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49th. 결혼도 일인 사람들 (1)
껄껄 웃던 헨리가 호쾌하게 코냑 글라스를 비우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자네, 나한테 들려줄 소식은 없는가?”
“무슨 소식 말씀이십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눈을 깜빡거리던 나를 보고 헨리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정말로 전해줄 소식이 없는 겐가? 자네, 조만간 식 올린다고 클레어한테 들었는데 안 알려줄 생각이었나?”
“아···.”
낮게 탄식한 나는 얼른 헨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헨리.”
“아닐세. 나도 오늘 일이 아니었다면 자네 결혼식에 못 갈 뻔했으니 말이야, 허허.”
다행히 헨리도 진심으로 서운해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우리 둘의 진짜 관계는 적어도 한국 사람들이 몰랐어야 할 일이 아닌가?
다행히도 김 대통령과 헨리의 환담 덕분에 우리 둘이 공식석상에서도 거리낌 없이 만날 수 있게 됐으니 횡재수가 따로 없었다.
“일주일 뒤에 고려호텔 강남점에서 올릴 계획입니다. 미처 챙겨드리지 못한 점 양해해주십시오, 하하.”
바쁘게 일하는 와중에도 나와 장하연은 결혼식 또한 부지런히 준비해왔다. 선해철과 클레어의 결혼식을 레퍼런스 삼아 신체 치수를 재고 원하는 패턴까지 골라서 톰 포드에게 보내주고 예복까지 맞추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해뒀다.
“호오, 그래? 그럼 우리가 함께 은행을 인수했다가 되파는 게 자네 결혼선물이 되겠군, 허허.”
생각해보니 헨리의 말이 맞았다. 은행 인수 후 재매각으로 얻을 차익이 어마어마하니 나와 장하연에게 주어질 초특급 결혼선물이었다.
“그렇군요, 하하.”
“그리고··· 내일은 마르코를 뵙도록 하겠네.”
“할아버지를요?”
“봄이 되면 그 보성이란 곳에 가보고 싶으니 지금부터 미리미리 공식적인 연을 쌓아둬야 하지 않겠나? 하하. 이럴 게 아니라 마르코께 전화부터 걸어야겠군.”
껄껄 웃으며 수화기를 든 헨리를 보니 말이 안 나왔다. 몇 년 전 이야기인데 환갑을 넘긴 양반의 기억력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
다음 날 아침.
밥상머리에 앉은 장호건이 국 한 술을 뜨고 수저를 내려놨다.
“너희도 어제 봐서 알겠지만 이 서방이 그 헨리 로이스의 통역을 했다. 너희들 생각은 어떤지 듣고 싶구나.”
장호건이 던진 숙제에 장용재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배경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이 서방이야 스탠더드 캐피털을 통해 미국 경제의 흐름을 알아차렸을 게 아닙니까? 당연히 트라이엄프 캐피털의 투자 흐름도 어느 정도는 알고 적당히 대답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나도 스탠더드 캐피털 정도의 배경이 있으면 충분히 대답할 수 있었다.’라는 장용재의 대답에 장호건의 표정이 굳었다.
“민재, 수연이, 박 서방도 그렇게 생각하나?”
“···.”
세 사람 모두 꿀 먹은 벙어리였다. 재벌가 사람, 그것도 해동그룹의 차기 후계자 중 한 사람이 미국의 거대투자회사 오너의 통역을 맡은 데서 무슨 의미를 찾으란 말인가?
“이 서방 이야기가 나왔다고 이 서방한테만 초점을 맞춘 게냐? 신성을 이끌어갈 사람들이 이리도 시야가 좁아서야···.”
장호건이 식탁에 앉은 이들을 둘러보고는 진하게 혀를 찼다. 장용재는 식탁 밑에서 주먹을 꽉 쥐었지만 얼굴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알려주십시오.”
“통역만 시킬 요량이었으면 대통령이 이 서방을 부르지도 않았을 게다. 왜 이 서방이 그 자리에 불려갔을까?”
장호건이 풀어서 던져준 질문에 장용재의 눈이 커졌다.
“대통령이 두 사람을 엮어주려고 불렀을 거란 말씀입니까?”
장용재가 내놓은 답에 장호건의 굳은 표정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 해동그룹 현금이 많아도 일시적인 환차익에 불과합니다. 사업 자체의 수익성은 우리가 더 앞서잖습니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장용재는 자신의 추측이 답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돈놀이로 횡재했을 뿐인 해동그룹이 뭐가 대단하다고 대통령이 자신의 지인과 이성민을 엮으려 한단 말인가?
“해동이 지난 한 해 동안 진출한 사업 분야만 5개가 훨씬 넘는다. 자동차, 제철, 석유화학 빼면 고만고만하겠지만 해동의 자금력과 뭉치면 무시 못 할 사업들이란 말이다!”
한숨으로 시작해서 호통으로 마무리지은 장호건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해동그룹이 그 사업들을 계속 키우려면 지금 쥔 돈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할 거다. 그런 해동에게 트라이엄프가 붙으면 외자유치가 늘어날 거라는 건 왜 모르는 거냐?”
질책에 가까운 장호건의 질문에 장용재, 장민재, 장수연, 박남준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제의 환담 속에 해동그룹과 트라이엄프 캐피털을 엮어 국내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대통령의 구상이 숨겨져 있었다니! 왜 알아채지 못했단 말인가?
“배움이 부족해서 깨우치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스탠더드 캐피털에 지분 내주고 달러 채운 데 안주했다면 더 큰 문제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자식들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이를 악물었다. 얼마나 더 해야 아버지의 마음에 든단 말인가!
“잔소리는 여기까지만 하마. 다들 밥 먹어.”
알아들을 만큼 알아들었다 여긴 장호건이 수저를 들었다. 언제나처럼 이 집안의 밥상은 시베리아처럼 냉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장호건이 안방으로 들어가자 황나연이 장호건을 째려봤다.
“당신은 아침부터 그런 얘기를 해야겠어요?”
“뭘?”
“어제 일이요. 피도 안 섞인 애들 이야기로 우리 애들 그렇게 들볶고 싶어요?”
장호건은 자신을 날선 눈으로 노려보는 황나연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당신, 몇 년 전에 처남들이 평택 땅 가지고 장난치려고 했던 거, 알아, 몰라?”
“여, 여보?”
황나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남편과 이수한이 평택 땅 투기 건으로 자신과 친정에서 심어둔 사람들을 모조리 정리했지만 남편도, 자신도, 처가도 내색하지 않고 암묵적으로 넘어간 일 아닌가?
“그거부터 족보 한 번 거슬러 올라가 볼까? 내가 내 사람들한테 챙겨줘야 할 거 처남들이 가로챈 거?”
장호건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황나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남편의 말 한마디면 친정인 조국일보의 매출이 폭락하는 건 시간문제다. 최악의 경우에는 아이들이 신성그룹을 물려받는 것도 엎어질 수 있었다.
“며칠 뒤에 두 애들 결혼식 때도 이런 식으로 어깃장 놓으면 가만있지 않겠어. 처신 똑바로 해.”
장호건은 마지막 경고를 끝으로 코트를 걸친 뒤, 가방을 챙겨서 방을 나갔다. 황나연은 망부석마냥 그 자리에 선 채 장호건이 닫고 나간 문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
아침 일찍 나와 헨리는 조용히 삼청동으로 들어가서 할아버지와 함께 차를 마셨다.
“참으로 운치 있는 저택이군요, 마르코. 미국의 제 집과 달리 자연과 어우러져서 운치가 좋습니다, 하하.”
“선친께서 터를 잡고 꾸준히 넓히다보니 이렇게 넓어졌소이다, 허허.”
한국 땅에서 만난 탓인지 할아버지와 헨리는 새로운 감회를 숨기지 않으며 오전의 티타임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었다. 나 또한 차 한 모금을 마시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꼭 내 새끼라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이놈처럼 영악한 놈도 없을 거요. 대통령 앞에서 우리도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알면 세습하게 해달라고 할 줄은 몰랐소이다.”
“저도 조니의 대담함에 놀랐습니다. 일국의 대통령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다니··· 마르코의 장손 아니랄까봐 대단하더군요, 하하.”
관록은 못 속인다고 할아버지와 헨리는 어제의 환담 자리에서 내가 대통령에게 한 말의 취지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벤처기업들만 경영권을 보장해주면 뒷말이 나올 얘기가 아닌가?
“아닙니다, 할아버지. 대통령님께서 부당하지 않게 경영권이 바뀌는 경우를 물었을 때는 놀란 체하지 않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가장 허접한 법인카드만 얘기하고 입을 꾹 다물지 않았더냐? 다른 그룹들을 적으로 돌리지도 않고 국민들에겐 재벌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으니 어느 줄타기꾼도 너보단 못할 게야, 흐흐.”
너스레를 떨던 나를 보며 할아버지가 낄낄 웃었고 헨리도 껄껄 웃으며 내게 말했다.
“조니만큼 악독한 사업가도 없을 겁니다. 조니는 개인재산이 튼실해서 그런 궁상을 떨 일이 없지만 다른 그룹 오너들은 다르잖습니까? 하하.”
헨리의 말대로 나뿐만 아니라 우리 집안사람들은 주식 외의 개인재산도 넉넉한데다 상속 작업을 3분의 2 이상 아무 말도 안 나오게 마무리했다. 상속세 때문에 한 푼이라도 아끼겠다고 다른 재벌들처럼 궁상을 떨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동감이오. 이놈만큼 지독한 놈도 없을 것이외다, 허허.”
서로를 보며 껄껄 웃던 할아버지와 헨리는 차 한 모금을 마시며 대화를 계속했다.
“여하튼, 프레지던트 킴 덕분에 저와 조니가 만나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마르코?”
“우연이라기엔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지요. 운신의 폭이 넓어졌으니 다행스러울 따름입니다, 허허.”
껄껄 웃으며 차를 마시던 할아버지에게 헨리가 말했다.
“마르코도 아시겠지만 어제의 환담 때 제가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우리 트라이엄프는 대한민국에서 해동그룹을 한국 시장 투자처 1순위로 꼽고 있습니다.”
“그리 생각해주니 고맙소. 앞으로 우리 측에서 채권을 발행한다면 트라이엄프에게 가장 먼저 귀띔해드리겠소.”
할아버지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던 헨리가 차 한 모금을 축이고 잔을 내려놨다.
“감사합니다, 마르코. 그래도 이번 환담으로 저와 조니 사이의 왕래가 수월해졌으니 조니의 결혼식까지 보고 가려고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헨리의 정중한 부탁에 할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오. 저놈이 좋은 자리를 내드릴 테니 자리를 빛내주시면 감사하겠소, 허허.”
헨리 같은 거물이 내 결혼식에 참석해준다면 대한민국에서 해동그룹을 가벼이 여길 놈들은 절대 없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유쾌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
며칠 뒤.
춘삼월이 되면서 고려호텔 강남점 그랜드볼룸은 한껏 차려입은 남녀들로 북적거렸다.
“축하드려요, 이사님.”
“축하드립니다, 이사님.”
하객으로 오신 재계 어른들께 인사를 올린 뒤, 신랑 대기실에 있던 나는 유현정과 박태진의 축하인사에 머쓱한 미소를 띠었다.
“고맙습니다, 하하. 두 분 식 준비는 잘 되고 있죠?”
“예. 혼수도 장만했고 예단도 주고받았습니다. 결혼식장도 잡아둬서 날짜 맞춰서 식만 올리면 됩니다, 하하.”
유현정에게 팔짱이 걸린 박태진을 보니 미소만 절로 그려졌다.
혼인신고를 했을 때도 가슴이 울렁거렸는데 결혼식을 치르게 되니까 색다르게 울렁거리는 기분이 온 몸을 휘감고 있었다.
혼인신고가 나와 장하연이 부부라는 것을 법적으로 못 박은 일이었다면 결혼식은 다른 이들 앞에서 우리가 부부라는 것을 밝히는 일이라 느낌이 다른 것 같았다.
묘한 기분을 안고 있을 때 선해철과 클레어도 대기실에 들어왔다.
“삼촌? 클레어?”
“이야, 우리 조카님 얼굴이 훤하네? 안 그래?”
“그러게 말이에요, 썬. 그래도 당신보다는 쪼끔 부족하지만 잘 생겼네요, 호호.”
나는 손으로 입술을 가리며 웃는 클레어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하드립니다, 보스.”
“뭐가?”
“아이, 가지셨다면서요? 후후.”
눈을 깜빡거리던 클레어가 살풋 웃었다.
“고마워, 조니. 나, 쌍둥이 임신한 거 있지?”
“정말요? 한 방에 해결하셨네요, 하하.”
껄껄 웃는 나뿐만 아니라 박태진도 클레어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미스 로렌스. 임신, 축하드립니다, 하하.”
“고마워요, 태진 씨. 그런데··· 옆에 있는 분은 누구신가요?”
클레어의 질문에 박태진이 미소를 띠었다.
“저와 결혼할 사람입니다, 하하. 청첩장으로 알려드리려고 했는데 이 자리에서 알려드리게 됐군요, 하하.”
“축하드려요, 태진 씨. 만나서 반가워요, 클레어 로렌스예요.”
박태진에게 축하의 말을 건넨 클레어가 자신을 소개하며 손을 내밀자 유현정은 엉겁결에 두 손으로 클레어의 손을 잡았다.
“유현정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해철과 클레어가 누군지 몰라서인지 유현정은 두 사람을 낯설어하는 것 같았다. 선해철은 그런 유현정을 보며 빙긋 웃고는 입을 열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제수씨. 선해철이라고 합니다. 태진이와는 형동생 하는 사이죠, 하하.”
“아··· 한랴··· 아니, 쾌남이라고 오빠한테 많이 들었습니다, 아주버님.”
탄성을 흘리며 말하던 유현정이 단어를 급히 정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선해철은 박태진을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봤지만 박태진은 눈썹을 들썩이며 씩 웃을 뿐이었다.
잠시 장난스런 눈싸움을 하던 선해철이 헛기침을 했다.
“자자, 신랑은 마음 편히 기다리게 풀어주고 우리는 우리끼리 가서 얘기합시다, 하하. 이따 보자, 조카야. 다시 한 번 결혼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삼촌.”
어수선하지만 유쾌한 하객맞이가 이제야 끝났다. 남은 건 식장에서 실수하지 않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