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46th. 도장깨기 part.2 (6)
해동중공업의 산업자동화 설비 개발의 성공을 기원했던 나는 불현 듯 내가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전력반도체가 빠졌네! 그거까지 만들어야 하는데.’
산업자동화 사업이 완벽해지려면 전력반도체가 필요하다. 고온의 전기에도 녹지 않고 전기신호를 처리할 수 있는 전력반도체까지 하면 더 바랄 게 없었다.
“부회장님, 혹시 전력반도체도 해동중공업에서 연구 중입니까?”
기대를 품고 질문을 던진 나와 달리 이명진의 표정은 그닥 밝지 않았다.
“거기까진 여력이 없어서 못하고 있어, 이 이사. 반도체까지 연구하기에는 해동중공업이 너무 작거든.”
“그러셨군요.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전력반도체까지 개발하면 미쓰비시 전기를 확실히 밟아버릴 텐데··· 이명진에게 사과하면서 고개를 숙였지만 나는 못내 아쉬웠다.
‘내년에 실리콘웍스가 창립되면 바로 지분 넣고 인수할 수밖에. 반도체 공장도 필요하니 아남전자가 부도처리 되면 바로 인수해야겠어.’
실리콘웍스는 GK그룹이 인수할 회사였지만 친가가 먼저였기에 결론을 내린 나는 차 한 모금을 마셨다.
반도체 사업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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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이명진은 이성민과 해동중공업의 플랜트 엔지니어링 사업 진출과 해동건설의 설계역량 축적, 해동시멘트의 경쟁업체 인수합병 계획까지 주고받고서야 본사로 돌아왔다.
“그 녀석 참···.”
이성민을 배웅해주고 집무실로 돌아온 이명진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이성민의 사업 컨설팅이 마치 자신의 속이라도 들여다본 것 같아서였다.
“형님이 남긴 씨앗이니 어디 가겠냐마는··· 후후.”
이명진의 견실함은 먼저 간 친형인 이명우와 함께 부대끼면서 익힌 것이었다.
그 형의 피를 물려받은 이성민이 건네준 중공업 부문 사업계획서에는 그룹의 중공업 부문 사업들을 보다 탄탄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각종 세부계획들이 꼼꼼하게 담겨 있었다.
“고맙습니다, 형님. 형수님. 우리 성민이, 제 아들처럼 돌봐주겠습니다.”
먼저 간 형 내외에게 고마워하던 이명진의 얼굴에 푸근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
대전에서 서울로 돌아온 나는 남은 주말동안 열심히 장하연의 지도를 받으며 소묘 연습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이렇게 하는 거야.”
내 손을 감싸 쥔 장하연이 내 손에 들린 4B 연필로 정물 소묘에 명암을 넣어줬다.
‘이런 모습은 처음 보네.’
옆을 힐끗 본 내 눈에 비친 장하연의 얼굴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그림에 몰입했던 장하연은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봤다.
“열심히 해요, 학생. 그래야 초등학생 그림실력 졸업하죠, 후훗.”
“네, 선생님.”
서로를 보며 싱긋 웃은 우리는 다시 그림 연습에 집중했다. 얼마 후, 소묘 연습을 마친 우리는 주스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어제는 숙부님 뵀고··· 내일은 어디야?”
주스를 마시던 나는 장하연의 질문에 컵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금융 쪽이니까 조영찬 부회장님 뵈러 가야지? 잠깐 쉴 때 연락드렸는데 해동증권 사람들부터 보고 오라고 하셨어.”
“증권이면 너희 회사에서 일했던 분들 있는 곳이지? 스탠더드 캐피털.”
“맞아. 우리 회사 본사에서 일한 양반들이라 그런지 얘기도 잘 통하더라구. 그 중 한 명이 태진이 형 입사동기라서···.”
그 뒤로도 우리는 내일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뒤, 침실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봐야 할 금융은 내 주전공이기에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장하연과 일요일 밤을 활활 불태웠다.
***
다음 날 아침.
명동의 해동종금 본점 건물로 출근한 나는 로비에서 박태진을 만났다.
“주말 잘 보냈죠?”
“네, 이사님. 집주인이 집을 빨리 비워준 덕분에 집에 들일 가구부터 가전제품까지 골랐습니다, 하하.”
박태진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박태진을 바라보던 나는 선해철이 사준 집을 박태진과 유현정이 어떻게 꾸밀지 궁금했다.
“형은 결혼식 언제 올려요?”
“오는 5월에 올릴 생각입니다. 그때쯤이면 날씨도 풀리고 분위기도 나아지지 않을까 합니다.”
“결혼식은 제가 먼저 올려야 할 것 같네요, 흐흐.”
박태진의 대답을 들은 나는 짓궂은 미소를 띠며 웃음을 흘렸고, 박태진 또한 입꼬리를 올리며 내게 말했다.
“그러셔야죠. 재벌가 사람들 중 최초로 혼인신고부터 하셨잖습니까? 흐흐.”
나와 장하연의 혼인신고는 재계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었다.
중세 귀족들 뺨치는 재벌 사회에서 약혼식은 고사하고 결혼식도 안 하고 혼인신고부터 했다고 이놈저놈 할 것 없이 우리 뒷담화를 까고 있었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박태진에게 말했다.
“상관없어요. 두 집안 어른들 승낙도 받았고 우리 둘 다 깨가 쏟아지고 있는데 아무렴 어때요?”
“그건 그렇죠. 결혼이라는 건 당사자들의 행복이 중요한 거니까요.”
“맞아요. 그럼, 역전의 용사들을 만나러 가볼까요?”
나와 박태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해동증권 본사 사무실이 있는 층에서 내린 다음, 복도를 걸어 사무실로 들어갔다. 트레이딩 룸처럼 꾸며진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사람들은 우리 둘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님?”
“전무님?”
소식이 빨랐는지 박태진을 전무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박태진과 함께 반가움을 숨기지 않고 해동증권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
“다들 잘 지냈죠?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이사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하.”
해동증권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악수를 하던 우리에게 민주형, 주승빈이 달려왔다. 우린 두 사람과 악수를 나누고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응접실로 들어가서 차를 마셨다.
“축하한다, 민 전무, 주 상무. 새해에도 열심히 잘해봐, 후후.”
“박 전무 너도 새해 복 많이 받고 열심히 이사님 보필해. 그런데··· 너한테 전무 소리 들으니까 어색해 죽겠다, 흐흐.”
“감사합니다, 전무님. 열심히 잘하겠습니다, 하하.”
낮게 웃는 민주형과 달리 주승빈은 박태진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세 사람이 덕담을 주고받는 걸 보며 커피를 마시던 나는 잔을 내려놨다.
“명패는 어때요? 자개박이는 너무 노티 나서 크리스털로 제작했는데.”
“맘에 쏙 듭니다, 이사님. 아침마다 명패 닦고 일 보고 있습니다, 하하.”
순식간에 상무로 올라갔음에도 주승빈은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쓰다듬었고···
“저도 요즘 일하는 게 즐겁습니다, 이사님. 마누라가 성과급에 배당금 받은 거 보고는 밤잠을 못 자게 합니다, 흐흐.”
전무로 승진한 민주형은 나처럼 와이프에게 밤마다 꽤나 시달렸는지 눈 밑에 다크서클이 꼈는데도 실실 웃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적을 줄 알고 걱정했는데.”
조금은 걱정하는 체하며 말하자 민주형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이사님. 주 상무나 다른 친구들도 성과급, 배당금 받고는 좋아죽으려고 했습니다. 다 합쳐서 100억이나 받았는데 그게 적은 돈은 아니잖습니까? 그렇지, 주 상무?”
이번에 해동증권에서 해동증권 초기 멤버들에게 지급된 성과급과 배당금만 1인당 총 100억 원이었다.
여기에 15퍼센트의 지분을 가진 해동그룹 임직원 복지기금에도 수백억 원의 배당금이 지급돼서 그룹 임직원들에게 자녀 장학금이나 병원비 등의 복지비로 뿌려졌고, 20퍼센트의 지분을 쥔 해동종금도 수입이 짭짤했다.
‘나야 이번 배당은 포기했지만 지금은 주식에 투자하는 게 훨씬 남는 장사야. 배당금 받으면 세금이 반이잖아?’
지금 같은 때는 배당을 받아서 피 같은 돈을 세금으로 뜯기느니 투자를 잘해서 회사 가치를 높이는 게 낫다. 싱글벙글하는 민주형 옆에 있던 주승빈도 반색하고 있었다.
“말하면 입 아프죠. 저희 같은 놈들이 어디서 어떻게 100억씩이나 받겠습니까? 다들 배당금 받은 걸로 해동자동차에서 준대형으로 한 대씩 뽑고, 강남에 아파트 한 채씩 샀다고 합니다, 하하.”
“의외네요. 그 돈으로 주식에 투자했을 줄 알았는데.”
뜻밖의 부동산 투자에 놀란 내게 주승빈이 겸연쩍은 미소를 보였다.
“주식도 좋긴 한데 내 집 마련이 우선이잖습니까? 다들 귀국 전에 집 한 채씩 장만해서 애인 있는 놈들은 결혼식 준비하고, 유부남들은 거하게 집들이하자고 했습니다, 흐흐.”
증권맨으로 변신했다고 해도 첫 직장인 해동종금에서 배운 안전지향 성향을 잊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앞으로 계속 잘 나가야 할 사람들인데 잘못된 투자로 오점 남길 일은 생기지 않을 것 같음에 나는 흡족함을 머금고 차를 마셨다.
***
그렇게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우리는 일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식 매수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국내주식 투자는 부회장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지시했다고 들었는데.”
“일단은 신성물산과 신성전자, 신성중공업, 태현자동차, 태현정밀, 태현중공업, 대한제철, SG에너지, SG텔레콤, GK전자, GK화학, GK상사, 미룡정유. 국민은행, 주택은행 등 대형주 중심으로 투자 중입니다. 업종이 다양하지만···.”
자신 있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투자 현황에 대해 설명하는 민주형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탄성을 흘렸다.
‘호오, 이 양반들 보게?’
지금만큼 대형주에 투자하기 좋은 때도 없지만 민주형이 말한 대부분의 투자종목들은 해동그룹 계열사들의 경쟁사 주식이었다.
“···당장 모든 자금을 투입해서 주식을 사지는 않을 겁니다. 외환위기의 후폭풍이 가실 때까진 투자심리가 얼어붙어 있을 터라 분할매수를 할 겁니다, 이사님.”
민주형답지 않게 섬세한 계획에 흡족해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좋네요. 그렇지 않아도 다른 부회장님들과 만났을 때···.”
그룹 사업에 훼방을 놓을만한 놈들의 주식을 잔뜩 사놓자고 합의한 내용을 알려주자 민주형이 낄낄 웃었다.
“소 뒷걸음질로 쥐 잡은 것 같네요, 흐흐.”
“부회장님 지시도 받았겠다, 좋은 주식에 투자할 생각으로 사놨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하하.”
주승빈도 밝게 웃는 걸 보고서야 나는 마음이 놓였다.
‘그래, 이런 것까지 내가 신경 쓰게 만들면 스톡옵션도 주고 미국 연수 보낸 보람이 없지.’
앞으로는 민주형과 주승빈을 비롯한 해동증권의 스무 명에게 해동그룹 금융부문의 공격수를 맡겨도 될 것 같았다. 속으로 내가 한 일에 보람을 느끼던 나는 이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안목을 보여줄지 궁금해졌다.
“대형주만 투자하고 있는 건 아니죠?”
내 질문을 질책으로 들렸나, 주승빈이 화들짝 놀랐다.
“아닙니다, 대표님! 중소형 주에서도 괜찮은 주식이 있는지 찾아봤는데··· 대서양화장품이라고 괜찮은 회사입니다.”
“대서양화장품이면 서영훈 회장님이 세운 회사죠? 둘째 아들인 서경빈 사장이 물려받았다고 들었는데.”
대충 아는 체만 했지만 대서양화장품은 절대 모를 수 없는 회사다.
방문판매 마케팅으로 화장품업계를 주름잡았고, 향후 아모르애틀랜틱과 아모르G로 분할돼서 그룹 시가총액만 최소 20조 원 이상 찍을 회사가 아닌가?
내 대답이 끝나자 주승빈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룹에 비하면 규모는 작지만 구조조정도 잘하고 있고 외환위기로 환율이 폭등하면서 수입화장품 원가가 비싸진 바람에 대서양화장품의 점유율 확대가 유력합니다. 현재 시장점유율은···.”
아직은 나만 아는 중국시장 진출 가능성은 빠졌지만 주승빈은 그 특유의 객관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브리핑을 해줬다. 주승빈의 브리핑이 끝나자 민주형도 가세했다.
“제 생각에도 대서양화장품은 투자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브랜드 가치도 좋고 서경빈 사장의 의지와 역량도 좋지만 무엇보다 경기가 풀리면 먹고, 입고, 꾸미는 일이 많아질 테니 지금이 적기입니다, 이사님.”
나야 이미 화장품에 대한 서경빈의 집념과 사업적 수완이 대단한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주승빈의 분석력에 민주형의 직관을 확인할 수 있어서 아주 흡족했다. 두 사람에게 상을 안 줄 수 없지.
“종금, 증권에서 200억씩, 나하고 내 와이프 명의로 100억씩 투자하죠. 여러분들도 4,5억씩 투자하고요. 다른 해동증권 멤버들한테도 말해두세요. 해동자산운용 세우면 그쪽 계정으로도 100억은 투자하고요.”
내 지시를 듣고 민주형이 난색을 드러냈다.
“그 회사 시가총액이 1,700억 남짓입니다, 이사님. 그쪽 경영권 방어 지분은 오너 지분 30퍼센트에 자사주 10퍼센트가 전부고요. 적대적 M&A 오해를 살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사님.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투자할 다른 기업들의 경계를 필요 이상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주승빈까지 우려를 드러냈지만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대서양화장품에서 우리 쪽에 사람 보내면 회사만 열심히 키우라고 하세요. 해동그룹 4세가 뭐가 아쉬워서 멀쩡한 회사를 사냥하겠습니까?”
심드렁한 표정으로 되물은 나에 이어 내 옆에 앉아있던 박태진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이사님도 이사님이지만 회장님 스타일 알잖아? 어지간하면 다른 그룹들하고 잡음 안 내려고 하시는 거.”
“하긴, 태현정유만 해도 6억 달러나 주고 가져오셨으니···.”
박태진이 짚어준 할아버지의 인수합병 방식에 민주형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미소를 띠었다. 나는 그런 민주형,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주승빈에게 한 번 더 강조했다.
“그러니까 서경빈 씨가 오면 말하세요. 지주회사를 만들던 뭘 하던 법의 테두리에서만 해먹으면 경영간섭은 없을 거라고. 우선매수청구권까지 준다고 하면 찍소리 못할 겁니다.”
‘알아서 세련되게 잘 포장하겠지. 앞으로 글로벌 플레이어가 되려면 누굴 만나도 당당해야 하잖아?’
다소 거칠게 말했지만 앞으로 해동증권을 대한민국, 아니 아시아 최고의 증권회사로 끌고 나갈 민주형과 주승빈이다. 나는 두 사람이 서경빈을 만나면 내 전언을 알아서 세련되게 포장할 거라 믿었다.
“알겠습니다, 이사님.”
민주형과 주승빈이 시원하게 대답하는 걸 보니 해동증권을 비롯한 주식투자는 두 사람한테 맡겨두면 될 것 같았다. 나는 두 사람을 보며 미소를 띠었다.
‘절대로 귀찮아서 짬시킨 게 아니야. 두 사람을 키우려고 하는 거지. 암, 그렇고말고.’
속으로 나 스스로를 다잡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박태진의 미소가 짓궂게 보였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