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47th. Dirty, Sexy Gold (2)
[당선인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대로 종합상사 구조조정부터 할 거라고 했잖나? 신성, 태현, GK, SG 할 것 없이 죄다 금을 내다 팔 게 분명하이. 우리가 거둬들일 금으로 한 집만 잡고 끝내면 좋겠는데··· 어떤가?]
수화기에서 들리는 이대수의 중저음에서 싸늘한 기운을 느낀 조영찬이 마른침을 삼켰다.
‘큰형님께서 피바람을 일으키려는 것 같군.’
조영찬은 이대수가 말한 그 ‘한 집’이 자신이 생각하는 곳이 맞는지 알고 싶었다.
“···대주그룹 강 회장입니까?”
이대수가 입에 올리지도 않은 곳이지만 그만큼 경멸하는 곳이 대주그룹이다. 대주그룹 회장 강오중 또한 이대수가 가장 경멸하는 사람이었다.
조심스럽게 묻고 대답을 기다리는 조영찬에게 이대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강오중 그놈, IMF에서 부채비율을 200퍼센트까지 낮추라고 권고했는데도 미룡자동차 처먹고 우크라이나에 공장까지 짓겠다고 하지 않았나?]
이대수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조영찬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 사이에도 이대수의 푸념 섞인 목소리는 계속해서 조영찬의 귀에 꽂히고 있었다.
[그대로 놔두면 이 나라에 암 덩어리가 될 게야. 그때 그놈을 독립시키질 말아야 했는데···.]
대주그룹 회장을 욕하던 이대수가 잠시 말끝을 흐리고는 다시 조영찬에게 말했다.
[여하튼, 성민이하고 잘 얘기해보게. 그놈 안목이라면 해동종금의 달러로 금을 사려고 할 테니 말이야.]
“예, 회장님.”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조영찬이 한숨을 내쉬었다.
***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쉰 건 이대수도 마찬가지였다. 김 당선인의 종합상사 구조조정 계획을 보고하러 와서 조영찬과 이대수의 통화를 지켜보던 고승주도 표정이 어두웠다.
“강 회장··· 잘라내실 겁니까, 회장님?”
고승주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이대수가 입을 열었다.
“어쩌겠나? 진호 형님이나 호건이, 사돈댁, 정현이야 구조조정을 하고 있는데 그놈만 안 하고 있잖나?”
이대수의 책망 섞인 되물음에 고승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현, 신성, GK, SG 모두 써야 할 돈까지 줄여가며 구조조정을 하는데 대주그룹만 확장을 하고 있지 않나?
“어리석은 놈. 독립할 때도 제 집부터 다져놓고 세를 펼치라고 했건만···.”
회한 섞인 목소리를 내뱉던 이대수가 말끝을 흐리며 31년 전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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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3월 1일.
당시 해동물산의 사장이었던 이대수는 해동물산 섬유부 이사였던 강오중과 삼청동 별채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독립?”
“네, 사장님. 저도 회장님이나 사장님처럼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회사를 세우고 싶습니다.”
“흐음···.”
강오중이 손바닥에 검은 돌을 쥐고는 이대수에게 고개를 숙였고, 이대수는 그런 강오중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해동물산 섬유부 최연소 이사로 올려줬을 만큼 추진력도 있고 부하직원들도 아끼는 강오중이다. 그럼에도 그 추진력이 지나칠 때가 있어서 자신이 가끔씩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었나? 침음성을 멈춘 이대수가 강오중에게 말했다.
“자네, 나하고 한 가지만 약조하지.”
“네, 사장님!”
고개를 번쩍 든 강오중을 보며 이대수가 바둑판 위에서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지금 이 판을 보면 자네는 자네 집을 굳건히 다져놓지도 않고 세를 펼치고 있네. 그렇지?”
“예···.”
강오중은 이대수의 지적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자신의 급한 성질이 걸린다는 말이 아닌가?
“솔직히 자네가 독립하면 이 대국처럼 사업을 할까 걱정이네. 앞으로 10년간 우리 회사에서 배운 대로 사업하겠다고 각서 쓰면 내 2천만 원을 지원해주지.”
이대수의 제안에 강오중은 좋다고 싫다고도 못했다.
지금껏 해동물산에서 독립해 회사를 세운 이들에게 은밀히 지원해주는 종자돈의 네 배를 밀어주겠다는 건 확실한 메리트 아닌가?
그와 반대로 해동물산의 방식대로 부채비율을 관리하며 회사를 키워야 한다는 건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한창 성장해야 할 때 잰걸음을 하는 게 답답해서 회사를 차리겠다는데 왜 그 방식을 강요하는가!
제안을 하는 이대수 또한 마뜩치가 않았다.
돈으로 사람을 조종하는 것 같고 강오중의 불같은 성격이면 5년만 버텨도 용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10년을 버티면 강산이 변하는 것처럼 강오중의 성정도 변할 거라 믿었기에 이대수는 이런 제안을 내민 것이었다. 견실함만 갖추면 강오중은 이 나라에 보탬이 될 큰 사업가가 될 거라 여겼으니 말이다.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강오중이 손바닥에 쥐고 있던 돌을 바둑판에 내려놨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강오중이 돌을 놓은 자리는 그의 집을 다지는 자리였다. 이대수는 그걸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큰 사람이 되길 바라겠네, 오중이.”
이대수와 강오중은 서로에게 내민 손을 굳게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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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을 마친 이대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세월이니 그 친구 성격도 바뀔 거라 생각했지. 했는데··· 내 생각이 틀렸어. 바둑판을 보고 내가 믿고 싶은 대로 그 친구를 풀어준 것 같더군.”
강오중은 그 10년이 지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인맥을 확대하고 사업을 늘려나갔다.
당연히 그 10년간 쌓인 견실함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대주그룹은 질주를 거듭하며 덩치를 키웠지만 정치꾼들, 공무원들의 힘을 빌려 빚을 빚으로 막는 등 속알맹이는 썩고 곪고 있었다.
그럼에도 강오중은 지금 같은 시국에 정신을 못 차리고 ‘세계경영’을 외치며 온갖 인수합병으로 고름을 키우고 있었다. 지금은 견원지간이지만 한때나마 강오중을 아꼈던 이대수였기에 답답하기만 했다.
“성민이 그놈이 금 매입하겠다고 하면 해동물산, 신성물산, 태현물산, GK상사, SG상사 다섯 곳에 금 매입 맡기라고 해. 강오중 그놈을 멈출 수 있는 건 지금뿐이야.”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이대수는 강오중이 이번 일을 겪고 현실을 직시하길 바랬다. 자신의 손으로 그의 목을 치지 않도록.
***
회사로 돌아온 나는 선해철과 차를 마시며 TV를 보고 있었다.
[오늘부터 KBC에서 ‘금모으기 운동 캠페인’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국난극복을 위해 국민 여러분들의 힘이 필요한 만큼···.]
때마침 금모으기 운동에 대한 이야기도 TV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는 TV를 보던 선해철에게 해동종금의 금 매입에 대해 물었다.
“···어때요?”
“금은 언제나 옳지. 괜히 중앙은행들이 금을 갖고 있는 게 아니잖냐? 흐흐.”
낮게 웃던 선해철이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냐?”
“뭐가요?”
“해동종금을 은행처럼 만들겠다는 게 금을 사는 이유의 전부냐고.”
“삼촌?”
잠시 흠칫한 나를 보며 선해철이 피식 웃었다.
“넌 항상 그랬어. 뭔가 하나의 일을 하면 그걸로 두 개 이상의 효과를 봤잖아?”
눈치 하나는 백단인 양반이었다. 헛기침을 하는 나를 보며 선해철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금을 사 모을 때 다른 일까지 꾸미지 않을까 싶다. 태진이 너는 어떠냐?”
선해철의 질문에 잠시 눈이 커졌던 박태진도 입을 열었다.
“형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 것 같군요. 말씀해주십시오, 이사님.”
박태진도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눈치였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
“맞아요. 금 매입은 해동물산, 태현물산, 신성물산, GK상사, SG상사에 맡길 겁니다. 커미션으로 금 시세의 20퍼센트를 얹어줄 거고요.”
내 대답을 듣던 선해철이 눈이 가늘게 변했다.
“대주물산은? 해동물산 빼면 5대 상사에 들어가잖아?”
“그렇습니다, 이사님. 대주물산까지 끌어들이면 금 매입이 더 쉬워질 텐데···.”
이 양반들이 약을 팔고 있다. 이미 눈빛은 의구심 대신에 추궁으로 가득한데! 나는 두 사람에게 손을 휘휘 내저어보였다.
“선수끼리 그만하죠, 다들. 종합상사 구조조정 계획에서 대주그룹을 희생양으로 삼아야죠? 안 그래요?”
두 사람에게 되물음을 던진 걸 시작으로 나는 그 이유를 차분하게 설명했다.
“신성그룹은 제 처갓집이에요. GK그룹은 제 외가고요. 태현그룹은 김 당선인의 대북정책에 앞장서고 있으니 안 되고, SG그룹은 채정현 회장님이 할아버지와 막역한 사이입니다. 무엇보다 네 그룹 모두 구조조정을 성실히 하고 있죠.”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네 그룹은 잔인하리만큼 구조조정에 열심이었고 다른 그룹들도 구조조정이 한창이다. 그렇게 쫓겨난 임직원들 중 정말 괜찮은 사람들은 해동그룹에서 흡수하고 있었으니 서로가 상부상조하는 셈이었다.
“그에 반해 대주그룹은 정신 못 차리고 덩치 불리고 있어요. 며칠 뒤에 미룡자동차 인수하기로 했고, 우크라이나 공장까지 세운다고 했잖아요?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도 판단하지 못하는데 살려줄 필요가 있을까요?”
대주그룹이 재계 4위라지만 내 눈에는 웨하스나 쿠크다스보다 부실한 허깨비였다. 그런 대주그룹을 신랄하게 비꼰 나를 선해철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그래도 대주그룹은 자산기준으로 재계 4위야. 대주물산은 대주그룹의 모기업이고. 대주물산이 거꾸러지면 대주그룹이 공중분해 될 텐데 어떻게 감당하려고?”
분명히 대주그룹은 쉽게 볼 수 없는 재벌이다. 대주물산, 대주자동차, 대주중공업, 대주금속, 대주전자, 대주증권, 대주카드, 대주화재 등 온갖 계열사를 거느리지 않았나?
나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기에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오중 회장도 생각이 있다면 자중하겠지만 그래도 안 멈추면 무너뜨릴 겁니다.”
“무, 무너뜨리겠다고?”
“이, 이사님?”
선해철과 박태진이 당황했지만 나는 그럴 이유가 있었다.
‘지금이야 장부상으로는 부채 33조 원에 자본 10조 원. 하지만··· 회계부정을 까면 진짜 자본은 겨우 3조 원이야.’
다시 말해 대주그룹의 실제 부채비율은 1,100퍼센트. IMF가 권고한 부채비율 200퍼센트 달성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내 기억의 대주그룹 강오중 회장은 ‘세계경영’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고를 외치며 덩치를 불렸다.
역사가 되풀이되면 대주그룹은 40조 원이 넘는 회계부정에 총 부채 87조 원이라는 암 덩어리를 대한민국 경제에 남기겠지만 역사가 어찌 흘러갈 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두 사람에게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일 벌인 놈이 수습해야지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대주그룹이 무너지면 가져올만한 게 많아요.”
나는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숨을 고른 뒤, 긴장한 두 사람을 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대주물산 미얀마 가스전 사업권, 서울역 본사 사옥, 힐튼 호텔, 여기에 대주중공업, 대주금속, 대주자동차는 우리가 챙겨야 합니다. 공적자금이든 채무재조정이든 조금만 지원받으면 살릴 수 있으니 인수가치는 충분해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서 붙여놓은 번호표까지 밝힌 나는 태연하게 차를 마셨고, 선해철은 어처구니없다는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너도 이제 기업가 다 됐구나. 국민들 혈세 퍼먹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다니.”
“그렇게라도 살려야 더 많은 세금을 내거나 혈세에 이자를 쳐서 갚겠죠. 형 생각은 어때요?”
쓴웃음을 지으며 선해철에게 대답하던 내 질문에 박태진이 굳은 표정으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이사님이 말하신 계열사 모두 기본기는 좋은 회사들입니다. 공적자금이 아니라 채무재조정만 받아도 충분히 살릴 수 있을 겁니다.”
박태진도 내가 뽑은 견적에 동의를 하자 선해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그럼 나는 대주그룹 정보를 모아야겠지?”
“네. 저하고 형은 금모으기 계획 꾸밀 테니까 삼촌은 사람들 풀어서 대주그룹 정보 모아주세요. 내부 임직원 분위기부터 실제 자산 현황, 위장계열사까지 전부요.”
적나라한 지시였지만 선해철은 오히려 나에게 씩 웃어보였다.
“재계 4위나 되는 대주그룹 속살을 까보게 된다니··· 재밌겠는데? 흐흐.”
***
며칠 뒤.
선해철, 박태진과 함께 대주그룹에 대한 정보를 모으면서도 금 매수 계획을 세운 나는 조영찬에게 전화를 걸어서 우리의 계획을 알렸다.
“···어떠십니까, 부회장님?”
[이, 이 이사?]
조영찬이 말을 더듬는 게 이상했다. 늘 침착한 양반이 왜 이리 놀랐을까?
“왜 그러십니까, 부회장님?”
[자네 계획, 회장님 생각과 똑같군. 그래서 놀랐네.]
“회장님께서요?”
할아버지도 대주그룹을 희생양으로 삼을 생각이었다니··· 짚이는 게 있었던 나는 얼른 조영찬에게 물었다.
“대주그룹 강오중 회장이 우리 그룹 출신이라 그런 겁니까?”
조심스러운 질문에도 조영찬은 대답이 없었다. 답답한 놈이 우물 파야 하니 내 입으로 얘기할 수밖에.
“제 추측이지만 강오중 회장이 우리 해동그룹 출신답지 않게 방만하게 회사를 키워서 회장님 눈 밖에 났다고 생각합니다. 대답해주십시오, 부회장님.”
한 번 더 잡아당기는 내 말에 조영찬이 한숨을 내쉬었다.
[맞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해동은 창업을 하겠다는 사람들에게 합당한 절차를 거쳐서 퇴직금과 별개로 종자돈을 주는 전통이 있네. 그런데 강오중은···.]
할아버지와 강오중의 관계에 대해서 들은 나는 그저 쓴웃음만 지었다.
‘할아버지를 기만했으니 눈 밖에 날 만했군.’
할아버지의 속은 나도 알 수 없었지만 이걸로 금 매수 계획은 대주그룹 해체 작업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수화기를 잠시 뺨에서 뗀 뒤, 숨을 고르고 통화를 계속했다.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죄송하지만 부회장님들을 모두 뵙고 말씀드렸으면 합니다.”
[역시··· 자네도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 모양이군.]
“내일 일도 모르는 게 세상살이니까요.”
씁쓸함이 배어나온 대답에 조영찬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네. 시간 잡히는 대로 연락하지.]
“네. 연락주시면 금방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나는 선해철, 박태진을 굳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대주그룹 해체라는 최악의 상황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는지 두 사람 또한 굳은 눈빛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점심 식사를 마친 우리는 조영찬의 연락을 받고 곧장 해동그룹 사옥으로 갔다.
회의실에 들어간 우리는 다섯 명의 부회장들을 앞에 두고 해동종금의 금 매입 계획, 그로 인해 벌어질 대정그룹 해체에 대비한 인수합병 계획에 대해 브리핑을 했다.
‘강오중이 절제를 한다면 필요한 것만 먹고 빠지겠어. 신성그룹과 싸우는 데 필요한 것만 가져오면 되니까. 그래도 안 멈추면 우리가 나서서 쓰러뜨릴 수밖에.’
브리핑을 마친 나는 굳은 표정으로 침음성을 흘리는 어른들을 바라보며 각오를 다졌다. 누군가 피를 묻혀야 한다면 내가, 회귀자로서 혜택을 받은 내가 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