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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168화 (167/229)

168. 48th. 영역 확대 (2)

일주일 뒤.

미룡그룹 저동 사옥에서는 세 남자가 소파에 앉아있었다.

“오늘로 일주일째다. 그 양놈들 거간꾼 노릇이나 하는 놈들이 말한 마지막 날이란 말이다!”

미룡자동차를 대주그룹에 넘기면서 부채 2조 원을 덜어냈지만 미룡그룹에 남은 부채를 해결하려면 3조 이상의 돈이 필요했다.

그런데도 스탠더드 캐피털을 믿어보자는 서준석 때문에 서원석은 답답하기만 했다.

상석에 앉은 서원석이 괄괄한 목소리로 소리쳤지만 서준석은 담담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죠. 이제 겨우 하루가 시작됐습니다. 자정을 넘기기 전까진 시간이 있습니다.”

“작은형님 말이 맞습니다, 형님. 스탠더드 캐피털, 해동그룹과 아도자동차도 제값 치르고 인수한 회사입니다. 최소한의 상도덕은 지키는 것 같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죠.”

서동석까지 나서서 서원석을 말리던 중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통화를 마친 서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겠습니다, 형님. 가자, 동석아.”

작은형의 표정이 밝아진 걸 보고 서동석도 재빨리 일어나 그의 뒤를 쫓아갔다.

***

미룡그룹 회생을 위한 지원방향에 대해 합의를 보고 준비를 마친 우리는 서준석과 서동석을 사무실로 초대해서 인도네시아 만델링 드립커피와 샌드위치로 아침식사를 함께 했다.

“형님을 쫓아내라고요?”

커피를 마시던 서준석, 샌드위치를 입에 넣으려던 서동석이 잔을 내려놓고 진심이냐는 눈길로 우리를 쳐다봤다. 나 또한 입에서 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두 분 부회장님들은 몰라도 서원석 회장님은 회사 재산부터 헐값에 빼돌리고 있을 겁니다.”

내가 아는 서원석은 망해가는 미룡그룹에서 회사 소유의 땅을 비롯한 각종 재산을 차명으로 헐값에 빼돌렸다가 추징금까지 맞았었다.

서준석과 서동석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걸 보니 이번 생에서도 리플레이 되는 것 같았다.

“그에 반해 두 분은 역량도, 회사를 아끼는 마음도 서원석 회장님보다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니 미룡그룹과 서원석 회장님의 절연이 우리 투자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지지리도 못난 서원석과 달리 내 앞에 있는 서준석과 서동석은 개인재산까지 털어가며 회사를 살리려 노력했다. 형보다 잘난 동생들이 있으니 서원석은 미룡그룹의 회생과 재도약에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

“다른 조건들은 뭡니까?”

“미룡중공업과 미룡정공을 해동중공업에 매각하시죠.”

미룡중공업은 독일의 만(MAN)에서 라이선스를 받은 선박엔진 외에 자동차부품을 생산하고 미룡정공은 프레스 기계 시장 1위의 알짜기업이다.

두 회사 모두 부채가 많지만 해동그룹이 인수하면 대출 연장도 쉬워지고 해동중공업, 해동자동차와 시너지를 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사람 좋은 형님도 부채감이 줄어들겠지.’

그 두 회사의 매각을 매각처까지 짚어가며 요구한 건 서준석이 짊어질 마음의 빚을 줄여주기 위한 나만의 위악(僞惡)이었다.

투자하기 전부터 남의 회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꼴이니 얼마나 아니꼽고 더럽겠나? 그럼에도 서준석과 서동석은 무던히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자동차가 떨어져나간 이상 중공업 부문을 유지하긴 어려우니 그렇게 하죠.”

“하나 더. 스탠더드 캐피털에서 등기이사들을 파견해서 미룡그룹의 재정상황을 확인할 겁니다. 수용, 하시겠습니까?”

조금은 어려운 요구였는지 잠시 고민하던 서준석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룹 지배구조의 축이 미룡양회와 미룡정유, 미룡건설이니 3사에 투자하고 이사들을 파견하시면 될 겁니다.”

서준석이 체념한 표정으로 요구에 응했고, 나는 그런 서준석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합니다, 형님.’

지금까지 이들 형제에게 치욕만 상실감만 줬지만 지금부터는 그 감정들을 지워줄 차례였다.

***

지금까지 말한 요구사항들이 이들 형제에게 치욕과 상실감만 줬다면 지금부터 내밀 제안들로 그 감정들을 지울 차례였다.

“또한, 미룡건설의 미분양 아파트 물량 전부를 스탠더드에 넘기시죠.”

건설업에서의 미분양 아파트는 제조업으로 치면 악성재고다. 그 악성재고를 다 떠안아주겠다는 내 첫 번째 제안에 서준석이 적잖이 놀랐다.

“이 이사님?”

“놀라실 거 없습니다. 미분양 물량이 미룡건설의 실적 악화 주범 아닙니까? 우리 측에 넘겨주시면 숨통이 트일 겁니다.”

“미분양 물량이 현재 시세로만 총 4천억이 넘습니다. 지금 같은 불경기에 그걸 전부 떠안으시겠다니···.”

서준석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을 흐렸지만 그 말끝을 선해철이 이어받았다.

“부동산은 언젠가 오를 투자자산이죠. 당분간은 임대로 돌리고 경기가 회복되고 나서 매각하면 수익은 충분히 낼 수 있습니다, 하하.”

강남 아파트조차 시장에서 안 팔릴 만큼 부동산 불황이 한창인 요즘이다. 지금 그 물량을 전부 떠안아주겠다니 믿을 수가 없겠지.

입을 떡 벌린 서준석과 서동석을 보며 웃던 선해철이 웃음을 거두며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그 정도 자금을 동원하는 건 스탠더드에게 커피 한 모금 축이는 것만큼 쉬운 일입니다. 나머지 투자계획은 이 이사가 계속 알려줄 겁니다. 이 이사.”

“네, 대표님. 스탠더드에서 유상증자 총 1조 원, 10년 만기 후순위채 총 2조 원을 제공하겠습니다. 후순위채 금리는 미국 연준 금리에 1퍼센트를 더 얹어서 변동될 겁니다.”

유상증자든 후순위채든 자본을 채워주는 투자이고 현재의 미국 연준 금리에 1퍼센트를 덧붙여도 국내 금리보다 비교할 수 없이 저렴하다.

다시 말해 우리 투자가 들어가면 미룡그룹 부채비율은 IMF가 권고한 200퍼센트 밑으로 떨어진다. 남은 건 서준석과 서동석이 그룹 임직원들과 허리띠를 졸라매가며 전력으로 그룹을 재건하는 것뿐이었다.

‘자본도 채워주고 이자도 싸다. 이 정도면 형님도 충분히 다시 일어설 거야.’

두 형제가 미룡그룹을 일으켜 세울 거라 믿으며 커피를 마시던 내게 서준석이 물었다.

“왜 이런 투자를 해주시는 겁니까?”

“무슨 말씀이시죠?”

“지금 제안한 투자 전부 돈을 안 벌겠다는 겁니다. 투자회사가 돈을 안 버는 일을 하다니···.”

“서동석 부회장 말이 맞습니다. 당신들은 월가에서 잘 나가는 투자회사 아닙니까?”

서동석에 이어 서준석까지 던진 질문에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가?

‘내 걱정하지 마세요, 형님. 우린 지금도 돈에 깔려죽을 지경이니까.’

총액 3조 4천억 원이라고 해봐야 달러로는 그 3분의 2 남짓이다. 미국 증시에서 계속 커지고 있는 IT 주식을 처분하거나 대출을 받으면 금방 가져올 수 있는 돈이고 우리는 분명히 수익을 충분히 낼 수 있다. 무엇보다···.

‘내 주변 사람들이 당당하게 사는 걸 보고 싶습니다, 형님. 당신, 좋은 사람이잖아요.’

애당초 싹수가 노란 놈들이면 손도 안 내밀었다.

내게 리더의 솔선수범을 가르쳐준 또 다른 경영스승이자 서로의 애환을 나누던 서준석이다.

그의 동생인 서동석 또한 월가에서 실력을 쌓은 만큼 이대로 녹 슬기엔 아까운 사람이기에 돕는 것이었다.

“수익이야 충분히 납니다. 환율이 낮아질수록 미국 달러 기준으로는 차익을 얻고 경기가 회복되면 주가도 오를 테니까요. 그리고.”

잠시 말을 끊은 나는 두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려줬다.

“열 명의 아군을 만드는 것보다 한 명의 적을 안 만드는 게 낫죠. 그게 한국 투자 시장에서 우리 스탠더드 캐피털이 세운 대전략입니다.”

수익을 위해서라면 부모형제도 팔아먹을 월가의 투자회사들과 다른 접근법 때문일까, 월가 물을 먹었던 서동석과 달리 국내파인 서준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해동그룹 때문입니까?”

“그런 셈이죠. 우리가 대한민국 재계와 척을 지면 해동자동차의 공동경영권자인 해동그룹에 부정적인 영향이 미칠 테고, 그 부정적인 영향이 해동자동차에 미칠 테니까요.”

내 대답을 듣고 서준석이 질문을 계속했다.

“그럼, 우리가 스탠더드에 투자를 요청한 걸 삼청동 이 회장님도 알고 계시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이 회장님 자문을 구했는데 좋은 친구는 많을수록 좋다는 말로 답을 대신해주셨습니다.”

선해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건넨 대답에 서준석이 머뭇거리던 입을 열었다.

“···이 회장님께 고맙다는 말씀 전해주십시오. 아니, 제가 직접 삼청동에 가서 인사를 올려야겠군요.”

“그 편이 좋으실 겁니다. 앞으로 좋은 관계를 맺길 바라겠습니다, 하하.”

선해철이 껄껄 웃었고, 서준석과 서동석 또한 밝은 미소로 우리에게 화답했다.

***

그룹 임원 회의를 통해 수락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서준석과 서동석을 돌려보낸 뒤.

[우리 장손, 이 할애비 이름은 잘 팔아먹었느냐? 으허허.]

“예, 할아버지. 조만간 삼청동으로 찾아가서 인사 올리겠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자신 있게 팔아먹었다는 손자도 나뿐이고 당신 이름을 팔아도 즐거워하는 할아버지는 우리 할아버지뿐일 거다.

힘 있게 대답한 내게 할아버지의 푸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곤이 형님이 자식 농사를 망치고 간 건 아니구나. 중정 끌려가서 콧수염 뽑히고 홧병으로 가버린 게 엊그제 같았는데···.]

말끝을 흐린 할아버지의 목소리에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미룡그룹 창업주인 서형곤과 아는 사이인가?

“서형곤 의원님과 친하셨나요?”

[그럼? 경상도 사람이지만 소탈하면서도 호탕했지. 한국전쟁 때 형님이 만든 비누도 우리가 팔아줬고 내가 형님한테 유도 배우고 형님이 나한테 검도 배웠어, 으허허.]

껄껄 웃는 할아버지의 대답에 새삼 놀라울 뿐이었다. 경상도라면 이를 가는 분이 경상도 사람과 친했다니?

“그래도 할아버지, 경상도 별로 안 좋아···.”

[지금 야당으로 나와서 금뱃지 단 놈들만 싫어하는 거다, 이놈아. 형곤이 형님도 금뱃지 달긴 했지만 나나 다른 회장들과 동류라는 건 안 잊고 산 양반이었어.]

할아버지의 핀잔에 나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 분이 공화당 재무위원장이었을 때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그 양반이 재계 사람들 모아서는 자기가 재계 쪽 정치자금 창구가 되겠다고 했었지. ‘피스톨 박’에 ‘궁정동 멧돼지’가 지들 주머니 홀쭉해졌다고 이를 갈았지만 형님 덕분에 우리가 아낀 돈이 한두 푼이 아니었다, 흐흐.]

권력 깨나 휘두른다는 놈들 치고 돈 안 밝히는 놈들이 없던 천박한 군사정권.

그 시절 대통령과 친구처럼 지냈고 여당 핵심 정치인이자 재계의 일원이었던 서형곤 전 의원은 자신을 단일 창구로 하여 해외 차관과 공사대금의 10퍼센트만 정치자금으로 상납하게 했다. ‘뇌물의 제도화’랄까?

‘서 의원 방식이 합리적이긴 하지. 어차피 줘야 할 정치자금이면 양지로 끌어올려서 관리하는 게 백 번은 나아.’

정치가 돈 없이 돌아갈 수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다.

기존의 여야는 총선 때마다 수백, 수천억씩 재계에서 뒷돈을 받아 선거운동에 쓰고 진보정당 국회의원도 차명으로 부동산을 소유하는 게 이 나라 정치판의 미래가 아닌가?

잠깐의 단상에 빠져 있던 나를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끌어올려줬다.

[여하튼 네가 그만큼 밀어주면 서준석이 그 친구가 미룡그룹 간판을 지키는 건 일도 아닐 게야, 허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할아버지. 숙부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네 덕분에 좋은 사업 건졌다고 하더구나. 할애비가 봐도 미룡은 부채를 덜어내고 우린 자동차, 중공업과 합이 맞는 사업을 취했으니 상생이지 싶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그런데··· 네 돈 그렇게 써도 안 아까운 게냐? 이 할애비가 봤을 땐 이문이 박한 장사인데?]

우리 할아버지, 날 떠보는 걸까? 진심으로 아까워하는 걸까? 이미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는데.

“아깝긴요. 사람을 남기는 일이 아닙니까?”

[그리 말할 줄 알았다. 준석이 그 친구, 됨됨이도 괜찮지만 동남아 정재계 인사들과 친분이 두텁다고 들었어. 삼촌이나 큰형님처럼 따르고 친하게 지내거라.]

할아버지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후한 조건으로 투자한 것이었다. 전생의 인연과는 별개로 서준석을 통해 동남아 정재계 인사들과도 친분을 맺어야 해동그룹의 동남아 진출 발판을 다지지 않겠나?

“예, 할아버지.”

[오냐, 수고하거라.]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대답한 나는 할아버지의 푸근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통화를 마쳤다.

“할아버지도 잘했다고 하시네요, 후후.”

“그래도 조금은 아깝다. 미룡그룹이면 해동그룹이 흡수해도 될 만한 매물 아니냐? 시멘트, 정유, 건설, 전부 겹치잖아.”

선해철이 못내 아쉬워했지만 나는 검지만 세운 손을 좌우로 까닥거렸다.

“다 먹으면 탈납니다, 삼촌. 앞으로 스탠더드가 대한민국에서 사랑받는 회사가 되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손해 볼 투자도 아니고요.”

돈을 다루는 주제에 사랑 이야기를 하는 게 우습지만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돈을 뿌려서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아깝지가 않았다.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이론이냐?”

“네?”

“인간은 물질적인 욕구가 채워지면 정신적인 욕구를 채우려고 한다는 거다. 너 하는 거 보니까 생각났어, 후후.”

빙긋 웃는 선해철의 대답이 틀리지는 않았다.

톰 포드와의 첫 미팅 때 다짐했던 것처럼 아스팔트만 깔린 복수의 고속도로만 만드는 게 아니라 그 가장자리에 꽃도 키우고 나무도 심으며 나아가겠다고 다짐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낭비하는 건 아니에요, 삼촌. 저, 죽어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합니다. 아시죠?”

“안다, 알아. 돈으로 충당 못하는 수익은 돈이 아닌 다른 걸로 뽑아내는 게 너 아니냐? 안 그러냐? 흐흐.”

선해철이 낄낄 웃으며 던진 가벼운 턱짓에 박태진이 빙긋 미소를 띠었다.

“이미 형님 장인어른 통해서 선거도 움직인 이사님이잖습니까? 하하.”

“그거야 헨리도 원해서 한 일이고. 여하튼, 미룡에서는 우리 제안 받을지 모르겠네. 성민이 넌 어떻게 보냐?”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있나. 나는 선해철에게 바로 대답했다.

“서원석 회장이 미룡그룹 파탄의 주범입니다. 그룹 문제 수습하겠다고 발로 뛴 게 서준석 부회장이고요. 임원들도 생각이 있다면 서준석 부회장 손을 들어주겠죠.”

대답을 마친 나는 미지근히 식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순식간에 입 안 가득 퍼진 인도네시아 만델링의 맛처럼 미룡그룹도 빠른 결정을 내릴 거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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