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47th. Dirty, Sexy Gold (4)
이대수를 중심으로 5대 그룹 총수들의 회합이 끝난 뒤.
해동그룹, 태현그룹, 신성그룹, GK그룹, SG그룹 할 것 없이 모든 채널을 동원해서 각 그룹의 종합상사로 금을 몰아줬다.
한 푼의 세금도 탈루하지 않고 다섯 그룹들이 모은 금들은 전부 GK금속의 제련소로 보내져서 커다란 주괴로 만들어진 채 각 회사의 창고에 보관되었다.
이러한 다섯 그룹의 움직임은 남산의 밀레니엄 힐튼 호텔 22층과 23층을 1년에 12만 원만 내고 집무실로 쓰는 남자에게도 흘러들어갔다.
“···사실인가?”
“네, 회장님. 해동물산에서 금을 사들이는 족족 주괴로 만들어서 창고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대주그룹 비서실장 황병식의 보고에 희끗희끗한 백발의 안경잡이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하군. 이런 일에 절대 손을 댈 양반이 아닌데···.”
대주그룹 회장이자 신임 전경련 회장인 강오중은 황병식의 보고에 뭔가 개운치 않았다. 지금처럼 한 푼이 아쉬울 때 금을 사놓고 꾸역꾸역 쟁여두고 있다니?
“다른 놈들은? 자잘한 놈들 말고.”
미간을 찌푸린 강오중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 황병식은 금세 알아챘다. 우물쭈물했다가는 강오중이 집어던질 재떨이에 이마가 깨지거나 몸에 멍이 들 테니 얼른 대답해야 했다.
“신성물산, 태현물산, GK상사, SG상사 모두 달러는 아니지만 현금으로 금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수출은? 하고 있나?”
“아닙니다. 그쪽도 주괴로 가공만 했지, 전부 해외법인으로 넘기기만 하고 있습니다. 선적일도 많이 늦고요.”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과 빗나가지 않았다.
종합상사들 중 가장 규모가 큰 다섯 업체가 금을 사들이고만 있다니··· 강오중은 다시 한 번 황병식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제 생각에는 금 시세가 오르길 기다리는 듯합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현금으로 금을 매입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급전으로 땡긴 달러로 핫머니도 결제했으니 여유를 부리는 게 아닐까 합니다.”
대답을 들은 강오중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다들 배가 불러 터졌군. 언제 칼날이 떨어질지 모르는데 한가롭게 사재기나 하고 있다니.”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었기에 강오중의 미간이 더 찌푸려졌다.
김 당선인이 종합상사 구조조정을 선언해서 대주그룹이 앞장서서 돌파구를 뚫고 있건만 이 무슨 태평한 작태인가?
“흐음···.”
불안 섞인 침음성을 내뱉던 강오중은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탱크처럼 장애물을 뚫고 질주하려면 금을 팔아서 그룹의 지주회사인 대주물산을 지켜야 한다.
넓디넓은 세상에 할 일은 참으로 많지 않은가? 대필 작가에게 맡겨서 쓴 자서전 제목처럼.
“우리 쪽 수출현황은 어떻게 되고 있나?”
“매입한 금 모두 대주금속 온산제련소에 보내서 주괴로 가공해 수출하고 있습니다. 벌써 처리한 물량만 30톤이 넘습니다.”
“잘하고 있네, 흐흐.”
차분한 목소리 때문인지 순조로운 작업 때문인지는 몰라도 강오중의 구겨진 얼굴이 펴졌다.
“흐흐흐···.”
생각할수록 자신의 기발한 생각에 강오중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계열사인 대주금속에 제련을 맡겨서 수수료도 따먹고 서류로만 존재하는 중간업체들을 여러 개 만들어 매출을 부풀린 덕분에 실적도 챙기고 각종 세금까지 골고루 환급받으니 꿩 먹고 알 먹고였다.
“알았네. 계속 진행해.”
“예, 회장님.”
그 말을 끝으로 비서실장을 보내고 홀로 남은 강오중은 의자에서 일어나 발밑까지 유리로 된 창가로 갔다.
“세월 참 빠르군.”
해동물산에서 독립한지 벌써 30년 하고도 2년째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처럼 10년 뒤부터 자기 뜻대로 하면 이대수도 이해해줄 거라 여기고 그를 속인 강오중에겐 종자돈을 받아서 대주양행을 차린 게 엊그제 같았다.
하지만.
창업 11년 차부터 인맥과 능력으로 대주그룹을 키운 강오중은 이 호텔의 첫 삽을 뜰 때부터 이대수와의 관계가 틀어져버렸다. 무엇보다 중공업으로 진출한 80년대부터는 견원지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고집불통 영감···.”
그 옛날의 기억 때문인지 강오중의 뒤틀려진 입에서 이대수에 대한 서운함이 튀어나왔다.
대출이 아니면 섬유와 가발이나 팔던 자신이 어떻게 지금 같은 대주그룹을 일구고, 이토록 전망 좋은 호텔 집무실에서 일하겠나?
지금의 강오중은 손바닥 같은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칸막이 하나 없이 함께 일하던 궁상맞은 시절로 되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절대 물러날 수 없어.”
이 방을 떠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오중의 목소리와 그의 꽉 쥔 주먹 위로 드러났다. 그러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금을 사고 팔아야 했다.
***
2월로 접어들면서 금모으기 운동이 시작된 지 일수로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장하연과 함께 장호건을 만나러 성의원에 다녀온 바람에 회사에 늦게 출근해서 선해철, 박태진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성의원에서 있었던 얘기를 들려줬다.
“그래서 늦게 온 거였냐?”
“네. 그 자리에서 계약서 찍고 신성물산 계좌로 1조 원 쐈으니까 고려호텔은 이제 하연이 겁니다, 하하.”
오늘부로 고려호텔을 비롯한 신성그룹의 모든 레저사업과 SH자산개발 지분 50퍼센트가 장하연의 회사가 됐다. 후련한 웃음을 터뜨리는 내게 박태진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이사님. 이제야 장 상무님도 우리 그룹 사람이 되겠군요, 하하.”
“그런 셈이죠. 해동물산이 고려호텔을 합병하고 나면 다시 자회사로 내려가게 되겠지만 덩치는 더 커질 테니까 하연이나 정 대표님도 서운해 하지는 않을 거예요.”
대답을 마친 내게 박태진이 말했다.
“다른 사업에 비해 눈에 안 띄지만 해동물산 레저사업부도 규모가 제법 됩니다. 여수, 변산, 서귀포, 통영, 경주, 강원도 고성에 리조트가 있고 골프장도 수도권 교외에 4개, 지방에 5개가 있고요.”
박태진 말대로 해동물산 레저사업부도 절대 작은 규모는 아니었다. 5공에서 강요해서 시작했지만 그룹 경영에서 손을 뗐던 할아버지가 풍류남아로서 유일하게 의욕적으로 키웠던 사업이 아닌가?
“그걸 고려호텔 레저사업과 합병시키면 로엘그룹 레저사업과 비벼볼 만할 거야. 인천이나 부산 쪽 호텔에 서귀포 쪽 리조트까지 더 인수하면 확실히 뛰어넘을 테고.”
선해철까지 눈을 반짝거리며 의견을 보탰다. 나는 그런 선해철을 보며 피식 웃었다.
“클레어하고 놀러갈 곳 만들고 싶은 거죠?”
“그런 것도 있는데 우리 조카며느리 사업 챙겨준다 생각해라, 흐흐.”
사적인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보다는 오늘의 빅 이벤트에 대해 얘기해야 할 것 같았다.
“오늘로 금모으기 운동 36일째네요. 얼마나 준비됐죠?”
목적어는 없었지만 박태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내게 대답했다.
“다섯 종합상사들의 매집한 물량을 전부 합치면 24k 기준으로 175톤 438.59킬로그램입니다. 해동종금에서 지불해야 할 액수는 총 19억 9999만 9,926달러고요.”
‘지독한 양반들···.’
박태진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떻게든 해동종금에 남아 있는 20억 달러를 한 푼이라도 더 빼먹겠다고 그램 단위까지 맞춰버릴 줄이야.
“그 중에 590그램은 네 장인어른이 개인 금붙이 팔아서 맞춘 거다. 참 꼼꼼한 양반이더라, 흐흐.”
“아하하하···.”
선해철의 대답을 듣고 나는 그저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장호건이 패물을 내놓으면서까지 달러를 구하려고 하다니···.
‘그 많은 달러를 처분했는데도 시중에 달러가 부족한가보네. 하긴, 우리가 달러를 팔 때 철수한 헤지펀드들도 있고 투기 수요를 노린 놈들도 있을 테니 오죽하겠냐마는···.’
외환시장의 보이지 않는 시장 참여자들까지 고려할 여유 따윈 없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잡생각을 떨쳐내고 다른 사항을 물었다.
“당선인 측하고는 얘기 됐나요?”
“네, 이사님. 오늘 점심 때 회장님께서 당선인과 직접 통화하셨는데 당선인께서도 외부로 금이 유출되는 것보다는 해동종금에서 인수하고 한국은행에 예탁해주는 게 IMF의 압력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물꼬를 터줬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이 나오면서도 점령군 같은 IMF 놈들의 꼬라지에 이가 갈렸다.
이내 숨을 고르며 화를 가라앉힌 내게 박태진이 계속해서 거래 내용들을 설명해줬다.
“해동종금에서 매입한 금을 정부에서 강압적으로 매입하지는 않겠지만 예탁된 금을 영란은행에 넘겨서 금 거래 시장에 대여해 얻는 수익은 한국은행이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박태진의 설명에 나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헐값에 우리 금 먹으려고 했으면 억울해서 잠도 안 왔을 텐데 다행이네요. 출점 문제는 어떻게 됐어요?”
가장 중요한 해동종금의 출점 문제를 물어본 나를 박태진이 선물을 주는 부모처럼 바라보며 말했다.
“해동종금의 출점 문제도 해결됐습니다. 자기자본비율이 충분하니 대출한도 규제만 지키면 허용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선인께서 선물을 하나 더 주셨습니다.”
“당선인께서요?”
박태진이 전해준 소식에 귀가 쫑긋 세워졌다. 박태진은 내게 그 새로운 소식의 내용을 들려줬다.
“트라이엄프 측에서 인수할 100억 달러 국채 발행 주관은 해동증권에 맡기겠다고 했습니다, 하하.”
“정말요?”
“진짜냐?”
나와 선해철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박태진을 바라봤다. 박태진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 둘에게 말했다.
“지난번 선거전 때 로이스 경과 이어준 보답이라며 김 당선인께서 권하셨다고 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이사님.”
박태진의 축하에 감사할 경황이 없었다.
국채 발행 주관사가 된다는 건 증권사에게 더없이 영광스러운 이력이다.
시국이 안 좋지만 어찌됐든 국가에서 인정하는 증권사가 되는 일 아닌가? 신생 증권사인 해동증권에겐 가장 절실한 후광이었다.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나를 보며 선해철이 피식 웃었다.
“입 찢어지겠다, 인마. 너도 내심 욕심냈을 거 아냐?”
선해철도 내 속을 뻔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선해철의 핀잔 섞인 목소리에 겸연쩍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지금까지 계속 고만 외쳤으니까 한 번은 스톱을 해야겠다 싶더라고요. 고만 외치다 독박 써도 판을 엎어버리면 되긴 하는데 아직은 그럴 힘이 없잖아요.”
아직은 기존 정재계의 질서를 무시할 수 없었다는 뜻을 비친 나는 머쓱한 미소를 띤 선해철에게 말했다.
“그래도 헨리와 트라이엄프의 존재감이 컸던 것 같네요. 형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럴 겁니다. 이사님과 회장님께서 당선인과 헨리를 연결시켜줬으니 해동그룹을 밀어주면 트라이엄프와 스탠더드의 투자를 더 이끌어 낼 거라 생각한 듯합니다.”
박태진의 의견이 내 생각이었다.
트라이엄프도, 스탠더드도 한국에 대규모 자본을 투자할 테니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거래 조건을 모두 확인한 나는 오늘의 메인이벤트가 언제 열릴지 궁금했다.
“방송은 언제 나가기로 했어요?”
본제로 돌아온 내게 박태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녹화는 오후 5시에 할 예정이고 방송은 오늘 밤 9시에 나가기로 했습니다. 오늘 밤 전국의 국민들이 대주그룹과 강오중 회장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씹을 겁니다, 흐흐.”
박태진도 꽤나 즐거운 모양이었다. 우리 셋은 오늘 밤에 대주그룹과 강오중이 얼마나 너덜너덜해질지 떠올리며 커피타임을 마무리 지었다.
***
그날 저녁.
10여 대가 넘는 대형 트럭들이 해동물산 인천창고 앞에 나란히 멈춰 섰다.
끼익 소리와 함께 짐칸의 모든 게이트를 내리자, 모루만한 금덩어리들이 차곡차곡 쌓인 팔레트 밑으로 해동중공업 로고가 붙은 지게차들이 포크를 넣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례하겠습니다, 기사님! 사진 한 번만 찍을 게요!”
“지금 하시는 대로만 해주세요, 기사님. 자연스럽게!”
뒤이어 방송용 캠코더와 카메라를 들고 우르르 몰려 온 기자들과 PD들은 지게차가 금을 내리는 장면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현재 이곳은 해동물산의 인천항 물류창고입니다. 금 모으기 운동이 시작된 이래로 각 종합상사들이 대형 주괴로 가공된 금 약 175톤 438.59킬로그램을 해동종금에서 매입해서 한국은행에 예탁하기로 했습니다. 그 해동종금을 책임지는 해동그룹 금융부문의 조영찬 부회장을 모시겠습니다. 조영찬 부회장님, 이번 금 매입 결정은 어떻게 하게 되셨는지 말씀해주십시오.”
그 중 현장을 중계하던 기자가 마이크를 내밀자 옆에 있던 조영찬이 거룩한 표정을 짓고 입을 열었다.
“우리 해동종금은 최후의 안전자산인 금이 헐값으로 외국에 팔려나가는 걸 방관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해동종금의 최대주주인 이성현 이사를 비롯한 그룹 경영진들과 다른 그룹들을 설득하여 각 종합상사들이 비축한 금을 달러로 매입했습니다.”
“이번 거래로 해동종금의 손실이 크다고 들었습니다. 시세보다 20퍼센트 더 비싼 값으로 인수하셨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우리에게 금을 매각한 종합상사 5개 사는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금을 떠안고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 국부 유출을 막기 위해 노력해주신 5개 사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담담하게, 하지만 비장함까지 묻어나는 표정으로 말하는 조영찬은 여의도에 있는 젊은 오너의 바람잡이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그 뉴스는 밤 9시에 일제히 방송 3사의 채널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처럼 해동물산과 태현물산, 신성물산, GK상사, SG상사를 비롯한 5개 사가 어려운 각 사의 사정에도 국부 유출을 막고자 노력한 것과 달리 대주물산은 50여 톤의 금을 헐값에 해외로 매각했다고 합니다. 이에···.]
“저, 저런 개 같은···.”
뉴스를 보던 강오중은 치미는 분노에 말을 잇지 못하고 리모컨을 쥔 주먹만 부들부들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