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148화 (147/229)

148화. 44th. 도장깨기 part.1 (2)

다음 주 월요일 아침.

일요일 밤을 화끈하게 불살랐던 나와 장하연은 아침이 되자마자 용산구청에 가서 혼인신고서를 접수했다.

“이제야 누나한테 도착했네.”

“그러게. 참 길었어.”

손을 잡고 구청을 나온 우리는 서로를 애틋한 눈길로 바라봤다.

5년에 걸린 마라톤 끝에 난 장하연, 장하연은 나라는 목적지에 다다랐고, ‘부부’라는 테이프를 통과했다. 마음만 먹었으면 빨리 다다를 수 있었지만 해야 할 일들이 많았기에 이제야 결승점을 통과한 것이었다.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보던 장하연이 물었다.

“오늘부터 그룹 전략 컨설턴트 됐다고?”

“응. 아버지나 숙부님처럼 말단부터 시작하지는 못했는데 부회장님들하고 사업 현안 검토하라는 게 그룹 경영에 빨리 참여시키려고 하신 것 같아.”

내 대답에 장하연은 싱긋 미소를 띠었다.

“우리 서방님, 앞으로 많이 바빠지겠네? 선배님도 이번에는 안 도와주신다며?”

“형은 이번 일에서 빠지기로 했어. 내년부터 전무 명패 받으니까 인수인계 받을 게 많나봐.”

말은 그렇지만 어째··· 나 혼자 구르게 하려고 박태진을 떼어놓은 것 같았다. 박태진이 나이를 초월한 내 소울메이트라는 걸 제일 잘 알고 있을 할아버지가 박태진을 떼어놓다니··· 나는 입맛을 다시고 장하연에게 말했다.

“누나도 고려호텔 가져와서 해동물산에 합치면 많이 바빠질 거야. 우리 집안, 오너라고 봐주는 거 없거든. 후후.”

보는 일이 다르고 일하는 장소가 다를 뿐, 우리집안 사람들은 절대 노닥거리는 일이 없었다. 전업주부인 숙모님도 사촌동생들과 함께 천주교 산하 재단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 주기적으로 나가서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가. 앞으로는 나도, 장하연도 하루하루 쉼 없이 일하며 그룹을 키워야 했다.

나와 장하연은 차를 몰고 고려호텔 본점에 도착했다. 본점 로비에 도착한 나는 장하연을 배웅해줬다.

“힘 내.”

“너도.”

나는 호텔 안으로 사라지는 장하연을 보며 흔들던 손을 내리고 운전석 문을 열었다. 그때였다.

“어이, 매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장용재가 로비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는 도어맨에게 차 키를 넘겨주고 로비로 들어갔다.

“장 상무한테 얘기 들었다. 혼인신고 하고 왔다며?”

장용재의 얼굴에서 얕잡아보는 기색이 확 느껴졌다. 장하연을 ‘장 상무’라고 부르는 것까지 두 배로 거슬렸다.

하지만.

아직은 저놈과 대놓고 각을 세우기엔 때가 너무 일렀다. 아직은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내 발톱과 송곳니를 숨겨야 했기에 겸연쩍은 미소를 띠었다.

“나나 누나나 어릴 때부터 소꿉친구였잖아. 그러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네.”

“아쉽네. 난 네가 수연이하고 잘 되길 바랬는데.”

장용재도 이젠 제법 표정관리가 되는 것 같았다. 그 연기력은 높이 사줄만하지만 내가 너희들 머리 위에 있다, 새끼야.

“어쩔 수 없잖아. 난 그때 하연 누나하고 일로 만난 건데 수연 누나가 나한테 못 보일 꼴 보여서 스스로 포기했으니.”

3년 전의 백화점 컨설팅 때 일을 거론하던 나는 저놈이 속으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장용재는 그런 내 표정을 보면서도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하긴··· 내 동생이지만 참 한심했지. 우연히 마주쳤겠지만 경쟁자가 있는데도 멍청하게 추잡한 꼴이나 보이고 다녔으니.”

오히려 내 입장을 이해한다는 듯 관대한 체까지 한다. 지가 무슨 영화 ‘300’의 크세르크세스도 아니고.

장수연에 대한 감정을 한숨으로 드러낸 장용재가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건 그렇고, 그런 대박 투자였으면 나한테 더 잘 알려주지 그랬냐? 알려줬음 없는 돈도 만들어서 몰빵했을 텐데.”

“금융시장이라는 게 널뛰기 같은 곳이잖아. 그냥 큰물에서 놀고 싶어서 나선 것뿐인데 나도 그렇게 일이 터질 줄은 몰랐지. 다 알면 신이게?”

장용재는 내가 대답하는 와중에도 나를 보며 내 생각을 읽으려고 애썼지만 어림도 없다. 스탠더드 캐피털이 내 회사라는 걸 알지 않는 이상 나를 읽는 건 불가능했다.

그 뒤로도 장용재는 나에 대해 캐내려고 애를 썼지만 모르쇠로 일관하는 나를 뚫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알았다. 그래도 너, 장 상무하고 결혼했어도 나하고 손 안 끊을 거지?”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 갈게.”

옅은 미소를 보인 걸 끝으로 나는 도어맨에게서 키를 받고 주차장으로 갔다. 잘해봐라, 장용재.

###

점점 작아지는 이성민의 모습을 장용재가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봤다.

“저 자식··· 분명히 숨기는 게 있어.”

장용재는 이성민이 방금 전 늘어놓은 말들을 안 믿었다.

증거는 없지만 직감이라는 놈이 이성민은 더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우연이라기엔 홍콩에서 번 돈이 너무 많아서였다.

“그렇다고 홍콩 건으로 찔러서 캐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끝을 흐리던 장용재가 이맛살을 팍 구겼다.

홍콩 투자 건은 자신도, 장수연도, 장민재도 엮여 있는 일. 잘못 건드리면 지금 추진하는 신성물산 지분 매입까지 불거지면서 똥물을 뒤집어쓸지도 모른다.

고려호텔 매각을 앞두고 오너 가문이 지주회사의 주식을 헐값에 사들이는 일이 아닌가? 내부자 정보를 이용해서.

입술을 깨물던 장용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성민, 장하연··· 홍콩 건은 넘어가주지. 다음부터는 국물도 없을 거다.”

장용재의 꽉 다문 입에서 굳은 각오가 드러났다.

***

그대로 다리를 건너 강남에 들어간 나는 해동그룹 본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고승주에게 찾아갔다.

“오늘부터요?”

얘기를 나누던 나는 그룹 비서실이 총괄전략본부로 개편될 거라는 소식과 고승주와 배재훈, 태재호, 조영찬 모두 오늘부로 부회장이 됐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그래. 그룹이 많이 커졌으니 회장님께서 조직 확대를 염두에 두신 것 같다, 하하.”

“그러시겠군요. 세 분 모두 관리하시는 사업이 커졌으니···.”

그룹의 규모가 커진 만큼 총괄전략본부는 계열사 간의 교통정리와 그룹 차원의 사안에 집중하고 각 부문의 수장들은 소그룹 체제로 책임경영을 하는 게 효율적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문득 생각난 게 있어 고승주에게 물었다.

“금 회장님은요?”

“회장님께서 그대로 두라고 하셨어. 인사, 재무, 기술개발, 생산은 우리가 휘어잡으라고 하셨는데 노골적으로 점령군 노릇하는 건 원치 않으시는 모양이다.”

고승주의 해석은 일리가 있었다. 잡음이 일어나는 걸 질색하시는 할아버지이니 말이다.

“그럼, 어느 분부터 만나면 될까요?”

“태 대표님부터 뵙는 게 좋을 것 같구나.”

“태 대표님이요?”

의외였다. 해동그룹의 간판은 상사부문인데 태재호를 먼저 만나라니?

그 의문은 고승주의 대답을 듣고 풀렸다.

“이번 사태 때문에 물류유통 쪽이 많이 힘들어져서 그래. 배 대표님이나 부회장, 조 대표님도 가장 급한 불부터 꺼야하니 그게 좋겠다고 하셨어.”

“그러겠네요. 요즘 들어 마트하고 백화점에 손님들이 별로 없다고 들었는데···.”

이러나저러나 경제위기가 닥치면 서민들과 중산층이 가장 큰 피해를 본다. 그 서민들과 중산층에게 물건을 팔아 돈을 버는 백화점, 할인점도 타격이 클 테니 빨리 수습해야 했다.

그 뒤로 나머지 일정을 모두 확인한 나는 곧바로 태재호를 만나러 영등포 해동백화점 본점으로 넘어갔다.

“안녕하십니까, 부회장님.”

회의실에 들어간 나는 소파에 앉아있던 태재호에게 인사를 올렸다.

“오, 이 이사. 오늘부터 그룹 전략 컨설턴트가 됐다고 들었네. 곧 있으면 다른 사람도 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게.”

“다른 사람들이요?”

‘일대일 미팅이··· 아니라고?’

눈을 깜빡거리던 나를 보며 태재호가 피식 웃었다.

“뭘 그리 쫄고 그러나? 하이마트 출점 광고할 때도 어깨띠까지 둘러맸던 사람이.”

“아하하하··· 알겠습니다, 대표님.”

잠시 기다리며 차를 마시던 사이, 인터폰이 울렸다.

[부회장님, 나창석 상무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해요.”

문을 열고 나창석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부회장님.”

“어서 오게, 나 상무. 자네들끼리도 인사해야지?”

고개를 숙였던 나창석이 태재호의 말을 듣고 내게 다가왔다.

“축하드립니다, 이 이사님. 그룹 전략 컨설턴트로 오셨다고 부회장님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 상무님. 내년부터 전무로 승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하하.”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우리는 새로 들어온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일단은 땅만 사두자는 거지?”

“네, 부회장님. 할인점 실적이야 경기에 민감하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도 ‘노마크’를 알릴 기회라 여기고 있으니 씨 뿌리는 시기라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창석의 의견에 태재호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처럼 힘든 때에 가성비 좋은 PB 상품인 ‘노마크’를 저가에 대량 살포하면 그 어떤 경쟁사의 PB브랜드도 마크하지 못할 터.

“대신에 지금처럼 매장이나 물류센터를 지을 땅을 저렴하게 확보할 기회는 없을 겁니다. 어떻게든 최대한 좋은 땅들을 많이 넓게 확보해야 출점경쟁에서 안 밀릴 겁니다. 주제 넘는 말씀이지만 백화점도 마찬가지일 거라 봅니다.”

나창석의 의견을 듣고 태재호가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틀린 말은 아니지. 로엘 놈들이나 신세기는 말할 것도 없고, 월마트, 까르푸도 움직이고 있으니 말이야.”

유통업계는 지금 토지매입 전쟁이 시작됐다.

로엘그룹은 본거지인 일본에서 저금리로 끌어온 엔화로. 신세기그룹은 유통과 식품, 신성생명 지분을 제외한 모든 자산을 처분한 돈으로. 월마트, 까르푸도 본사에서 보내준 돈으로 땅을 사고 있다.

‘지금처럼 땅값이 똥값인 때가 없으니 부지 매입은 쉽겠지. 중요한 건 돈이 될 만한 자리인데···.’

고민을 하던 나는 손을 들고 태재호에게 물었다.

“부회장님, 물류유통부문 전략실 점포개발부 담당자들과 만났으면 합니다. 지도도 필요하고요.”

내 부탁을 듣고 태재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네. 내 당장 들어오라고 하지.”

태재호가 전화로 지시를 내린지 얼마 안 돼서 점포개발부 담당자들이 플라스틱 박스가 실린 손수레들을 밀며 집무실로 들어왔다.

‘뭐, 뭐여? 아예 작정한 거 같은데?’

난 그저 간단한 전국지도만 생각했는데··· 손수레에 실린 박스들을 보며 마른침을 삼킨 내게 태재호가 말했다.

“앞으로 매장 지을 자리 한 번 제대로 뽑아봐야지. 지금이야 조금 어렵지만 우리는 로엘이나 신세기와는 다르지 않은가? 흐흐.”

태재호가 음침하게 웃으면서 번쩍거리는 눈으로 쳐다보는 게 아예 작정하고 뽑아먹으려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해드려야지. 뽑아먹다 배 터질 만큼.

***

“알겠습니다, 대표님.”

재킷을 벗은 나는 셔츠 소매단추를 풀어서 소매를 둘둘 말아 걷은 뒤, 손수레에 실린 플라스틱 박스를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도책들을 비롯한 각종 자료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박스 안을 들여다보던 나는 가볍게 숨을 내쉰 뒤, 태재호와 나창석, 점포개발부 담당자들에게 말했다.

“먼저 말씀드릴 게 있다면 민자역사 건설이나 임대, 공공시설 기부채납도 고려해야 한다는 겁니다, 부회장님.”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태재호의 질문에 점포개발부 담당자 한 사람이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공공시설 기부채납은 잘 모르겠지만 민자역사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부회장님.”

“그렇습니다. 민자역사는 현행법상 30년 뒤에 정부에 소유권을 넘겨야하지만 내부공간을 분양하고 임대료를 받는다는 점에서 장기적인 현금흐름이 안정적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백화점, 할인점 같은 유통사업까지 겸하고 있고 해동건설까지 있습니다. 우리가 투자할 민지역사 건설비용은 해동건설의 매출이 되고 우리 백화점과 할인점을 입점 시키면 더 큰 이익을 남길 겁니다, 부회장님.”

민자역사 사업 진출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점포개발부 담당자들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태재호는 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민자역사는 향후 사업 건이 나오는 대로 진행하지. 헌데, 공공시설 기부채납은 뭘 말하는 건가?”

“미국처럼 공공시설을 지어서 기부채납을 하는 조건으로 상업 공간을 99년간 무상으로 장기임대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상암동에 지을 월드컵 경기장이 되겠군요.”

작년 10월에 상암동에 서울 월드컵 경기장 부지가 결정됐지만 IMF에서 빌린 돈 갚는 것도 빠듯하다. 나라에서 무슨 돈으로 월드컵 경기장을 짓겠나?

그에 반해 우리는 실탄도 넘치고 해동건설이라는 실력 있는 건설회사도 갖고 있다. 목 좋은 할인점 땅도 얻고 해동건설의 실력도 보여주면서 실적까지 챙길 절호의 기회다.

잠시 고민하던 태재호가 입을 열었다.

“알겠네. 두 건 모두 부회장단 회의에서 의논해보지. 나도 좋지만 우리 이 부회장이 좋아하겠어, 허허.”

“그럼 지금부터 점포를 세울 땅을 보겠습니다, 부회장님.”

상암 월드컵 경기장 기부채납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을 받은 나는 회의용 탁자 위에 쫙 펼친 전국 지도에 쉴 새 없이 동그라미를 쳤다.

점포개발부 담당자들은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쳐다봤지만 나는 60개 정도 되는 곳에 동그라미, 20여 곳에 박스를 치고서야 고개를 들고 펜 뚜껑을 닫았다.

“작은 박스를 친 곳은 물류센터를 지을 자리입니다. 지금부터 각자 제가 동그라미 친 도시별 지도를 펼쳐주시죠.”

점포개발부 담당자들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나는 각 도시별 지도마다 내가 기억하는 곳마다 동그라미를 쳤다.

한참 동안 작업을 마치고서야 나는 허리를 펴고 숨을 가다듬었다.

“나중에 한경그룹에서 서울역 한경백화점 부지를 내놓으면 반드시 임대해서 하이마트를 입점시켜야 합니다. 2002년 월드컵이 시작되면 해외관광객들이 슬슬 늘어나면서 관광수요가 커질 곳이니까요. 그리고 여기 연수구 땅은···.”

향후 송도국제도시가 지어지면 수요가 커질 거란 점을 설명했고, 다른 곳들 또한 적당한 수위에서 미래 전망을 알려줬다.

‘이거 다 먹으면 여러분들 공됩니다, 이 사람들아.’

점포개발부 담당자들이나 나창석은 나를 귀신이나 괴물 보듯 쳐다봤지만 어찌하리오. 20년은 더 앞에서 지켜보고 돌아온 결과 값인데.

헛기침으로 주위를 환기시킨 나는 표정을 가다듬고 눈에 힘을 줬다.

“다른 곳은 몰라도 이 땅들은 무조건 사둬야 합니다. 딱 봐도 목 좋은 자리 아닙니까? 남들이 헉헉거릴 때 우린 더 치고 나가야 합니다.”

자신 있게 말하는 나를 보며 점포개발부장이 대답했다.

“확실히 입지는 좋습니다. 대체적으로 거의 다 신도시가 예정되어있거나 유동인구가 많아서 점포 당 매출이 높을 거라 예상됩니다.”

그에 이어서 나창석까지 지도를 살펴보고 의견을 보탰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매출이 높은 점포를 대량으로 확보하면 가격경쟁에서도 유리해지고 PB상품 품질도 충분히 챙길 수 있습니다.”

나창석의 말대로 매출이 높은 점포가 많을수록 점포든 회사 전체든 재고회전이 빨라져서 마진과 협상력이 커진다. 그 마진과 협상력으로 초저가공세를 펼치거나 ‘노마크’처럼 품질 좋은 PB상품을 살포하면 하이마트는 부동의 1위가 된다.

모두들 잔칫상을 받은 손님들처럼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있었지만 이들도 모르는 게 있었다.

‘내가 찍은 땅만 다 먹고 매장을 지어도 20년 뒤에 할인점 시장의 25퍼센트를 먹을걸?’

내가 찍은 매장 부지들은 향후 400여 개까지 늘어날 할인점 점포들 중 매출 기준 상위 70개에서 무주공산인 땅들이었다. 이 땅들을 기억한 건 신성그룹 시절에 할인점 사업을 관리하면서 순위경쟁에 노이로제에 걸렸던 기억 때문이었다.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지.’

온갖 아이디어로 매출을 높이려했지만 입지조건의 벽은 넘어설 수 없었다. 이번에는 좋은 자리부터 차지하고 아이디어로 성벽을 쌓고 해자까지 파서 철옹성을 만들 생각이었다.

신세기든, 로엘이든, 외국계든 전부 덤벼라.

해동백화점과 하이마트 앞에서 죽을 때까지 통곡하게 될 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