋게 웃는 두 사람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오늘은 박 전무님이 주인공이니까 다음에 또 봐요.”
두 사람을 보낸 우리는 대기실에 혼자 있는 박태진에게 다가가서 축하인사를 건넸다.
“지금 기분 어떠냐?”
“저라는 사람이 결혼을 해서 가정을 잘 꾸릴까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되고··· 붕 떠있는 것 같습니다, 하하.”
질문을 건넨 선해철이 빙긋 미소를 띠며 말했다.
“다 그런 거다. 나도 결혼할 때 그랬거든, 흐흐. 우리 조카는 어땠어?”
“말할 필요가 있나요?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그럴 겁니다, 하하.”
아마도 우리가 붕 떠있는 기분을 공유하는 건 좋아하는 사람과 평생의 동반자가 되어서일 것이다. 나만 해도 장수연과의 결혼식 때는 느끼지 못했던 푹신한 기분을 장하연과 결혼하고서야 맛보지 않았나?
껄껄 웃던 나는 박태진에게 말했다.
“지금 그 기분을 안고 있으면 평생 행복할 것 같네요. 축하드려요, 형.”
지금 내가 건네는 축하는 가식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두 번 결혼해본 남자로서 검증하고 건네는 축하가 아닌가?
박태진과 유현정은 분명히 행복하게 살 것이다. 우리들처럼.
***
결혼식을 마친 박태진과 유현정은 곧바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넘어갔다. 두 사람이 묵을 방은 제주도 고려호텔의 최고급 스위트룸이었다.
“와아···.”
문을 열고 방에 들어온 유현정은 넓고 화려한 내부를 보고 탄성만 자아냈다. 박태진은 그런 유현정을 보며 빙긋 웃었다.
“어때?”
“어떻긴? 너무 좋아.”
유현정은 지금 자신이 누리는 게 현실 같지가 않았다. TV 속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된 것 같은 황홀함에 자신도 모르게 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도 지금이 믿기지가 않아. 평생 철부지 돌봐주다가 혼자서만 살 줄 알았는데··· 후후.”
빙긋 웃던 박태진을 보던 유현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철부지면··· 이사님?”
“맞아. 병원에서 눈 뜨기 전까지만 해도 방황했던 철부지였는데 눈 뜨고부터는 어른이 됐고, 이사님이 됐지. 이사님이 안 바뀌었으면 우리가 지금 여기까지 온 건 꿈도 못 꿨을 거야.”
박태진의 대답에 유현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늘 웅크려있던 해동그룹이 대한민국 재계의 중심부로 들어간 것도.
그 과정에서 자신이 하이마트로 옮겨와서 40도 안 된 나이에 부장이 되고 박태진을 자신의 남자로 만든 것도.
전부 이성민이 정신을 차리고 종횡무진하면서 벌어진 일이 아니던가?
“이사님이 우리 둘을 이어준 오작교였네, 후훗.”
“현정이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난 앞으로도 이사님을 쭉 모시고 바쁘게 살아야 할 거야. 이해해줄 거지?”
“물론이지. 오빠하고 만나게 해준 이사님 돕겠다는데 어떻게 말리겠어.”
자신을 이해해주는 유현정의 미소에 박태진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편안한 마음을 안고 박태진은 자신의 얼굴을 유현정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그 모습을 보고 유현정은 눈을 감았고, 박태진 또한 눈을 감으며 자신의 입술을 유현정에게 살며시 포갰다.
***
일주일 뒤.
신혼여행을 마치고 회사에 출근한 박태진을 보며 선해철이 농담을 던졌다.
“우리 새신랑 얼굴이 너무 좋은데? 일주일간 손만 잡고 잤냐? 흐흐.”
“지금 하신 말씀, 형수님한테 전화로 알려드릴까요? 흐흐.”
박태진이 핸드폰을 빼들고 전화번호를 누르려는 제스처를 취하자 선해철이 황급히 소리쳤다.
“그건 반칙이지! 농담도 못하냐?”
우리 삼촌, 클레어한테 잡혀 사는 것 같았다. 하긴, 거의 띠동갑인 여자와 결혼했으니 업고 다녀도 욕을 먹는 게 이상하지 않겠나?
손까지 들어 흔든 선해철을 보며 박태진이 피식 웃었다.
“저도 농담입니다, 흐흐. 그리고 저, 아직 팔팔합니다. 형님.”
저 표범 같은 박태진 정도면 밤일 걱정은 할 필요도 없다. 소매를 걷어붙인 박태진이 팔에 힘을 준 걸 보고 선해철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끄응··· 니 똥 굵다, 자식아.”
“삼촌도 참. 앞으로는 다들 유부남에 애 아빠 될 텐데 고운 말 써야죠, 흐흐.”
이 방에 있는 남자들이 전부 자신들의 짝을 만나 둥지를 틀었다는 사실이 왜 이리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지 몰랐다.
그 기분을 안고 나는 두 사람과 잔칫상을 준비할 것이다.
강오중 회장 덕분에 더 풍성해진 빅딜이라는 잔칫상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