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50th. 피할 수 없는 빅딜 (1)
로비로 내려간 우리는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세 사람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이 늙은이가 주책없이 불쑥 찾아왔으니 기다려야지, 허허.”
껄껄 웃으며 일어난 할아버지를 앞에 세운 우리는 곧바로 선인장 마을로 갔다.
“이게 그 선인장이냐?”
“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무릎을 굽히며 선인장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참으로 놀랍구나. 지구 반대편에서나 볼 수 있는 게 여기서 자라다니···.”
나지막이 감탄하던 할아버지가 낮췄던 몸을 세웠다.
“그래서 상품에 입힐 브랜드 스토리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브랜드 스토리?”
“앞으로 기술이 발전할수록 제품의 품질은 어느 회사든 비슷해질 테니 우리 제품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겠구나. 품질이 비슷하면 소비자들의 마음을 채워줘야 할 테니 말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건너와 스스로 자랄 만큼 강한 생명력을 가진 선인장의 열매로 만든 초콜릿이라고 스토리를 잡으면 먹힐 것 같구나, 허허.”
우리 할아버지, 내일모레면 여든을 바라볼 분인데도 어지간한 마케터만큼이나 센스가 남다른 분이었다. 다른 그룹 회장들이었으면 품질만 따졌을 텐데···.
“저희도 할아버지 말씀대로 브랜드 스토리의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렇지?”
장하연은 내 눈길을 받자마자 얼른 입을 열었다.
“네, 할아버님. 저희가 만든 사업계획서부터 봐주셨으면 합니다.”
장하연은 버킨백에서 서류 세 부를 꺼내서 할아버지와 고승주, 태재호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흠··· 우리 장손 내외 덕분에 이 동네 주민들은 살판나겠구먼, 허허. 안 그런가?”
“이를 말씀입니까? 이곳에 농장과 공장을 만들어서 원료를 수급하고 제품까지 생산하면서 근처 공터에 리조트까지 지어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면 충분히 먹힐 만하다고 봅니다, 하하. 본부장 생각은 어떤가?”
먼저 대답한 태재호에게서 고승주가 바통을 넘겨받았다.
“부회장님 말씀도 맞지만 지역사회와 상생한다는 점에서도 정부와 지자체, 국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거라 예상됩니다.”
고승주까지 찬성했지만 할아버지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자네들, 내 핏줄들이 꾸민 일이라고 공치사 치는 건 아니겠지?”
할아버지의 느물느물한 목소리에 태재호가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회장님. 여행에서 남는 건 볼거리와 먹거리 아닙니까? 볼거리가 있는 곳에 리조트를 만들고 남들과 차별화되는 이야기까지 담으면 충분히 성공할 겁니다.”
“앞으로는 우리 호텔이나 콘도가 있는 지역 고유의 먹거리를 판매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억지로 찾을 필요는 없겠지만 좋은 먹거리가 있다면 그 음식을 개발한 사람과 정식으로 공정계약을 하고 판매하는 방법도 좋다고 봅니다, 회장님.”
고승주의 제안까지 듣고서야 할아버지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조만간 고려호텔과 해동물산이 합병해서 레저사업을 재편하면 이 계획서를 토대로 사업을 꾸리도록 하지.”
할아버지의 최종 승낙이 떨어졌다. 나와 장하연은 할아버지와 마주보며 활짝 웃었다.
***
일주일간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스탠더드 캐피털로, 장하연은 고려호텔로 복귀했다.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해동물산의 고려호텔 흡수합병 후 자회사 분리였다.
“다들 알겠지만 이번 합병으로 우리 새아가도 해동물산의 주주가 되었다. 새로 재편된 고려호텔 이하 레저사업과 면세점사업은 새아가 몫이니 그리들 알어.”
모처럼 만의 가족회의에서 나온 할아버지의 선포에 온가족들이 장하연에게 축하를 건넸다.
“앞으로 휴가 잘 보내려면 우리 조카며느리한테 잘 보여야겠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 때 좋은 방 좀 부탁하게요, 하하.”
이명진의 너스레에 장하연이 어색한 미소를 띠었고, 이명진의 옆에 있던 숙모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이이도 참···.”
“아범 나이 오십 줄인데 막내손주 안겨주려는 게냐? 으허허.”
할아버지까지 넉살 좋게 웃자 숙모는 새색시마냥 고개를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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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물산과 고려호텔의 합병을 마친 뒤.
장하연은 정창호, 태재호와 함께 고려호텔의 초콜릿 사업에 나섰다.
“리조트와 선인장 농장, 초콜릿 공장이 동시에 오픈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게 좋겠습니다, 부회장님.”
해동그룹에 합류하고 나서 처음으로 만나는 그룹 수뇌부였기에 정창호는 긴장을 숨기지 못했지만 태재호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편하게 하게, 정 대표. 자네나 나나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무슨 예의를 차리나?”
태재호의 사람 좋은 미소에 정창호가 겸연쩍은 미소를 띠었다.
“그래도 해동물산의 창업을 함께 해오지 않으셨습니까? 지킬 건 지켜야지요, 하하.”
“거 참, 사람하고는··· 앞으로 내가 팍팍 밀어줄 테니 잘해보세, 허허.”
태재호의 푸근한 인심에 장하연과 정창호는 팍팍했던 신성그룹 시절과는 다른 묘한 감정이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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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연이 태재호, 정창호와 함께 제주 선인장 마을에서의 선인장 농장, 초콜릿 공장, 리조트 건설 계획을 추진하고 있을 때 나는 나대로 사업을 점검하고 있었다.
“은행 인수 준비는 잘 되고 있네요.”
미국에서 클레어가 보내준 서류를 보던 나는 기분 좋게 휘파람을 불었다. 선해철은 그런 나를 보며 씩 웃었다.
“클레어가 좋아하더라. 우리 애들 키우는 데 돈 들어갈 걱정 덜었다고, 흐흐.”
“삼촌도 참. 누가 알면 제가 악덕 고용주인 줄 알겠어요. 그래도 저, 삼촌하고 클레어한테 많이 챙겨준 거 아시죠?”
“안다, 이놈아. 벌써 통장에 찍힌 숫자만 해도 얼만데?”
선해철과 클레어의 계좌에 찍힌 돈만 각각 1조 원 가까이 됐다. 두 사람 모두 그 돈을 스탠더드 캐피털에 맡기고 있으니 돈이 돈을 벌어주고 있었다.
“아! 미룡그룹 회생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순항 중. 우리 쪽에서 자금 지원해주고부터는 은행권 태도도 싹 달라졌어.”
“어떻게요?”
“대출 상환 압박도 쑥 들어가고 오히려 금리를 깎아주겠다고 했다더라.”
선해철의 대답이 내 얼굴에 미소를 그려줬다.
“고객님 뺏길까 전전긍긍했나보네요.”
“그러겠지. 덩치만 따지면 미룡그룹만한 고객도 손에 꼽히잖냐?”
미룡그룹 투자 건으로 스탠더드 캐피털이 국내 시중은행들보다 훨씬 많은 자금을 좋은 조건으로 빌려줄 수 있다는 게 증명됐다. 그 때문에 국내 은행권은 회생이 유력한 그룹들에게는 대출 압박도 자제하고 금리까지 우대해주고 있었다.
“그래도 미룡그룹보다는 신성자동차 먹은 해동자동차가 훨씬 더 좋은 우량고객이지, 흐흐.”
“다 장인어른 덕분이죠, 흐흐.”
선해철의 능글맞은 웃음에 나 또한 씩 웃었다.
해동자동차는 지난 4월 중순에 신성물산에게 8천억 원을 주고 신성자동차를 가져왔다.
합병을 통해 한 라인에서 여러 차종을 연간 30만 대 생산할 수 있는 최신식 공장을 손에 넣은 데 비해 늘어난 부채는 겨우 1조 원.
이는 모두 지난 3월 말에 4대 회계법인에서 실사를 마친 결과, 신성생명의 적정주가가 주당 70만 원으로 나왔고 국세청에서 회계법인들이 산출한 주가를 인정했다.
은행권에서 장호건이 내놓은 신성생명 주식 350만 주를 받고 부채 2조 4,500억 원을 탕감해준 덕분이었다.
“이사님 장인어른과 이 실장님이 고생 좀 하셨을 겁니다, 하하.”
장호건과 이수한은 우리에게 신성자동차를 떠넘길 때 빚을 털어낸다는 명목으로 신성생명 주식을 내놓겠다며 정부와 정치권, 은행권, 회계법인에 수백억 원을 뿌렸다. 나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박태진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주식쪼가리 던져주고 2조 5천억 가까운 빚을 털어낸 데다 신성생명 상장의 빌미가 생겼으니 남는 장사라 생각하겠죠, 후후.”
장호건의 숙원사업 중 하나인 신성생명 상장.
은행들은 현찰 대신 받은 주식을 어떻게든 현금으로 바꿔 채워야 장부에 난 현금구멍을 메울 수 있다. 그러니 신성생명의 상장은 반드시 추진되어야 한다는 게 장호건과 이수한의 계산이었다.
“그 주식, 어떡할 거냐?”
“장인어른이 채권단과 계약할 때 2000년도까지 신성생명을 상장시켜서 주식을 팔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그때까진 지켜봐야죠.”
질문을 던진 선해철은 내 대답을 듣고 짓궂은 미소를 띠었다.
“그러다가 안 팔리면 네가 가져올 거지?”
“물론이죠. 신성제철에 석유화학계열, 신성자동차도 가져왔잖습니까? 흐흐.”
누군가는 내 웃음을 보고 악마의 웃음이라 하겠지만 처가 놈들에 대한 내 복수는 이제 겨우 시작이다. 그들이 가진 회사들의 숫자만큼 내가 그들의 살점을 한 점씩 한 점씩 저밀 테니 말이다.
웃음을 거둔 나는 서류를 다시 살펴보며 일을 계속하던 중 선해철에게 물었다.
“대통령님 취임 연설 때 뭔가 쌔하지 않았어요?”
“뭐가?”
“대기업들이 경쟁력 없는 기업들을 문어발처럼 거느렸다는 거요.”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는지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던 선해철이 표정을 풀었다.
“아, 그거?”
“네. 제 생각엔 단순히 립서비스로만 한 말은 아닐 것 같아요.”
“그럼?”
“경쟁력 없는 기업들을 업종별로 정리할 것 같습니다.”
선해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빅딜?”
“네.”
선해철은 대답을 내놓고도 못 믿는 눈치였지만 김 대통령은 민주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면서도 시장경제에 충실한 자본주의자였다. 외환위기라는 파도의 영향이 있었어도 노조의 반대를 무시하고 노동유연성을 강화한 사람이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다.
김 대통령은 경쟁력이 없다 판단된 몇몇 업종은 하나의 기업으로 통폐합 하는 빅딜까지 밀어붙였다. 이번 생에 나와 우리 집안이 막대한 달러를 풀어서 한 고비는 넘겼어도 재벌들의 고질적인 부채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으니 빅딜은 예고된 셈이었다.
“그래도 우리 그룹 계열사들은 빅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빅딜의 대상을 넘어 주체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이사님.”
박태진이 조심스럽게 추측했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업종별 기업들 중 해동그룹 계열사들은 부채비율이 가장 낮지 않은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빅딜을 통해 인수할 만한 회사들을 알아보는 게 좋을 텐데··· 가장 유력한 건 대주그룹 정도겠죠. 다른 기업들은 우리 그룹 규모에 비하면 짜치니까요.”
내가 내놓은 의견에 박태진의 표정이 굳었다.
“그렇지만 대주그룹은 금모으기 건 이후로 인수합병이든 외부 자금 차입이든 모든 형태의 확장을 멈춘 채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진짜로 빚을 줄이면 회생이 유력합니다.”
나 또한 박태진이 짚어준 부분이 걸렸다.
역사를 바꾼 탓일까 대주그룹은 금모으기 운동 이후로 얼음땡의 얼음이라도 된 것마냥 모든 팽창을 멈췄다. 내가 아는 대로면 해외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게 정상인데···.
입술을 뒤튼 채 고개를 모로 꼬던 중 거칠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큰일 났습니다, 이사님!”
“무슨 일이죠?”
아래층 사무실에서 뛰어올라왔는지 헐떡거리는 직원을 본 나는 물을 건네줬다.
“마시고 말해요.”
내가 건네준 물을 들이켜고 숨을 고른 직원은 재빨리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총 40억 달러를 해외에서 유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앞으로 대주그룹은 그룹을 재정비하고···.]
연설대 앞에서 원고를 읽는 강오중의 모습에 사무실에 있던 누구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주그룹이 40억 달러나 유치하다니?
***
“···예, 대통령님! 걱정 마십시오. 이번 기회에 재계도 각자 잘하는 일에 집중하도록 노력해야지요. 저희 대주 또한 대통령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던 강오중은 수화기를 내려놓자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대통령님께서 뭐라 하셨습니까?”
그런 강오중 앞에 있던 황병식이 마른침을 삼켰다. 해외비자금을 전부 그룹에 끌어들여 정부 주도의 빅딜에서 고지를 점하겠다는 강오중의 계획을 짠 최고 책임자가 아닌가?
그 옆에 있던 대주그룹 기획본부장인 유성학은 두 사람이 무슨 일을 꾸몄는지도 모르고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다.
“금융감독위 이재헌이한테 말해서 회사채, CP 발행 제한 풀어주고 물산에서는 건설, 상사만 분리하고 남는 부실은 정부에서 떠안기로 했다. 조만간 추진될 빅딜에서는 태현그룹에 철도차량 던지는 대신에 GK그룹에서 금속, 통신 가져올 거고.”
황병식은 벌어지려는 입을 애써 다물었다. 자금줄이 풀린 건 말할 것도 없고 부실도 털어내는데다 쭉정이 던져주고 알짜배기를 가져오는 빅딜이 아닌가?
그와 반대로 강오중의 표정은 불만이 가득해보였다.
“지금껏 내가 밀어준 게 이거밖에 안 되다니···.”
대주그룹은 지금의 대통령과 여당이 야당이었던 시절부터 다른 그룹들보다 더 많은 정치자금을 밀어줬었다. 다시 말해 당시 여당이었던 현 야당의 눈총을 무릅쓰고 돈을 밀어줬었기에 강오중의 입에서 불만이 나온 것이었다.
“그래도 회사채와 CP를 발행해서 자금만 조달하고 내실을 다지면···.”
자신의 주군을 위로한다고 유성학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강오중이 지른 소리에 입을 닫아야 했다.
“약한 소리 하지 마, 유 본! 돈을 구하면 우리가 판을 끌고 나갈 수 있어! 그런데도 회사를 내놓는 게 말이 되는가? 유상증자까지 했는데?”
수십 년에 걸쳐 알토란처럼 모아온 해외비자금 40억 달러 전부를 써서 회수가 가능한 장기 채권도 아니고 시세변동에 민감한 주식으로 묶이는 유상증자를 선택한 강오중.
겉으로나마 자신의 지배권을 포기하는 모양새를 보이며 대중들의 지지를 얻고자 선택한 승부수였기에 강오중은 정부에서 준 반대급부가 보잘 것 없음에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유성학이 얼른 고개를 숙인 사이, 황병식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유 본이 대한신용유통을 활용해서 대주전자의 유동성을 높일 방법을 짜왔습니다.”
“사실인가?”
강오중의 반짝거리는 눈을 보며 황병식이 대답을 이어갔다.
“예, 회장님. 대주전자 국내영업망을 분리하고 대한신용유통에 합병시킨 뒤, 대주전자가 매각대금 대신 받을 대한신용유통 지분을 시중에 매각하는 안을 제안했습니다.”
종합가전유통회사인 대한신용유통은 강오중과 대주그룹 핵심 임원들이 차명으로 돈을 대서 세운 위장계열사다. 따라서 겉보기엔 계열사가 아닌 터라 대주전자가 쥐게 될 대한신용유통의 주식을 팔면 부채를 줄이는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순식간에 그 모든 걸 계산한 강오중이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고 유성학을 쳐다봤다.
“그렇게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 왜 그리 소심한 게야?”
“···죄송합니다, 회장님.”
잠시 머뭇거리던 유성학이 고개를 숙였고, 황병식은 강오중의 풀어진 얼굴을 보며 말을 계속했다.
“우리도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는 모양새는 만들어야 하니 유 본의 안대로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좋아, 좋아. 그거 외에 회사채, CP 발행도 잘 만져봐. 유동자금 없으면 전부 헛수고 되니까. 가봐.”
강오중은 흡족한 표정으로 황병식과 유성학을 보낸 뒤,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언제나 똑같군. 저 밑은.”
나지막이 뇌까리던 강오중이 자신의 발밑에 보이는 백범공원을 내려다봤다.
그의 눈에는 저 밑에서 점처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젊었을 적에는 저 수많은 점들 중 한 명이었던 강오중이 이를 악물었다.
“다시는 저 점으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이 자리를 지키며 저 점들을 내려다볼 겁니다, 회장님.”
강오중의 입에서 나온 ‘회장님’이 누구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