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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144화 (143/229)

144화. 42nd. 그 겨울, 온기가 도는 때 (2)

다음 날 아침.

박태진은 하이마트 본점 지하주차장에서 유현정을 조수석에 태우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오빠, 어디 가는 거야?”

“따라오면 알아. 나쁜 데 가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마.”

유현정은 박태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출근하자마자 박태진의 연락을 받고 나창석에게 부탁해서 휴가를 수리 받았는데 가타부타 말도 없이 차를 몰고 가는 게 수상했다.

30여 분쯤 지났을까, 두 사람이 탄 차는 효자동 삼거리를 지나 경복궁 뒷길을 달린 끝에 백악산 산자락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성문만큼이나 커다란 한옥 대문을 보고 유현정의 눈이 커졌다.

“여, 여긴···?”

유현정이 말을 잇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삼청동 산자락 밑에 있는 이런 저택은 단 한 곳뿐이지 않은가?

박태진은 유현정에게 빙긋 미소를 날린 뒤, 사람 한 명만 나올 수 있는 문을 열고 나온 고용인에게 말했다.

“박태진 이사입니다. 결혼할 사람과 함께 왔다고 전해주십시오.”

“네, 이사님.”

고용인은 손에 쥔 무전기로 박태진의 말을 전했고, 곧바로 대문 양쪽을 활짝 열었다. 대문을 통과한 박태진은 차를 세우고 나와서 조수석 문을 열고 유현정과 나왔다.

“오, 오빠?”

“걱정 마, 현정아. 회장님, 허례허식 안 따지는 분이니까. 오늘 입은 옷만 해도 충분해.”

박태진과 달리 유현정은 거의 울상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옷차림이 빠지는 건 아니지만 자신이 몸담은 그룹의 총수를 남편 될 사람의 혼주로 만나야 하는 자리가 아닌가!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옷차림을 더 신경 쓰고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저 박태진의 기습공격 때문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

유현정의 표정이 풀리지 않는 걸 보고 박태진도 황급히 뒷수습에 나섰다.

“나도 매일 입고 다니는 옷으로 입었어. 그러니까 주눅 들지 않아도 돼. 회장님께서 너 그렇게 승진시킨 거만 생각해도 모르겠어?”

유현정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나창석과 더불어 해동물산 물류유통부문 고속승진의 상징이 아닌가?

“그래도··· 오빠하고 결혼할 사람으로서는 다르잖아.”

시무룩한 유현정의 대답에 박태진이 푸근한 미소를 비치며 말했다.

“괜찮대두 그러네. 나만 믿어.”

박태진은 유현정을 다독여주며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자신 있는 박태진의 모습에 유현정도 조금은 풀린 표정으로 그의 손에 이끌려 본관으로 들어가서 서재로 올라갔다.

“회장님, 박태진입니다.”

[들어오너라.]

서재 안에서 들린 목소리에 박태진은 문을 열고 유현정과 함께 들어갔다.

“오호, 아주 참한 처자께서 함께 오셨구먼? 허허.”

이대수의 넉넉한 웃음소리와 달리 유현정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룹 수뇌부가 아닌 이상에야 들어오지 못하는 이 서재에서 총수를 마주하게 되다니!

‘정신 차리자, 유현정. 주눅 들면 안 돼.’

속으로 자신을 다잡은 유현정은 뛰는 가슴을 누르며 이대수에게 인사를 올렸다.

“네, 회장님. 하이마트 본점의 유현정 차장이라고 합니다.”

“호오, 듣던 대로 강단이 있구먼. 우리 태진이 잡아줘서 정말 고맙네, 유 차장.”

“아닙니다, 회장님. 태진 씨 같은 남자를 잡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

“왜 그리 생각했나?”

“하이마트에서 일할 때 보여준 태진 씨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회장님의 가장 가까운 사람임에도 늘 겸손하고 정중한 그 모습이 좋았습니다.”

유현정의 막힘없는 대답에 이대수는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대수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생각해주니 고마우이, 유 차장. 내 집에 온 손님을 계속 세워둘 수는 없으니 차부터 한 잔 하지.”

“네··· 회장님.”

유현정은 박태진과 함께 소파에 앉았다. 그 사이에 집사장이 직접 만든 차가 이대수의 책상과 박태진, 유현정이 앉은 소파 앞 탁자에 놓였다.

“그래, 우리 태진이하고 사귄지 두 해가 넘었다고 했나?”

찻 한 모금을 축인 이대수의 질문에 유현정의 눈이 커졌다. 아무리 박태진을 최측근으로 뒀다고 해도 자신 같은 일개 직원과의 연애까지 신경 쓰다니?

“그걸··· 어떻게···?”

토끼처럼 놀란 유현정을 보며 이대수가 겸연쩍은 미소를 띠었다.

“이 늙은이한테 사업 빼고 가장 큰 숙제 세 개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태진이 저 녀석을 좋은 여자한테 장가보내는 거였네. 헌데, 우리 유 차장을 데리고 온 걸 보니 태진이 저놈 복이 크게 터졌구먼, 으허허.”

껄껄 웃는 이대수의 칭찬에 유현정의 얼굴이 다시 한 번 붉게 물들었다. 박태진 또한 미소를 띤 얼굴을 이대수에게 숙였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우리 태진이 잘 부탁하네, 유 차장. 내 아들이다 생각하고 키운 놈이니 절대 유 차장 울릴 일은 없을 걸세.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장담하지.”

이대수의 말에 유현정은 어쩔 줄을 몰랐다. 자신도 박태진이 좋아서 이 자리까지 오게 됐지만 이대수가 박태진을 이토록 아끼고 있었을 줄이야!

그 뒤로도 박태진과 유현정은 결혼식 준비 등에 대한 이야기만 이대수와 나누다가 본관을 나왔다.

“오빠.”

“왜?”

“회장님, 원래 저런 분이셨어?”

박태진에게 묻는 유현정의 눈에는 경외감과 의아함이 혼란스럽게 엉켜있었다.

이대수가 누구인가? ‘재계의 기인’, ‘삼청동 호랑이’ 등 보통 이상의 별명을 달고 다니는 해동그룹 2대 총수이고 이 나라 가장 현금이 많은 기업가가 아닌가? 그런 사람이 여느 할아버지처럼 편안한 사람이라니···.

박태진은 유현정을 보며 빙긋 미소를 띠었다.

“원래 저런 분이셔. 나나 실장님, 그리고 다른 형님께는 아버지 같은 분이고.”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유현정에게 박태진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명동에서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땐 적응하기 힘 들었어. 수금장부 대신에 교과서를 쥐여 주고 막싸움 대신에 태권도나 유도, 검도를 가르쳐주셨거든.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고.”

처음 듣는 얘기에 유현정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딱딱한 거 빼고 모든 게 완벽한 박태진이 이대수의 작품이었다니?

“회장님, 오빠한테 정말 아버지 같은 분이시구나.”

“맞아. 얼굴도 모르는 부모님보다 더 부모님 같은 분이야. 그래도.”

잠시 말을 끊었던 박태진이 걱정스런 눈길로 유현정을 바라봤다.

“현정이 넌 앞으로 조금 힘들어질 수도 있어. 회사에서도 알게 모르게 헐뜯는 사람도 나올 텐데··· 괜찮지?”

총수가 아들처럼 여기는 최측근과 결혼하게 됐으니 화합이 잘 되는 해동그룹이라도 시기와 질투가 따르지 않겠나? 박태진의 미안한 표정과 달리 유현정은 싱긋 미소를 띠었다.

“걱정 마, 오빠. 나, 우리 회사에서 인기 좋은 거 알면서 그런다?”

유현정의 새초롬한 대답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녀가 낸 성과는 머리가 좋고 실천력이 좋은 것뿐만 아니라 어지간한 사람들에게 잘 다가갈 수 있는 붙임성 때문이니 말이다.

그 붙임성은 그룹 내에서 가장 철벽같다던 박태진마저 뚫어버렸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유현정은 박태진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박태진은 기분 좋은 표정을 머금고 유현정과 함께 자신의 차로 걸어갔다.

***

“선배님, 할아버님 뵈러 간 거 사실이야?”

“응. 형도 결혼할 사람 있어서 할아버지 뵈러 갔어.”

조수석에 앉은 장하연은 박태진이 유현정과 함께 삼청동 본가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구나. 선배님 같은 남자가 결혼 안 하면 그것도 이상할 거야.”

“그럼 나는?”

“그래서 우리도 지금 아버지 뵈러 가고 있잖아, 후훗.”

장하연은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래, 지금 나는 장하연과 함께 성의원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누나. 고려호텔 지분, 전부 돈 주고 살 거야?”

조심스럽게 물어봤지만 장하연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게 낫잖아. 아버지 마음 편하게 해드리려면. 용재, 수연이, 민재한테 트집도 안 잡히고.”

조금은 아쉬웠지만 장하연답다 싶었다.

지난주를 끝으로 해동증권의 57억 달러가 10조 원으로 변했고 정산 끝에 장하연의 통장에 찍힌 돈만 1조 원이다. 그 돈을 전부 고려호텔 인수에 쓰겠다니··· 짧게 입맛을 다신 나는 입을 열었다.

“나도, 내 사촌동생들도 할아버지 주식 물려받으면서 증여세 전부 냈으니 누나도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 하하.”

나와 내 사촌동생들은 작년에 할아버지가 물려준 해동물산 주식 때문에 연부연납으로 내던 증여세 잔여분과 대출금 총 1조 원을 오늘 아침에 깨끗이 납부했다. 장하연도 우리집안 사람이 될 테니 떳떳하게 상속받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손해 보는 것도 아니잖아. 안 그래?”

나는 장하연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긴 해. 누나가 물려받을 회사, 누나가 사오는 거니까 아저씨도 안 줄 수는 없을 거야.”

장하연이 돈을 주고 회사만 가져오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사람을 데려와 달라는 내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으니 나에게도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가 탄 아도자동차 세단은 성의원 정문에 도착했고 정문을 넘어 차를 세운 우리는 장호건의 집무실로 걸어갔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상무님. 들어가시죠.”

“고마워요.”

우리 둘은 직원들이 열어준 문을 넘어 집무실로 들어갔다.

“저 왔어요, 아버지.”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인사를 한 우리를 보며 장호건이 책상 앞에서 일어나 걸어왔다.

“어서 와라. 중요하게 말할 게 있다고 해서 시간을 냈는데 무슨 말일지 궁금하구나. 앉아서 얘기하자.”

자리에 앉은 우리는 장호건과 함께 커피를 마셨다. 첫 모금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은 장하연이 장호건에게 말했다.

“고려호텔 지분, 제가 전부 인수할게요.”

“무슨 소리냐? 네 돈으로 인수하겠다니?”

“해동증권에 투자한 돈, 오늘 아침에 정산 받았어요. 1조 원 받았는데 충분히 인수할 수 있어요, 아버지.”

장호건은 당황한 표정으로 장하연을 보며 말했다.

“애비 그렇게 안 힘들다, 하연아. 너 시집보낼 정도는 애비도···.”

장하연은 장호건이 말하는 사이에 클러치 백에서 해동증권 통장을 꺼내서 내밀었다.

“아버지한테 부담 드리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저 시집가면 집에는 아버지밖에 안 계시는데 이렇게 해야 어머님이나 다른 분들한테 하실 말씀이 생기잖아요. 받아주세요, 아버지.”

처음으로 자식들에게 말이 끊겼겠지만 장호건은 화를 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미안한 표정으로 장하연을 말없이 바라봤다. 두 부녀의 가슴 짠한 광경을 보고 나도 입을 열었다.

“받아주십시오, 아저씨.”

“성민아.”

나를 바라보는 장호건의 눈빛이 이토록 딱딱한 건 처음이었다. 예비사위 앞에서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겠지.

나도 이 거래가 완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장하연이 고려호텔 지분을 전부 인수하면서 줄 돈은 신성물산에 튼실한 동아줄이 될 테니까.

그래도.

저 남자가 돌아가신 아버지와 정혼서약서를 쓰고 장하연과 나를 맺어주려 했다는 사실을, 내가 장하연과 사귀니까 나를 살갑게 대해준 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다른 목적도 있었고.

그러니 나도 한 번은 뒤로 물러설 생각이었다. 이번 생에서 확실히 내가 짓밟을 인간들은 장용재, 장수연, 장민재와 그 떨거지들이니까.

생각을 정리한 나는 품 안에서 낡은 봉투 하나를 꺼내서 내밀었다.

“이거, 기억하시죠?”

내 손에 들린 봉투를 보고 장호건의 눈이 커졌다.

“이건···?”

“아버지와 아저씨께서 쓰셨다는 정혼서약서입니다. 할아버지께서 전해달라고 하시더군요. 이거 드리면 누나 부탁 허락해주실 거라면서요.”

당연히 할아버지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그토록 소중했던 친구가 쓴 정혼서약서를 내밀며 말했으니 장하연의 부탁을 들어줄 거라 믿었다.

“허락해주십시오, 장인어른. 하연이 마음이 편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은근슬쩍 장인어른이라 부르자 장호건이 굳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장호건을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장호건도 내게 고갯짓으로 답한 뒤 봉투를 받고 장하연에게 말했다.

“알았다. 이 실장에게 말해서 하연이 너한테 1조 받고 고려호텔 지분 100퍼센트 넘기라고 하마. 그래도···.”

말끝을 흐리던 장호건이 장하연에게 말했다.

“마냥 받을 수만은 없으니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봐.”

부모로서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 싶다는 건가. 장호건의 씁쓸한 미소를 말없이 바라보던 장하연이 말했다.

“···비서실 감사팀 박태곤 상무, SH자산개발로 옮겨주세요.”

“박 상무를?”

뜻밖의 부탁이었는지 장호건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생각도 못해서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박태곤이 벌써 상무를 달았다니··· 전생보다 3년은 출세가 빨라졌다.

내가 잠시 딴 생각에 빠져있을 때 장하연은 장호건의 되물음에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고려호텔, 제가 가져가면 SH자산개발 지분 50퍼센트도 넘어오잖아요. 영등포 재개발 사업 자금관리 투명하게 하려면 그 분이 필요해요. 그 뒤로도 마찬가지고요.”

장호건은 장하연에게 했던 약속대로 신성물산과 고려호텔을 합병한 뒤, 고려호텔에 신성물산에서 관리하던 골프장들과 용인 리조트, 여기에 영등포 재개발 사업 법인인 SH자산개발 지분 50퍼센트까지 전부 묶어서 자회사로 내렸다.

그런 SH자산개발에 박태곤을 보내달라는 장하연의 부탁은 박태곤을 해동그룹에 시집갈 때 함께 데려가갔다는 뜻이었다.

“흐음··· 박 상무라···.”

장호건의 말끝이 흐려지는 걸 보니 많이 아까운 모양이었다. 자신의 친동생보다 더 친동생 같은 이수한이 건져 올린 보석인데 그 사람을 내게 넘겨달라고 하니 오죽할까?

하지만.

장하연에 손에 쥔 1조 원이면 유상증자든 장내 매수든 신성물산의 최대주주가 되는 데 부족함이 없는 돈이다.

신성전자와 다른 계열사들을 지배하는 신성물산을 포기하고 신성물산에 현금 1조 원을 안겨줄 고려호텔 지분 인수를 선택한 이상 박태곤마저 안 주면 장호건은 장하연을 끝까지 실망시키게 된다.

그러니.

장호건이 박태곤을 보내주길 바랬다.

신성그룹에서 빼앗아야 할 방패일 뿐만 아니라 그대로 두면 나중에 팽 당할 내 친구, 그렇게 팽 당하기엔 아까운 내 친구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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