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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153화 (152/229)

153화. 44th. 도장깨기 part.1 (7)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까지 해먹지는 않았었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해봐.”

배재훈의 말대로 해동그룹은 다른 재벌들에 비하면 정말 점잖은 편이었다. 배재훈의 질문이 무슨 의도로 나왔는지 알아챈 걸까, 해동물산 감사팀장이 재깍 말했다.

“경영지원과 생산계통의 임원들은 대부분 잘라내야 합니다. 밑에서 부역한 간부들도 징계처리를 해야 하고요. 대신에···.”

기존의 해동그룹에서 승진시켜야 할 사람들 일부를 보내는 것 외에도 옛 신성그룹과 태현그룹 시절부터 실력도, 자세도 좋지만 소외받던 이들을 대거 승진시킬 것을 권했다.

원하는 대답이 나와서일까 배재훈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때일수록 정석대로 가야지. 해동정유, 해동석유화학, 해동정밀화학 모두 새 식구이니 우리 식이 뭔지 보여줄 겸 말이야. 이 이사는 어떤가?”

“외환위기 덕분에 정리해고에 대한 거부감도 옅어졌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쓰레기 같은 놈들을 치우고 제대로 일을 할 사람들을 끌어올릴 기회가 없을 겁니다.”

‘발톱 하나만 보여줬을 뿐인데 벌써부터 쫄다니, 후후.’

곱상한 얼굴에서 이런 과격한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두 감사팀장이 입을 떡 벌렸다. 나는 싸늘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어갔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유지보수는 앞으로 해동중공업과 해동건설에서 맡아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 계열사인데 신성과 태현에 돈 새나가는 걸 볼 수는 없습니다.”

내부거래는 둘째 치고 공장 유지보수를 악용해서 태현과 신성이 정도 이상의 폭리를 취한 게 괘씸했다.

해동건설과 해동중공업이 유지보수를 맡으면 지금보다 적은 비용을 지출하면서 석유화학계열의 정상화도 앞당길 수 있으니 과감하게 끊어내야 한다.

“그래야겠지. 멀쩡한 우리 계열사 놔두고 엄한 놈들한테 바가지 쓸 수는 없으니까. 다른 건 없나?”

“유상증자를 할 때 채권단과 협상해서 부채를 재조정해야 합니다. 금리 인하에 만기 연장··· 필요하다면 해외기업에 판다고 공갈을 쳐서라도 일부 탕감까지 끌어내야 합니다.”

“예?”

놀라는 두 감사팀장을 나는 심드렁한 표정을 바라봤다.

“외환위기는 지금껏 분수도 모르고 대출 받아서 회사 늘린 재벌과 그 장단에 맞춰 돈 꿔준 은행들, 재벌과 은행을 통제하지 못한 정권에서 잘못한 일입니다. 우리가 돈이 많아도 무조건 다 갚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래도···.”

“지금은 돈 많은 놈이 판을 리드하고 있습니다. 우리 해동은 이 판에서 돈이 가장 많고요. 인맥도 안 밀리는데 주눅 들 거 없습니다.”

지금의 해동그룹 임직원에게 가장 부족한 건 자신감이었다. 재계 1위가 되고 군림할 수 있다는 그 자신감을 심어주는 게 나와 배재훈을 비롯한 그룹 수뇌부의 숙제였다.

“거만해보이면 안 되겠지만 정당한 요구도 못하면 호구 소리 듣습니다. 저는 우리 해동이 호구 잡히는 거 절대 못 봅니다.”

“나 또한 이 이사 말에 공감하네. 덩치가 커졌는데도 할 말 못하면 얕보이기 십상이야. 이 이사 말대로 협상을 진행하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배재훈의 질문에 해동물산 감사팀장이 잠시 침묵하더니 재빨리 입을 열었다.

“구체적인 조건을 맞춰봐야겠지만 채무상환 조건을 재조정하기만 해도 경영정상화 속도가 최소 1년 이상 빨라질 겁니다.”

“그렇습니다, 부회장님. 우리가 유지보수 공사를 맡으면 신성과 태현이 챙겼던 액수의 절반만 받아도 해동중공업과 해동건설, 석유화학 부문 모두 이익을 보게 됩니다.”

“알겠네.”

해동중공업 감사팀장까지 가세하자 고개를 끄덕이던 배재훈이 해동물산 감사팀장에게 말했다.

“자넨 석유화학계열 임원들부터 부장급 관리직, 노조 지도부 인사카드 체크해서 괜찮은 놈들만 추려봐. 작업 끝나면 밥도 먹이고 술도 먹이고··· 잘 다독여서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

“네, 부회장님.”

해동물산 감사팀장의 대답을 들은 배재훈은 옆에 있던 해동중공업 감사팀장에게 눈을 돌렸다.

“자네는 데리고 온 친구들하고 공장 실태 파악하는 대로 설계도 들고 서울로 돌아가게. 관련 부서 담당들하고 유지보수 견적 다시 뽑아서 본사로 보내.”

해동중공업과 해동건설의 실력이면 유지보수 비용을 효율적으로 뽑아낼 것이다. 안전관리를 위한 비용이라면 몰라도 허위 노동자에 허위 공수, 자재비 부풀리기 따위로 눈 먼 돈이 나가는 짓은 용납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게.”

배재훈과 대답을 주고받은 두 감사팀장이 사무실을 나갔다. 바닷바람보다 매서운 칼바람이 대산석유화학단지를 수술할 것이다.

그렇지만 수술만으로는 해동그룹 석유화학계열을 살리는 속도가 느리다. 보다 획기적인 재활과 영양공급이 필요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부회장님.”

“말하게.”

“지금 결정한 조치들은 응급조치일 뿐입니다. 추가조치가 필요합니다.”

“추가조치라···.”

배재훈이 말끝을 흐리는 틈에 나는 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꺼냈다.

“그게 뭔가?”

“해동정유의 회생방안입니다. 필요 이상의 급여 삭감이나 정리해고는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십니다, 하하.”

회생방안이라는 말에 눈매가 날카로워진 배재훈을 보며 나는 너스레를 떨었다. 그때서야 표정을 푼 배재훈은 내게서 받은 서류의 표지를 넘기고 내용을 살펴봤다.

“원유 트레이딩?”

“네. 작년 하반기 일 때문에 동아시아권 경제가 초토화됐습니다. 환율도 뛰어서 주유소 기름 값까지 올랐으니 일시적으로나마 수요도 줄어들고, 원유 값도 떨어질 수밖에 없죠.”

엑손과 모빌, 셰브런 등의 석유 메이저들은 세계 각지의 유전에서 채굴하는 원유 성분과 각종 부산물 종류를 분자구조까지 파악해서 석유화학산업 수요공급 동향과 연동시키는 등 과학적인 기법으로 트레이딩을 한다.

허나 빚 갚을 여력도 없는 해동정유에겐 언감생심.

그래서 내가 준비한 자료는 글로벌 석유 수요와 공급에 기초한 거시적 전망이었다.

“더군다나 걸프전 종전 후 이라크에 가해졌던 원유수출제재가 내년부터 해제됩니다. 그간 시장에서 사라졌던 이라크 산 원유가 시장에 풀리면···.”

배재훈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을 내놨다.

“유가가 폭락하겠군.”

“네. 그러니 재고물량은 당분간 두 달분만 비축해둬야 합니다. 계속 값이 떨어질 재고를 무작정 쟁여둘 수도 없으니까요. 그와 동시에 석유 시장에서는 선물 매도-현물 매수로 재고가치 손실을 보전하면서 차익도 남겨야 합니다.”

제철소나 정유공장, 화학공장은 재가동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어서 1년 365일 쉼 없이 돌려야 한다. 당연히 원유를 계속 수입해야 하는데 유가가 떨어지면 재고가치가 하락하면서 회계장부상 마이너스 처리가 된다.

‘지금의 해동정유는 그 재고가치 하락 손실도 용납할 수 없어. 손실을 메우고 돈을 벌려면 원유 트레이딩이 답이야.’

돈놀이에 이골이 난 나로서는 해동정유의 원유 트레이딩이 최선의 회생방책이었다. 원유 선물을 먼저 팔고 나서 만기가 돌아오는 선물을 상환 시점에 현물로 사서 갚으면 차익을 내서 재고가치 손실을 메울 돈을 벌 수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11월까지는 계속 매도 포지션으로 거래하면 손실은 메울 것 같군. 9월로 넘어갈 때 동절기 수요로 잠깐 반등하니까 그때만 조심하면 되고··· 11월에 몽땅 쟁여놔야지.’

계획은 완벽하다. 이번 1년 농사만 제대로 지어놓으면 해동정유는 무조건 살려놓을 수 있었다.

묵묵히 서류를 살펴보던 배재훈이 손에 쥔 서류를 내려놓고는 굳은 눈빛으로 날 보며 말했다.

“중동 법인 녀석들도 유가 하락 전망 리포트를 올려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자네까지 그리 말한다면 더 이상 볼 것도 없겠지. 물산 상사부문에서도 트레이딩에 나서겠네.”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이걸로 한 고비는 넘기겠군.’

해동정유가 돈을 벌어오면 해동정유의 100퍼센트 자회사인 해동석유화학과 해동정밀화학도 숨통이 트인다. 급한 불을 끄게 됐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

그 뒤로도 회사를 둘러본 우리는 전주로 내려가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 일찍 섬유방직공장으로 갔다.

다른 직원들처럼 방진복과 마스크를 둘러쓴 나와 배재훈은 공장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자네는 처음 왔겠지만 이곳은 우리 해동그룹의 정신적인 고향이네. 회장님께서도 이따금씩 이곳에 들르시곤 하지.”

“그러셨군요. 그런데··· 저건 뭐죠?”

실뭉치들이 부지런히 돌아가면서 짜는 원단을 부지런히 롤링하는 직조기들을 가리키자 배재훈의 표정에 뿌듯함이 번졌다.

“스판덱스 원단일세. 지난 96년 3월에 국내 최초로 국산화에 성공했지. 우리 때문에 호성그룹 놈들이 닭 쫓던 개 꼴 됐었다네, 흐흐.”

“네?”

낄낄 웃는 배재훈과 달리 나는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해동물산 내부 자료 중에서도 섬유소재 연구소 자료는 접근권한이 있는 사람들만 열람할 수 있어서 알지 못했는데 우리가 최초로 스판덱스를 국산화했다니? 원래대로면 호성그룹이 97년도에 처음으로 국산화했을 텐데···.

‘나비효과 때문인가···.’

그것 외에는 설명될 방법이 없었다.

금융실명제 때 우리 집안의 재산을 지켰고, 재작년 엔고투기로 막대한 수익을 내면서 투자에 여력이 생기지 않았나.

‘그러겠네. 부산 북항 화물터미널도 그때쯤에 인수했고, 신항만 화물터미널 지분까지 땄으니···.’

그간의 사업을 짚으며 나름의 결론을 내린 내 모습을 보고 배재훈이 피식 웃었다.

“새삼스럽게 뭘 그리 놀라나, 이 이사? 자네가 4년 전에 그룹 재산 지키고 재작년에 돈 벌어온 덕분에 예산 팍팍 늘려서 나온 작품인데.”

“그러셨군요, 하하.”

내 생각대로 나비효과가 맞았다. 나는 그저 배재훈의 장단에 맞춰 웃기만 했다.

돈을 버는 게 무조건 나쁜 게 아니다. 돈을 수단으로 생각하냐, 목적으로 생각하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지 않나? 나는 돈을 수단으로 여기면서 돈을 지켰고 돈을 벌어왔으니 좋은 보람을 맛본 셈이었다.

공장을 둘러본 우리는 이 공장의 핵심인 연구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내 손에 쥔 새까만 노끈뭉치를 보고 입을 벌렸다.

“이걸··· 연구하고 있었다고요?”

그 노끈뭉치는 탄소섬유였다. 의류용 기능성 소재 정도만 연구하고 있을 줄 알고 계획서로 짜왔는데 내 걱정은 기우였다.

“허허, 우리 이 이사가 많이 놀랐나보군.”

“저도 탄소섬유 같은 첨단소재를 연구해야 섬유소재 사업이 지속될 거라 여겼습니다, 부회장님. 제가 준비한 것도 봐주시죠, 하하.”

넉살 좋게 웃던 나는 곧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배재훈에게 내밀었다.

“호오, 그래? 우리 이 이사가 얼마나 준비했는지 봐야겠군.”

내게서 받은 서류를 보던 배재훈의 눈이 커졌다.

“아라미드(Aramid)까지? 이걸 자네가 어떻게 알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회장님?”

“10여 년 전부터 섬유소재 연구소에서 추진한 핵심 프로젝트가 세 개였네. 하나가 작년 초에 끝난 스판덱스 국산화였고 나머지 두 개가 탄소섬유와 아라미드인데··· 우리 이 이사가 그룹 살림 키우는 데 관심이 많았구먼, 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배재훈과 달리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다들 알게 모르게 오래 전부터 노력해왔는데 전생의 나란 놈은 드러난 것만 보고 집안을, 그룹을 버리지 않았나?

‘이번 생에는 무조건 성공한다. 무조건!’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지는 나를 보며 연구소장이 푸근한 미소를 띠었다.

“재작년부터 예산이 늘어나면서 연구원들을 충원한 덕분에 스판덱스 국산화 연구도 예정보다 빨리 끝났습니다, 이사님. 지금은 탄소섬유와 아라미드 연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연구소장을 보며 배재훈이 손을 내저었다.

“여기 있는 연구원들이 쌔가 빠지게 고생하고 있지. 이 친구들이 탄소섬유하고 아라미드 국산화만 성공하면 전주공장 일자리는 너끈히 지킬 걸세.”

‘일자리를 지킨다고요? 몇 배는 늘어날 겁니다!’

뿌듯한 표정으로 말하는 배재훈에게 나는 소리 없는 비명만 질렀다.

탄소섬유나 아라미드 모두 사용처가 무궁무진한 소재다.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데다 폭발 시 파편 위험이 낮은 특성 때문에 자동차, 우주항공, 방탄헬멧, 건축자재, 연료탱크 등에 두루 사용되어 ‘꿈의 첨단소재’라 불리지 않는가?

탄소섬유와 아라미드만 생산하면 우리 공장 일자리도 더 늘어나고, 다른 회사들도 일자리가 늘어난다. 장밋빛 미래에 취해 있던 나는 취기를 떨쳐내고 연구소장에게 물었다.

“둘 다 국산화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이르면 내후년까지, 늦어도 2000년까지 완료할 계획입니다, 이사님.”

“가능합니까?”

“연구원들이 더 충원되고 자금만 지원되면 가능합니다.”

연구소장의 확답을 들은 나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탄소섬유 품질은 어느 정도입니까? 일본 도레이(東レ) 사 기준으로요.”

연구소장이 내 눈을 보고 흠칫했다. 너무 노골적으로 보였을지는 모르겠지만 배재훈의 눈짓을 받고 연구소장이 입을 열었다.

“도레이에서 비밀리에 개발했다는 T1000급까지는 라인업을 갖출 수 있습니다.”

“T1000급이요?”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T1000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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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탄소섬유 산업을 주도하는 일본에서 1등을 지키고 있는 도레이 내부 기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T300/T500 : 골프채, 테니스 라켓, 자전거 등

T700 : 자동차 부품이나 연료저장탱크

T800/T1000 이상 : 우주항공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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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T1000이면 항공기 동체 제작에 써먹어도 부족함이 없는 고부가가치 소재였다.

‘T1000급 탄소섬유는 2020년까지 호성그룹에서도 만들지 못했는데···.’

나도 모르게 이런 초특급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다니··· 바보가 된 기분에 허탈한 미소만 그려졌다.

“우리 이 이사가 이만저만 충격이 큰 게 아닌 것 같군. 하하.”

껄껄 웃는 배재훈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미래를 겪고 돌아온 내 심정을 아냐고 소리치면서.

어쨌든.

덕분에 정신을 차린 나는 배재훈에게 말했다.

“최대한 빨리 개발해야 합니다, 부회장님. 생산라인도 대규모로 갖춰야 하고요. 적어도 연간 2만 톤은 생산할 수 있도록 설비를 갖춰야 합니다.”

“2만 톤?”

나를 보는 배재훈의 눈빛이 미친놈을 보는 눈빛으로 바뀌었다.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해마다 2만 톤 뽑을 라인 갖추려면 5천억 이상 써야하는데? 설사 설비를 갖춰도 그 물량을 어떻게 다 소화할 생각인가?”

“부회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사님. 그 정도 고품질 제품은 사용처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배재훈뿐만 아니라 연구소장도 뜯어말렸지만 난 지금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돈이야 벌어오면 되는 게 아닌가?

“한꺼번에 2만 톤급 설비를 갖추자는 게 아닙니다, 부회장님. 시험 라인부터 설치하고 현장 직원들도 교육시켜야죠.”

흥분을 가라앉히고 계획을 풀기 시작하자 배재훈과 연구소장, 연구원들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그들을 보며 계속해서 내 계획을 알려줬다.

“그럼에도 T1000급이면 분명히 돈이 될 아이템입니다. 한꺼번에 갖추지는 못해도 생산라인 증설은 꾸준히 추진돼야 합니다.”

생산라인 확대를 강조한 나는 이를 악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일본 놈들 밥줄은 내가 끊어놓는다.’

도레이는 2006년부터 2024년까지 보잉과 탄소섬유 독점납품 계약을 하면서 총 17조 원의 매출을 확보한다. 그 밥그릇, 우리가 가져와야 한다.

나를 보던 배재훈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가 봐도 이 탄소섬유가 돈 되는 아이템이라는 건가?”

“물론입니다, 부회장님. 부회장님께서 밀어만 주시면 보잉이나 에어버스 같은 고객들은 제가 물어오겠습니다.”

“보, 보잉?”

“에어버스요?”

내 입에서 나온 두 회사 때문인지 배재훈, 그리고 연구소장을 비롯한 연구원들이 입을 떡 벌렸다. 나는 그들을 보며 물었다.

“이렇게 좋은 소재를 개발하고 계시면서 그 정도 거래처도 생각하지 않으신 건 아니시죠?”

“그, 그건 아니지만···.”

다들 주저하는 모습을 보고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솔직히 저는 과학이나 기술 쪽은 일자무식이라 아무것도 모릅니다. 다만.”

잠시 말을 끊은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장사꾼 집안의 사람으로서 우리 식구들이 잘 만든 물건 잘 팔아오는 게 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걱정 말고 연구에 전념해서 더 좋은 성과를 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폴리케톤 같은 소재 연구 가이드라인은 넘겨준 계획서에 실려 있으니 나머지는 이 양반들에게 맡겨야겠다.

이 정도면 알아서 잘 할 테니 차근차근 영업 뛸 준비나 해야지. 보잉하고 에어버스 지분은 새천년 지나고부터 사 모으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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