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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167화 (166/229)

167화. 48th. 영역 확대 (1)

화를 참지 못한 강오중이 TV를 향해 리모컨을 거칠게 집어던졌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지금 저 TV에서 나온 뉴스가 더 이상 허튼 짓하면 재미없을 거라는 이대수의 경고라는 걸 강오중은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강오중이 내뱉은 욕은 분명히 이대수를 향한 것이었다. 끝까지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이대수 말이다!

씩씩거리며 거칠게 숨을 내쉬던 강오중에게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낚아채듯 수화기를 든 강오중은 통화를 받자마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대, 대통령님?”

[나 아직 당선인 신분입니다, 강 회장.]

김 당선인의 건조한 목소리에 강오중이 마른침을 삼켰다.

[대주물산, 대체 뭐한 겁니까? 지금 같은 시국에 금을 팔아요?]

“다 나라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어려운 때에 금을 해외에 수출하면 달러를 벌어오지 않겠습니까?”

재벌총수 수십 년에 걸쳐 쌓은 내공으로 평정심을 되찾은 강오중이 최대한 차분하게 변명을 늘어놨지만 돌아온 건 김 당선인의 코웃음소리였다.

[지금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겁니까? 대주물산이 해외에서 금을 수입해온 건 뭘로 설명할 거요?]

강오중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가 아닌가?

[뿐만 아니라 금 수출 과정에서 중간 중간에 서류로만 존재하는 회사들을 넣었더군요. 그 회사들 전부 부가세부터 온갖 세금을 다 빼먹었는데··· 누구 회사인지 내 입으로 말해야겠습니까?]

강오중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김 당선인이 영민한 사람인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니?

[대주그룹에 남은 금 전부 한국은행에 예탁하고 IMF 권고대로 구조조정에 집중하시오! 지금 이상으로 빚을 늘리면 어떡할지 두고 봅시다!]

날선 경고를 끝으로 김 당선인의 전화가 끊어졌다. 강오중은 수화기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화를 못 참고 수화기를 탁자에 내려쳤다.

“으아아!”

미친놈처럼 소리치던 강오중은 몇 번이고 탁자에 내려치던 수화기가 부러질 즈음에야 숨을 가다듬었다.

“방법을 찾아야 해, 방법을···.”

여기서 확장을 멈추면 알맹이가 부실한 대주그룹은 그대로 주저앉는다. 위기에 몰린 강오중의 눈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강오중이 부리나케 서재로 올라가 전화를 걸었다.

“황병식이! 지금 바로 런던에 연락해서···.”

다급하게 지시를 내리는 강오중의 얼굴은 모든 밑천을 올인하는 도박사처럼 보였다.

***

다음 날 오전.

“크하하하! 어젯밤 뉴스 봤어? 강 회장 얼굴에 똥칠 진하게 됐겠더라!”

“똥칠만 됐겠습니까? 오늘 아침에 총괄전략본부 회의 때 들었는데 당선인께서 강 회장에게 엄포를 놨다고 합니다. IMF 권고대로 구조조정을 하라고 말이죠, 하하!”

“호오, 그래? 우리 강 회장님, 불쌍해서 어쩌려나? 으하하!”

선해철과 박태진이 웃을 만한 일이었다. 내실이 가장 부실한 대주그룹의 자금 조달을 막아버리겠다는 게 아닌가?

“당분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그 사이에 우리 영역을 넓혀야겠어요.”

“돈을 벌자는 거냐, 외연을 넓히자는 거냐?”

묻고 있으면서도 선해철의 눈은 웃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둘 다죠. 우리 총알은 달러니까 미국 금리를 따르는 원화 표시 채권을 사주기만 해도 기본 마진은 깔고 들어갑니다. 한국 사회에 좋은 인상을 남길 수도 있죠, 흐흐.”

IMF 권고 때문에 국내 시중은행 금리가 20퍼센트를 훌쩍 넘어버렸다. 이런 시국에 10퍼센트도 안 되는 미국 연준 금리 기준으로 대출해줘도 돈은 돈대로 벌고 스탠더드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까지 만들 수 있었다.

“지독한 놈. 돈 버는 것도 모자라서 마음의 빚까지 깔아두려는 거냐?”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우리에겐 큰 무기가 될 겁니다. 다른 미국 사모펀드들이 한국에서 도적떼처럼 돈놀이하는 것과 다르게 보일 테니까요.”

지금은 내 투자관이 미친놈으로 보이겠지만 나중에는 ESG(Environment, Social, Governance, 환경보호, 사회공헌, 윤리경영)로 발전한다. 수십 년은 앞섰지만 돈을 까먹을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기에 자신이 있었다.

모처럼 만에 여유를 누리며 차를 마시던 중 직원 한 명이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죠?”

“투자를 요청하는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꼭 부탁드린다며 직접 뵙고 싶다는데···.”

난감해하는 직원을 보니 예정에 없던 사람인 모양이었다. 선해철은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손님 안 받을 거면 장사 접어야지. 모시도록 해요.”

해동자동차의 양대 대주주이자 신성그룹, GK그룹의 주요 투자자로 소문이 난 스탠더드 캐피털에 찾아올 정도면 보통 사람은 아닐 터. 누굴까?

***

방에 들어온 남자를 본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형님이 찾아오다니···.’

애써 놀란 티를 안 내려 노력한 나는 우리와 마주서있는 저 남자의 인사를 들었다.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미룡그룹 부회장 서준석입니다.”

서준석.

미룡그룹의 창업주이자 콧수염이 트레이드마크였던 고 서형곤 국회의원의 차남이다.

미룡건설을 싱가포르의 ‘마리나 배이 샌즈’ 등 고급 건축의 명가로 만드는 데 앞장선 남자였다. 무엇보다···.

‘회사를 위해 모든 걸 바친 남자였지. 형님은.’

재벌 2세임에도 회사를 이용해서 개인 재산을 불리기는커녕

자신의 주식을 전부 회사에 내놓고 집까지 담보로 잡혀가며 대출 받은 돈을 미룡건설 회생에 쏟아 부었다.

직원들과 함께 어깨띠를 둘러맨 채 길거리에서 아파트 분양 전단지를 나눠주는 등 회사를 살리겠다고 온갖 고생을 자처했던 ‘리얼 맨’이었다.

그런 서준석의 모습은 내 마음에 울림을 줬다.

그 울림 때문에 내가 그를 형님으로 모시며 기업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을 배웠고, 오너 가문 출신임에도 마름 노릇을 하는 서로의 애환을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며 털어냈던 사이였다.

당연히.

전생의 내가 직원들과 함께 어깨띠를 둘러매고 아파트 분양 전단지를 나눠주는 등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게 된 건 서준석 같은 기업인처럼 보이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형님 얼굴에 근심이 잔뜩 껴있네.’

과거를 통해 지금을 바라보는 나는 서준석의 얼굴이 피로에 찌든 이유를 알았다. 그래도 이번 생엔 초면이기에 모르는 체하고 선해철에 이어 나를 소개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스탠더드 캐피털 코리아의 이성민 이사입니다. 해동그룹 이대수 회장님의 장손이고요.”

서준석은 내 직함보다 뒤에 알려준 내 혈연관계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는 이내 소탈하게 웃었지만 그 웃음으로도 가리지 못한 짙은 그늘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서원석 그 인간이 벌여놓은 자동차 사업 때문에 준석이 형님이 고생했었지.’

얼마 전에 국회의원을 사퇴하고 미룡그룹 회장으로 복귀한 서원석 전 국회의원.

자신의 자동차 사랑 때문에 신성그룹처럼 미룡자동차를 세웠다가 신성과 달리 그룹의 덩치가 작고 벌이도 시원찮아서 미룡그룹이 해체되게 만든 작자였다.

쓴웃음을 짓던 이성민을 보고 서준석이 겸연쩍은 미소를 띠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 이사님.”

자신보다 열 살도 훨씬 넘게 어린 내게 이사님이라 불러주고 공손히 손을 내민 서준석의 모습에 나는 그저 미소만 지어졌다.

‘한결같네, 형님은.’

저 매너와 친화력이야말로 미룡건설 임직원들이 서준석을 앞장서서 지킨 이유였고, 서준석이 싱가포르 화교 재벌들을 비롯한 동남아 정재계의 인맥을 갖춘 배경이자, 미룡건설을 위기에서 건져낸 원동력이었다.

나와 서준석 사이, 아니 서준석을 향한 나의 감정을 알아차렸을까 선해철이 나섰다.

“차라도 한 잔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처음 보는 이들의 호의에 서준석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나는 빙긋 웃으며 소파 쪽으로 손을 뻗었다.

“저희 스탠더드, 그렇게 야박하지 않습니다. 몸이라도 녹이면서 얘기를 나누시죠.”

“···알겠습니다.”

자리에 앉은 서준석은 직원이 내온 차 한 모금을 마시며 미소를 띠었다.

“이 차, 영국에 있는 우리 아이들이 선물로 보내준 차와 맛이 같은 것 같습니다.”

“그 차, 골든팁스입니까?”

“예. 아이들이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보내준 선물인데 아까워서 어쩌다 한 번씩만 마시고 있습니다.”

자식 이야기가 나오자 서준석의 얼굴에서 잠시나마 그늘이 사라졌다.

‘두 녀석 모두 케임브리지에 다니고 있겠네. 영국 왕자들과 이튼칼리지 동문이라던데···.’

내가 서준석의 아이들을 떠올리는 사이 선해철이 서준석에게 넉살 좋은 미소를 드러내며 말했다.

“저희 스탠더드에서는 누구든 편하게 마시는 차입니다. 이 이사 장인어른이나 태현그룹 명진호 회장님은 이 좋은 차를 마시고도 우리와 각을 세웠지만요, 하하.”

“아하하···.”

서준석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걸 보고 선해철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렇다고 우리 스탠더드가 대한민국 재계와 척을 질 생각은 없습니다. 사안에 따라서 손도 잡고 어깨동무도 하고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찻잔을 놓고 맞잡은 손만 만지작거리던 서준석이 굳은 표정으로 선해철에게 말했다.

“우리 미룡에 투자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투자요?”

“형님과 저, 그리고 제 동생이 그룹을 잘못 경영한 책임이 크지만 이대로 가면 미룡그룹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겁니다. 임직원들의 생계와 자부심만큼은 지켜주고 싶습니다.”

서준석의 호소에는 어폐가 있었다.

‘서원석이 그룹을 잘못 경영한 겁니다, 형님. 왜 형님이 그 짐을 나눠 갖는 겁니까?’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도 걸린 것 같은 저 양반의 호소를 듣자니 답답하기만 했다. 나야 미래를 알고 있기에 큰 그림을 그리고자 돈지랄을 하고 있지만 서준석은 본인의 형이 싼 똥을 치우는 게 아닌가?

“흠···.”

침음성을 흘리는 선해철을 보고 서준석이 재빨리 설득을 계속했다.

“무작정 투자를 요청하는 건 아닙니다. 투자만 해주신다면 제 형님과 동생을 설득해서라도 우리 집안의 모든 사재를 회사에 출연하고 전문경영인으로라도 성실히 일하겠습니다.”

표정에서든 목소리에서든 서준석에게서 절박함이 전해졌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는 알기에 투자의 가부를 정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선해철과 박태진에게는 재계 6위나 되는 미룡그룹의 회생을 도와주는 일이다. 당연히 한두 푼 들어가는 일이 아니고 회수 가능성도 미지수라 여기고 있을 터.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나는 선해철에게 말했다.

“당장 말씀드리긴 어려울 듯합니다, 대표님. 내부 회의를 거쳐서 결정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하지, 이 이사. 투자 요청을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서준석 부회장님. 낙담은 안 하시길 바랍니다.”

선해철이 보여준 희망의 끈 때문일까 서준석은 처음보다 밝은 표정으로 선해철의 손을 잡았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투자자로서 좋은 투자처가 있으면 투자하는 게 일 아닙니까? 일주일 뒤에 연락드리겠습니다.”

***

서준석을 돌려보낸 뒤.

“재벌 오너 치고 사람은 괜찮아 보이는데··· 너, 저 사람 아는 거냐?”

“왜요?”

철판을 깔고 대답한 나를 보며 선해철이 대답했다.

“아는 사람 대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미룡그룹 3대 회장 맡았던 분 아닙니까? 모를 수가 없죠.”

애써 회피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선해철의 눈은 더 가늘게 변했다.

“그래도 보는 눈빛이 달랐어. 네 눈빛, 우리 바라보는 것 같았거든.”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사님. 눈은 절대 못 속이는 법이죠. 서준석 부회장님을 바라볼 때 눈빛이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난 것 같더군요. 속 시원히 말씀해주시죠.”

박태진까지 가세한 추궁에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싱가포르 래플스 시티, 서준석 부회장이 미룡건설 대표이사일 때 시공한 거예요. 스위스호텔 스탬퍼드까지 전부요.”

“진짜? 그 호텔, 싱가포르에서 제일 높은 호텔인데?”

선해철의 호들갑에 이번엔 내가 의문이 생겼다.

“어떻게 아세요?”

“예전에 클레어하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짜식아.”

‘클레어와 찐한 밤을 보낸 것 같은데··· 어른이들의 이야기는 넘겨줘야겠지, 흐흐.’

무심결에 대답하던 선해철이 가늘게 뜬 눈으로 날 째려봤다. 피식 웃은 나는 대답을 계속했다.

“여하튼, 그 건물 짓고 나서 리콴유 총리가 미룡건설과 대한민국을 본받아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고 합니다. 싱가포르, 설계와 다르게 시공되면 공정률이 99퍼센트라도 전부 헐고 새로 짓게 하지 않습니까?”

그 뒤로도 나는 서준석에게서 들었던 래플스 호텔 복원 프로젝트나 뉴 KK병원, 탄톡셍 병원, 선텍시티, 하노이 타워 센터 등 미룡건설의 인상 깊었던 프로젝트와 서준석의 싱가포르 인맥에 대해 맛보기만 보여줬다.

“수수해 보였는데 외외네. 수완이 있는 사람이니 투자할 가치는 충분하겠어.”

“서준석 회장도 괜찮은데 동생인 서동석 부회장도 깜냥이 좋은 사람입니다. 미국 씨티그룹에서 일하다가 돌아와서 미룡증권 맡았는데 조지 소로스한테 500억 위탁받았거든요.”

“조지 소로스? 영란은행 털어먹은 그 영감?”

“네.”

질문은 받은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확인해주니 선해철이 혀를 내둘렀다.

“형만한 아우 없다는데 미룡그룹은 예외다. 형보다 동생들이 훨씬 나아.”

“확실히 서원석 회장이 방만한 데 반해서 서준석 부회장도 서동석 부회장도 자기 분야에 전문성도 있고 견실합니다. 외환위기야 예측이 어려웠으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겠죠.”

박태진까지 긍정론을 드러냈다. 나는 두 사람을 보며 내 뜻을 밝혔다.

“그러니 서원석 회장만 쳐내고 우리 측에서 충분히 자금을 지원해주면 미룡그룹 회생은 어렵지 않다는 게 제 결론입니다. 미룡건설은 서준석 회장 인맥 때문에 수주가 끊이질 않을 테고 정유, 시멘트는 현금흐름이 좋은 사업이니까요.”

“그래도 마냥 퍼주는 것 같으면 우릴 호구취급 하는 놈들이 생길 거다. 조금은 독한 모습도 보여줘야 해.”

선해철은 우리가 쉽게 보일까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나도 마냥 호구처럼 보일 생각은 없었다. 도와주더라도 조금은 모진 소리를 해야 서준석이 질 마음의 짐을 덜어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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