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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155화 (154/229)

155화. 45th. 새해, 훈훈하면서 차가운 날 (2)

셋째 손자까지 짝을 지어줬다는 사실에 이대수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성민이나 성문이, 성우 죄다 짝도 생겼으니 셋 다 이 집안 후계자들로서 갖출 건 얼추 갖췄구나. 성아야 천천히 하면 될 테고. 안 그러냐?”

차를 마시던 이명진이 다기를 내려놓고 말했다.

“예, 아버지. 지난 홍콩 투자 건으로 증여세까지 깨끗이 냈으니 홀가분합니다, 하하.”

아무리 대한민국에서 현찰 많은 해동그룹 오너 가문이라도 이명진 혼자서 세 남매의 증여세를 감당하는 건 힘들었다. 1인당 2천억씩 총 6천억 원이나 되지 않았던가?

상속세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해동증권의 홍콩 프로젝트 투자가 대박이 터져버렸다. 그 투자에 천만 달러씩 넣었던 이성문, 이성우, 이성아는 증여세와 각종 대출을 처리하고도 1인당 2천억 원의 현금이 남았으니 이명진은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었다.

껄껄 웃던 이명진이 웃음을 거두고 이대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머지 애들 돈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흐음···.”

[앞으로 스탠더드 캐피털은 우리 집안, 우리 그룹의 자금을 운용하는 회사가 될 겁니다, 할아버지.]

침음성을 흘리며 턱을 매만지던 이대수는 지난여름에 비밀을 털어놓은 장손의 말을 떠올리며 장침을 가볍게 내려쳤다.

“스탠더드 캐피털에 맡겨둬.”

“아버지?”

“아버님?”

이명진과 정유민은 깜짝 놀랐다. 집안과 그룹의 은행인 해동종금과 해동증권을 두고 남의 회사에 맡기라니?

“재작년에 트라이엄프와 스탠더드 캐피털이 일본 털어먹을 때 성민이 공이 컸다고 들었다. 덕분에 녀석이 거기서 받은 분배금도 뚠뚠하고 지금도 계속 불어나고 있는 모양이야.”

“예?”

이명진과 정유민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성민이 비즈니스에 이골이 났다고 해도 재작년부터, 그것도 미국 월가에서 두각을 드러냈었다니?

의아해하는 두 사람을 보며 이대수가 손을 내저었다.

“자세히 알려고 들지 마. 성민이 고놈 덕분에 스탠더드 캐피털 그 양놈들이 우리한테 후한 조건으로 투자하는 거니 말이다.”

이대수의 굳은 표정을 보고 이명진 내외는 표정을 다잡았다.

“예, 아버지. 함구하겠습니다.”

“조심하겠습니다, 아버님.”

고개를 숙인 차남 내외를 보던 이대수. 그는 장손이 자신에게 한 약속을 지킬 거라 믿었다.

***

이대수가 이명진 내외에게 스탠더드와 이성민의 관계에 대해 함구할 것을 주문했을 때, 이명진의 자녀들 중 막내인 이성아는 장하연과 함께 녹차를 마시고 있었다.

“언니는 성민 오빠 어디가 좋았어요?”

“음··· 그거보다는 싫은 걸 꼽는 게 빠를 것 같은데요?”

잠시 뜸을 들이던 장하연이 싱긋 웃으며 대답하자 이성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네?”

“예전에 자동차 레이싱 하던 거 빼면 다 좋아요. 자상하고, 따뜻하고, 듬직하고···.”

생각만 해도 좋은지 달달하기만 한 장하연의 표정을 보며 이성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빠가 많이 바뀌었나보네요?”

“그럴 거예요. 병원에서 눈 뜨고부터 많이 달라졌거든요.”

소꿉친구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이성민에 대해 장하연이 들려주자 이성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말이 맞네요. 성민 오빠, 맨날 역사교수 하고 싶다고 노래 불렀었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아가씨. 저하고 해동백화점 컨설팅할 때는···.”

백화점 컨설팅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이성민이 해온 일들을 들려주자 이성아가 입을 떡 벌렸다.

“정말요?”

“그럼요, 아가씨. 성민 씨, 이젠 어엿한 경영자예요.”

“와아··· 대박···.”

입을 벌린 채 감탄을 숨기지 못한 이성아가 부리나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죄송해요, 언니. 이런 사촌시누이 처음이죠?”

눈치를 보는 이성아에게 장하연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말했다.

“당연히 처음이죠, 아가씨. 성민 씨하고 한 결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테니까요.”

“그러겠네요, 헤헤.”

귀엽게 혀를 빼물고 웃는 이성아를 보며 장하연이 미소를 띠었다.

“그런데 아가씨는 어디 들어가실 거예요? 작년에 수능 쳤다고 들었는데.”

“서울대 건축학과요.”

“건축학과요?”

깜짝 놀란 장하연을 보며 이성아가 씩 웃었다.

“어렸을 때부터 인형의 집 가지고 노는 거 좋아했는데 중학교 들어가고부터 제 손으로 만들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이명진이 설계해준 대로 가족들과 함께 만든 집- 이명진의 지도를 받으며 이성문은 철재, 이성우는 배선, 이성아는 어머니 정유민과 함께 목재와 유리 가공을 담당했다. -을 시작으로 세계의 랜드마크 축소 모형을 만든 것, 여기에 좀 더 깊이 있게 만들고 싶어서 언어, 수학, 역사 등을 공부하게 됐다는 것 등을 장하연에게 알려줬다.

“그러다보니까 이제는 우리가 쓰는 건물을 제 손으로 만들고 싶더라고요. 어때요, 언니?”

“호호호···.”

초롱초롱하게 눈이 반짝거리는 이성아를 보며 장하연은 겉으로는 웃되 속으로는 기함할 뿐이었다.

‘이게··· 성민이네 집안 교육방식?’

어릴 때부터 자녀들이 좋아하는 걸 깊이 파고 들어갈 수 있게 가르쳐주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언어, 수학, 역사 등을 가르쳤으니 부모와 자식들 모두가 만족할 방식이었다.

‘나중에 애들 가르칠 때 고민해봐야겠어.’

아직 애가 들어서지는 않았지만 벌써부터 자녀교육의 의지를 불태우는 장하연이었다.

***

삼청동을 나온 우리는 부모님에 납골당으로 가서 인사를 올린 뒤, 한남동의 장호건 저택으로 가고 있었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장하연이 나를 불렀다.

“자기야.”

듣기만 해도 온몸이 찌릿찌릿하다. 입꼬리가 올라간 나는 앞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왜?”

“막내 아가씨, 우리 학교 건축학과 들어가는 거 사실이야?”

“응. 그저께 서산 가는 길에 당진에 잠깐 들렀는데 숙부님께서···.”

대학에 있는 지인들을 통해 이성아가 건축학과 수석에 공대 수석까지 따놨다는 확답을 들었다고 알려주자 장하연이 적잖이 놀랐다.

“진짜였어?”

“진짜야. 성아 걔, 중학교 때 숙부님이 인형의 집 설계해주고 숙모님, 성문이, 성우하고 같이 만들었거든. 다른 모형건물도 꽤 많이 만들었을 걸?”

이명진의 저택에는 본채와 떨어진 정원 가장자리에 작은 공방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 이명진이 전체 과정을 봐주는 가운데 이성문이 쇠를 깎고, 이성아는 서울대 응용미술과를 졸업한 정유민과 함께 나무와 유리를 다듬고, 이성우가 이명진과 함께 전선을 깔아서 모형 건물을 만드는 게 그들의 취미생활이었다.

‘덕업일치가 따로 없는 가족들이지, 후후.’

전생에도 그들의 직업은 취미생활에서 비롯됐으니 그보다 더 찰진 비유도 없었다. 속으로 웃으며 운전대를 움직이길 10여 분쯤 지났을까, 우린 장호건의 저택에 도착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장인어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버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우리는 문 앞에 있는 장호건에게 인사를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너희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헌데···.”

장호건이 내 얼굴을 살피고는 피식 웃었다.

“우리 이 서방 얼굴이 반쪽이 됐군. 신혼이 좋긴 좋은 모양이야? 허허.”

순식간에 나뿐만 아니라 장하연의 얼굴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버지!”

“너희 둘, 죽고 못 살아서 혼인신고부터 올린 거 아니냐? 왔으니 차라도 한 잔 하자꾸나, 하하.”

껄껄 웃던 장호건이 거실로 손을 뻗었고 우리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장모님은 안 계십니까?”

“집사람은 친정 갔네. 애들도 다 제 짝 만나러 나갔고.”

죄다 우리가 보기 싫어서 피한 것 같았지만 그 편이 나았다 싶었다. 마주쳐서 좋은 소리 나올 족속들이 아닌가? 속으로 쓴웃음을 짓던 내게 장호건이 물었다.

“자네 부친하고 모친은 뵙고 왔나?”

“네, 장인어른. 앞으로 하연이하고 잘생긴 아들, 예쁜 딸 순풍순풍 낳아서 찾아뵙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야···.”

넉살 좋은 미소를 띠며 대답하는 나와 달리 장하연은 내 소매만 살랑살랑 흔들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잘했네. 나나 두 사람 모두 이젠 내 딸이나 자네가 독거노인으로 살다 갈 걱정은 안 하겠어.”

우리 둘을 보며 껄껄 웃던 장호건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나저나 자네, 해동그룹 전략 컨설턴트가 됐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네, 장인어른.”

짤막한 대답에도 장호건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삼청동 사돈어른께서 애 쓰셨겠군. 자네만 집안 관례에서 예외로 쳐줄 수는 없으니 외부영입 형식으로라도 그룹 경영에 참여시키신 것 같네.”

아주 정확히 짚었다.

후계자가 되려면 밑바닥을 거쳐야 하는 집안 전통과 달리 밑바닥을 거치기엔 나란 놈이 너무나도 아까울 터. 그런 식으로라도 경영의 중심에 끌어들여야지 어쩌겠는가?

나도 아는 사실이었지만 아버지의 친구이고 장인어른이기에 나는 예의를 갖췄다.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감사는 무슨. 내가 삼청동 사돈어른이라도 그리 했을 걸세. 자네처럼 유능한 인재를 썩히는 건 경영자로서 죄 짓는 일이니 말이야, 허허.”

한참동안 이야기를 하던 장호건이 찻잔을 비우고 내게 말했다.

“자네, 나하고 서재 좀 올라가지.”

“네, 장인어른.”

무슨 일로 나를 따로 보자고 하는 걸까?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할 것 같은데.

***

장호건은 서재로 들어가자마자 진열장에서 위스키 한 병과 온더락 글라스 두 잔을 꺼내왔다.

“받게, 이 서방.”

“네, 장인어른.”

나는 두 손으로 잡은 글라스로 장호건이 따라주는 위스키를 받았다. 내 잔에 반절쯤 위스키를 채워준 장호건이 병을 내밀었다.

“나도 한 잔 주게.”

“예.”

나는 장호건에게서 건네받은 위스키를 그의 잔에 내가 받은 만큼 따라줬다. 장호건은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는 잔을 내밀었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장호건의 잔에 내 잔을 부딪친 나는 옆으로 몸을 돌리고 위스키를 단숨에 비웠다. 그 모습을 보던 장호건이 가볍게 입술을 축이고 껄껄 웃었다.

“자네 지금 내 앞에서 술 자랑하는 건가?”

“아닙니다, 장인어른. 서양 술이긴 해도 장인어른 앞이니 우리네 주도(酒道)를 지킨 것뿐입니다, 하하.”

너스레를 떠는 나를 보며 장호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부친 닮아서 넉살은 좋구먼, 허허.”

껄껄 웃던 장호건이 웃음을 거두고 내게 물었다.

“신성물산 자동차사업본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장인어른의 발목을 붙잡을 족쇄가 될 겁니다.”

자동차 애호가인 장호건의 속을 후벼 팔 말이었지만 나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을 던졌다. 장호건은 나를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흐음··· 역시나 그렇군.”

‘역시나? 자동차라면 사족을 못 쓰던 이 양반이 왜 이러는 거지?’

속으로 흠칫한 나를 보며 장호건이 말했다.

“신성의 자동차사업은 내가 봐도 실패했다고 보네. 외환위기도 있었지만 부산 공장 건설비용이 너무 컸어. 창원공장만 있었을 때는 수익이 제법 났었는데···.”

말끝을 흐리는 장호건의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묻어났다. 선발주자들의 등쌀 속에서도 꿋꿋하게 수익을 냈던 회사가 아닌가?

“그럼··· 어떡하실 생각이십니까?”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묻던 내게 장호건이 충격적인 대답을 내놨다.

“아도자동차, 아니 해동자동차에 매각하고 싶네. 전자와 물산만 끌고 가도 될까 말까인데 자동차까지 끌고 가다간 가랑이가 찢어질 테니 말이야.”

예상대로였다.

장호건은 공과 사도 철저히 구분했고 선택과 집중도 확실한 남자였다.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장호건에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해동그룹이든 스탠더드 캐피털이든 신성물산 자동차사업본부를 인수할 수 없습니다. 짐 덩어리 아닙니까?”

“짐 덩어리라··· 자네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하군.”

장호건이 쓴웃음을 지어도 사실은 사실이었다. 나는 거리낌 없이 장호건에게 말했다.

“가정사 이야기를 한다면 저는 장인어른의 사위 이성민입니다. 하지만 사업 이야기를 하는 이상 해동그룹 전략 컨설턴트 이성민으로서 대답드릴 수밖에요.”

물렁한 모습을 보여줄 이유도, 의지도 없었기에 독한 말을 날리는 것이었다. 장호건도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

“먼저, 신성물산 자동차사업본부를 신성자동차로 분리하십시오. 고려호텔 때처럼 완전자회사로 내리면 되실 겁니다.”

장호건이 뜨뜻미지근한 표정으로 날 보며 말했다.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장인어른. 그와 동시에 전자와 물산 계열에서 쥐고 있는 신세기그룹과 신성그룹 중공업 계열 채권을 양쪽에서 보유한 신성생명 주식과 맞교환하십시오. 다는 가져올 수 없어도 30퍼센트까지는 줄여놔야 합니다.”

전자와 물산 계열이 쥐고 있는 빚문서로 장호경과 장호민의 신성생명 주식을 가져오라는 제안에 장호건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리고 또?”

“채권과 주식을 교환한 뒤에 신성생명의 지분 가치를 최대한 끌어올리고 장인어른 지분 25퍼센트 중 20퍼센트를 신성자동차 채권단에게 출연해서 부채를 털어내십시오. 신성자동차 매각은 그 다음에 진행되어야 합니다.”

“20퍼센트를 출연하라고?”

장호건이 쥐고 있는 신성생명 지분 50퍼센트는 실명주식과 차명주식이 반반인 주식이다. 장호건은 내가 이 사실을 모를 거라 여길 테니 밑밥을 더 뿌려야했다.

“네. 20퍼센트를 출연해도 전자와 물산 계열이 처고모님과 처숙부님 쪽에서 가져올 주식에 장인어른 쪽 임원들이 쥐고 있는 주식까지 합하면 금융계열 지배력은 공고하지 않겠습니까? 부채 탕감과 신성생명 상장 모두 챙길 수 있으니 일거양득일 겁니다. 그렇게만 해주시면 해동그룹과 스탠더드 캐피털 양쪽을 설득해서 신성자동차를 인수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신성자동차의 부채 탕감에 내놓을 주식 20퍼센트는 장호경과 장호민에게서 가져올 주식으로 메우고, 부채 신성생명 상장까지 챙기라는 것이었다.

“흐음···.”

‘상장이 가능할지는 나중에 알게 되실 겁니다, 장인어른.’

나는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띠며 고민에 빠진 장호건이 내가 던진 미끼를 물길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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