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38th. 각개전투 (2)
이성민 일행이 홍콩 증시에서 풋옵션으로 돈을 쓸어 담고 있을 때, 삼청동 본가 서재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뭐시라고? 유상증자?”
이대수는 고승주가 올린 보고를 듣고 두 손으로 책상을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고승주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이대수를 보며 대답했다.
“예, 회장님. 태현그룹에서 해외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3천억 원의 유상증자를 했다고 증권거래소에 공시가 떴습니다.”
“독한 양반··· 병호 형님한테 진 빚 갚겠다고 해외 비자금까지 끌어다 쓸 줄이야···.”
말끝을 맺지 못하고 이대수가 이를 악물었다.
10월이 시작된 지금, 환율이 불안정한 이 시국에 해외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3천억 원의 유상증자를 했다는 건 아도자동차을 집어삼켜서 신성그룹을 자동차 시장에서 퇴출시키겠다는 뜻이 아닌가? 해외로 빼돌린 비자금까지 털어가면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이대수를 보며 고승주가 보고를 이어갔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태현그룹이나 신성그룹 모두 하청업체들에게 어음을 뿌리고 현금을 묶어두고 있습니다.”
“뭐라? 어음?”
이대수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헤지펀드들이 동남아를 신나게 약탈하고 나면 한국으로 올라올 텐데 가장 취약한 중소기업들을 쥐어짜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꼴인가?
한숨을 내쉰 이대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들 미쳤군. 제정신이 아니야. 크던 작던 회사들이 나자빠지고 있는데 아도자동차 하나 먹겠다고 다 같이 죽자는 건가?”
조 단위의 기업들이 겨우 2,3백억 원의 어음을 못 막아서 나자빠지고 있는데도 남 일처럼 여기는 듯한 두 그룹의 경쟁에 이대수는 밀려올라오는 탄식을 참지 못했다.
[양쪽 모두 어음을 뿌리고 현찰을 끌어 모을 겁니다. 우리는 태현그룹 어음을 인수해야 합니다, 할아버지.]
‘고 녀석 참···.’
손톱을 책상으로 두들기며 장손의 혜안에 감탄하던 이대수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안 되겠군.”
이대수가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날세, 조 대표. 태현에서 뿌린 어음이 얼마나 되나?”
조영찬에 대한 이대수의 질문에 고승주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봤던 아도자동차 인수 시나리오를 이대수가 따르다니?
“회장님?”
고승주가 마른침을 삼키며 이대수를 불렀다. ‘대체 왜 그렇게 스탠더드 캐피털을 도우시려는 겁니까?’라는 질문은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그런 고승주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대수는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고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조영찬의 대답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번 달 말에 상환 받을 놈부터 태현그룹 어음 5천억 매입해. 액면의 2퍼센트만 할인해서. 그리고···.”
“회장님?”
고승주의 눈이 커졌다. 한국은행 기준금리가 8퍼센트인 지금, 태현이 뿌린 어음을 액면의 2퍼센트만 깎아서 인수하면 사실상 손해를 보겠다는 말이 아닌가?
아연실색한 고승주를 보면서도 이대수는 전화로 조영찬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지시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래. 수고 좀 해주게. 명동에 시켜서 소문 흘리고.”
수화기를 내려놓고 이대수가 고승주에게 말했다.
“그 황금야차 놈들이 동남아에서 이 땅으로 넘어오면 환율이 폭등할 거다. 아도자동차를 먹을 수 있다면 5천억 정도는 얼마간 묶여도 되지 않겠느냐? 떼일 돈도 아니고.”
“···끝까지 가시려는 겁니까, 회장님?”
고승주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이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호 형님이 레이스를 쳤는데 이쪽도 받아쳐야 인지상정 아니겠나? 우리가 쥘 어음이 진호 형님 모가지에 채울 개목줄이 될 게야, 흐흐.”
음침하게 웃던 이대수가 눈을 껌뻑거렸다.
“한 놈한테 더 전화해야겠군.”
고승주는 지금 이대수가 말하는 ‘한 놈’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수화기를 귀에 대고 다른 손 손톱으로 책상을 두들기던 이대수를 숨죽이고 지켜봤다.
“아, 명 회장? 이대수일세. 우리 쪽에서 태현그룹 어음을 사들일 건데···.”
이대수는 명세호와 작전 계획을 주고받은 뒤, 껄껄 웃었다.
“자네 형님, 미치고 팔짝 뛰겠군. 잘 해보세, 흐흐.”
순식간에 전화를 끊은 이대수의 얼굴은 악마가 미소를 품은 것보다 더 사악해보였다. 고승주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고, 이대수는 그를 보며 낄낄 웃었다.
“이 늙은이가 그리도 무서워 보이는 게냐? 으허허.”
“죄송합니다, 회장님.”
고개를 숙인 고승주는 오늘처럼 이대수가 무서워 보인 적이 없었다. 평생 분란을 싫어해왔던 양반이 사생결단 수준의 분란을 일으키고 원하는 걸 손에 넣으려 들다니?
그뿐만이 아니다. 중소기업이 쥐고 있는 어음을 액면으로 매입해서 태현그룹의 목줄을 틀어쥐면서도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바탕까지 만들지 않았나?
이대수가 홀가분하다는 표정으로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인자 우리 장손이 얼마나 벌어올 지만 지켜보면 되겠구먼, 으허허.”
한 번도 홍콩에 전화를 안 했지만 이대수는 이번에도 장손이 큰 기회를 잡을 거라 여기며 껄껄 웃었다.
***
이대수의 지시가 떨어진 다음 날부터 해동종금 본점을 비롯한 수도권 지점 직원들은 새벽부터 이슬을 맞으며 기다린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 자! 다들 줄 서세요! 줄!”
해동종금 직원들은 목이 터져라 소리치며 사람들에게 번호표를 나눠줬다.
번호표 발급기가 있는 객장 내부는 태현그룹의 어음을 할인받으러 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에 혼잡을 우려한 직원들은 수기로 작성한 번호표를 나눠주고 있었다.
“101번 고객님!”
“네!”
여직원의 호명에 한 중년의 남성이 벌떡 일어서서 창구로 뛸 듯이 걸어갔다.
“얼마라고 하셨죠?”
“5억 원입니다. 얼마를 할인해도 좋으니 현금만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의자에 앉자마자 어음을 내민 그 남자는 태현정밀에 자동차 부품을 납품하는 하청업자였다.
10월에 만기가 오는 어음인데도 시중은행조차 어음을 할인해줄 수 없다고 하는 통에 생전 처음으로 명동 사채시장에 발을 들였던 그 남자는 뜻밖의 말을 들었다.
[태현그룹 어음이면 우리 말고 해동종금 가 보슈. 당신 같은 양반, 우리하고 얽히면 좋을 거 없으니까 말이오.]
그래서 그 남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창구직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간절함이 전해져서일까, 착잡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던 여직원이 계산기를 두들기고 말했다.
“4억 9천만 원이네요. 어디어디에 지급하셔야죠?”
“예?”
남자는 믿을 수가 없었다. 기준금리가 8퍼센트인데도 액면의 2퍼센트만 어음을 할인받다니?
얼떨떨한 표정의 남자를 보며 여직원이 싱긋 미소를 띠었다.
“죄송하지만 전액 현찰 지급은 불가능합니다, 고객님. 대신에 저희 계좌를 만드시고 거래처 계좌를 알려주시면 저희 쪽에서 거래처로 이체해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죠?”
남자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 걸 보고 여직원이 종이와 볼펜을 내밀었다.
“표시해드린 곳에 기재사항 적어주시면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재빨리 서류에 필요한 사항들을 적고 어음과 함께 넘겨줬다. 서류와 어음을 받은 여직원은 한참동안 키보드를 두들긴 뒤, 영수증을 넘겨줬다.
“처리되셨습니다, 고객님. 필요하실 때 다시 방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몇 번이고 인사를 한 뒤, 날아갈 것 같은 표정으로 해동종금 통장을 챙겨서 객장을 나갔다.
“어려운가 봐요, 대리님.”
방금 전 응대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직원의 착잡한 표정에 선배로 보이는 여직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종금사고 은행이고 다들 돈 없어서 난리잖아. 우린 정말 복 받은 거야. 대표님하고 이사님께서 미국에 투자한 덕분에 끄덕도 안 하잖아? 뱅크런도 없고.”
“그러게요. 회사에서 쫓겨날 때까진 꼭 다녀야겠어요.”
짤막한 대화를 마친 두 여직원이 다시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창구에 앉아 일하는 직원들 모두 자신들은 행운아라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
일주일 뒤.
태현자동차 회장실에 있던 명세호가 전화를 받고 있었다.
“네, 형님. 나도 이제 움직이겠소.”
명세호는 이대수에게서 태현그룹과 신성그룹의 어음 5천억 원어치를 인수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청운동의 명진호 저택에 갔다.
“나하고 내 아들이 가진 태현자동차 주식, 선구한테 넘겨주겠습니다, 형님.”
거실 소파에 앉자마자 동생이 던진 소리에 명진호가 놀랐다.
“뭐라고?”
“태현자동차, 선구한테 넘기겠다고 했소. 장자가 든든해야 집안이 바로 서는 법 아니오?”
명세호의 옅은 미소를 보고 명진호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고맙다, 세호야. 자동차도 키워주고, 동생들 중에 가장 먼저 양보해줬으니 원하는 건 뭐든 주마.”
‘키워줬다’라는 말에 명세호는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키워줬다니? 키워줬다니!
속으로 분노를 삭이던 명세호가 마른침을 삼키고 물었다.
“그 말씀, 정말이십니까?”
“사나이 명진호, 팔순까지 얼마 안 남았어도 두 말 안 한다. 각서 쓰고 지장이라도 찍어주랴? 으허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명진호는 종이와 펜, 인주를 가져와서 순식간에 펜을 휘갈기긴 뒤, 자기 이름 옆에 엄지에 묻힌 인주까지 꾹 찍어서 건네줬다.
“네 이름 먼저 쓰고, 지장 찍은 다음에 원하는 거 말하거라. 무리한 것만 아니면 넘겨주마.”
‘무리한 것만 아니면’이라는 말이 맘에 걸렸지만 명세호는 큰형님의 이름 밑에 자기 이름을 쓴 뒤, 빨갛게 변한 엄지손가락 지문을 옆에 찍었다.
“원하는 게 뭐냐?”
“선구가 갖고 있는 태현개발에 시멘트, 정유, 정유 밑에 있는 석유화학까지 주십시오. 태현개발에서 관리하던 땅에 용산역 개발권도 주시고요.”
“뭐라고?”
명진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나마 현금장사 하는 걸 다 가져가겠다고? 태현개발이 쥔 땅에 용산역 개발권만 해도···!”
“그나마라뇨, 형님? 태현자동차 할부금융 수익만 해도 시멘트 1년 장사 몇 배는 됩니다. 거기에 해운, 물산, 생명, 해상, 증권까지 있는데 무슨 걱정이십니까?”
지금껏 처음으로 자기 말을 끊는 동생의 말대답에 명진호는 기가 막히고 말문이 막혔다. 자식들 분가시킬 때 캐시카우 한두 개씩 떼어주려 했는데!
명진호의 이마에 굵고 긴 선이 패이고 있었지만, 명세호는 끝을 보기로 했는지 입을 열었다.
“언젠가부터 형님은 대통령, 은행장들 만났지만 저는 삼청동 가서 손바닥 비벼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끌어온 돈은 제가 더 많았지요. 자동차 공장 지을 때도, 주베일 바지선 운송 때 국내업자들에게 보증 부탁했을 때도 그렇고요.”
수십 년 전 옛날이야기에 명진호가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봐도 명세호는 물러설 수 없었다. 양지보다 음지에 돌아다니는 돈이 더 크던 시절에 매번 자신이 이대수 집안에서 돈을 끌어왔기에 꿇릴 것도 없었다.
더군다나 이대수와 그의 부친은 8.3 사채동결을 자축하던 큰형님을 대신해 용서를 구하던 자신에게 막걸리와 수육까지 내주며 ‘형 때문에 고생한다.’라며 위로까지 해줬었다.
그런 이 씨 집안과 달리 큰형님이란 작자는 태현그룹의 기둥인 태현자동차를 양보한 자신에게 가재도구 몇 개 내주는 것도 아까워하고 있으니 누가 가족이고 누가 남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침음성을 흘리던 명진호가 굳은 표정으로 명세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알았다. 태현개발에 정유, 석유화학, 시멘트 붙여서 내주마. 용산역 개발권에 태현개발 땅도 마찬가지다.”
“형님···.”
무리한 부탁인 줄 알면서도 자식들 걱정에 협박하다시피 부탁한 명세호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명세호의 눈빛이 흔들리는 이유는 명진호에 의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대신, 오늘부터 넌 남이다. 태현그룹과도 남이고. 두 번 다시 발 들이지 마.”
“형님!”
소리치는 명세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지만 명진호는 명세호가 달라던 계열사들을 각서에 적었다.
“원하는 대로 해줬으니 내일 오전에 회사로 와서 선구랑 정식으로 계약서 써. 일주일 안으로 계열분리 해주마. 신문기사는 곱게 나갈 테니 그리 알아. 마지막 배려다.”
할 말을 다 마친 명진호가 양 손으로 소파 팔걸이를 짚고 일어선 채 휭 하니 방으로 들어갔다. 명세호는 허망한 눈으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
몇 주 뒤. 10월 25일 토요일.
이대수는 한양일보에 실린 기사를 보며 모닝티를 마시고 있었다.
[명진호 회장의 통 큰 결단. 명세호 회장의 아름다운 퇴장]
“허허, 거 참.”
신문 1면 헤드라인을 보던 이대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계열분리 때문에 명진호, 명세호 형제가 등을 돌린 건 재계 내에서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한양일보의 노골적인 태현그룹 나팔수 노릇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걸로 태현그룹 발은 묶어뒀군, 안 그러냐? 흐흐.”
맞은편에 앉아 있던 고승주가 미소를 띠었다.
“그렇습니다, 회장님. 이번 계열분리 때문에 태현그룹이 소모한 현금만 4천억 원 이상입니다.”
“지분 교환하면서 채권도 묶여있겠지?”
“예, 회장님. 명세호 회장님 계열사들이 태현그룹에 묶인 채권 총액이···.”
고승주에게서 자세한 내역을 듣고 이대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독한 영감··· 세호한테 챙겨주는 게 그리도 싫었나, 쯧.”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었다.
재벌들이야 본인들 명의로 된 돈이 많지 않으니 지분교환 과정에서의 가치 차이를 채권으로 처리하는 건 당연지사다. 그러나 이자 내기도 버거울 만큼 채권을 묶어둔 건 숫제 다시 가져오겠다는 심보가 아닌가?
“어쩔 수 없겠군. 세호 빚은 우리가 대신 갚아줄 수밖에.”
“우리 쪽에서 부채를 대신 갚아주면서 태현정유, 태현석유화학을 가져오면 될 듯합니다.”
낮게 웃는 고승주를 보며 이대수가 껄껄 웃었다.
“맘에 드는군. 자동차에 기름장사, 쇳물장사까지 하면 아주 볼만 하겠어.”
이 모든 건 아도자동차 인수합병 시나리오의 하위 시나리오였다.
자신이 감수를 해주는 과정에서 명세호와의 친분을 알려줬기에 추가된 계획이었지만 화살 한 대로 여러 마리의 새를 잡을 꾀를 낸 장손이 이대수는 흡족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