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45th. 새해, 훈훈하면서 차가운 날 (1)
전주에서 서울로 올라온 배재훈은 이성민을 내려준 뒤, 성북동의 자기 저택으로 향했다.
“자네가 봤을 땐 어떤가?”
“누구 말씀이십니까, 부회장님?”
뜬금없는 질문에 벙찐 운전기사의 되물음에 배재훈이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이 이사 말일세. 우리 회장님 장손 말이야. 자네도 나하고 30년 됐으니 얼마만치는 볼 수 있지 않나?”
잠시 고민하던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배재훈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입을 열었다.
“말로만 들었던 게 사실일 줄은 몰랐습니다. 보통 이 이사님 또래의 재벌가 남자들이면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을 때가 아닙니까?”
배재훈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운전기사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도 이 이사님은 병원에서 퇴원하고부터 사고 한 번 안 내고 회사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준비한 사업들만 해도 잘은 모르겠지만 굉장히 얼개가 촘촘하게 짜여있었고요.”
“바이오시밀러 사업 말인가?”
배재훈의 질문에 운전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인간숙주세포를 비롯한 각종 동물세포의 배양기술 연구를 시작으로 단백질 생산 기술을 확보하면서도···.”
관절염 치료제인 레미케이드(Remicade), 유방암과 위암 치료제인 허셉틴(Herceptin), 림프종, 백혈병 치료제인 맙테라(Mabthera) 등 수요가 많은 항체 의약품을 찍은 것, 이에 필요한 연구인력 명단과 규모, 각각의 단계별 타임 테이블 등을 기억하는대로 말했다.
“부회장님을 모시면서 이것저것 주워들은 걸 비쳐봤을 때 이런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운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확신을 가지고 추진한다는 건···.”
“점쟁이는 아니니 공부가 철저했다는 뜻이겠지. 게다가 그 연구소와 공장을 전주에 세우겠다는 것만 해도 회장님 마음을 지극히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고.”
배재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떠나서 기억도 거의 없지만 고향에 늘 미련이 남아있는 이대수가 아닌가?
“나나 태 부회장, 조 부회장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우리 부친들이나 초대 회장님 모두 전주 출신이시지. 그런 그곳에 갈 때마다 왠지 모르게 허전했는데··· 이 이사가 그 허전함을 채워줄 것 같더군.”
배재훈의 읊조림에 운전기사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부회장님들 부친들께서도 초대 회장님과 동경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셨지요?”
“그렇다네. 초대 회장님 선친 덕분이었지. 그렇게 시작된 연이 벌써 우리들, 그리고 우리 자식들까지 이어지고 있고.”
세 부회장의 부친부터 시작된 인연은 세 부회장의 자녀들까지 해동그룹에 입사해 중간관리자로 일하면서 3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었다. 대답을 하던 배재훈이 피식 웃었다.
“남들이 보면 왕조국가의 신하들이냐고 비아냥거리겠지. 아무렴 어떤가? 우리가 떳떳하면 그만인 것을.”
빈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세 부회장 모두 혁혁한 공을 세워 그룹 수뇌부가 되었고, 그들의 자녀들은 입사시험 때부터 중간관리자로 올라올 때까지 한 번도 부모들의 도움을 안 받고 올라왔으니 말이다.
빙긋 미소를 띠던 배재훈이 상념에서 벗어났다.
“여하튼, 이 이사가 물건은 물건이지. 일도 일이지만 한 여자만 5년을 만난 것도, 그런 여자와 청춘사업하면서 그룹을 일으킨 것도, 시국이 어렵다고 혼인신고부터 올린 것도 보통 재벌가 놈들이면 어림도 없으니 말이야, 허허.”
껄껄 웃는 배재훈의 얼굴을 백미러로 보던 운전기사는 미소를 띠었다.
‘부회장님께서는 도련님을 삼청동 서재의 다음 주인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군.’
운전기사의 생각대로 배재훈은 이성민에 대한 평가를 끝냈다.
‘그놈이야말로 형님 다음으로 삼청동 서재에서 이 나라를 내려다볼만한 놈이다. 이 배재훈이 말고도 재호, 영찬이, 명진이, 그리고 먼저 간 명우 숙원까지 이룰만한 놈이야.’
[장사꾼 집안의 장손으로서 우리 식구들이 잘 만든 물건 잘 팔아오는 게 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걱정 말고 연구에 전념해서 성과를 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전주의 섬유방직공장과 연구소에서 보여준 이성민의 단호한 의지가 배재훈의 뜻을 결정한 것임은 그만의 비밀이었다.
***
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나는 고려호텔로 가서 장하연과 1997년의 마지막 밤을 뜨겁게 보내면서 1998년 새해를 맞았다.
“한복, 안 입어도 돼?”
“안 입어도 돼. 우리 집, 그렇게 꽉 막힌 집 아니야.”
시댁 식구들에게 처음으로 새해 인사를 올리러 가는 탓인지 단정하게 잘 차려입은 장하연이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귀엽게만 보였다.
차를 타고 삼청동 서재에 도착한 우리는 뒤이어 도착한 이명진 가족을 맞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숙부님. 숙모님.”
소파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간 우리는 이명진 내외에게 인사를 올렸다.
“오, 그래. 우리 성민이하고 조카며느님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하하.”
“새해 복 많이 받으렴, 성민아. 우리 조카며느님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호호.”
이명진 내외는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서 소파로 갔다. 그 뒤를 이어 들어오는 세 남매를 보며 우리는 인사를 올렸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얘들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도련님들, 아가씨.”
우리 인사를 받자마자 가장 앞에 있던 우람한 체격의 이성문, 날렵한 체격의 이성우가 빙긋 미소를 띠었다.
“새해 복 많이 받아, 형. 형수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뒤이어 들어온 우리 집안 막내 이성아도 인사를 올렸다.
“새해 복 많이 받아, 오빠. 언니도 새해 복 많으세요, 후훗.”
2020년대에 나올 아이돌도 쌈 싸먹을 것처럼 생긴 막내사촌여동생이 싱긋 미소를 띠며 인사를 하자 장하연이 미소를 띠었다.
한 차례의 인사를 마친 우리는 이명진 내외를 선두로 할아버지가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아버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버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할아버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할아버님.”
이명진 내외를 앞에 세운 우리는 뒤에서 단체로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렸다.
“오냐, 우리 아범, 어멈도 새해 복 많이 받고 우리 강아지들도 새해 복 많이 받거라, 으허허.”
껄껄 웃던 할아버지는 늘 그랬던 것처럼 한쪽 팔을 걸쳐뒀던 장침(長枕) 밑에서 신권(新券)이 한 장씩 담긴 흰 봉투 일곱 개를 꺼내 우리에게 하나씩 건네주고 덕담을 시작했다.
“우리 아범은 올해에도 사업 번창하길 바라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명진의 굳건한 표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할아버지가 숙모에게 말했다.
“어멈은 평소대로 보육원에서 어렵고 힘든 아이들 잘 도와주고.”
“예, 아버님.”
그 다음에는 나에 대한 덕담이 나왔다.
“성민이는 이제 가장 됐으니 일도 열심히, 며늘아기 건사하는 건 더 열심히 해야 할 게야.”
“예, 할아버지.”
“며늘아기는 이제부터 우리집안 사람이니 가족들 어려워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새 식구가 된 장하연까지 다독여준 할아버지는 내 첫째 사촌동생인 이성문에게 덕담을 건넸다.
“성문이는 학부 잘 마치고 석사 준비 잘 하거라. 네 형수처럼 참한 여자친구 있다고 업에 소홀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자친구를 사귀다니··· 요놈의 자식, 털어봐야겠는데?’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 둘째 사촌동생인 이성우에게도 할아버지의 덕담이 날아들었다.
“성우도 학부 공부 잘하면서 건강관리 잘 하거라.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할아버지.”
이성우의 맑은 목소리를 듣고 할아버지가 우리 집안 막내에게 말했다.
“우리 막내는 대학 가서 오라비들 기준 삼아서 좋은 남자 만나거라. 알았지? 으허허.”
“할아버지도 참···.”
수줍은 미소를 짓는 이성아를 끝으로 모든 덕담을 마친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도 끝났으니 새해 첫 상 받으러 가자꾸나.”
문을 나선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우리 모두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 하연이, 우리 집 새해 첫 식사 문화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
식탁에 앉은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떡국을 비웠다. 신성그룹 장 씨 집안의 식탁과 다른 분위기 탓인지 장하연은 얼굴에서 위화감을 지우지 못했다.
“왜 그러느냐, 아가야? 어디 불편한 게냐?”
“아, 아닙니다, 할아버님. 이렇게 화목한 식탁은 처음이라···.”
말을 잇지 못하는 장하연에게 할아버지가 푸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는 네 집이고 네 가족이니 편하게 하거라. 인자부터는 우리 식구 아니냐, 으허허.”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껄껄 웃는 할아버지를 보며 장하연이 물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핀 걸 보니 무슨 감정인지 알 것 같았다.
‘냉기만 부는 밥상만 받다가 우리 집안 밥상을 받으려니 오죽하겠냐마는···.’
장하연을 보며 속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사이에도 우리 가족의 대화는 계속 됐다.
“형수님은 어떤 거 좋아하세요?”
이성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장하연이 당황했다.
“네?”
“취미생활이요. 저는 CAD로 설계한 거대로 쇠 깎아서 조립하는 거 좋아하거든요, 하하.”
“아하하하···.”
소탈하게 웃는 저놈 때문에 나는 헛웃음만 나왔다.
‘이놈의 자식, 쇳덩이 주물떡 거리는 거에 환장한 건 못 속여가지고!’
이성문은 기계공학과를 다니면서도 금속공학 관련 강의까지 듣고 있었다. 그게 다 쇳덩어리로 지가 원하는 물건 만들려고 저러는 거니 나를 제외한 우리 집안 4세들 중 덕업일치 1호였다.
“아···.”
이성문의 소탈한 웃음에 장하연이 나지막이 흘리던 탄성을 멈췄다.
“저는 원래 미대 들어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개인 작업실에서 회화를 그리거나 소조를 한다고 말하자 이성문의 눈이 반짝거렸다.
“와, 정말요? 저희도 가끔씩 거푸집 만들어서 부품 떠내는데.”
“원리는 똑같으니까요. 나중에 도련님하고 금속 소조 한 번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후훗.”
그 뒤로도 이성우나 이성아도 장하연과 미술 관련 이야기나 대학 축제 이야기를 하면서 긴장을 풀어주려 애썼다. 고마운 녀석들.
할아버지와 이명진, 숙모, 그리고 나는 정답게 얘기하는 넷을 보며 식사를 계속했다.
“자, 인자 뒷정리를 해야겠구나. 아범아.”
떡국을 비우고 숟가락을 내려놓은 할아버지의 부름에 이명진이 대답했다.
“예, 아버지. 당신하고 조카며느님, 성아는 소파에서 쉬고 있어. 우리가 뒷정리할게. 얘들아.”
“네, 숙부님.”
“네, 아버지.”
이명진과 나, 이성문, 이성우는 약속한 것처럼 짧게 대답하고 셔츠 소매를 둘둘 만 뒤, 넥타이를 포켓에 넣고 식기를 걷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장하연이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하, 할아버님?”
“우리 집안 전통이다. 새해 첫 상 뒷정리는 집안 남자들이 하니 잘 알아두려무나, 허허. 안 그러냐, 어멈아?”
껄껄 웃는 할아버지에게 숙모가 대답했다.
“그럼요, 아버님. 우리 조카며느님도 앞으로 잘 기억해둬요. 알았죠?”
“네··· 숙모님.”
“빨리 가요, 언니. 거실 가서 고려호텔에 걸린 그림 이야기 해줘요.”
얼떨떨해하던 장하연은 팔짱을 끼며 조르는 이성아를 보고 싱긋 미소를 띠었다.
“네, 아가씨.”
시베리아 같은 신성그룹에서 벗어났으니 이젠 햇볕 가득한 우리 집안에서 마음이 녹았으면 좋겠다. 내 사랑.
***
설거지를 마친 우리 가족은 셋으로 나눠서 장소를 옮겼다. 할아버지는 이명진 내외와 함께 안방으로 들어갔고, 장하연과 이성아는 1층 손님방으로 들어갔다. 나와 이성문, 이성우는 다른 손님방으로 들어가서 다과를 먹고 있었다.
“너희 형수, 어떠냐?”
차 한 모금을 마신 내 질문에 이성문이 피식 웃었다.
“결혼하면 다 형처럼 팔불출 되는 거야?”
“짜식이! 뭐··· 너희 형수 정도 되는 여자면 팔불출 돼도 괜찮지 않겠냐? 흐흐.”
낄낄 웃는 나를 보며 이성문이 어깨를 으쓱했다.
“형수가 예쁘긴 하지. 그래도 난 우리 영란이 밖에 없어.”
“동양일보 조 사장님 첫째 딸이라고?”
고개를 끄덕인 이성문이 녹차 한 모금을 마시고 입을 열었다.
“미팅 때 만났는데 애가 꽤 당차더라고. 오밀조밀하니 예쁘기도 하고. 저번 대선 때 동양일보에서···.”
헨리가 김 후보에게 방문했을 때 실었던 기사를 썼던 조영란이 이 녀석 여자친구였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할아버지, 아예 동양일보와 가족이 되려는 건가? 사돈이라는 이름으로.
나한테 팔불출이라고 했던 이성문은 쉴 새 없이 조영란에 대한 자랑을 늘어놨다. 확실히 대단하긴 대단해서 탄성이 절로 나왔다.
“대단하네. 휴학계까지 내고 수습기자를 하다니.”
“자기 아버지 덕분에 하긴 했는데 아무도 태클 못 걸어. 고등학교 때 전국학생문예축전에서 수필 부분 금상 탔거든.”
모르는 체하고 말한 나는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이성문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도 우리 집안 남자긴 하구나, 흐흐.”
“응? 무슨 소리야?”
어리둥절해하는 이성문과 달리 약과를 우물거리던 이성우는 옆에서 무슨 소린지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키득거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도 돌아가신 할머니 그리워하시고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도 어머니 많이 사랑하셨어. 숙부님까지 숙모님 사랑이 지극하시니 너도 똑같단 말이지, 흐흐.”
씩 웃는 나를 보며 이성문이 툭 내뱉었다.
“남 말 하지 마, 형. 형수님 옆에 있다고 식사하는 내내 입꼬리가 귀에 걸릴 것 같던 양반이? 흐흐.”
서로를 보며 씩 웃던 우리는 조용히 녹차를 마시고 있던 나머지 한 놈을 보며 물었다.
“넌 언제 여자친구 만들 거냐?”
“나? 사귀고 있는데?”
심드렁한, 그러면서도 자신감 있는 이성우의 대답에 우리 둘 다 벙찐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니가? 모터 연구에만 매달리는 니가?”
“너 인마! 여자친구, 언제 사귄 거야?”
나와 이성문의 질문에 이성우가 피식 웃었다.
“연구실에서 선배나 교수님하고 모터 연구하다가 만났어. 얼굴도 예쁜데 나하고 얼마나 잘 맞는지 몰라, 흐흐.”
이성문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놈의 새끼, 덕업일치 2호인 건 못 속이겠다.
***
안방에서 차를 마시던 이대수는 이명진 내외와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 성문이 녀석은 석사 따고 전문연구요원 들어갈 거라고?”
“예, 아버지. 올해 안에 산업설비기사 따고 대학원 석사 마치면 지원할 거라고 했습니다. 기왕 치러야 할 병역이면 경력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이명진의 대답에 이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손인 이성민이야 자동차 사고로 몸이 만신창이가 됐던 터라 군 면제를 받았지만 둘째 손주와 셋째 손주는 꼼짝없이 군대에 가야 했다. 이대수 본인도 통역장교를 했었고, 이명우와 이명진도 기어코 병장을 찍고 만기제대하지 않았나?
“그 편이 좋겠구나. 두 녀석이야 해외 경진대회 나가서 입상도 했으니 제 녀석들 실력으로 전문연구요원도 충분히 할 게다. 그리하면 대리로 시작해도 뭐라 할 놈들은 없겠지.”
“예, 아버지. 그리고···.”
말끝을 흐리던 이명진의 눈짓에 이명진의 부인 정유민이 입을 열었다.
“성우가 여자친구를 사귈 기미가 통 안 보여서 저희가 손을 썼습니다, 아버님.”
“뭐라고?”
이대수의 눈이 커지자 이명진이 얼른 말을 이었다.
“성우 이 녀석, 강단에 있는 선후배들한테 들었는데 강의 끝나면 연구실에서 모터 연구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우랑 같은 과에서 괜찮은 아이를 찾아서 붙여줬는데···.”
해동중공업 중전기 사업부와 연관된 협력업체 사장의 딸이라는 걸 듣고 이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사지육신 멀쩡한 내 새끼가 애인 한 명 없으면 안 돼지. 서로 잘 돼서 적당히 때 되면 식 올려주도록 해.”
“예, 아버님.”
다 큰 자식손주 연애사까지 챙겨주느라 바쁜 이대수와 이명진 내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