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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145화 (144/229)

145화. 42nd. 그 겨울, 온기가 도는 때 (3)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중 장호건이 입을 열었다.

“알았다. 하연이 네가 이렇게까지 원하는데 박 상무 한 명 못 내줄까. 고려호텔 정 대표도 함께 데려가거라.”

“아버지?”

“장인어른?”

장호건이 친 레이스에 장하연도, 나도 놀랐다. 박태곤을 넘겨주는 건 그렇다 쳐도 본인과 호형호제하던 정창호까지 데려가라니? 무슨 꿍꿍이일까?

장호건은 내 눈빛 속에 숨겨진 날을 보고 손을 내저었다.

“너희한테 가면 해동그룹 정보도 나에게 안 주고 너희들에게도 우리 정보 안 줄 사람이 정 대표다, 성민아. 그건 내가 보증하마.”

전생의 정창호는 그룹에서 물러날 때까지 방어적 중립을 지키며 장하연의 몫인 고려호텔을 지켜주기만 했다. 그런 정창호의 행적을 생각하면 장호건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고마워요, 아버지.”

“고맙습니다, 장인어른.”

대답하는 우리 둘을 보며 장호건이 말했다.

“고마워할 거 없다. 일전에도 말했듯 유통은 손대지 않겠지만 나머지 사업들은 너희가 서운해 해도 해동과 부딪치게 될 거다. 조건이 맞으면 협상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두 사람을 받는 대가로 선전포고까지 받았지만 나와 장하연은 장호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하연은 이제 우리집안 사람이고, 나는 그런 장하연을 지켜낼 자신이 있으니까.

장호건은 표정을 풀고 커피 한 모금을 축였다. 이제 올 것이 온 건가?

“사업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자꾸나. 혼인은 어떻게 할 거냐?”

신성그룹 회장에서 부모님으로 돌아온 장호건. 그의 질문에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단···.”

“혼인신고부터 할게요, 아버지.”

내 말을 끊고 대신 입을 연 장하연의 폭탄선언에 나와 장호건의 눈이 커졌다. 혼인신고부터 하겠다니? 예전에 미사리 카페에서 내게 했던 말이 현실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하, 하연아?”

“누, 누나?”

나나 장호건 모두 크게 뜬 눈으로 장하연을 바라봤지만 그녀의 눈빛은 굳게 다져져있었다.

“저, 크리스마스이브 때 성민이한테 프러포즈 받고 호텔에서 같이 잤어요. 이미 볼 거 다 봤는데 혼인신고부터 해야죠. 저도 성민이 집으로 들어갈 거고요.”

반지까지 보여주며 말하는 모습이 점입가경이었다. 그 일까지 터뜨리다니!

“너, 너, 너희들···.”

말을 더듬으면서도 장호건은 도끼눈으로 나만 죽일 듯이 노려봤다. 나는 장호건이 눈으로 찍어대는 도끼질에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새하얗게 질렸다.

친구와 결혼을 약속했어도, 사윗감으로 찍어놨어도 딸 가진 아버지들에게 사위는 도둑놈이다. 혼전관계까지 치렀으니 어느 아버지가 식도 안 올린 사위를 좋게 보겠나? 탁자에 놓인 크리스털 재떨이로 장호건이 내 머리를 안 때리는 게 다행이었다.

장하연은 그런 나를 보고는 내 손에 자신의 손을 얹고 말했다.

“저희 둘, 5년씩이나 연애하면서 사고 한 번 안 쳤어요. 두 집안 살림 늘리겠다고 일도 열심히 했고요. 파혼도, 이혼도 안 하고 평생 행복하게 살 텐데 뭐가 문제겠어요?”

장하연이 이렇게 당돌한 여자일 줄은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는 뭐가 되라고!

“그러니까 혼인신고부터 올릴게요. 정식으로 올리는 건 지금 시국이 어느 정도 가라앉을 때 할 거고요.”

얼마나 지났을까, 거칠게 숨을 내쉬던 장호건의 호흡이 가라앉았다. 그는 우릴 보며 피식 웃었다.

“알았다. 하루라도 일찍 외손주 안겨주겠다고 노력했다 생각하마.”

“고마워요, 아버지.”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활짝 미소를 띤 장하연, 졸지에 죄인이 된 나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장호건이 굳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성민이 너.”

“네, 장인어른.”

“내 딸 울리면 가만 두지 않을 거다. 알겠느냐?”

장호건의 눈에서 살기가 넘실거렸다.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장하연과 속궁합부터 맞췄으니 얼마나 미울까? 나는 장호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큰소리로 대답했다.

“네, 장인어른!”

대답을 듣고 장호건이 풀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혼인 준비는 너희 둘이 알아서 준비하도록 해. 내 와이프한테 맡기면 사고 날 테니 원하는 대로 준비하고 알려 주거라, 허허.”

장호건의 너털웃음을 듣고서야 간신히 심장이 진정됐다. 한고비는 넘겼으니 할아버지만 뵈면 되겠다.

***

이성민과 장하연을 내보내고 혼자 남은 장호건.

그는 곧바로 전화를 넣어 이수한을 호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수한이 들어왔고, 장호건은 두 아이가 찾아와서 나눈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어떤가?”

태연하게 소감을 묻는 장호건을 보며 이수한이 아연실색했다.

“회, 회장님?”

장하연이 1조 원 가까운 현찰을 손에 쥐었다는 사실은 해동증권에서 수익금을 정산해줬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알 수 있었다. 장용재, 장수연, 장민재 명의로 5억 원씩만 투자해서 3백억 원 가까운 돈이 들어왔으니 그 서른 배가 넘게 투자했던 장하연이면 1조 원은 손에 쥐지 않았겠나?

그 돈을 탈탈 털어서 고려호텔 주식을 전부 사겠다니··· 이수한은 기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장호건을 바라봤다.

“그렇게 됐네, 수한이. 고려호텔 지분 100퍼센트, 하연이한테 1조 받고 넘겨. 세금 떼도 7천억 이상 남을 테니 불공정거래 소리도 안 들을 걸세.”

“하연이 고집, 형님께서도 못 꺾으셨군요.”

모처럼 자신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이수한을 보며 장호건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겠나. 하연이가 그리해야 제 마음이 편하겠다고 하는데. 그래서 나도 모진 소리 한 거였고.”

자식에게 물려주기로 약속한 걸 돈 받고 파는 것만큼 부모로서 실격인 일도 없다. 떠날 때까지 자신을 배려해주는 큰딸, 양껏 챙겨주고 싶어도 챙겨주지 못할 큰딸에게 고맙다는 말조차 못 할 만큼 장호건은 한없이 미안하기만 했다.

그런 딸이 부담 없이 돌아서라고 장호건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딸, 그리고 그 딸을 지켜줄 사위 앞에서 선전포고를 날린 거였다.

“지키기 위해 밀어내신 겁니까, 형님?”

“그런 셈이지. 내가 싸고 돌면 용재, 수연이, 민재, 와이프, 그리고 처가 놈들까지 죄다 달려들 테니 말이야.”

담담하게 대답하는 장호건이 이수한은 안타깝기만 했다. 형처럼 따르고 모셔온 지 20여 년이 넘은 장호건을 이해하기에 더더욱 안타까웠다.

이수한은 분위기도 바꿀 겸 말을 돌렸다. 더 이상 얘기해봐야 ‘형님’의 가슴만 아리고 속만 미어질 테니 말이다.

“그래도 하연이나 성민 군이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형님.”

“왜 아니겠나. 나도 놀랐는데. 그래도··· 성민이한테 그런 건 본심이 아니었다네.”

장호건이 내놓은 뜻밖의 대답에 이수한의 눈이 커졌다. 장호건이 이성민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는 게 본심이 아니었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명우하고 정혼서약서까지 쓰고 그놈을 하연이 옆에 두기로 약속했는데 미워할 이유가 뭐가 있나? 다 큰 애들끼리 결혼까지 약속한 마당에 말이야.”

“그래도··· 혼인 전에 그런 사고를 친 건 좀···.”

남사스러운 이야기인지라 말끝을 흐리는 이수한을 보며 장호건이 담담히 말했다.

“하연이가 나한테 성민이와 잤다고 말한 거, 내가 돈 받고 고려호텔 파는 거에 미안해 할까봐 잊게 하려고 말한 것 같더군.”

“···하연이도 형님을 끔찍이 여기니 그랬을 겁니다.”

이수한의 대답은 분위기나 맞추려고 한 소리가 아니었다. 장호건의 자식들 중 진심으로 장호건을 위하는 자식은 자신이 봐도 장하연 하나뿐이니 말이다.

“하연이 엄마 만나기 전까지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녔던 내가 두 아이를 뭐라 할 자격이 있겠나. 나 같은 놈에 비하면 성민이나 하연이 둘 다 순수한 거지. 오히려 5년씩이나 버티고 이제야 터뜨린 게 용할 지경이야.”

자신의 죄가 크니 남을 비난할 자격이 있겠냐는 장호건의 자조적인 고백에 이수한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가볍게 숨을 내쉰 장호건이 표정을 가다듬고 이수한에게 말했다.

“이걸로 처가 놈들도 성민이나 하연이 해코지는 못할 걸세. 그리되면 용재, 수연이, 민재까지 다치게 될 테니 말이야.”

이수한은 장호건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군요. 아이들이 손에 쥔 돈으로 물산 지분을 매입하고 나서 고려호텔 지분을 하연이에게 넘기면···.”

“세 아이 모두 독배인 줄도 모르고 독배를 마시는 거지. 그렇게 하고도 하연이를 물어뜯었다간 환투기에 지분 매입 건까지 터질 테니 말이야.”

잔인한 일이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독을 몸 밖으로 빼내든 소화하든 둘 중 하나는 해내야 신성그룹을 이어가고 다시 합칠 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장호건이니 말이다.

이수한 또한 그런 장호건의 뜻을 알기에 대답했다.

“그러겠죠. 용재, 수연이, 민재도 해동증권 덕분에 돈을 벌었고 물산 주식을 사들인 뒤에 물산에서 고려호텔 지분 전량을 하연이게 팔면 주가가 오를 테니까요.”

장호건은 이수한이 내놓은 시나리오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마당에 해동증권의 홍콩 투자 건을 물고 늘어진다면 스스로의 목줄을 죄는 꼴이 되겠지. 하연이가 쥔 1조 원이면 당장 유상증자로 신성물산 최대주주가 될 수 있으니.”

신성물산은 장호건 계열사들 지배구조의 최상단에 있는 회사다. 그런 회사의 최대주주가 될 기회를 차버리고 그 일부 계열사인 고려호텔과 SH자산개발 지분을 1조씩이나 주고 사는데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누가 뭐라고 하겠나?

장호건이 모든 속내를 밝히자 이수한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하연이한테 고려호텔 넘기기 전에 세 아이한테 들어간 현금으로 신성물산 주식부터 사들이겠습니다. 박 상무한테도 전해두겠습니다.”

“수고하게, 이 실장.”

장하연이든 장용재, 장수연, 장민재든 아무도 불평할 수 없는 일이다. 장하연은 떠안지 않아도 될 짐까지 떠안았으니 나머지 세 아이도 그만한 짐은 떠안아야 공정하다고 여기는 장호건과 이수한이었다.

***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미안해, 성민아. 그렇게 안 하면 아버지 마음이 안 편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어. 내 맘, 알지?”

차를 타고 삼청동으로 향하던 나는 조수석에 앉은 장하연에게서 혼전관계를 터뜨린 이유를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려호텔을 물려주는 것도 아니고 파는 식으로 딸에게 넘겨줄 장호건의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고 싶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나. 내 여자가 그걸 원하는데.

“누나가 나 좋아하는 건 알지. 그건 그렇고··· 고려호텔은 언제쯤 넘겨주실까, 장인어른?”

침울한 얘기 대신 사업이야기로 돌린 나는 은근히 궁금했다. 장하연이 고려호텔 인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잠시 뜸을 들이던 장하연이 입을 열었다.

“용재, 수연이, 민재가 신성물산 주식 충분히 사들일 때쯤?”

장하연의 대답을 듣고 속으로 식겁했다. 나도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나는 장하연이 얼마나 수를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철판을 깔고 물었다.

“왜?”

“왜긴? 내가 고려호텔 가져오면 물산에 현금 1조 생기잖아. 그러면 주가는 올라갈 테고··· 아버지나 이 실장님이 그런 기회를 놓칠 분들이 아니니까 그래서 그렇게 생각했어.”

“그렇구나···.”

내색을 안 해서 그렇지, 재벌가 사람 아니랄까봐 장하연도 보통 여우가 아니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 더 물어봐야겠다.

“거기까지야?”

“아니. 아버지나 이 실장님이 그렇게 해주시면 용재, 수연이, 민재, 그리고 어머님이나 조국일보도 나나 네가 홍콩 투자로 돈 번 일은 못 건드리겠지. 바보가 아닌 이상.”

“누, 누나?”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장하연의 말대로 장용재, 장수연, 장민재가 주식공개매수든 장내매수든 신성물산 주식을 사들이면 빼도 박도 못할 부당이득 편취죄에 걸린다. 신성물산 주가가 오를 걸 알고 주식을 쓸어 담은 게 아닌가?

그럼에도 나와 장하연의 홍콩 투자 건을 건드리면 세 연놈들이 홍콩 투자에 숟가락을 얹은 것도 나오고, 조사 과정에서 신성물산 주식을 사들인 것도 딸려 나온다.

미치지 않고서야 절대 건드릴 수 없게 되는 구조라서 고려호텔 인수를 안 말렸는데 장하연도 여기까지 노렸을 줄이야···.

유리창 앞을 보면서도 마른침을 삼키는 나를 장하연은 이상하게 바라봤다.

“어디 아파? 식은땀까지 맺히는 게··· 감기 걸렸어?”

장하연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손수건을 꺼내 내 이마 오른쪽 가장자리를 닦아줬지만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럼··· 아저씨도 다칠 텐데 괜찮아? 세 사람 엮이면 장인어른도 책임지셔야 텐데?”

장하연과 장호건이 갈라서게 되면 막상 좋을 줄 알았지만 장하연이 먼저 갈라서는 모양새가 나오니 당황스러웠다. 허나, 장하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나도 아버지 생각해서 그렇게 돈 주고 내 회사 가져오는 건데. 아버지께서도 그 문제는 알아서 단속해주셔야지.”

“그래도··· 누나가 이런 생각으로 고려호텔 사오겠다고 한 걸 아저씨가 알면···.”

엄청난 배신감을 느낄 것 같았다. 장하연을 그렇게나 아꼈던 장호건이 아닌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에도 장하연은 더 놀라운 대답을 풀어놨다.

“경영자로서는 너나 나나 그게 아버지한테 효도하는 거야. 아버지도 말씀하셨잖아. 유통은 몰라도 다른 사업으로 우리와 부딪치게 될 거라고. 사업은 사업이니 부딪칠 건 부딪치고 협상할 건 협상해야지. 그리고.”

들을수록 기절초풍할 이야기였지만 장하연은 끊었던 말을 이었다.

“나, 이제 너하고 살게 되잖아. 더군다나 보통 며느리도 아니고 장손며느리 되는데 나도 확실히 선 그어야지. 할아버님, 아버지만큼이나 나 아껴주시는 분이신데.”

장하연의 마음을 이제야 이해했다. 장 씨 성만 쓸 뿐, 우리집안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려고 배수진을 친 것이었다.

어쩌면 장호건도 그 편이 딸에게 나을 거라 생각하고 선전포고를 날린 것 같았다. 적어도 해동이 신성에게 밀리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오늘만큼은 장인어른도, 내 여자도 내게는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말없이 차를 몰고 삼청동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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