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39th. 정산 시작 (3)
선해철은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장호민에게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죠, 신성정유, 신성석유화학, 신성제철 전부 넘겨주시죠. 넘겨만 주시면 비자금 문제도 넘어가드리고 3억 불을 더 얹어드리죠.”
장호민의 눈이 번쩍거렸다. 가장 심각한 문제 두 개를 치워버리는 것만으로도 혹할 만한 거래인데 3억 달러를 더 쳐주겠다니?
“선 대표?”
“장호민 부회장님도 건질 게 있어야 거래가 되겠죠. 우리 스탠더드, 그렇게 야박한 회사 아닙니다, 하하.”
스탠더드가 한국에서 자리 잡으려면 평판 관리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가 신성을 잡아먹을 때를 대비하려면 지금부터라도 좋은 평판을 쌓아둬야 합니다, 삼촌.]
스탠더드의 오너이자 해동그룹의 적장손인 이성민의 주문은 매우 합당했기에 선해철은 당장의 손해를 감수하는 쪽에 동의한 것이었다.
선해철의 웃음에 장호민의 표정도 부드럽게 변했다.
석유화학계열을 날린 건 아쉽지만 고로 하나도 없는 제철소를 팔아서 빚도 털어내고 금덩어리가 될 3억 달러를 받을 수 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선 대표가 그리 해주겠다면야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준비되는 대로 계약서부터 씁시다.”
장호민은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선해철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선해철도 그의 손을 잡으며 승자의 미소를 띠었다.
***
장호민이 나간 뒤, 선해철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지간히 똥줄 탔나보다. 우리가 3억 불 던져주겠다니까 얼씨구나 하고 넘기겠다네? 흐흐.”
“잘 됐네요, 흐흐.”
선해철은 나와 함께 흘리던 웃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너무 손해 보는 거 아니냐? 장호민 그놈이 환차익 먹으면 어떡하려고?”
선해철이 날 떠보는 것 같았지만 나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괜찮아요, 삼촌. 그 3억 달러, 나머지까지 빼먹으려고 던져준 미끼니까요. 현찰 대신에 담보 물건 받아주고 3억 달러까지 얹어주면 절대 우릴 욕하진 못할 겁니다.”
더 큰 거래를 위해서라면 3억 불은 기꺼이 던질 수 있었다. 밑천이 많으면 돈을 더 부어서 그 이상의 수익을 남기는 방법을 택하는 게 투자가 아닌가?
선해철이 날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독한 놈, 정말로 할 생각이구나. 능지처참.”
“물론이죠. 장호민 부회장 회사,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전부 우리가 잡아먹을 겁니다.”
“그렇게 집어먹을 회사는 전부 명진이한테 넘길 테고?”
“그렇죠. 8.3 사채동결로 밀린 이자까지 하나씩 하나씩 전부 받아낼 겁니다. 장호경 회장도, 호건이 아저씨도 마찬가지고요.”
내 복수를 따라올 능지처참은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없을 거다.
앞으로 장 씨 것들의 회사를 하나씩 하나씩 집어삼키거나 지분을 늘려가며 그들의 살점에서 회를 떠낼 테니 말이다.
“오늘 따라 무서워 보인다, 너.”
“무서울 거 없어요, 삼촌. 이제 겨우 시작인데요, 뭐.”
몸을 부르르 떠는 선해철에게 태연하게 대꾸한 나는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말했다.
“첫 번째 정산은 끝났고··· 두 번째 정산 시작할까요?”
“두 번째 정산이면···.”
“호건이 아저씨요. 아도자동차 인수의 명분이 되어준 값은 적당히 치러줘야죠, 흐흐.”
세상 사악한 표정으로 웃음을 흘린 나는 차를 마시며 지금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
스탠더드 캐피털과 선해철을 앞세운 이성민이 장호민에 대한 정산을 끝냈을 때 성의원은 먹구름이 가득 끼고 있었다.
“수출대금으로 받는 외화는 핫머니 상환에 쓰거나 비축 중이고 국내 결제대금은 은행권 대출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환율 추세를 보면 외화는 한 푼이라도 더 모아둬야 합니다.”
“지금 회전 중인 외화는 3억 달러가 고작입니다. 이대로 가면 수출보증에 쓸 돈은 고사하고 핫머니 상환에 쓸 돈도 부족해질 겁니다.”
“문제는 수입 대금입니다. 스텔라 케미파나 모리타, 히타치 케미컬을 비롯한 업체들이 엔화나 달러 현금이 아니면 물건을 안 넘기겠다고 통보해왔습니다.”
핵심계열사 사장단들과 그룹 비서실 임원들의 보고를 받고 있는 장호건의 얼굴은 잔뜩 굳어있었다. 그 와중에도 마지막 끈을 놓지 않으려는지 간절한 눈빛으로 이수한을 바라봤다.
“이 실장.”
“예, 회장님.”
“재정경제원에 연락한 건 어떻게 됐나?”
“죄송합니다, 회장님. 몇 번이나 전화했지만 받질 않습니다.”
비서실장을 맡은 지 10년이 되어가는 이수한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외환위기도 외환위기지만 자신이 전화를 하면 누던 똥오줌까지 허겁지겁 끊고 받던 놈들이 이제는 핸드폰이 터지도록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아서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쾅!
“개 같은 놈들, 지금껏 뜯어먹은 게 얼만데!”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친 장호건의 거친 욕지거리에 모두들 침을 꿀꺽 삼켰지만, 이어지는 그의 지시에 얼굴빛이 사색으로 변해야 했다.
“달러든 엔이든 마르크든 한 푼도 쓰지 말고 철저히 관리해. 돈줄 끊기고 그룹 망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옷 벗을 줄 알아!”
장호건은 큰소리로 임원들을 쫓아낸 뒤, 이수한에게 물었다.
“아도자동차 인수, 불가능하겠지?”
“죄송합니다, 회장님. 원화는 잔뜩 쌓여있지만 혹시 모를 달러 매수를 위해 남겨둬야 합니다.”
이수한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장호건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머리 좋은 녀석까지 비관적인 전망을 비칠 정도면 아도자동차는 포기해야 했다.
“미치겠군. 하필이면 이럴 때···!”
장호건이 말끝을 채 맺지도 못하고 책상을 내려쳤다. 그렇게 원하고 원했던 아도자동차 인수가 코앞인데 외환위기가 웬 말인가?
장호건과 이수한이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한참 끙끙 거릴 때 전화벨이 울렸다.
[안녕하십니까, 장호건 회장님.]
“선 대표가 무슨 일이오?”
[아도자동차 인수대금 조율 때문에 연락 드렸습니다. 어떻게, 가능하시겠습니까?]
선해철의 가벼운 목소리에 장호건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금 누구 놀리는 거요?”
[내가 지금 장 회장님 놀리겠다고 재촉하는 줄 아십니까? 줄 돈 빨리 주고 제대로 자동차 만들자는 거 아닙니까?]
선해철의 정론에 장호건의 이맛살이 더 구겨졌다. 뻔히 자신을 약 올리려는 수작이 아닌가?
[회장님께도 말씀드렸는데 장 회장님이 낼 몫을 정하고 나면 연락하라고 하시더군요. 해동그룹은 신성그룹이 분담하고 남을 액수의 반을 내겠다면서요.]
이대수가 왜 그런 자신감을 내비칠 수 있는지 장호건은 뻔히 알고 있었다. 해동그룹의 자체 현금만 수십억 달러가 넘지 않던가?
마음 같아서는 해동그룹에서 달러를 빌리고 싶지만 더 이상 손을 벌릴 수는 없었다. 이대수가 눈치를 주지 않아도 시집보낼 딸의 성품이면 제풀에 시댁에서 눈치 볼 게 아닌가?
장호건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알겠소. 내가 직접 가리다.”
[그러시죠.]
통화가 끊겼고, 장호건이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놨다.
“빌어먹을···.”
대 신성그룹의 회장이 돈놀이하는 놈들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다니··· 장호건에게 오늘처럼 분한 날도 없었다.
***
장호건은 이수한과 함께 스탠더드 캐피털 사무실에 들어왔다. 응접실로 들어간 두 사람은 선해철과 간단한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차를 마셨다.
“인수대금, 어떡하시겠습니까?”
빚쟁이 같은 선해철의 태도에 장호건과 이수한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양놈들의 개 노릇이나 하는 놈이 감히!
“선 대표는 어떡할 거요?”
“우리도 장호건 회장님이 부담할 만큼의 나머지를 해동그룹과 반씩 분담해야죠. 대신에 장 회장님 분담금이 1조를 안 넘기면 아도자동차와 신성물산 자동차사업본부를 합병하는 안은 절대 찬성하지 않을 겁니다.”
처음부터 차단벽을 딱 쳐놓은 선해철 때문에 두 사람의 숨이 턱턱 막혔다. 신성물산 자동차사업본부를 신성자동차로 분리시켜서 아도자동차와 합병하려던 계획을 막겠다니?
“그렇게 보지 마시죠. 장 회장님, 이 실장님. 지분의 3분지 1도 안 가져갈 거면서 혹덩어리를 떼어다가 붙이려는 건 어느 나라 상도덕입니까?”
선해철은 두 사람의 굳은 표정을 보면서도 가시 돋은 말들을 쏘아댔다.
“우리가 원해서 한 일이지만 우린 아도자동차 인수 참여 과정에서 막대한 환차손을 봤습니다. 그 손해를 메우려면 아도자동차를 건실하게 키워야 하는데 빚만 잔뜩 진 군식구가 늘어나면 회수가 더 늦어지지 않겠습니까?”
군식구라니, 군식구라니, 군식구라니!
저 건방진 선해철의 주동아리를 찢어놓고 싶었지만 장호건은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아도자동차 인수 말고도 거래해야 할 게 있지 않던가?
마른침만 삼키는 두 사람을 보며 선해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신성그룹은 아도자동차에서 손 떼시죠. 하루라도 빨리 인수해서 살려야 하는데 무슨 꼴입니까?”
그 말을 듣고 장호건이 버럭 소리 질렀다.
“이봐요, 선 대표! 당신네 스탠더드가 아도자동차에 발 걸친 게 누구 덕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요!”
장호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해철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럼 돈을 내시란 말입니다, 장호건 회장님. 지금 쥐고 있는 1조 4천억 원이면 아도자동차 인수대금 3분지 1은 차고 넘치게 댈 텐데 왜 안 쓰시는 겁니까?”
“그, 그건···.”
장호건이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칼자루를 쥔 건 자신이 아니라 선해철이 아닌가?
선해철은 장호건과 이수한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친조카처럼 아끼는 성민이 여자친구의 아버지라서 말씀드리죠. 아도자동차 인수에서 빠지시면 스탠더드와 해동그룹에서 아도자동차에 돈을 대고 신성물산 자동차사업본부를 인수하겠습니다. 미국 달러로요.”
장호건과 이수한의 눈이 커졌다. 그 빚덩어리 회사를 달러를 주면서까지 가져가겠다니?
“선 대표?”
“사실입니까?”
“대신에 신성물산 자동차사업본부 부채는 장 회장님도 나눠가지셔야 합니다. 빚만 떠안고 10원에 가져와도 본사에서 욕을 먹을 사업 아닙니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저 양아치 구렁이 같은 선해철이 순순히 호구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장호건이 선해철에게 물었다.
“우리가 선 대표 조건을 받아들이면 달러를 팔아줄 수 있겠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달러당 1,400원 쳐주겠소. 10억 불만 팔아주시오.”
장호건은 큰 맘 먹고 질렀지만 선해철은 코웃음을 치며 손을 내저었다.
“지금 환율이 1,100원입니다, 장호건 회장님. 앞으로 2천 원까지도 갈 거라는 소리에 명동과 남대문 사채시장도 달러의 씨가 말랐는데 1,400원이라뇨?”
“그러면 얼마나 받아야겠소?”
“달러당 1,600원은 주셔야겠습니다. 거기에 신성전자와 신성물산 지분 10퍼센트씩도 유상증자로 넘겨주시죠. 납입 주금은 달러로 드리죠. 달러당 1,600원씩 쳐서요.”
헐값으로 자신의 두 팔에 안 빠질 주사바늘을 박아 넣고 쭉쭉 빨아먹겠다는 소리였지만 장호건은 선해철의 제안을 대번에 거절할 수 없었다. 달러가 없어서 수출보증을 못하는 통에 공장에서 찍어내는 반도체도 못 팔고 있지 않은가?
잠시 고민하던 장호건이 선해철에게 말했다.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은데 비켜줄 수 있겠소?”
“얼마든지요.”
선해철은 서슴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휘적휘적 응접실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장호건이 이를 갈았다.
“저 새끼 모가지, 언젠간 내 손으로 꺾어놓는다.”
선해철에 대한 욕지거리를 끝낸 장호건이 이수한에게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앞으로 3일 뒤에 신성물산과 고려호텔 합병이 완료됩니다. 그 뒤에 유상증자를 해야 한 주라도 더 지분을 방어할 수 있습니다.”
고려호텔과 신성물산 모두 장호건이 직간접적으로 보유한 지분이 많은 회사들이다. 모래알을 뭉쳐 바윗돌로 만들고 나서 처리하자는 이수한의 제안에 장호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합병이 끝나는 대로 다시 협상하도록 하지.”
“네, 회장님.”
자리에서 일어난 이수한이 응접실을 나갔고, 선해철은 이수한과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어떡하시겠습니까?”
“나 혼자서 단독으로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소. 중역들 의견도 들어봐야 하니 며칠만 더 고민해봅시다.”
선해철이 장호건의 말을 듣고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아도자동차 인수는 손 떼시는 걸로 알고 이 회장님께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장호건은 기어이 원치 않던 꼴을 보고야 말았다. 가슴 속에 맺히는 피눈물을 삼키며 장호건은 이수한과 함께 응접실 문을 거칠게 열고 나갔다.
***
3일 뒤.
장호건과 이수한은 다시 스탠더드 캐피털에 방문해서 선해철과 유상증자 및 환전 계약을 마쳤다. 두 사람을 보낸 선해철은 방으로 들어와서 나에게 계약서를 보여줬다.
“신성전자 지분 10퍼센트에 3억 불, 신성물산도 10퍼센트에 1억 불, 10억 달러 환전에 1조 6천억 원··· 좋네요.”
가볍게 휘파람을 부는 나와 달리 선해철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며칠 전하고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어. 거드름 피우는 꼴이라니···.”
“걱정 마세요, 삼촌. 지분 인수만 마치고 나면 스탠더드가 보유한 신성전자와 신성물산 지분이 15퍼센트 직전까지 늘어나니까요.”
지금까지 나와 선해철은 여러 증권사 창구에서 신성전자와 신성물산, 태현자동차, 태현건설 등의 주식을 5퍼센트 직전까지 사들였다.
돈은 문제가 없었지만 더 이상 장내매수로 지분을 늘리는 건 장호건을 비롯한 다른 재벌들의 경계를 사기 좋은 일이다. 지금보다 신성전자와 신성물산 주식을 늘리려면 유상증자가 가장 모양새가 좋았다.
“아무튼, 두 번째 정산도 끝났고··· 이제는 어디냐? 흐흐.”
잠시 고민하는 척하던 나는 선해철을 보며 말했다.
“외삼촌들 좀 도와드려야겠어요.”
“GK그룹 말하는 거냐?”
“네.”
“거긴 조금만 고생하면 고비 넘길 거 아냐?”
선해철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녹녹한 것 같지가 않아요. 핫머니 때문에 부담이 커지고 있다네요.”
내 외가인 GK그룹은 그 어떤 인수전에도 나서지 않고 내부 살림을 정리하는 데만 집중했다. 그럼에도 달러가 없어서 수출입을 못하는 건 매한가지인지 GK그룹 임원들이 남대문과 명동을 돌아다니며 달러를 구할 정도였다.
선해철은 어두운 내 얼굴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성정유에 신성석유화학 전부 해동물산에 붙이면 GK화학이나 GK정유와 충돌하게 될 테니 어쩔 수 없지. 알았다.”
“고마워요, 삼촌.”
고개를 꾸벅 숙인 내게 선해철이 조건을 내걸었다.
“대신에 너희 외삼촌들한테 투자 제안하는 건 네가 졸라서 한 걸로 포장할 거다?”
“네?”
“외가 어른들한테 점수 좀 따둬야지? 흐흐.”
피는 안 섞였지만 선해철만한 삼촌도 없었다. 나는 선해철과 마주보며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