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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171화 (170/229)

171. 48th. 영역 확대 (5)

“첫 번째도 인터넷, 두 번째도 인터넷, 세 번째도 인터넷입니다.”

처음부터 결론을 풀어놓고 시작하자 대통령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눈이 반짝거렸다.

“이유가 뭔가?”

“엘빈 토플러 씨가 쓴 <제3의 물결>에 따르면 인류는 이제야 비로소 지식정보시대를 향한 경주를 시작했을 뿐입니다.”

<제3의 물결>은 김 대통령의 애독서 중 하나였다. 그 책을 근거로 발언을 이어갔다.

“그 지식정보시대를 이끄는 중심에 인터넷이 있습니다. 인터넷은 누구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국경이 없는 또 다른 지구이기 때문입니다.”

“흐음···.”

대통령의 입술 틈새와 코에서 흘러나오는 침음성이 가벼웠다. 반응이 나쁘지 않은 것을 확인한 나는 계속해서 발언을 이어나갔다.

“일례로 저희 스탠더드 캐피털에서 투자한 야후는 미국 시장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 시장에서도 홈페이지를 통한 광고로만 연간 수십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사실인가?”

“예. 야후의 예처럼 인터넷 산업은 공장에서 상품을 생산, 수출하거나 해외에 지사를 내어 무역, 금융 등의 서비스로 외화를 벌어오던 것과 달리 누구든 독창적인 창의성과 지식만 있다면 국경을 넘어 성공할 수 있는 산업입니다.”

“호오··· 그렇겠군.”

탄성을 흘리는 대통령의 밝아진 표정을 보니 내가 아는 그 김 대통령답다 싶었다. 어떻게든 재벌 대기업에 경제력이 집중되는 구조를 타파하면서도 고부가가치의 일자리를 만들고 싶을 테니 구미가 당기겠지.

“그럼 그 인터넷 산업을 활성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

“국가 차원의 대규모 광통신망을 설치하고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누구나 컴퓨터와 인터넷을 쓸 수 있도록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하나입니다.”

“하나라고 말한 걸 보니 다른 게 또 있나보군?”

“예, 대통령님. 둘은 인터넷 종량제를 불허하는 등 망 중립성을 정부에서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은 인터넷을 토대로 성장할 벤처기업들의 도덕적 해이를 막으면서도 창업자들의 경영권이 부당하게 침해되는 것 또한 막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황금주나 포이즌 필, 차등의결권이 필요할 것이며···.”

이어지는 내 대답에 김 대통령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나는 그 표정을 보며 속으로 미소를 띠었다.

‘많이 애매하실 겁니다, 흐흐.’

내 대답에는 묘한 함정이 숨겨져 있다.

망 중립성 보장을 외친 것은 기존의 통신사업을 하고 있는 재벌들이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폭리를 취하려는 수작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벤처기업 창업자들의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것은 재벌들에게도 이로운 일이다. 유치하게 보이겠지만 ‘쟤들은 되는데 우리는 왜 안 되냐?’라는 이야기가 재계에서 안 나오겠는가? 전경련을 중심으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날 터.

김 대통령에게서 또다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음색이 많이 낮은 게 즉답이 어려운 일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침음성을 끊은 대통령이 내게 물었다.

“그럼 이 군이 생각할 때 부당하지 않게 경영권이 바뀌는 건 뭐라 생각하는가?”

역시 쉬운 양반이 아니었다. 혼자 떠안기엔 부담스러운 일이니 내게도 짐을 떠넘기고 싶은 모양인 것 같아서 즉시 입을 열었다.

“사사로이 회사의 재산을 유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법인카드를 이용해서 개인의 여흥을 위한 쇼핑을 하거나 음주가무를 즐기는 행위는 가장 먼저 근절되어야 합니다.”

작업복 생산이나 건설 자재 조달 등 온갖 내부 일감으로 돈 빼먹는 짓을 건드리면 우리 집안과 해동그룹은 재계에서 왕따가 된다. 그래서 나는 가장 가벼운 축에 들어가는 법인카드 남용만 대답했다.

“흠··· 그런 일은 명백한 배임이니 처벌해야겠군.”

대통령이 나를 보는 눈빛에서 아쉽다는 감정이 느껴졌지만 어쩌겠나? 내부 일감으로 만들어진 돈이 정치권으로도 흘러들어 가는데.

‘이쯤에서 하시죠, 대통령님.’

자신을 바라보는 내 눈빛에서 타협하자는 메시지를 읽어냈는지 대통령이 가볍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도 이 군이 몇 년 전에 백화점 컨설팅을 할 때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해동그룹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려, 허허.”

“물론입니다, 대통령님.”

해동그룹의 대리점들은 은퇴한 임직원들이 먹고 살 방책을 마련해주고자 온전히 내준 것이고 미국 스탠더드와 트라이엄프, 명동 사채조직에서 나오는 돈만으로도 이 나라에서 권력을 파는 놈들과 거래하기에는 차고 넘친다.

거리낌없는 대답을 내놓은 나와의 미묘한 기 싸움을 마친 대통령은 겸연쩍은 미소를 띠며 헨리에게 말했다.

“얘기가 길어져서 미안합니다, 헨리.”

“아닙니다, 대통령님. 저희가 눈여겨보는 해동그룹의 후계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어서 좋은 대화였습니다, 하하.”

껄껄 웃는 헨리를 보며 대통령이 표정을 풀었다.

“그럼 이제 헨리의 의견을 구하고 싶습니다. 헨리는 우리 대한민국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기대를 가득 품은 대통령의 눈을 보며 헨리가 말했다.

“저 또한 미스터 리의 의견과 같습니다. 앞으로의 경제는 인터넷을 비롯한 IT산업이 좌우할 것입니다.”

헨리가 망설임 없이 내놓은 대답에 대통령과 청와대 직원들의 눈이 커졌다. 한국 재벌의 후계자에 불과한 나와 의견이 같다고 했으니 얼마나 놀랍겠나?

“못 믿으실 수도 있겠지만 우리 트라이엄프 캐피털 또한 IT산업에 대한 기대가 커서 전담 투자부서를 만들고 100억 달러가 넘는 자금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100억 달러가 넘는다는 말에 또 한 번 사람들이 놀랐다.

대한민국의 국채를 인수하는 데 쓴 돈보다 IT산업에 투자한 돈이 더 많다는 것은 한국의 미래보다 IT산업의 미래에 대한 기대가 더 크다는 게 아닌가?

“한국의 IT산업이 투자할 가치가 충분하다면 우리 트라이엄프 캐피털은 대한민국 국채에 투자한 액수만큼의 자금을 기꺼이 한국 시장에 투자할 것을 약속드리는 바입니다.”

헨리가 내 말에 힘을 더 실어준 만큼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은 쉽게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한 말과 나 둘 다 말이다.

***

환담을 마친 뒤, 김 대통령은 나를 먼저 보내고 몇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헨리를 전송해줬다. 사무실에서 일을 하던 나는 전화벨 소리를 듣고 핸드폰을 꺼냈다.

[날세, 조니. 지금 막 고려호텔에 돌아왔네.]

“고생하셨습니다, 헨리.”

[지금 자네와 썬, 그리고 미스터 박을 봤으면 하는데··· 괜찮겠나?]

먼 곳에서 온 귀한 친구가 보자는데 거절하면 미친놈이다. 나는 숨도 안 쉬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헨리. 지금 가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 곧 있으면 저녁이니 식사라도 하면서 얘기하도록 하지. 얘기가 꽤 길어질 테니 말이야.]

“모처럼 만에 함께 식사를 하겠군요. 이따 뵙겠습니다, 하하.”

통화를 마친 내게 선해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헨리가 보자고 했어?”

“네. 같이 밥 먹으면서 얘기할 게 있는 것 같아요. 지금 바로 퇴근하죠, 삼촌. 형도 같이 가요.”

“저도 말씀입니까?”

“네. 형까지 오라고 한 걸 보니까 우리 그룹과도 연관된 일 같네요.”

대답을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고, 선해철과 박태진도 짐을 챙겨서 고려호텔로 향했다. 무슨 일이지?

***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창호와 장하연의 마중을 받았다.

“어서 오게, 이 이사.”

“어서와, 여보.”

“미스터 로이스가 보내신 겁니까?”

내 질문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그 양반이 자네하고 저녁식사 할 거라고 룸서비스까지 주문해뒀으니 얼른 올라가보게.”

“평소처럼만 해, 여보.”

나를 응원해주는 장하연이 귀엽기만 했다. 평소처럼만 해도 헨리는 날 반겨줄 사람이 아닌가?

“알았어, 여보. 잘하고 올게.”

진실을 깊이 감추고 대답한 나는 선해철, 박태진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고려호텔에 남아있을지 모를 신성그룹 끄나풀들을 생각하면 엘리베이터에 도청기가 설치되어 있을지도 모를 터. 우리 모두 헨리가 머무는 방에 들어갈 때까지 입을 꾹 닫았다.

헨리의 방 앞에 멈춰선 우리는 노크를 했다.

[누굽니까?]

“미스터 리입니다, 미스터 로이스.”

대답이 들린 지 얼마 안 되어 문이 열렸고, 방에 들어가고서야 우리는 편안하게 해후를 풀 수 있었다.

“새해 복 많이 받게, 조니!”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헨리!”

오랜만에 만난 삼촌과 조카처럼 포옹과 비쥬를 나눈 우리는 서로를 보며 껄껄 웃었다.

“자네 연기에 감탄이 몇 번이나 나왔는지 모를 걸세. 대단하더군, 하하!”

“저도 헨리가 할리우드에 진출했으면 어떠셨을까 싶었습니다, 하하!”

대통령 앞에서의 환담은 우리 둘 다 짜고 친 연기였다. 헨리는 나의 입지를 다져주고, 나는 헨리의 위상을 대통령에게 보여주기 위해 연극을 펼친 것이었다.

“대통령이나 보좌진들 얼굴을 보니 연극은 성공한 것 같더군, 후후.”

“오늘 일이 있으니 청와대에서도 저와 저희 집안, 그리고 트라이엄프 캐피털을 쉽게 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하.”

연극이 성공했음을 확신한 뒤, 헨리가 선해철에게 다가갔다.

“고생 많이 하는군, 썬.”

“아닙니다, 헨리. 클레어는 잘 있습니까?”

“문제가 하나 생겼네.”

헨리의 굳은 표정에 선해철의 눈빛이 흔들렸다.

“안 좋은 일입니까?”

“좋다고 해야 할지, 안 좋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한국에 오기 며칠 전에 헛구역질을 했다더군. 한국어로는 입덧이라고 한다던데···.”

무거운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온 헨리의 대답에 얼굴이 어두워졌던 선해철이 눈을 껌뻑거렸다.

“입덧이요?”

“그래, 이 사람아. 산부인과에 가서 확인했는데 벌써 임신 12주째라더군, 허허.”

어느 새 표정이 밝아진 헨리가 껄껄 웃었고, 선해철의 입이 땅에 닿을 만큼 벌어졌다.

“축하합니다, 형님!”

“축하해요, 삼촌!”

박태진과 나는 선해철을 얼싸안고 빙글빙글 돌며 그를 축하해줬다. 우리들 중 가장 먼저 아버지가 되지 않았나?

“어, 어···.”

우리에게 붙들린 채 빙글빙글 돌던 선해철이 멍한 표정으로 대답만 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게 저런 심정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출장을 올 때 로마네 콩티를 가져왔네. 우리 사위가 아버지가 됐으니 맘껏 들어보세, 하하!”

호탕하게 앉은 헨리가 객실 안쪽으로 손을 뻗었고 식탁 앞에 앉은 우리는 얼마 뒤, 직원들이 가져온 스테이크와 샐러드 등을 먹으며 선해철 부부의 임신을 축하했다.

***

식사를 마친 우리는 소파로 옮겨가서 식후주로 코냑을 마셨다.

“조니 발음이 아주 유창하더군. 해적 놈들 왕족이나 귀족들도 자네 앞에서는 한 수 접어줘야 할 정도였어, 허허.”

“아닙니다, 헨리. 전문 통역사 분들에 비하면 부족한 실력이었는데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기분 좋게 코냑을 한 모금 들이킨 헨리가 가볍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조니를 보내고 나서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 지하벙커로 들어갔네. 통역도, 수행원도 한 명 없이 말이야.”

청와대 지하벙커라는 단어에 우리 셋 다 눈이 번쩍 뜨였다. 미국 CIA조차도 도감청이 불가능한 곳에 갔다니?

“크리티컬한 이야기를 하셨겠군요.”

“맞네. 우리처럼 돈 다루는 사람들에겐 그 나라 주권이 달린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지.”

돈 다루는 사람들이 국가 주권이 달린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면 딱 하나뿐이었다.

“시중은행 관련 일입니까?”

내가 내놓은 답에 잠시 흠칫했던 헨리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네. 조만간 공적자금을 투입해서 정상화시킬 한국의 시중은행 몇 곳을 트라이엄프 캐피털에서 사모펀드 몇 개를 만들어 인수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네.”

시중에 돈을 공급하는 시중은행은 국가경제를 사람으로 치면 골수와 같은 기관이다. 선해철과 박태진의 입이 벌어질만한 일이었지만 외국자본의 은행 인수를 봤던 내겐 크게 놀라온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 양반이 절대 순순히 은행을 넘겨주지는 않을 텐데···.’

내가 아는 김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과 달리 경제에 빠삭했다. 청와대 비밀벙커까지 통역 한 명 없이 들어가서 은행 인수를 부탁했다면 둘만 알아야 하는 이면거래가 오갔다는 뜻일 터.

“향후 계획에 대한 말씀이 있었습니까?”

“우리 손을 빌려서 은행 통폐합 작업을 마친 뒤에 한국이 IMF 관리체제를 벗어나면 정부에서 인수대금의 두 배를 지불하고 우리가 인수할 은행 지분의 90퍼센트를 가져오고 싶다고 했네. 은행 지분을 거둬들이면 재상장을 추진해서 10퍼센트는 국민연금, 10퍼센트는 재정경제부에 넘길 거라고 했고. 나머지 70퍼센트는 국민주로 뿌릴 거라는데 국민주 절반은 20년간 보호예수를 걸어둘 거라더군.”

‘역시 김 대통령이야.’

김 대통령의 식견은 알고 있었지만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은행 통폐합을 통한 시중은행의 대형화는 메가뱅크(Mega Bank, 대규모의 자산과 자본을 갖춘 대형 은행)가 늘어나고 있는 글로벌 금융시장 트렌드에 부합하는 일이다.

그렇게 통합될 시중은행들의 주식 70퍼센트를 국민주로 뿌리면 IMF 관리체제 하에서 고통을 분담해야 할 국민들도 조금이나마 보상을 받을 수 있고

그 국민주의 절반을 20년간 못 팔게 하면 빈익빈부익부도 막을 수 있고 외국자본의 시중은행 주식 과반 점유도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금융주권을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진 치밀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헨리의 수락 여부에 따라 성사 여부도 결정되는 일이다. 나는 코냑 한 모금을 축이고 마음을 추스르며 헨리에게 물었다.

“수락하실 겁니까?”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네. 자네는 한국에 미래가 있다고 보는가?”

말해 뭐하리. 나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있습니다. 확실히!”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럼 스탠더드 캐피털과 5대 5로 출자해서 은행 인수를 추진하세.”

‘내 돈까지 태워주겠다고? 5대 5로?’

지금 들은 말을 의심하던 내게 헨리가 말했다.

“그 대신, 클레어와 썬에게 스탠더드가 챙길 매각 차익의 3분의 1씩 넘겨주게. 가을에 태어날 내 외손주들한테 줄 선물로 말이야, 으하하.”

호탕하게 웃는 헨리를 보니 남자답고 아버지답고 할아버지다웠다. 삼청동에 계시는 할아버지를 보는 것 같아서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알겠습니다, 헨리. 당신의 친구로서, 썬의 조카로서 약속드리죠.”

나와 헨리는 코냑을 쥐지 않은 손을 굳게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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