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40th. 거래 준비 (2)
할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채권단과 만나서 아도자동차 인수를 마무리 짓고 해동증권 홍콩 지점에 전화를 넣은 지 하루가 지났다.
“이 이사는 10월까지 그 친구들을 봤겠지만 난 근 1년 만에 보겠구먼, 허허.”
“그러시겠네요, 하하.”
나와 조영찬은 해동증권 일행의 도착 시각에 맞춰 김포공항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화려한 환영준비는 못했지만 우리에겐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인재들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입국장 문이 열리면서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이사님!”
“형!”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드는 박태진을 보고 나도 힘껏 손을 흔들었다. 2개월 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이제야 완전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출 수가 없어 박태진에게 달려갔다.
“고생했어요, 형.”
“아닙니다, 이사님. 편히 쉬다 돌아왔습니다, 하하.”
박태진을 보며 미소를 띠던 나는 민주형과 주승빈의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민 이사님, 주 부장님.”
“네, 이사님.”
“고마워요. 여러분들이 안 믿어줬으면 홍콩 프로젝트는 시작도 못했을 겁니다.”
감사 인사를 올린 나는 두 사람에게 가볍게나마 고개를 숙였다.
‘윗사람이라고 무조건 뻣뻣해서는 안 돼.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이면 가끔씩이나마 고맙다는 말도, 사과의 말도 건네고 고개도 숙이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내가 고개를 숙이자마자 민주형과 주승빈이 황급히 양쪽에서 내 팔뚝에 손을 댔다.
“그러지 마십시오, 이사님. 대표님과 이사님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저희 같은 놈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습니까?”
“민 이사님 말이 맞습니다, 이사님. 이사님께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의 만류를 듣고서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 눈에 들어온 두 사람과 나머지 18명의 멤버들 모두 나를 보는 눈빛이 부드러워진 게 마음에 들었다.
“1년간 정말 고생했어요. 이번에 여러분들 성과급에 배당금은 1인당 100억씩 챙겨드리죠. 다음에 나갈 땐 지점장이나 법인장으로 보내드리고요. 어떠십니까, 대표님?”
“이, 이사님?”
입이 떡 벌어진 스무 명을 보며 껄껄 웃던 조영찬이 내게 대답했다.
“이렇게 공을 세웠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자네들 모두 그땐 임원 명패 들고 나가야 할 걸세, 하하.”
“네, 대표님!”
그들의 힘찬 대답에 조영찬이 껄껄 웃으며 내 곁으로 왔다.
“다들 기합이 바짝 들어갔구먼. 며칠 푹 쉬고 연락하면 좋은 데서 밥이나 한 끼 하세.”
“감사합니다, 대표님!”
누가 뭐래도 이들은 어디에 내놔도 자랑스러운 내 사람들이다. 다시 한 번 대답하는 그들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넘치고 있었다.
***
집으로 돌아온 나와 박태진은 짐을 풀고 나서 삼청동으로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회장님.”
문을 열고 들어간 박태진은 바로 앞에 있는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절을 올렸다. 할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고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며 박태진의 등을 쓰다듬어줬다.
“욕 봤다, 태진아. 먼지구덩이에서 그러지 말고 어여 일어서, 으허허.”
할아버지와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운 박태진과 함께 서재에 들어가서 차를 마셨다.
“집안 살림 일으키겠다고 고생 많았다, 태진아.”
“아닙니다, 회장님.”
찻잔을 내려놓은 할아버지의 칭찬과 위로에 박태진도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지는 그런 박태진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너나 성민이 모두 이제는 어엿한 해동의 중진이다. 해서.”
할아버지는 말을 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책상 쪽으로 간 할아버지는 서랍을 끄집어내고 그 안에 담긴 서류철 하나를 가지고 왔다.
“받아라. 때 되면 너 주려고 처리한 거다.”
박태진은 할아버지가 내민 서류철을 두 손으로 받았다. 할아버지는 박태진에게 손을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
“이 자리에서 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허허.”
“네··· 회장님.”
표지를 펼친 박태진은 안에 적힌 내용을 보고 눈이 커졌다.
“회장님?”
“해동물산 주식 2퍼센트다. 지난 9월에 네 앞으로 돌려뒀으니 받아둬.”
해동물산 주식은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비싼 주식이다. 현찰 짱짱한 해동그룹의 총사령탑이자 이 나라에서 가장 크고 가장 강력한 종합상사의 주식이 아닌가?
그런 주식을 할아버지가 2퍼센트나마 박태진에게 줬다는 건 그룹 수뇌부로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저는 아직···.”
박태진이 자신의 위치를 의식하며 고사하려고 했지만 할아버지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거 처리하려고 세금 왕창 깨졌어, 이놈아. 그 돈 네가 물어낼 텨? 허허.”
“···죄송합니다, 회장님!”
박태진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고, 할아버지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그를 보며 말했다.
“승주도 비서실장 됐을 때 그만치는 넘겨줬었다. 승주나 너나 내 아들 같은 놈들인데 똑같이 나눠줘야지, 허허.”
할아버지의 푸근한 웃음소리에 박태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애써 참는 게 보였지만 그의 눈가에 물기가 맺히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우리 가족이니 열심히 해야지, 으허허허!”
박태진은 그대로 할아버지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였고,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흐뭇한 표정으로 박태진을 바라봤다. 이제야 박태진도 진정한 우리집안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보는 나도 뿌듯했다.
***
여운이 가실 무렵, 할아버지가 차 한 모금을 축이고 입을 열었다.
“너희 둘 다 이제야 장가를 보낼 것 같구나. 그렇지?”
“네, 할아버지.”
“네, 회장님.”
할아버지의 은근한 눈빛에 우리 모두 허리와 가슴을 쭉 펴고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할아버지는 우리가 결혼할 준비가 됐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흐뭇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좋다. 혼인은 언제든 할 수 있으니 된 것 같은데···.”
또 뭐가 걸려서 저러는지 모르겠다. 뜸들이지 말고 빨리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내색하지 않고 기다리던 우리는 할아버지에게서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
“다가올 투표, 어찌 생각하느냐?”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나는 망설일 것도 없이 대답했다.
“기존 여당은 안 됩니다.”
“호오, 칼처럼 대답하는 걸 보니 이유가 있는 게구나. 말해 보거라.”
뻔히 알면서 물어보는 것이겠지만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나라살림을 말아먹은 여당입니다. 그런데도 재집권에 성공하면 끝도 없이 오만해질 겁니다. 무엇보다 뒤늦게 달러를 풀기 시작한 우리에게 해코지를 하겠죠. 어떻게든 자신들의 잘못을 뒤집어씌울 희생양을 찾을 테니까요.”
“그것만은 아니겠지?”
기대에 가득한 할아버지의 눈빛. 나는 그 눈빛을 보고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박태진 이사의 의견도 들었으면 합니다. 해동물산 주주인데다 내년이면 전무로 승진하잖습니까?”
“그것도 좋겠구나. 박 이사도 말해봐.”
잠시 숨을 고르고 박태진이 입을 열었다.
“이 이사 의견도 맞지만 야당의 김 후보는 지난 대선 때 현재 대통령에게 졌던 분입니다. 이번에 당선되지 못하면 다음은 기약하기 어려울 텐데 회장님을 비롯한 우리 그룹에서 당선을 도우면 향후 사업 확대에 도움이 될 겁니다. 물론.”
박태진은 잠시 끊었던 말을 다시 이어 붙였다.
“회장님께서 절대로 정부를 상대로 헐값에 이익을 취하실 일은 없으실 테니 김 후보 측에서도 우리 측의 사업 확장에 큰 제동은 걸지 않을 거라 봅니다.”
할아버지는 우리의 대답을 듣고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 대답대로다. 그럼 김 후보를 당선시키려면 어찌 해야겠느냐?”
또 알면서 물어보시는 거지만 원하신다면 대답해드릴 수밖에. 나는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답, 할아버지가 듣고 싶을 답을 내놨다.
“헨리에게 다녀오겠습니다, 할아버지. 가서, 김 후보 측에 힘을 실어달라고 부탁하겠습니다.”
“가능할 겁니다, 회장님. 형님 결혼식 때 로이스 경이 회장님께 약조했던 바도 있으니 조건만 맞으면 가능할 거라 봅니다.”
이어지는 박태진의 대답까지 듣고서야 할아버지가 만족하는 표정으로 우릴 보며 말했다.
“좋다. 너희들 장가가는 건 미국 출장 다녀와서다. 성민이가 미국 사돈의 동업자이니 쉽게 풀릴 터. 며칠 푹 쉬고 다녀 오거라.”
할아버지의 주문이 끝났지만 한 가지 더 해야 할 일을 할아버지에게 알렸다.
“헨리를 만나는 대로 체이스맨해튼에서의 대출 건도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할아버지.”
“오냐. 다녀오는 김에 40억 불도 가져 오거라,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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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기분 좋은 축객령을 받은 우리 둘은 스탠더드 캐피털 사무실로 갔다. 할아버지의 주식 증여 이야기를 듣고 선해철이 흐뭇한 표정으로 박태진을 바라봤다.
“축하한다, 태진아.”
“아닙니다, 형님. 형님도 못 받은 해동물산 주식인데···.”
박태진은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말끝을 흐렸지만 선해철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어, 인마. 나야 회장님 해외비자금 관리하면서 원하는 곳까지 올라갔으니 그걸로 충분해. 덕분에 클레어처럼 좋은 여자하고 결혼했잖냐?”
“그래도···.”
“됐다니까 그러네? 이번에 장호민 계열사 거둬 와서 해동물산에 넘겼는데 스탠더드에 떨어질 매각 차익이 전부 내 몫이야. 성민이가 주기로 했으니 그걸로 됐어, 흐흐.”
소탈하게 웃던 선해철이 소파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리고 내게 물었다.
“미국에 다녀올 거라고?”
“네, 삼촌. 이번 대선 맞춰서 김 후보 측에 대한 헨리의 지원사격이 필요합니다.”
대답하는 나를 보며 선해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다. 헨리도 엔고투기 때문에 아직도 찜찜해했었는데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라도 수락해줄 거야.”
헨리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투자가이기도 하지만 명예와 긍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니 이번 기회만큼 좋은 기회가 없을 것이다.
***
며칠 뒤.
나와 선해철, 박태진은 뉴욕으로 날아가서 헨리를 만나고 있었다.
“마르코께서 그런 부탁을 하셨다고?”
할아버지의 영어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르는 헨리를 보며 선해철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헨리. 지금의 한국은 외환위기에도 불구하고 지역감정과 레드 콤플렉스 때문에 야당 후보가 불리합니다.”
“흐음···.”
선해철의 설명을 듣고 헨리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고 박태진이 바통을 넘겨받았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 분은 절대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로이스 경. 현재 여당과 독재자들이 터무니없는 낙인을 찍은 겁니다.”
김 후보가 공산주의자였다면 여당보다 더한 자본주의 정책들을 했을 리가 없다. 고개를 끄덕이던 나 또한 두 사람의 뒤를 이어 설득에 나섰다.
“썬과 미스터 박의 말 모두 맞습니다. 그러니 헨리께서 김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시면 김 후보가 당선될 겁니다.”
역사대로 흘러가도 야당 후보가 당선되겠지만 나는 그 선거의 내용을 바꾸고 싶었다.
야당 후보가 압도적인 지지율을 바탕으로 선거에서 이겨야 국회의석 수를 극복할 만한 정치적 동력을 확보한다. 그 힘이 있어야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잡음 없이 먹을 수 있었다.
말없이 홍차를 비우던 헨리가 잔을 내려놨다.
“일전에 우리 딸아이를 썬에게 시집보낼 때 마르코께 약속드린 걸 이제야 지키겠군. 나도 손을 보태겠네.”
“고맙습니다, 헨리. 정말 고맙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헨리는 나를 보며 껄껄 웃으면서도 손을 내저었다.
“고맙긴 이 사람아. 조니 자네 덕분에 돈도 벌고 명예도 얻게 됐으니 내가 고맙지. 어서 앉게.”
겸연쩍은 미소를 띠며 소파에 앉은 내게 헨리가 말했다.
“사실 나도 ‘미스터 킴’에 대해서는 짧게나마 들은 적이 있네. 20여 년 전에 조니 자네 나라의 군부 출신 독재자들과 맞서다 이 나라에서 망명생활을 했다고 들었는데, 맞는가?”
“그렇습니다, 헨리. 뿐만 아니라 그 분은···.”
젊은 시절에 사업으로 성공하기도 했고, 언론사도 꾸리며 사설도 직접 써서 올렸다는 등 현재까지 실현된 그 양반의 인생역정, 그리고 그와 붙을 여당 후보의 인생까지 들려주자 헨리가 탄성을 흘렸다.
“그런 분이라면 법전만 뒤적거리던 여당 후보보다 대화가 통하겠군. 지금 같은 시기에는 경제적 감각도 있고 사익보다 공익을 먼저 여기는 사람이 키를 쥐어야 하니 말이야.”
후보 본인은 몰라도 그 아들들이든 야당이든 똥파리 같은 놈들이 많아서 기름칠이 필수지만 그 정도 돈은 우리집안 사채조직에서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 검경과 국세청조차도 못 찾는 돈이 수두룩하게 돌아다니는 사채시장은 그 검경과 국세청 윗대가리들이 받아먹은 돈도 나온 곳이 아닌가?
“그래서 추천 드린 겁니다, 헨리. 지금부터 트라이엄프 캐피털 한국법인을 통해 해동건설과 해동중공업, 해동시멘트 주식을 매입하신 뒤에···.”
뒷거래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안 꺼내고 향후 액션에 대해서도 시나리오를 알려주자 헨리가 나를 보며 껄껄 웃었다.
“아주 좋은 시나리오일세! 마다할 이유가 없겠어, 하하!”
“감사합니다, 헨리.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헨리를 설득하는 일은 성공했다. 할아버지는 ‘김 후보’ 상대로 잘하고 계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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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민이 헨리를 만나서 시나리오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을 때, 이대수 또한 삼청동 저택의 서재에서 수화기를 귀에 붙이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후보님. 지금의 오물과 잔해를 치우고 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분은 후보님뿐이라서 준비한 일입니다. 그러니···.”
이날 평생 자신의 격을 높이기 위해 겸양을 떨었던 이대수였지만 지금은 자신과 통화를 주고받는 ‘김 후보’에게 진심으로 자신을 낮추고 있었다. 자신과 손주가 그릴 해동그룹의 미래에 손을 보태줄 사람이기에 이대수의 목소리에서는 절박함까지 묻어나고 있었다.
[저 또한 이대수 회장님의 성품과 경영을 존경해왔습니다. 이 회장님께서는 재계에서 유일하게 노사관계도 살피시고 선을 지켜가면서 기업을 일구셨잖습니까? 그런 이 회장님께서 손을 보태주시겠다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허허.]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이대수의 표정이 밝아졌다. 자신에 대한 칭찬의 진위(眞僞)는 몰라도 자신의 제안과 그에 따른 ‘거래’까지 받아들이겠다는 말이 아닌가?
“고맙습니다, 후보님. 그리 말씀하셨으니 계획대로 진행해도 되는 걸로 알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거래가 끝내고서야 이대수의 표정이 밝게 변했다. 20여 년 전부터 쌓인 한을 이제야 제대로 풀 것 같은 예감에 그의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