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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176화 (175/229)

176화. 50th. 피할 수 없는 빅딜 (2)

유성학은 황병식과 강오중의 집무실이 있는 힐튼 호텔에서 서울역 인근의 대주그룹 본관으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고개를 숙인 유성학을 보며 황병식이 미소를 띠었다.

“죄송하긴. 힘들 때 서로 도와줘야지.”

“그래도 대주전자 국내영업망과 대한신용유통을 합병시키고 지분을 매각하는 건 실장님 아이디어였잖습니까? 괜히 저 때문에···.”

유성학이 말을 잇지 못하고 또다시 황병식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룹을 살리겠다고 애쓰는 선배의 공을 가로챈 꼴이 아닌가?

“괜찮아, 유 본. 이번에 빚졌으니까 열심히 해봐, 하하.”

황병식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젓고는 껄껄 웃으며 유성학을 다독여줬지만 정작 유성학의 얼굴에서는 그늘이 걷힐 줄을 몰랐다. 그 모습을 보고 황병식도 웃음을 그쳤다.

“많이 답답한가봐, 유 본.”

“···죄송합니다, 실장님.”

황병식은 숙였던 고개를 든 유성학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껏 회장님 지시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것 같던 사람이 왜 그러나? 오늘, 자네답지 않았어.”

황병식의 핀잔에도 유성학은 힐튼 호텔 집무실에서 말하지 못한 걸 쏟아냈다.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실장님. IMF와 정부가 빚 줄이라고 독촉하는데 어떻게 감당합니까? 회장님께서 40억 달러를 유치하셨지만 부채상환에 집중해야 분식(粉飾)을 없앨 수 있습니다. 그런데 CP와 회사채를 발행하라뇨?”

“유 본.”

황병식의 얼굴이 굳었지만 유성학은 멈출 줄을 몰랐다.

“다른 그룹들도 부채를 줄이려고 투자계획을 재검토하거나 기존 사업까지 처분하고 있습니다. 장부에 난 구멍도 메우고 있고요.”

“누가 그걸 모르나? 그래도 조금만 더 참고 넘기면 길이 보이지 않겠나?”

“실장님도 아시겠지만 대출과 분식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돌이킬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지금이라도 팔 건 팔고 살릴 건 살려야 합니다.”

유성학도 이 바닥 생활이 오래된 만큼 다른 그룹들에 지인들이 많았기에 듣고 있는 게 많았다. 대주그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5대 그룹뿐만 아니라 그밖의 그룹들마저 구조조정에 여념이 없기에 유성학의 말에서는 절박함마저 묻어나고 있었다.

“이봐, 유 본. 우리 대주는 지금껏 식구들을 늘리면 늘렸지, 쫓아낸 적이 없어. 자네도 그게 좋다고 해동물산에서 우리 회사로 옮겨오지 않았나? 그런데, 식구들을 내치자고?”

황병식의 질책에 유성학이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그룹들은 피 보는 일이 허다한 노사분규조차 대주그룹은 상위권 재벌답지 않게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면서 여기까지 올라오지 않았나?

그의 예전 직장이었던 해동그룹, 잠재력에 비해 적은 사람들만 끌어안아왔던 그 해동그룹과 다른 모습이 좋아서 청춘을 불살라왔기에 자신의 태도가 모순인 것도 알고 있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온정과 도전 모두를 해내는 게 좋아서 지금까지 열심히 일 해왔고요. 하지만···.”

말끝을 흐리던 유성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 드시겠습니까?”

“냉수나 한 잔 주게.”

유리컵 두 개에 물을 채운 유성학은 황병식에게 한 개를 건넨 뒤, 자신의 손에 남은 컵을 단숨에 비웠다.

“다 끌고 가려다간 모두 다 죽습니다. 다른 집에 우리 식구들을 넘기는 걸 감수해도 살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유성학은 20년 넘는 대주그룹 근무기간 중 지금처럼 두려운 적이 없었다. 자신이 강오중이라면 팔 하나를 잘라내도 내실을 다지고 훗날을 기약하고 싶었다.

먹구름이 잔뜩 낀 유성학의 얼굴을 보던 황병식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네. 우리에게 결정권이 없는데 어떡하자는 건가?”

“실장님?”

“우린 월급쟁이야. 월급 주는 양반을 따라야지, 별 수 없잖나?”

유성학을 바라보던 황병식이 자조적인 토로에 이어 물을 들이켰다. 텅 빈 컵을 거칠게 내려놓은 유성학에게 황병식이 말했다.

“자네, CP하고 회사채 발행에서 손 떼.”

“시, 실장님?”

“그렇게 자네가 못하겠다면 내가 직접 해야지, 어쩌겠나?”

“시, 실장님!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 자네 지금 하는 거 봐서는 이도 저도 안 될 게 훤히 보여. 내가 핸들링 할 테니 빠지도록 해.”

다급하게 해명하려던 유성학은 황병식에게 말이 잘린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이번 일이 잘 되면 난 더 올라갈 수 있지 않겠나? 하하.”

황병식의 미소와 귀에 들리는 웃음소리가 유성학에게는 왠지 모르게 애처롭게 보이고, 구슬프게 들렸다. 안타까워하는 유성학을 보며 황병식이 미소를 지었다.

“일 잘 풀리면 회장님께 자네 얘기 잘 말해보겠네. 걱정 말게.”

그 말을 끝으로 소파에서 일어난 황병식이 사무실을 나갔다. 유성학도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황병식을 잡지 못한 채 우두커니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

대주그룹의 40억 불 투자 유치 뉴스를 본 우리는 곧바로 그룹의 어른들과 연락을 주고받은 뒤, 모든 채널을 동원해서 세부 정보를 확인했다.

“다 챙겼죠?”

“오케이.”

“가시죠, 이사님.”

나와 선해철, 박태진은 차를 타고 강남의 해동그룹 본관으로 넘어갔다. 배재훈의 집무실에 들어간 우리는 회의용 탁자 앞에 앉은 다섯 부회장에게 인사를 올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부회장님들.”

“아닐세. 우리도 이제 막 들어왔네. 앉게.”

미리 준비해온 서류를 한 부씩 돌린 우리는 탁자에 앉아서 회의를 시작했다. 첫 스타트는 그룹의 컨트롤타워를 맡고 있는 고승주가 끊었다.

“스탠더드 캐피털과 총괄전략본부가 합동으로 알아본 바에 따르면 대주그룹에서 40억 달러를 끌어온 당일에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서 정부 주도의 빅딜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역시나였군. 강 회장이야 지금 여당이 야당이었을 때부터 정치자금을 적잖이 밀어줬고 대주그룹도 자본을 늘렸으니 대통령이 응할 만했겠어.”

배재훈이 굳은 표정으로 말한 다음은 내가 받았다.

“무엇보다 현 대통령은 지난 취임 연설 때도 재벌들의 방만한 확장을 비판했습니다. 그때부터 빅딜은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고 강 회장님이 틈새를 잘 파고든 것 같습니다.”

“강 회장 칭찬만 할 생각은 아니겠지, 이 이사?”

평소와 달리 태재호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히 나 또한 평론만 하고 끝낼 생각은 없었다.

“물론입니다, 부회장님. 선 대표님이나 박 전무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우주항공은 정부에서 출자하여 반(半) 국영기업으로 만들고 철도차량 분야는 태현철도차량을 중심으로 합칠 계획이라 합니다.”

여기까지는 역사와 똑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한국항공우주와 태현로템이 만들어지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쪽은 우리와 엮인 게 없네, 이 이사. 다른 건 없나?”

“있습니다. 자동차 쪽에서는 빅딜이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강 회장님이 슬쩍 찔러봤다는데 해동자동차의 뒤에 스탠더드 캐피털이 있다는 게 크게 작용했습니다.”

실제로도 정부 관료들과 정치권에서도 이 점을 의식했는지 나와 선해철, 박태진과의 술자리에서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말했다.

[해동자동차 건드리면 스탠더드와 적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좋은 조건으로 국내 기업들 살려주는 곳도 없는데 적으로 돌리는 미친 짓을 누가 하겠습니까?]

[대통령님께서 단칼에 거절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자동차 쪽은 걱정 마시오, 허허.]

[해동그룹에서 지난 대선 때 우릴 도와준 걸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지요. 걱정 붙들어 매둬요, 이 이사.]

우리가 술자리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들려주자 조영찬이 피식 웃었다.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군. 강 회장 이빨이 안 먹히다니, 흐흐.”

“뿐만 아니라 자동차 외에도 우리 그룹 계열사들이 빅딜의 대상이 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이사님 말이 맞습니다, 부회장님. 재무구조와 주가, 사업경쟁력 모두 동종업계 경쟁사들보다 우수하니 오히려 빅딜의 주체가 되어달라고 하더군요.”

나와 박태진이 알려준 정치권과 은행권 동향에 이명진이 피식 웃었다.

“대주그룹 강 회장님, 많이 배 아플 것 같습니다. 하하.”

“나도 그리 생각하네. 그 양반 성격이면 해동자동차는 꼭 집어삼키고 싶었을 텐데 말이야, 흐흐.”

낄낄 웃던 배재훈이 입을 벌리며 탄성을 흘렸다.

“내 정신 좀 보게. 이 이사.”

“네, 부회장님.”

“상사부문 전략실에서 알아봤는데 GK그룹이 최대 피해자가 되게 생겼다더군.”

‘올 것이 왔군.’

예전에도 내 외가는 GK반도체를 태현그룹에게 넘기면서 반도체 사업을 접어야 했었다.

반도체 사업의 핵심인 메모리 반도체가 처음부터 망조가 들었다는 것을 알고는 잘 팔았다는 게 외가 내부의 중론이었지만 자존심과 다른 사업에서의 이익 때문에 외부에는 억울하다는 여론을 조성했었다.

모든 사실을 알기에 담담한 내 표정을 보고 배재훈이 입을 열었다.

“태현그룹에서 GK반도체를 가져가려고 여당에 로비를 하고 있네. 자네도 알겠지만 명진호 회장님이 이번 정부의 대북사업에 협력하는 터라 유리하게 돌아갈 걸세.”

“그렇군요.”

태현그룹의 대북사업이 플러스 요인이 되겠지만 태현전자의 반도체 사업이 GK반도체보다 나은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배재훈이 이어서 들려주는 소식에는 평정심을 지킬 수 없었다.

“게다가 강 회장이 자네 외가 쪽 계열사들을 노린다고 들었네. GK금속과 GK통신을 흡수할 생각이라더군.”

“네?”

GK금속은 국내 최대의 구리 제련회사이고 GK통신 또한 신성전자 통신장비사업부와 견줄만한 업계 내 양대 산맥이다. 내실도 없이 비대하기만 한 대주그룹 따위가 내 외가 살림에 손을 뻗다니!

나도 모르게 이빨이 갈렸다. 징징거리는 진동이 뇌까지 전해져서 두통까지 일어날 정도로!

한참동안 이를 갈던 나는 숨을 고르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죄송합니다.”

이 자리에서 막내인 놈이 웃어른들 앞에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건 사과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고개를 숙인 내게 배재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그렇게 야박한 사람들 아니네, 이 이사. 자네가 자네 우리 그룹만큼이나 자네 외가를 위하는 건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네.”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고개를 든 나는 잠시 말없이 고민했다. 고민을 마친 나는 내 윗자리의 어른들에게 말했다.

“해동물산에서 GK금속에 증자를 해주는 게 어떨까 합니다.”

“왜인가?”

배재훈의 가늘게 뜬 눈을 보니 사적인 감정 때문에 투자하는 거라면 절대 허락하지 않을 듯했다. 당연히 내겐 사업상 투자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해동물산의 주요 사업은 자원개발, 그 중에서도 광산 사업입니다. 외환위기가 풀리고 나면 파나마 구리광산을 개발하게 되는데 여기서 채굴될 정광물을 GK금속 제련소에서 가공하면 채굴부터 제련까지의 수직계열화가 완성됩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코브레 파나마 매장량도 좋고 순도까지 높다는 보고가 올라왔었네. IMF 관리체제만 끝나면 바로 개발할 생각이었는데 GK금속을 지원하면 일거양득이겠군.”

“그리고 스탠더드 캐피털에 있는 제 돈의 일부를 GK통신에 투자하겠습니다. 이동통신 시장이 해마다 커지는 만큼 통신 중계기 수요도 올라갈 테니 수익은 충분히 보장될 겁니다.”

이번 기회에 외가에 빚 한 번 더 지워놓고 우리와의 협력을 부스팅 해야겠다.

그와 별개로 강오중은 내 손으로 무너뜨릴 것이다. 내 가족을 건드린 대가는 치러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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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를 마친 우리는 곧장 삼청동으로 들어가서 할아버지에게 정부 주도의 빅딜과 대주그룹의 확장에 대한 1차 대책에 대해 보고했다.

“그놈이 기어이 경을 치겠군. 반도체는 덩치가 크니 돕지 못해도 금속과 통신은 이 이사 제안대로 하세.”

“예, 회장님.”

굳은 표정으로 지시를 내린 할아버지가 고승주를 보며 입을 열었다.

“고 본부장은 배 부회장과 손발 맞춰서 대주그룹 정보 최대한 캐내. 내 직감이 맞으면 그놈이 유치한 40억 불, 해외로 빼돌려온 비자금일 게야.”

“그렇지 않아도 금모으기 운동 때부터 배 부회장님이 각지의 상사 네트워크를 동원해서 대주그룹 해외법인 정보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총괄전략본부 또한 대주그룹 본사 내부자를 통해 정보를 확보하는 중이고요.”

할아버지의 관록도 날카롭고 고승주의 일처리도 기민했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고승주의 보고에도 침음성을 흘렸다.

“흠··· 쉽진 않을 걸세. 길이 안 보이면 자네가 나서야 할 텐데 괜찮겠나?”

“예, 회장님. 필요하다면 직접 나설 생각입니다.”

나와 박태진, 선해철은 무슨 뜻인지 몰라서 눈을 껌뻑거렸지만 나머지 네 명의 부회장들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좋다. 피할 수 없다면 도망치지 말고 맞서 싸워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대주그룹이 날뛰는 걸 막아. 알겠느냐?”

“예!”

대주그룹, 반드시 막아야 한다. 대한민국을 또다시 수렁에 빠뜨릴 수는 없으니 말이다.

***

며칠 뒤.

“해동물산에서 GK금속에 9천억, 스탠더드 캐피털에서 GK통신에 5천억이면 충분하겠죠?”

“몇 번이나 검토했지만 그 정도 자본이 추가되면 두 회사 모두 부채비율이 200퍼센트 밑으로 내려갈 거다. 대주그룹 이빨도 깨지게 만들 걸? 흐흐.”

낄낄 웃는 선해철을 보며 박태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가을이면 쌍둥이 아버지 되실 분이··· 체통 좀 지킵시오, 형님.”

“너나 잘해, 인마. 다음 달에 식 올릴 거라며?”

곱게 흘겨보는 선해철의 눈초리에 박태진은 오히려 미소를 띠었다.

“예. 식 올리면 형님 따라잡을 겁니다. 현정이가 빨리 애 갖고 싶다고 하더군요, 흐흐.”

“자자, 이럴 시간 없어요. 빨리 외가 어른들 뵈러 가죠, 후후.”

우리가 도울 GK그룹을 깨물려 든다면 대주그룹의 이빨은 산산조각날 것이다. 두 사람을 보며 빙긋 웃은 나는 서류가방을 손에 쥔 채 그들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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