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45th. 새해, 훈훈하면서 차가운 날 (3)
얼마나 흘렀을까, 장호건의 입에서 나오던 침음성이 멈췄다.
“알겠네. 내 이 실장과 상의해보고 말해주도록 하지. 일 얘기는 그만하고 자네도 하연이하고 돌아가서 푹 쉬어. 신혼이니 한창 즐거울 때 아닌가? 하하.”
장호건이 덕담을 건네며 껄껄 웃는 걸 보니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나 또한 장호건을 보며 빙긋 미소를 띠었다.
“알겠습니다, 장인어른.”
장호건과 함께 서재를 나선 나는 1층으로 내려갔다. 장하연은 우리 둘을 샐쭉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시느라 이렇게 오래 계신 거예요, 아버지?”
“미안하구나, 우리 큰딸. 내 이 서방한테 앞으로 열심히 해보라고 이것저것 알려주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하하.”
껄껄 웃는 장호건의 모습에 장하연도 표정을 풀고 피식 웃었다.
“아버지도 참. 성민이, 얼마나 훌륭한 경영자인지는 충분히 입증됐잖아요.”
장하연이 나를 편들자 장호건이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탄성을 흘렸다.
“허어, 벌써부터 지아비 편 드는 게야? 기업가 인생은 끝날 때까지 끝이 없다, 하연아. 끝없이 탐구하고 끝없이 정진해야 하지 않겠더냐?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거라.”
“알겠어요, 아버지.”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장인어른.”
현관문 앞에서 장호건에게 인사를 올린 우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랑 무슨 얘길 그렇게 재밌게 한 거야?”
“이거저거? 백화점은 부동산업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고···.”
장호건이 전생에 누차 임원들에게 강조했던 ‘업의 본질과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자 장하연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도 참. 그런 건 내가 알려줘도 되는데.”
“장인어른께서 그만큼 날 사위 이상으로 생각해주시니까 직접 해주셨겠지, 하하.”
“그렇겠네, 후훗.”
기분 좋게 웃으며 정원을 걷던 우리는 낯익은 얼굴 하나와 낯선 얼굴 하나를 마주했다.
“너희가 여긴 웬 일이야?”
“웬 일은 무슨? 새해 첫날인데 아버지한테 인사도 못 올리니?”
장수연의 선공에 장하연이 반격을 날렸다. 허공에서 얽히는 두 여자의 시선에 나나 장수연 옆에 있는 양아치처럼 생긴 놈이나 겸연쩍은 미소만 흘렸다.
‘저놈이 박남준인가 보군.’
말로만 들었던 박남준을 실제로 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전생에는 자식들을 시켜 제 와이프를 구타해서 자살까지 몰고 간 사이코패스였는데 이번 생에는 장수연에게 꽉 쥐여 살게 생겼다. 박남준의 앞날을 속으로 비웃던 나는 얼른 장하연을 말렸다.
“그만해. 새해 첫날이잖아.”
“당신도 그만해요. 그래도 언니인데···.”
나와 박남준이 나서서 말리고서야 장하연과 장수연의 눈매가 조금씩 무뎌졌다. 나는 박남준 앞으로 가서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박남준 씨. 스탠더드 캐피털 이사 겸 해동그룹 전략 컨설턴트인 이성민이라고 합니다.”
내 소개가 끝나자 박남준은 눈썹을 들썩이고 아랫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대놓고 무시하는 듯한 표정에 장하연의 얼굴이 굳었다.
박남준은 아랑곳 않으며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성민 씨. 무진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 박남준입니다.”
‘지 마누라가 재벌이지 지가 재벌인 줄 아나보네? 재벌들 시다바리 노릇이나 하면서 먹고 사는 주제에 거만을 떨어?’
무진로펌이 이 나라 양대 로펌이라지만 민우로펌에 비하면 시궁창 쥐새끼 같은 로펌이다. 외국계 자본의 거간꾼, 그것도 일본 전범기업들의 변호까지 맡은 쓰레기들이 아닌가?
속에서 치미는 불길을 누른 나는 박남준에게 싸늘한 미소를 지어보인 뒤, 그놈이 내민 손을 있는 힘껏 꽉 쥐었다. 박태진한테 단련된 손맛 좀 봐라!
“아악!”
순식간에 가해진 압력에 박남준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낮췄다. 나는 손을 풀어주지 않은 채 그놈의 일그러진 얼굴을 내리 깔아봤다. 눈썹을 들썩이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런, 제 악수가 너무 격했나보군요. 반가운 사람한테는 손에 힘을 주는 버릇이 있어서, 하하.”
너스레를 떨며 웃던 나는 박남준의 손을 풀어줬다. 장수연은 얼굴이 시뻘개진 채 나와 장하연을 노려봤고, 장하연은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제부한테 보약 좀 지어줘, 얘. 그런데··· 너희 형부는 보약 안 지어줘도 되겠더라? 이만 갈게, 후훗.”
장수연을 비웃어준 장하연은 나와 팔짱을 꼈고, 나는 비웃음을 머금은 미소를 띤 채 장수연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지하차고로 내려갔다. 그런데···.
‘정말로 보약 안 지어주는 건 아니겠지?’
***
정원에서 이성민-장하연 부부와 장수연-박남준 부부의 신경전이 이성민-장하연 부부의 완승으로 끝났을 무렵, 장호건은 서재에서 이수한과 전화를 하고 있었다.
“···어떤가?”
[그만하면 회장님 사위로 손색이 없습니다, 하하.]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네, 하하.”
수화기에서 들리는 이수한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장호건의 얼굴에 흡족함이 차올랐다. 자신들이 짰던 계획과 똑같은 계획을 맏사위가 내지 않았는가?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예전부터 오랫동안 추진해온 사업인데···.]
말끝이 흐려지는 이수한의 목소리에 장호건이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쏟은 노력이 아깝지만 더 이상 신성자동차 살리겠다고 고생해봐야 죽은 자식 불알 만지는 것밖에 안 돼. 아도자동차 인수합병도 실패했으니 잘라낼 건 잘라낼 수밖에.”
그토록 아꼈던 자동차사업이었지만 장호건은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아니, 미련은 있었지만 잘라내야 했다. 자동차사업으로 급증한 악성부채 3조 원 때문에 신성그룹 전자 계열과 물산 계열까지 줄줄이 무너지게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신성물산과 신성생명 중심으로 지배구조를 짜고 신성생명 상장까지 추진하게 됐으니 자동차사업도 마지막까지 제값은 할 겁니다. 상심하지 마십시오, 회장님.]
이수한의 위로에 장호건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알겠네. 우리 쪽에서 쥔 채권이면 누님하고 호민이 지분을 얼마까지 가져올 수 있겠나?”
[은행장들과 손잡고 압박하면 총 20퍼센트까지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흐흐.]
음침하게 웃던 이수한에게 장호건이 말했다.
“참 신기하더군. 우리 속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숫자까지 딱딱 맞아떨어지다니 말이야.”
새파란 사위 앞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지만 장호건은 이성민이 내놓은 계획에 소름이 끼쳤었다.
장호민과 장호경에게서 20퍼센트의 신성생명 주식을 가져온 뒤, 자신의 실명 주식 20퍼센트를 내놓기로 이수한과 상의한 게 며칠 전이었는데···.
[우연의 일치겠지요. 오너를 제외한 대주주 요건이 5퍼센트이니 이 이사도 그 정도 숫자는 남겨둬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을 듯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이수한의 해석에 장호건이 가볍게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일부터 시작해. 은행장들 만나서 누님하고 호민이 쥐어짜라고 말이야, 으하하.”
웃는 와중에도 이성민에 대한 장호건의 불안감은 지울 수 없었다.
***
다음날 아침.
평소와 달리 나는 장하연과 함께 삼청동 본가로 넘어가서 식사를 했다.
“우리 새아가 얼굴을 보니 이 할애비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날아갈 것 같구나, 으허허”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식사를 하는 내내 할아버지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함께 식사를 하던 이명진과 고승주, 박태진, 선해철도 미소를 띠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 할아버지가 말했다.
“새아가, 미안한데 네 신랑하고 이야기 좀 하고 보내도 되겠느냐?”
“네?”
“요 며칠째 밖으로만 돌아다녀서 말이다. 부회장들하고 합이 잘 맞는지 궁금하구나, 으허허.”
눈을 깜빡이던 장하연은 껄껄 웃는 할아버지를 보며 미소를 띠었다.
“네, 할아버님.”
“고맙구나, 허허.”
식사를 마친 우리는 장하연, 고승주, 이명진을 보낸 뒤, 서재로 올라갔다. 책상 앞에 앉은 할아버지가 소파에 앉은 나를 보며 물었다.
“지난밤 늦게 전화해서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이냐?”
“장인어른이 해동자동차에서 신성물산 자동차사업본부를 인수해줬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장호건과 서재에서 나눴던 이야기들을 남김없이 풀어놓자 할아버지의 입꼬리가 뒤틀어졌다.
“네 장인이 혹할 만한 미끼로구나, 흐흐.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할아버지의 질문에 선해철이 잠시 차를 마시며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물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신성물산 자동차사업본부는 부산공장을 지으면서 부채가 3조 원이나 늘어났습니다. 금융비용을 감안하면 차량 한 대당 수백만 원을 밑지고 파는 꼴이니 빨리 털어내고 싶을 겁니다.”
선해철의 추론대로 신성물산 자동차사업본부는 차를 팔수록 적자가 커진다. 그러니 어떻게든 도려내야 신성물산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박 전무는 어떻게 생각하나?”
올해부터 해동그룹 총괄전략본부의 전무로 승진하게 된 박태진이 할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제 생각 또한 형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신성물산은 신성그룹 전자 계열과 물산 계열의 지주회사입니다. 손해를 봐도 장호건 회장은 신성물산 자동차사업본부를 도려내 물산과 전자 계열 전체에 독이 퍼지는 걸 막을 겁니다.”
계급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맞을까, 박태진이 좀 더 크게 본 그림도 맞는 말이었다. 신성물산 자동차사업본부를 그대로 끌고 가면 자동차사업으로 늘어난 악성부채 3조 원은 장호건이 지배하는 물산과 전자 계열을 괴사시킬 터.
‘원래대로였으면 장호건은 아도자동차 인수에 승부수를 걸었어. 그게 틀어지고서야 자동차사업 철수에 안간힘을 썼고. 이것도 나비효과라면 나비효과 같군.’
달라진 게 있다면 신성생명의 지분구조 변화 속도였다.
신성생명은 장호민과 장호경 모두 자신들의 계열사들을 통해 쥐고 있었고, 장호건 또한 실명과 차명으로 50퍼센트를 쥐고 있던 터라 내전에서도 공략 순위가 낮았다.
하지만.
지금은 나로 인해 역사가 뒤틀어지면서 장호건이 훨씬 빨리 신성자동차를 털어내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나대로 장호건에게 맞춰서 스텝을 밟으면 그만이었다.
“언제가 됐든 네 장인이 주식을 던지면 그 주식, 우리가 주워오면 되겠구나, 흐흐.”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내 귀에 할아버지의 음침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할아버지에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할아버지. 그 주식을 시작으로 장호경, 장호민의 지분까지 가져오겠습니다.”
장호민과 장호경의 신성생명 주식을 가져오겠다는 건 그 신성생명의 주식을 쥐고 있는 두 사람의 회사들까지 가져오겠다는 뜻이다. 할아버지는 나를 보며 껄껄 웃었다.
“허허, 장 씨 것들이 사위를 잘못 들였구먼. 집안 잡아먹을 사위를 들였으니, 으허허.”
껄껄 웃던 할아버지는 신성생명 주식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다른 걸 물었다.
“허면, 자동차사업은 어찌할 생각이냐? 네 장인에게 제안한 게 성사되면 인수할 게냐?”
“장인어른이 부채를 털어준다면 인수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부채만 털어내면 수익을 내는 건 순식간이니까요.”
스타트를 끊은 내 뒤를 이어 선해철도 할아버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부채탕감의 효과는 해동자동차로 증명됐습니다, 회장님. 해동자동차 산하의 방계 계열사들을 중공업 부문에 매각하면서 현금도 차곡차곡 쌓고 있습니다.”
“저 또한 인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회장님. 자동차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규모로 승부하는 곳입니다. 더군다나 부산공장은 규모가 작아도 신형 설비를 도입한 덕분에 규모 대비 생산성이 좋다고 들었습니다.”
박태진까지 가세해서 인수를 외치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자동차는 명진이도 금 회장 그 친구한테 맡기자고 했으니 성민이 네가 때 되면 금 회장한테 말해둬.”
담담하게 주문을 내린 할아버지와 달리 나는 말문이 막혔다.
자동차 사업은 신차 개발이든 공장 건설이든 수천억 원은 우습게 잡아먹는다. 그러면서도 성공가능성이 불확실한지라 투자 한 번 잘못하면 장호건처럼 손해를 보고 철수해야 하거나 미룡그룹처럼 그룹 전체를 말아먹는 지경에 이르는데 그런 자동차 사업을 내게 맡기겠다니?
“할아버지?”
조금은 놀란 내게 할아버지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네놈 실력이면 해동자동차를 이 나라에서나마 가장 좋은 자동차회사로 만들 거라 믿어서 맡기는 게야. 무엇보다 먼저 간 네 애비도 원하던 일이 아니더냐? 이 세상 곳곳을 누비는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꿈.”
나에 대한 믿음을 보여준 것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꿈을 내게 맡기겠다는 말이 내 마음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회, 회장님?”
선해철과 박태진까지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는 가운데, 할아버지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땐 이 늙은이가 자동차사업처럼 큰 사업에 자신이 없었다. 어중간하게 볕 드는 땅과 그늘진 땅에 발을 걸치고 있어서 말이다.”
할아버지의 얼굴에 부끄러움이 드리워졌다. 그 두 곳에 발을 담근 채로 험한 세월을 헤쳐오신 것만 해도 대단했는데···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잠시 말이 없던 할아버지가 한을 털어내듯 숨을 내쉬며 말했다.
“헌데, 성민이 저놈이 우리 집안을 떡하니 받치는 대들보라는 걸 알았으니 두려워할 게 뭐가 있을까? 여건이 되는데도 하지 않으면 먼저 간 우리 장남하고 큰며느리 볼 낯이 없지. 암, 그렇고말고.”
푸근한 미소를 짓는 할아버지를 보던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뒤늦게나마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꿈을 이해해줬다는 게 이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러니 금 회장 만나더라도 가슴 쭉 펴고 얘기해. 내 대신 만난다 생각하고 말이다. 알겠느냐? 허허.”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인사를 올린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할아버지의 미소가 오늘 따라 후련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