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46th. 도장깨기 part.2 (1)
해동자동차에 대한 전권을 할아버지에게서 위임받은 뒤로도 나는 금석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야 선해철, 박태진과 함께 삼청동을 나왔다. 차를 타고 여의도로 가던 나는 가는 내내 창밖의 하늘을 바라봤다.
‘아버지, 어머니···.’
맑은 하늘 속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어릴 적에 드라이브를 나가면 아버지는 ‘언젠가 꼭 내 손으로 세상 곳곳을 누비는 자동차를 만들 거다.’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고 어머니는 옆에서 응원해줬었는데···.
“할아버지, 많이 바뀌신 것 같네요.”
갑자기 툭 던진 말이었지만 선해철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네가 회장님을 바꾼 거야. 70년 가까이 안 바뀌셨던 분을 5년 만에 말이야, 하하. 안 그러냐?”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회장님께서 10여 년간의 동면에서 일어나신 건 전부 이사님 공이 컸지요, 후후.”
박태진까지 잔잔한 웃음을 흘리니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가볍게 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봤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하긴 하지. 그래도 멈출 수 없어. 끝을 보기 전까진 계속 나아가고 싶으니까.’
처음엔 내 한을 풀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나를 믿고 나와 함께 같은 길을 걷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멈출 수 없었다. 마지막 숨을 내쉬는 그날까지 달릴 생각에 중압감이 밀려들기 보다 피가 달궈지는 게 나란 놈도 지독한 일중독자 같았다.
한강다리를 건넌 우리는 여의도에 들어왔다. 해동자동차 사옥 앞에서 차가 멈췄고,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일 보고 들어갈게요. 특이사항 생기면 연락드릴게요.”
“오케이.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해.”
“잘하십시오, 이사님.”
선해철, 박태진과 인사를 주고받은 나는 두 사람이 탄 차를 보내고서야 도로변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훗.”
이제는 해동자동차 사옥이 된 아도그룹 사옥을 보니 웃음만 나왔다. 원래대로였으면 태현자동차그룹에 넘어가서 미래의 태현카드 본사가 될 곳이 아닌가? 피식 웃으며 사옥을 보던 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가슴 쭉 펴고 얘기해. 내 대신 만난다 생각하고 말이다. 알겠느냐? 허허.]
“가볼까.”
할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며 미소를 띤 나는 그 어느때보다 더 가슴을 쭉 펴고 해동자동차 사옥 정문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
로비에 도착해서 간단한 확인절차를 거친 나는 마중을 나온 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회장실로 들어갔다.
“고마워요.”
문을 열어준 비서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넨 나는 창가를 보며 뒷짐을 지고 있던 금석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자존심 싸움 하자는 건가? 뭐, 초장이니 예의는 차려야겠지.’
조금 언짢았지만 예의를 차려서 손해 볼 건 없었다. 나는 금석호의 뒷모습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금석호 회장님. 해동그룹 전략 컨설턴트인 이성민이라고 합니다.”
소개를 마치고서야 금석호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서 오게, 이 이사. 회장님 연락은 받았네. 앉아서 차부터 한 잔 하지.”
“그러시죠.”
짤막하게 대답한 나는 금석호가 상석에 앉는 걸 보고 소파에 앉았다. 잠시 후, 문을 열어준 비서가 커피를 내왔고 나와 금석호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말문을 텄다.
“회사 내부 정리는 어떻게 됐습니까, 금 회장님?”
첫머리부터 아픈 곳을 내가 찔러서일까, 찻잔을 내려놓던 금석호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이내 찻잔을 내려놓은 금석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굉장히 직선적이군, 이 이사. 차 한 모금 마시자마자 일 얘기를 하자는 건가?”
금석호가 담담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지만 내가 베풀 동정심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예의는 인사까지야. 회사 말아먹은 사람한테 굽힐 필요는 없어.’
아무리 할아버지에게서 금석호가 국내에서 손꼽히는 자동차 전문가라고 해도 경영자로서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자를 덥석 믿는 건 쉽지 않았다.
회귀자로서의 교만일 수도 있겠지만, 내 눈으로 직접 이 사람을 검증하기 전까진 믿을 수 없었기에 날선 질문은 계속될 예정이었다.
“해동자동차가 공적자금 투입으로 살아났다고 해도 내부를 수습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금 회장님. 그래서 여쭤본 거였습니다.”
건조한 목소리에 사무적인 어조를 실어서 또 한 번 찌른 내게 금석호는 여전히 담담한 미소만 보였다.
“그 문제라면 걱정 말게. 임원들 중에서 총대 메고 출장 다녀올 사람들도 정했고, 죄의 경중에 따른 징계도 끝났네. 인사발령도 고 본부장과 이 부회장이 처리했고.”
예상보다 고승주와 이명진의 대숙청이 빠르게 진행됐다. 인사, 재무, 기술개발, 생산관리 조직은 장악했지만 한 가지 더 확인할 게 있었다.
“노조는 어떻게 됐습니까?”
“노조도 마찬가지네. 정리해고를 안 하는 조건으로 전임노조원은 1명만 남기기로 했고, 민주노총 탈퇴도 결의됐다네.”
가장 중요한 노조 문제도 해결됐다는 사실을 확인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태현자동차 노조 같은 강성노조는 안 나오겠군.’
민주노총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태현자동차 노조는 막장의 진국이었다.
준대형 세단에 중대형 세단 네임로고를 붙이질 않나, 기본 생산량만 맞추면 라인을 멈추고 신문을 보거나 스마트폰 게임을 하질 않나, 문짝이 안 맞는다고 신발을 신은 채로 문짝을 밀어차질 않나··· 개판 그 자체였다.
“이 이사?”
“네? ···네, 금 회장님.”
태현자동차 노조에 대해 진절머리를 치던 나는 금석호의 목소리에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던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전임노조원 축소든 민주노총 탈퇴든 꽤나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텐데.”
재빨리 화제에 맞춰 둘러댄 나를 보며 금석호가 크게 반색했다.
“무슨 소린가, 이 이사? 정리해고를 안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
“사실입니까?”
“정년보장에 5조 3교대, 성과급제, 주택자금 할부까지 해줘서 노조 지도부가 놀라자빠지려고 했네. 그 사람들도 최소한의 염치라는 게 있는 사람일세, 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금석호를 보니 우리가 내민 당근꾸러미에 노조가 넘어온 것 같았다. 지금처럼 실업자가 속출하는 판국에 고용승계를 비롯한 반대급부를 약속했으니 민주노총 탈퇴가 문제인가?
고개를 끄덕인 나는 금석호에게 말했다.
“앞으로 해동자동차는 해동그룹 계열사답게 정년은 보장해주겠지만 각자의 성과만큼 대가를 받는 회사가 될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노력만큼 보상받길 원하니까요.”
금석호는 내 대답을 듣고 나에게 말했다.
“맞는 말이야. 게으르고 무능한 놈들 월급 깎아서 부지런하고 유능한 놈들한테 몰아주는 게 회사에 훨씬 유익하지.”
“회사 전체의 수익도 좋아지면 게으르고 무능한 자들의 연봉도 올라가겠지만 그들보다 부지런하고 유능한 인재들이 더 많이 받을 겁니다. 승진도 마찬가지고요.”
사람이라는 게 그렇다. 내가 남보다 더 노력했는데도 월급통장에 찍히는 숫자가 똑같으면 누가 좋아하겠나?
우리가 짠 성과급제대로 되면 회사 매출이 전년 대비 향상된 퍼센트 수에 월급을 곱한 만큼 전 임직원에게 최대 700퍼센트의 성과급이 지급된다. 여기에 회사 차원의 성과와 부서별, 개인별 성과가 전부 반영된 개별 보너스까지 별도로 지급된다.
‘그 성과가 연봉 지급 기준만 되는 건 아니지, 후후.’
이처럼 보너스 지급 기준이 되는 직원들의 고과는 다음 해 연봉협상의 베이스가 되고 그 고과가 켜켜이 쌓이면 승진의 속도와 당락을 좌우한다.
그렇게 되면 상위 10퍼센트 부서의 말단 대리급 직원이 하위 10퍼센트 부서의 이사급 임원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기도 하고, 40대도 안 돼서 부장이 되거나 60세 정년까지 대리, 과장으로 살다가 끝날 수도 있다.
‘해동자동차니까, 외환위기 시국이니까 가능한 일이지. 태현자동차 노조 같은 썩은 노조는 절대 안 돼. 절대로!’
과거의 태현자동차그룹이야 실그물 같은 순환출자로 인한 적대적 인수합병을 막고자 노조의 파업과 시위를 반쯤 방치했다. 노사관계가 개판이면 태현자동차가 계륵으로 보일 테고 누구든 인수합병의 의욕을 못 느낄 테니까. 하지만···.
‘해동자동차는 어림도 없어. 해동물산과 스탠더드 캐피털이 모든 쥐고 있고 유상증자든 채권 인수든 나와 집안의 돈을 쏟아 부어 키울 테니까.’
상장이든 직원들에 대한 분배든 충분히 키우고 난 다음에야 가능한 일이다. ‘성과만큼 보상한다.’라는 신념을 되새기던 나를 보며 금석호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인수전 때 주식을 100퍼센트 사들이자고 한 것도 대단하지만··· 정말 회장님 장손답군, 이 이사.”
금석호가 던진 말의 뉘앙스도, 나를 바라보는 눈빛, 슬쩍 올라간 입꼬리도 이상했다. 뭐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금 회장님?”
“해동자동차 인수부터 회생방안, 그리고 앞으로의 투자계획까지 전부 자네가 밀어붙이지 않았나? 돈과 실력으로.”
금석호의 느물느물한 목소리에 뒷목이 싸늘해졌다.
“설마?”
“스탠더드 캐피털에 들어 있는 자네 돈으로 우리 회사 주식의 반을 샀다고 회장님께 들었네. 회장님 장손 아니랄까봐 이재(理財)에 탁월하더군, 허허.”
껄껄 웃는 금석호를 보던 나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할아버지께서 내 비밀을 금석호에게 알려줬다니?
***
금석호는 새하얗게 얼굴이 변한 나를 보며 겸연쩍은 웃음을 흘렸다.
“허허, 젊은 친구가 뭘 그렇게 놀라나?”
“솔직히 전 금 회장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이유는 금 회장님께서 더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정신을 차린 내가 굳은 표정으로 쏘아보며 말하자 금석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래. 나도 내 잘못을 알고 있네. 총수라는 자리에 취해서 오만해졌고, 결국엔 그 자리에 잡아먹혀서 회사를 망친 사람이니 말이야.”
“잘 알고 계시는군요.”
비아냥거리듯 대꾸한 나를 금석호가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래도··· 자네와 회장님께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네. 내 잘못을 내가 씻어낼 수 있는 기회를 줬잖나.”
“저와 회장님은 고 본부장님과 이 부회장님을 통해 금 회장님 손발을 전부 다 잘라버렸습니다. 억울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아도자동차를 인수하자마자 실시됐던 대숙청을 들췄지만 금석호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억울할 게 뭐가 있겠나? 다 내가 뿌린 대로 거둔 것을···. 회사를 말아먹었는데도 다시 한 번 기회를 줬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일해야지.”
그럼에도 나는 금석호를 믿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도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 나에 대해 알려줬겠지만 영 개운하지가 않았다. 고민하던 나는 금석호에게 말했다.
“회장님께 연락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리하게. 동업자 간에 불신이 생기면 안 되니 해결할 건 해결하고 넘어가야겠지.”
금석호의 선선한 목소리를 들은 나는 곧바로 핸드폰을 빼서 전화를 걸었다.
“이 이사입니다, 회장님. 금 회장님께 얼마나 말씀드린 겁니까?”
이런 중대사를 나와 상의 한 번 안 하고 말한 탓에 할아버지에게 나가는 말이 곱지가 않았다. 아차 싶었을 때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금석호 그 친구, 너무 의심하지 말거라. 이제부터 은퇴할 때까진 네 말만 듣고 죽어라 달릴 명마가 될 게야.]
할아버지의 부드러운 타이름에도 나는 얼굴을 펴지 못했다.
“그래도 그런 중대사를 다른 분들도 아니고 금 회장님께 말하신 겁니까, 회장님?”
[걱정 말래두, 허허. 그 친구,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집안과 관련된 일에 한해서는 입이 무거운 친구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회장님.”
큰아버지나 작은할아버지 뻘 되는 금석호가 내 눈치를 보는 게 찝찝했지만 나를 납득시킬만한 대답을 할아버지에게서 듣고 싶었다. 집요해보일 수 있는 내 대답에 내 귓가로 전해지는 한숨소리에 이어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금 회장 그 친구, 이사 시절부터 우리 집안에 드나들던 사람이었다. 아도그룹에서 오너 가문이 물러났을 때 회장 자리 맡아서 잘 해보라고 그 친구 등 떠민 게 이 할애비였고. 그래서 우리 해동과 아도가 거래를 해왔고, 금 회장이 네가 애지중지하는 대형세단 1호차도 선물해준 게야.]
이제야 모든 게 명쾌해졌다.
우리 집안에 왜 아도자동차 대형세단 1호차가 있는지, 우리 집안과 아도그룹이 왜 거래 관계를 이어왔는지.
“그랬군요.”
[그 친구가 나한테 약속했다. 네 스스로 세상 사람들에게 정체를 밝히기 전까진 무덤까지 이 비밀을 가져가겠다고 말이다. 단도리도 잘 쳐놨으니 금 회장하고도 손발 잘 맞춰서 해동자동차 쑥쑥 키워봐. 그래도 그놈이 네 앞에서 한 약속을 어기면 이 할애비가 그놈 목을 치마. 걱정일랑 하덜 말어, 인석아.]
할아버지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으면 믿고 따르는 게 손자로서의 도리다. 나는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회장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래. 수고하거라, 허허.]
할아버지의 푸근한 웃음소리를 끝으로 통화를 끊은 내게 금석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가, 이 이사? 이젠 날 믿어줄 수 있겠나?”
굳은 표정으로 금석호를 보던 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 결례를 범한 점,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금석호 회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깍듯이 90도 인사를 한 나를 보고 금석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였던 허리를 편 내 어깨에 금석호가 손을 얹었다.
“나도 잘 부탁하네, 이 이사. 해동자동차, 잘 키워보세.”
내 눈에 비친 금석호의 눈에서 굳은 각오가 보였다. 오늘의 도장깨기도 꽤나 흥미로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