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42nd. 그 겨울, 온기가 도는 때 (1)
이틀 뒤.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두고 나와 장하연은 해동백화점 본점에 있는 해동플렉스 상영관에 들어갔다.
광고가 시작됐는데도 사람 한 명 안 들어온 상영관을 둘러보고 장하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불경기라서 많이들 안 왔나봐.”
나 또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이 일터를 잃고 거리로 내몰려 그 몇 배나 되는 사람들이 끼니걱정을 하는 판국에 누가 영화를 보겠나?
몇 분 동안 이어진 광고가 끝나고 영화 ‘편지’가 시작됐다. 팝콘을 먹는 것도 잊고 영화에 집중했던 우리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 돼서야 입을 열었다.
“정인이라는 여자, 환유가 떠나고 나서 어떻게 살았을까?”
“글쎄··· 영훈이 키우면서 살지 않았을까? 현실에 만족하면서.”
‘편지’의 마지막 장면은 아들 ‘영훈’을 낳아서 키운 정인이 수목장으로 묻힌 환유의 잣나무에 와서 그를 그리워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부분을 두고 영화를 본 사람들끼리 정인이 어떻게 살았을 지 얘기했었지만 수목원에서의 첫 데이트와 마지막 장면을 비춰봤을 때 ‘만족’이라는 잣나무의 꽃말대로 지금에 만족하면서 살지 않았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렇게 나와 장하연이 영화에 대한 감상을 주고받던 중 스피커로 방송이 나왔다.
[외환위기로 어려운 시국에도 저희 해동플렉스를 찾아주신 두 분께 특별 이벤트를 제공해드리고자 합니다. 두 분을 위해 추가 영화 1편을 특별상영 해드리고자 하오니 그대로 착석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식사는 지금 바로 제공해드릴 테니 편안히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특별영화? ···너?”
방송이 끝나자 장하연이 크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얼른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걱정 마. 회사 차원에서 크리스마스이브 이벤트 하는 거니까.”
요즘 같은 시기에 나와 장하연만 이 같은 호사를 누리면 분노와 증오의 화살받이가 되기 딱 좋다. 더군다나 우리는 재벌가 사람들이니 그 강도는 비교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내 돈으로 하는 건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똑같은 음식 먹으면서 영화 볼 텐데.’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 국민들에게 소소한 위로가 되고자 준비했다고 홍보할 테니 훌륭한 대국민 마케팅이 되지 않겠나? 중요한 건 나와 장하연만 이 공간 안에 있다는 거니까.
이 모든 건 마케팅도 마케팅이지만 나와 장하연이 애인으로서 누리는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한 이벤트였다. 내년부터는 부부로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테니 말이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문을 열고 들어온 직원들은 우리 앞의 팔걸이에 테이블을 고정시켜준 뒤에 식탁보를 깔아줬고, 그 위에 식기와 스테이크, 샐러드, 와인 등을 세팅해줬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고객님.”
인사를 올린 직원들은 뒷자리로 가서 우리와 똑같은 식사를 하며 대기했고, 우리 또한 와인 잔을 들고 가볍게 부딪쳤다.
“메리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서로를 보며 크리스마스를 기원한 우리는 와인 한 모금을 축였다. 우리가 잔을 내려놓고 얼마 안 돼서 영화가 시작됐다.
“‘타이타닉’?”
“작년 여름에 우리가 투자한 영화야. 환율이 올라서 다다음 달에 개봉하기로 했는데 누나한테는 보여주고 싶었거든. 그래서 준비한 거야.”
크리스마스이브 선물로.
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장하연의 눈은 이미 촉촉하게 변해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영화가 시작되었고, 우린 식사를 하면서 영화에 푹 빠져들었다.
3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던 우리는 침몰 전의 타이타닉 호로 돌아간 로즈가 잭과 재회하며 키스하는 장면을 끝으로 셀린 디옹의 ‘My heart will go on’을 들으며 영화에서 빠져나왔다.
조명이 켜지자 직원들이 우리에게 다가왔고, 깨끗이 비워진 접시와 식기, 잔, 그리고 식탁보와 테이블을 조용히 걷어갔다. 그들의 눈은 붉게 물들어있었고, 내 옆에 있는 장하연은 ‘개구리 왕눈이’의 ‘아롬이’처럼 눈이 부어있었다.
“···괜찮아?”
“···로즈를 보니까 남 일 같지가 않았나봐. 로즈, 잭 만나면서 자유로워졌잖아.”
나를 바라보는 장하연의 눈빛이 너무 고마웠다.
5년 내내 ‘이 여자가 내 여자다.’, ‘이 여자가 내 애인이다.’라고 밝히지도 못한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주다니···.
그래도 장하연이 더 이상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딴지 섞인 질문을 던졌다.
“잭에 비하면 난 못 생겼는데?”
“그런 게 뭐가 중요해. 나한테만 잭 같으면 됐지.”
고개를 저은 장하연에게 나는 옆에 뒀던 서류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거 받아.”
“이건···.”
나는 서류를 건네주고 장하연에게 말했다.
“저번에 우리가 타이타닉 투자했을 때 내 지분 증서야. 누나한테 주고 싶어.”
“성민아?”
크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장하연에게 난 담담하게 말했다.
“돈을 주는 게 아니야. 우리 둘이 손을 보탠 이 영화, 누나가 보고 좋아했잖아. 우리만의 추억이니까 누나한테 주는 거야.”
내 사촌동생들과 헨리도 투자했지만 지금은 로맨틱이 필요한 때다. 직원들도 빠져나가고 둘만 있는 이 공간에서.
나를 바라보던 장하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고 물방울이 뺨을 타고 수직으로 떨어질 때 그녀는 내 목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벌써 감동하긴 이른데··· 어쩌지?
***
극장에서 나온 우리는 백화점 식당가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뒤, 한강으로 갔다. 선착장에 있는 유람선에 올라 주홍빛으로 물든 서쪽 하늘을 바라봤다.
“예쁘네. 꼭 그 장면 같아.”
포근한 미소를 머금으며 석양을 보던 장하연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 그거 할까?”
“그거?”
“조금 추울 텐데··· 괜찮지?”
이어지는 질문에 장하연의 눈이 잠시 커졌다. 그녀는 나를 보며 대답했다.
“좋아.”
우리 둘은 손을 잡고 선실 바깥으로 달려갔다. 선수 끝에 도착한 장하연은 선수 아래에서 갈라지는 물살을 바라봤다.
“잡아···줄 거지?”
“영원히 잡아줄게. 그러니까 우리···.”
말끝을 흐리던 나는 한쪽 무릎을 꿇은 뒤, 코트 주머니에서 작은 함을 꺼내서 열고 말했다.
“결혼하자.”
미래를 알고 있고, 돈이 많은 건 참 좋은 거다. 내가 원하는 대로 프러포즈 계획을 짜고 지금 이 순간 그 빛을 보고 있지 않나.
나를 보며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장하연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일어나 말했다.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그런 나를 기다려줘서 고맙고. 받아···줄 거지?”
함에서 반지를 빼내자 장하연이 두 손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장하연의 손을 잡고 반지를 끼워주며 물었다.
“우리··· 하던 거, 마저 할까?”
“···응!”
눈가에 물기가 또다시 맺힌 채 장하연이 밝은 미소를 띠었다. 나는 난간에 발을 얹는 장하연의 뒤를 받쳐주면서 내 발도 난간에 얹고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장하연은 조심스럽게 두 팔을 난간에서 뗐다. 그러고는 날개를 펼치듯 두 팔을 펼쳤다.
“나, 날고 있는 것 같아!”
환희에 젖은 장하연의 목소리에 나는 미소를 띠었다. 지금 내 눈에 들어오는 장하연은 케이트 윈슬렛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여자였으니까.
잠시 동안 팔을 펼쳤던 장하연이 두 손으로 난간을 잡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 또한 두 손을 그녀의 허리에서 떼고 난간을 잡은 뒤,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췄다.
잠시마나 잭과 로즈가 된 우리에게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 할 시간처럼.
***
이성민이 장하연과 5년간의 연애를 끝내고 평생을 함께하자는 약속을 했을 때, 박태진도 유현정과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고마워, 오빠. 그런 추억 안겨줘서.”
“고맙긴. 1년이나 떨어져있었는데 기다려준 너한테 뭐든 다 해주고 싶은 걸.”
남산타워에서 식사를 하는 박태진과 유현정.
박태진도 이성민 덕분에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형, 혹시 크리스마스이브 때 유 차장하고 만날 거예요?]
[그렇습니다만···.]
[그러면··· 이건 어때요? 그날 조조 때···.]
이성민이 준비한 이벤트에 대해서 들은 박태진은 해동물산 출판문화사업부에 있는 동기에게 급히 부탁해서 해동플렉스 본점 상영관 하나를 통째로 빌렸다. 덕분에 유현정과 두 편에 이은 멜로 영화를 보며 분위기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군바리 물 빠지려면 아직도 멀었군.’
박태진은 그 지도편달을 떠올리며 속으로 쓴웃음을 흘렸다. 풀데이 데이트는 상상도 못하지 않았나? 군바리 물이 덜 빠져서인지, 딱딱한 그의 성격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지금 남산타워의 레스토랑에서 즐기는 데이트는 자신의 아이디어였기에 박태진도 나름의 자신감을 갖고 유현정과 즐겁게 웃음꽃을 피우며 식사를 나눴다.
“잠깐만.”
와인 한 모금을 잠시 마신 박태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주자에게 다가가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눴다. 연주자들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는 새 악보를 펼쳤고, 자리에서 일어난 박태진은 유현정에게 손을 내밀었다.
“현정이 너, 대학에서 교양과목으로 탱고 배웠다고 했었지?”
“응. 지금도 가끔은 동호회 나가고 있어. 왜?”
눈을 깜빡거리는 유현정을 보며 박태진이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영원히 네 파트너 되고 싶은데··· 괜찮을까?”
박태진은 홍콩에서의 작업을 마친 뒤부터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 연습했던 탱고 실력을 오늘에야 보여주게 됐다. 오늘의 프러포즈를 위해서 말이다.
조금은 상기된 박태진을 보며 유현정이 재킷을 벗고 하늘하늘한 블라우스 차림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유현정은 목덜미에 매고 있던 하늘하늘한 스카프까지 풀어 의자에 내려놨다. 박태진 또한 재킷을 벗어서 의자에 걸친 뒤, 유현정의 손을 잡고 중앙 홀로 걸어가 자세를 잡았다.
“팬틴 썼구나?”
마주보며 유현정의 허리를 팔로 살짝 감싼 박태진의 질문에 유현정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알았어?”
“향기가 알려주니까. 너하고 잘 어울려.”
박태진의 달콤한 멘트에 유현정이 미소를 띠었다. 그 모습을 보고 연주자들이 ‘포르 우나 카베자(Por Una Cabeza)’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잔잔한 현악기 연주에 맞춰 박태진과 유현정이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연주에 맞춰서 고요한 강물처럼 스텝을 밟던 두 사람은 피아노의 연주가 시작되면서 몰아치는 강렬한 멜로디에 눈빛이 바뀌었다.
한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던 유현정을 박태진이 당기면서 품에 안았다. 몇 번의 스텝을 밟고 박태진이 허리를 숙였고, 유현정 또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뒤로 젖혔던 허리를 박태진이 끌어당기는 팔 힘에 맞춰 앞으로 세웠다.
연주자들이 엮어내는 선율과 박자만큼 뜨겁고 매혹적인 둘의 몸짓에 식사를 하던 다른 사람들마저 식기를 내려놓고 두 사람을 지켜봤다.
“와아아···.”
“후우우···.”
탄성을 자아내는 사람들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때로는 뜨겁게, 때로는 잔잔하게 홀을 누비며 탱고를 추며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곡이 끝날 무렵 유현정은 한쪽 다리를 박태진의 허벅지 위에 감싸듯 올리며 마무리를 지었다.
짝짝짝짝!
그런 둘을 보며 사람들은 손바닥이 터질 것처럼 박수를 쳤고, 박태진과 유현정은 식탁에 앉아있던 사람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돌리고서야 자리에 앉았다.
“···어때?”
“이 정도면··· 영원히 내 파트너 해도 되겠는데?”
잠시 뜸을 들이던 유현정의 대답에 박태진의 얼굴에서 긴장이 사라졌다. 그는 코트 주머니에서 조그만 함을 꺼낸 뒤, 유현정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함을 열어보였다.
“···오빠?”
“이 반지, 받아줄래?”
박태진의 간절함이 담긴 눈빛을 보고 유현정의 눈에 물기가 아른거렸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유현정을 보고 박태진이 일어서서 그녀가 내민 손에 반지를 끼워줬다.
“휘이익!”
“멋있다!”
“축하합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자기 친구들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시 한 번 휘파람을 불어주거나 박수를 쳐주며 박태진과 유현정을 축하해줬다.
‘일생일대 최고난이도의 작전’에 성공해서일까, 박태진의 얼굴이 비로소 편안해지고 있었다.
***
다음 날 점심.
집 앞에 멈춰선 택시에서 내린 나는 가볍게 미간을 찡그렸다.
“아으으··· 쓰려.”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수도 없이 남은 손톱자국 때문에 등짝이 쓰렸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전날 밤의 선상 데이트에서 터진 감정을 이기지 못한 나는 나만큼 달아오른 장하연과 함께 다른 호텔에서 황혼에서 새벽까지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객실 문을 닫자마자 입술을 떼질 못했던 우리는 키스를 하는 와중에도 문에서 멀어질 때마다 코트, 신발, 재킷 등을 허물처럼 벗었다.
욕실에 도착한 우리는 뜨거운 물이 만들어내는 수증기 속에서 실오라기 하나도 안 남은 서로의 피부를 맞대며 내일이면 지구가 망할 것처럼 본능에 충실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물기와 비누거품으로 흥건해진 욕실에서 본능만 존재했지만 침대에 누운 우리는 숫자를 세는 게 무의미할 만큼 그간 쌓인 감정을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쏟아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서 피곤을 못 이기고 잠 들었던 우리는 눈을 뜨자마자 또다시 스파크가 튀었다. 결국, 우리는 체크아웃 시간을 다 채울 즘에야 간신히 호텔을 나올 수 있었다.
‘누나를 알려면 아직도 멀었나보네.’
지금껏 장하연이 요조숙녀인 줄만 알아서 걱정했던 나는 나를 향한 그녀의 마음을 몸으로 겪으면서 내 걱정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어젯밤의 장하연은 세상에 둘도 없을 만큼 뜨거운 여자가 아니었나?
연애에 대한 형법이 있다면 나는 무조건 사형감이었다. 그런 여자를 5년씩이나 묶어놨다니··· 쓴웃음을 지으며 문을 열고 정원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뒤에서 멈춘 택시를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형?”
“도련님?”
택시에서 내린 건 박태진이었다. 나와 박태진은 서로를 보며 미소를 그렸다.
“형도 유 차장하고 좋은 시간 보내셨나보네요.”
“도련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공기가 차니 들어가시죠, 후후.”
다 큰 성인들의 일이기에 서로를 마주보며 빙긋 미소를 띠던 우리는 집으로 들어갔다. 각자가 불살랐을 어젯밤의 여운을 담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