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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165화 (164/229)

165화. 47th. Dirty, Sexy Gold (3)

심호흡을 한 나는 브리핑이 끝났음에도 자리에 앉지 않고 일어선 채로 다섯 어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표현을 써서 실례지만 대주그룹의 재무상황은 쓰레기 그 자체입니다. 부채 규모만 33조, 자본 10조 원 중 7조 원은 숫자장난으로 만들어낸 허상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대표님?”

옆에 있는 나와 눈을 마주한 선해철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사 말이 맞습니다. 저희 쪽에서도 알아봤고 박태진 전무도 같이 확인했습니다.”

선해철의 뒤를 이어 박태진도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이사가 발표한 내용 모두 대주그룹 비서실 직원들을 매수해서 확인한 정보입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대주물산 해외법인을 통해 작업했다는 얘기까지 들었습니다.”

박태진의 발언에 고승주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아주 잠시였지만 나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저 양반도 대충 알고 있는 모양이군. 런던 BFC.’

런던 BFC.

세계 3대 금융허브로서 금융거래가 자유로운 런던의 특성을 이용하여 대주그룹의 손실을 감춘 내부 비밀조직이다.

그 런던 BFC가 열심히 활약한 결과가 대주그룹 사태로 총 부채 89조 원에 회계부정 43조 원으로 미국의 엔론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산이었다. 생각을 하던 나는 저절로 턱에 힘이 들어갔다.

‘금모으기로 경고장 날릴 때 멈춰라, 강오중. 그러면 런던 BFC는 안 건드리고 최소한만 가져올 테니까.’

대주그룹에서 가져올 계열사들 리스트를 속으로 꼽던 내게 배재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이 자리는 금모으기로 쏟아질 금을 우리가 최대한 흡수할 방법을 논하는 게 우선이네. 금 매수 방안도, 그 여파에 대한 대비도 충분한듯하니 오늘 미팅은 여기까지 하지.”

배재훈의 회의 종료 선언으로 모든 게 깔끔히 결정됐다. 할아버지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고 조영찬에게서 들었으니 이제는 미국 사업을 돌아봐야겠다.

***

그날 저녁.

이대수는 정장차림으로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서 고려호텔 본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허허, 그놈 참···.”

이심전심인지 금모으기 운동을 이용해서 대주그룹 강오중의 폭주를 저지하겠다는 이성민의 계획을 전해들은 탓에 이대수의 입에서는 너털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호텔 정문에서 차가 멈췄고, 검정색 중절모를 쓰고 문을 연 이대수는 이성민에게서 선물로 받은 로마네 콩티 한 병이 담긴 종이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어서 오십시오, 할아버님.”

미리 기다리고 있던 장하연과 정창호의 인사에 이대수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마중 나와 줘서 고마우이, 허허.”

이대수는 장하연과 정창호의 안내를 받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물 흐르듯 올라가자 이대수가 입을 열었다.

“정 대표.”

“네, 회장님.”

“우리 그룹에 오게 됐다고 서운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이대수의 다독이는 목소리에 정창호가 당황했다.

“아닙니다, 회장님! 어떻게 감히 회장님께 서운해 하겠습니까?”

“웬 걸. 자네가 우리 성민이 장인하고 호형호제 하는 사이인데 어찌 섭섭하지 않겠나?”

자신의 되물음에 말을 잇지 못하는 정창호에게 이대수가 말했다.

“고려호텔을 해동물산에 합병시키고 나면 해동물산 밑에 있는 리조트와 골프장 들을 고려호텔과 묶어줌세. 해동물산 자회사로 내려가긴 해도 레저사업은 자네가 맡아서 잘 키워주게. 우리 새아가도 열심히 가르쳐주고, 허허.”

“회, 회장님?”

이대수의 푸근한 웃음소리에 정창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고려호텔과 해동그룹 레저사업을 합치면 국내 최대의 레저기업이 되는데 그걸 전부 자신에게 맡기겠다니··· 정창호는 객장인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주는 이대수가 더없이 고마웠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물러날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네가 퇴사하는 날은 하느님 곁으로 가는 날일 걸세. 힘이 부치면 일선에서 물러나도 고문은 맡아주게나, 허허.”

짓궂은 농담을 던지며 정창호의 어깨를 두드려주던 이대수가 이번에는 장하연에게 말했다.

“우리 새아가는 정 대표 밑에서 열심히 배워둬. 정 대표만큼 꼼꼼하고 섬세한 사람도 없으니 큰 배움을 얻을 게야, 허허.”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열심히 배워서 해동그룹에 어울리는 회사로 키우겠습니다.”

장하연은 감격이 넘치는 눈길로 이대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을 친딸처럼 보살펴준 정창호를 품어주겠다는 시할아버지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웠다.

“그래, 그래. 허허.”

이대수가 장하연의 어깨까지 토닥여주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띵동 소리를 내며 멈췄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이대수는 정창호가 열어준 문을 넘어 객실로 들어갔다.

“회장님, 해동그룹 이대수 회장님 오셨습니다.”

앞서 들어간 정창호의 말에 소파에 앉아있던 장호건이 일어났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사돈어른.”

“사돈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오, 허허.”

이대수와 장호건이 인사를 나눴고, 정창호와 장하연은 인사를 마친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인 뒤, 객실을 나갔다.

이어서 오현무, 채정현, 그리고 명진호가 순서대로 도착하면서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다섯 그룹 총수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두툼하고 큼지막한 스테이크를 썰며 저녁식사를 했다.

말없이 고기만 썰어먹으며 잔에 담긴 로마네 콩티를 비우던 다섯 사람은 그대로 한마디 말도 없이 식사를 마쳤다.

“금모으기로 모인 금, 어떻게들 하실 참이오?”

식사를 마치고 와인으로 입가심을 한 이대수가 운을 떼자 네 사람의 입에서 침음성이 나왔다.

“아깝긴 하지만 우린 자네와 사정이 달라, 이 회장. 자네야 명진이하고 성민이한테 지분도 어느 정도 넘겨줬고 해동물산만 쪼개주면 되잖나? 나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네.”

명진호의 얼굴은 잔뜩 골이 나 있었다.

자식들의 상속과 형제들의 분가 문제 때문에 끙끙 앓고 있는데 그룹 지배구조의 한 축인 태현물산이 김 당선인의 종합상사 구조조정 대상으로 지목당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사돈어른. 신성물산도 지금 겨우겨우 버티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숨통을 틔우려면 금을 사고 팔아서 실적을 내야 합니다.”

장호건도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

고려호텔만 장하연에게 넘기면 1조가 들어오지만 아직도 세 남매 명의로 신성물산 주식을 사느라 여념이 없었다. 당장 먹기엔 곶감이 달다고 금을 사고 팔아서 매출을 내는 것만큼 구조조정의 칼날을 손쉽게 회피할 방법은 없었다.

“죄송합니다, 사돈어른. 저희도 힘들 듯합니다, 정부는 둘째쳐도 IMF 권고사항을 맞추려면 방법이 없습니다.”

변명에 가까운 장호건의 거절이 끝나자마자 오현무가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해동그룹이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건 고맙지만 일가친척들의 지분이 40퍼센트 가까이 들어있는 GK상사를 살리려면 이대수의 뜻을 저버려야 했다. 도리를 중시하는 GK그룹의 3대 적장자로서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형님께서 달러 팔아주신 거,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내빼면 우리 그룹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아시잖소? 우리 그룹이 어떻게 컸는지.”

SG그룹의 채정현도 난처해하는 표정을 드러냈다.

채정현은 군바리한테 아들 팔아서 그룹을 키웠다는 재계 내부의 손가락질이 지긋지긋했다. 국민들한테 욕을 먹을지언정 이번 기회에 재계의 일원이라는 걸 보여주는 게 낫겠다 싶었다.

각자가 토로한 내부 사정을 듣던 이대수가 와인 한 병을 새로 따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네 사람의 잔에 와인을 채워줬다. 소믈리에가 필요 없을 만큼 깔끔하게 와인을 채워준 그는 자신의 잔에 와인을 채우고서야 자리에 앉았다.

“지금 채워드린 잔, 고배가 아니라 축배로 만들고 싶은데 허락해주겠소?”

와인 병이 놓이며 울린 쿵 소리와 함께 네 사람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운을 뗀 건 연장자인 명진호였다.

“자네, 그게 무슨 뜻인가?”

입으로는 물어보면서도 기대를 품은 명진호의 은근한 눈빛에 이대수가 피식 웃었다.

“허허, 아시는 분이 왜 그러십니까, 형님. 제가 물주 노릇하길 기대하시는 거 아니십니까?”

“이거 술을 마셔서 흐트러졌는데도 자네는 못 속이겠구먼, 으허허.”

두 사람의 너털웃음에 나머지 세 사람은 올라오려던 술기운이 쑥 가라앉았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나온 게 사실이 될 것 같지 않은가?

“사돈어른?”

“형님?”

자신과의 관계에 따라 자신을 부른 세 사람을 미소를 띤 채 두루 살펴본 이대수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해철 그 친구가 우리 손주한테 그랬습디다. 해동종금에 있는 달러로 우리가 모을 금을 사고 그걸 한국은행에 맡기는 게 어떠냐고 말이오.”

쭉 듣고 있던 명진호의 눈빛이 번쩍거렸다.

“참말인가?”

“제가 뭐 하러 형님 앞에서 거짓말하겠습니까? 이거 팔순이 되려니까 등잔 밑이 어두워집니다, 허허.”

거짓말도, 자신이 늙어간다는 걸 핑계 삼아도 이대수는 사람 좋은 웃음소리를 지어냈다. 집안과 그룹의 미래가 걸린 일이 아닌가?

“우리가 모을 금은 해동종금에서 쥔 20억 달러로 거둬들일 겁니다. 세금 빼먹는 일 없으면 달러 기준으로 국제시세의 2할을 더 얹어드리겠소. 어떻소?”

현재 금 시세는 24k 1킬로그램 당 9,500달러 수준이다. 그 값에 20퍼센트를 덧붙여서 미국 달러로 계산해주겠다니?

국내에서 모인 금은 한화(韓貨)로 거둬들여도 되기에 명진호의 입이 쫙 찢어졌다.

“선해철 그 친구도 제법 쓸만하지만 자네 장손도 잘 생각했네. 달러 쥐고 있는 것보단 그 편이 더 낫지. 돈도 챙기고 이름값도 챙기는 일 아닌가? 허허.”

명진호의 너털웃음에 장호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도 금을 모으고 나서 해동종금에 넘기겠습니다. 우리 사위 살림 챙겨줘야지요, 허허.”

“잘 생각했소, 사돈. 고맙소.”

신성그룹도 받아들이겠다는 걸 확인한 이대수의 표정이 한 결 더 부드러워졌다. 그런 이대수를 부드럽게 바라보던 오현무도 장호건에게 질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선 대표도 선 대표지만 성민이 그 녀석 배포가 참··· 꼭 매제를 보는 것 같습니다, 사돈어른.”

“그놈이 제 아비 닮아서 어른들 공경하는 게 지극정성이긴 하외다, 허허.”

오현무와 함께 껄껄 웃던 이대수가 채정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장손이 자네한테 전해달라고 하더군. 나한테 석유회사 판 거, 욕심 때문에만 나선 거 아니니 잘 봐달라고 말이네. 잘 부탁함세.”

신성그룹 석유화학부문 인수에 대한 이해를 구하며 이대수가 고개를 숙이자 채정현이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지 마십쇼, 형님. 지난번에 끝난 일인데 뭘 이렇게까지··· 아무튼, 손자 하나는 잘 두셨습니다. 내 새끼들은 죄다 지 할애비, 애비들 돈 빼먹느라 정신없는데 말이오, 흐흐.”

“그 설움, 국민들한테 좋은 소리 듣는 걸로 달래시게, 흐흐.”

그렇게 좌중의 뜻을 모은 이대수가 헛기침을 하면서 목청을 가다듬었다.

“이번 위기, 절대 쉽게 나오지 못할 겁니다. 몇 집은 더 나자빠져야 끝날 거요.”

눈을 가늘게 뜬 명진호의 입에서 침음성이 새어나왔다.

“상선 맡고 있는 둘째가 태 대표 만나서 판 거 말고도 스무 척 가까이 처분했네. 팔고 나서 아침 먹을 때 그놈한테 술 냄새가 진동하더군. 술도 잘 못 마시는 놈이··· 후우-.”

명진호는 자신이 차기 그룹 후계자 중 한 명이자 가장 아끼는 아들 명선우의 처음으로 망가진 모습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도 지금 죽겠습니다, 회장님. 퇴직금에, 위로금에··· 반도체만 간신히 끌고 가는 중입니다.”

고려호텔과 신성자동차 매각은 입 밖에 안 냈지만 장호건도 앓는 소리를 냈다.

투자해야 할 게 산더미인데 돈줄이 막혔다. 반도체 사업마저 뒤처질까 밤잠을 뒤척이는 통에 최근에는 황나연과 각방까지 쓰고 있었다.

“그나마 저흰 다른 분들보다 사정이 낫지만 막막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채 회장님은 어떠십니까?”

그나마 두 그룹에 비하면 스탠더드 캐피털의 호의적인 투자를 받아서 양호한 GK그룹이지만 구조조정은 불가피했다. 근심을 드러낸 오현무의 질문에 채정현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길거리에 차가 안 달리니 기름이 안 팔려죽겠네. 그나마 통신 때문에 버티긴 하네만 영 좋지가 않아. 보릿고개가 따로 없네그려.”

속사정을 털어놓은 네 사람은 이 자리에 있는 단 한 사람, 긴축을 하는 자신들과 달리 확장에 나서고 있는 이대수가 부러웠다. 이 날이 오기만 기다린 것처럼 일어서지 않았나?

그런 그들의 심기를 알아챈 이대수가 헛기침을 했다.

“우리도 최대한 도리는 지키려 노력하고 있소. 오늘 이 자리도 그래서 마련한 거고.”

적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적이 되면 무서운 ‘삼청동 호랑이’ 이대수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수는 그런 그들을 보며 표정을 펴고 말했다.

“다들 잘해봅시다. 애먼 우리가 칼질 당할 수는 없으니 말이오.”

이대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다들 잘 알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다섯 그룹들이 살아남으려면

이 자리에 없는 대주그룹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

다음 날 아침.

회사에 출근하려고 차에 올라탔던 나는 할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삼청동으로 방향을 틀었다. 서재로 올라간 나는 할아버지와 차를 마시며 어젯밤 회동 결과에 대해 들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감사는 무슨. 다들 한 달 장사로 2할이나 되는 이문을 내게 됐으니 손을 잡아준 게야, 으허허.”

‘이걸로 재벌들이 금모으기로 국민들의 등 쳐 먹었다는 소리는 안 나오겠네. 대주그룹 빼고.’

껄껄 웃는 할아버지의 미소를 보니 속이 후련해졌다. 원래는 더러운 치부에 쓰였을 금이지만 이제는 그보다 더 나은 곳에 쓸 수 있게 되지 않았나?

금모으기 운동의 더러운 역사가 바뀌었음에 미소가 그려진 내게 할아버지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돈이라는 건 수단이다. 언놈들은 너와 조 부회장더러 미쳤다고 하겠지만 우리 같은 장사꾼들에게 돈보다 더 중요한 건 인망이야. 절대 흔들리지 말거라.”

“네, 할아버지. 명심하겠습니다.”

할아버지의 주문이 없어도 나 또한 그런 소인배들의 말 따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을 생각이었다. 왜냐고?

‘어차피 금은 24k 1킬로그램 당 6만 달러 언저리까지 올라가. 외환위기만 넘기면 계속 모아둬야지.’

앞으로 나는 계속해서 해동종금에 금을 쌓아둘 것이다.

금, 그 쓰임에 따라 더럽고도 황홀한 물건이야말로 해동종금에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보물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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