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38th. 각개전투 (1)
1997년 7월 15일, 지금은 태풍이 몰아치는 시기다.
이는 비단 자연현상뿐만이 아니다. 돈의 태풍 또한 저 남쪽의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커피를 마저 비운 나는 손에 쥔 종이컵을 구겨서 휴지통에 버리고 사무실로 내려갔다.
때마침 오후 다섯 시 반이 돼서 항셍선물 시장에 45분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홍콩 증시 투자의 2단계 계획을 밝히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다들 저녁 먹고 하죠.”
“네, 이사님. 얘들아, 라면 끓여라!”
민주형의 지시에 막내 직원 네 명이 내가 가져온 컵라면에 스프를 털어 넣고 물을 부었다. 우리들은 물을 부은 컵라면과 한국에서 가져온 반찬들이 담긴 통을 들고 회의실에 들어갔다.
먹는 게 아니라 마시다시피하며 라면에 밥까지 말아먹은 나는 나 못지않게 라면 컵을 비운 사람들을 보며 운을 뗐다.
“태국, 어떻게 될 것 같나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사님?”
티슈를 입을 닦은 민주형의 질문에 담담히 대답했다.
“헤지펀드들이요. 바트화 공매도 중이잖아요.”
7월이 시작되자마자 헤지펀드들은 태국 바트화를 공격하고 있었다. 엔고투기 때 나 때문에 일본에서 벌어먹지 못한 만큼까지 챙기려는지 그들의 공세는 상상 이상이었다.
잠시 말이 없던 민주형이 침음성을 흘리며 대답했다.
“못 버틸 겁니다, 이사님.”
“왜죠?”
“월가에 머무른 지 1년 남짓이지만 헤지펀드들의 탐욕은 우리의 상상 그 이상입니다.”
“그렇죠. 엔고투기 때도 그랬고요.”
“무엇보다도 헤지펀드들의 자금력은 무한에 가깝습니다. 미국 물주들이 돈을 대줄 테니까요. 현재 공세 규모를 생각하면 빠를 경우 이달 말, 늦어도 다음 달 초에는 태국에서 IMF 구제금융으로 가지 않을까 합니다.”
민주형의 말대로 태국 정부는 미국과 유럽의 헤지펀드들의 공세를 못 버티고 이 달 말에 고정환율제를 포기, IMF에 수백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요청한다.
민주형의 동물적인 감각을 확인한 나는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태국이 구제금융을 요청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번에는 주승빈이 텅 빈 컵라면 그릇을 옆으로 치우고 입을 열었다.
“도미노 현상이 시작될 겁니다.”
“왜죠?”
“스탠더드에 있었을 때 알게 됐는데 태국은 재작년부터 외환위기에 대비해 동남아 각국들과 중앙은행들 간의 지원협정을 체결했습니다.”
“그렇죠.”
“헤지들이 태국을 일타로 노린 건 그 때문일 겁니다. 태국의 환율방어는 자국뿐만 아니라 다른 동남아 국가들의 외환보유고까지 끌어 쓴 걸 테니까요.”
이 정도 분석이면 민주형이나 주승빈 모두 합격이었다.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박태진에게 물었다.
“좋아요. 동남아는 어차피 무너질 테고··· 동남아 다음엔 헤지들이 어딜 노릴까요, 박 이사님?”
“일단, 이곳 홍콩이 될 겁니다.”
박태진의 대답이 나는 만족스러웠다. 우리가 있는 홍콩을 다음 표적으로 찍은 것도, 그 홍콩 앞에 ‘일단’이라는 걸 붙인 걸 보니 더 큰 그림을 그린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보는 눈을 의식해서 티내지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왜죠? 홍콩 금융관리국이나 중국 본토 정부의 외환보유고를 다 합치면 2천억 달러는 넘을 텐데?”
“이사님 말씀대로 홍콩 금융관리국이 약 1천억 달러, 중국 본토 정부가 1,250억 달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헤지들이야 관성대로 홍콩 달러를 공격할 테니 우린 홍콩 증시에서 들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박태진이 이만큼 그림을 그리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내가 아는 내용과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나와 박태진의 문답에 민주형이 끼어들었다.
“무슨 말이야, 박 이사? 헤지들이 환투기를 하는데 홍콩 증시에서 판을 돌리자니?”
“그렇습니다, 이사님. 이사님 말씀대로 홍콩과 중국 본토 모두 2천억 달러가 넘는 외환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민주형에 이어 주승빈까지 황당함을 숨기지 못했지만 박태진은 차분하게 두 사람, 아니 나머지 18명까지 보며 말했다.
“헤지펀드들은 홍콩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어. 홍콩 달러, 미국 달러와 연동돼 있잖아?”
박태진의 말대로 주승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페그제 때문에 1 미국 달러 당 7.75 내지 7.85 홍콩 달러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그건 그렇다 쳐. 그런데 왜 홍콩 증시에서 판을 돌리자는 거야?”
뒤이은 민주형의 질문에 박태진이 대답을 이어갔다.
“홍콩 외환시장은 금리만 올려도 방어가 될 거야. 그런데, 금리가 올라가면 어떻게 될까?”
박태진의 질문에 주승빈뿐만 아니라 민주형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표정이 달라졌다.
“그럼···.”
“증시에 들어간 자금이 은행으로 이탈하겠지. 당연히 주가는 곤두박질 칠 거고.”
박태진의 대답에 민주형이 팔짱을 풀었다.
“어부지리인가?”
“맞아. 헤지 놈들이 홍콩 외환시장에서 피 볼 때 우린 항셍지수 선물 풋옵션에 투자해서 이익을 남기는 거니까. 어떻습니까, 이사님?”
더 말할 필요가 있나? 9회 말 투 아웃 상황에서 역전 만루 홈런을 쳤는데!
내 기억대로 흘러가면 홍콩 금융관리국은 투기꾼들의 손모가지를 자르겠다고 미칠 듯이 금리를 올린다. 10월 말이 되면 ‘단기금리 300퍼센트’라는 초대형 작두날까지 휘두르니 16,000포인트를 눈앞에 둔 항셍지수는 곤두박질 확정이다.
한편.
월가의 투기꾼들은 어떻게든 틈새를 이용해서 돈을 우려내는 데 도가 튼 인간들이다.
환투기가 틀어질 것에 대비해서 항셍지수 폭락에도 충분한 돈을 걸 건 안 봐도 훤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수익을 내는 게 헤지펀드의 철칙 아닌가?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여러분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책상을 가볍게 내려치고 좌중을 둘러보며 묻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껏 우리는 동남아 외환시장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해동그룹의 미래를 위해서요.”
헤지펀드들이 태국을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나와 박태진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그 판에 뛰어들어 돈을 벌자고 했었다.
하지만 향후 해동그룹의 사업에서 동남아 또한 매력적인 시장이 될 것이기에 민심을 의식한 나와 박태진은 그들의 제안을 거부해왔다.
“그런 우리가 지금까지 선물거래로 불린 자금이 총 6억 미국 달러입니다. 그렇죠?”
“그렇습니다, 이사님.”
우리는 지금까지 항셍선물 시장에서 3억 달러를 6억 달러로 불렸다. 이 날을 위해 내 뜻을 받아준 스무 명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 돈 모두! 항셍지수 풋옵션에 배팅하겠습니다.”
“와아아!”
민주형이 주먹 쥔 손을 번쩍 들며 소리치자 다른 19명도 뛸 듯이 환호했다. 월가에서 갈고 닦은 자신들의 실력을 발휘하게 됐으니 얼마나 기쁠까?
“투자할 상품은 8월물부터 11월물 20배수 풋옵션입니다. 오늘 저녁에 항셍선물 투자금 전부 회수하고 내일 바로 풋옵션 매수 시작하죠.”
***
저녁시간에 모든 투자금을 회수한 우리는 항셍지수 풋옵션에 1차분으로 우리 자금의 반절을 투자하기로 결정한 뒤에야 회사에서 퇴근해 숙소로 돌아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시계를 보니 벌써 밤 1시를 향하고 있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침대에 걸터앉은 내게 박태진이 캔 맥주를 내밀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도련님. 한 잔 드시죠.”
“고마워요.”
캔 맥주를 딴 우리는 가볍게 캔 끝을 부딪치고 맥주를 들이켰다.
“후우-! 속이 다 시원하네요. 그동안 모두한테 미안했는데.”
“저도 도련님께서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금융은 우리 해동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 아닙니까?”
“그렇죠. 지금이야 그 모양 그 꼴이라도 동남아는 분명히 큰 시장이 될 테니까요.”
브래튼우즈 체제의 붕괴로 금태환제가 붕괴된 지 올해로 27년째.
그때부터 세계경제는 더 많은 달러를 버는 지가 부의 척도가 되었다. 누가 더 좋은 상품을 많이 만들어서 얼마나 더 많이 비싸게 팔아먹느냐가 부의 원천이 된 것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해동그룹은 신성그룹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지금까지의 모든 작업은 최소한의 준비에 불과했다.
물론.
동남아에서의 환투기를 안 한 것도 그 중 하나다.
돈놀이만으로 잡아먹을 수 있는 신성그룹이 아니기에
제조업이 있어야 잡아먹을 수 있는 신성그룹이기에
동남아라는, 우리그룹이 진출해야 할 시장에서 배척당하지 않고자 손대지 않은 것이었다.
홍콩이야 상관없다. 폭락장에서 돈을 버는 건 운에 가까운 일이니까. 나에겐 원하는 패가 나오도록 '탄'을 짠 고스톱에서 순서대로 패를 내고 점수를 내서 돈을 따는 일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잠시 딴 길로 샜던 나는 캔 맥주를 들이켜고 박태진에게 말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달라졌네요.”
“어떤 점에서 말씀이십니까?”
“투기꾼들이 홍콩 증시를 노릴 거라는 거요.”
박태진이 겸연쩍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사님은 늘 이 세상을 거대한 장기판으로 보시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저도 이사님 흉내를 내봤습니다, 하하.”
“흉내라뇨? 형이 그만큼 노력했으니까 그런 의견을 낸 거죠. 나도 그 의견에 동의했고요.”
몇 달 안 본 사이에 박태진이 남다르게 보였다. 진즉에 이렇게 떨어져서 지낼 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됐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이 길기에 그의 성장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형 덕분에 좋은 기회를 잡았어요. 고마워요.”
“고맙긴요, 도련님. 도련님이 아니었으면 이런 생각을 할 기회도 얻지 못했을 겁니다, 하하.”
“그럼, 짠 한 번 더 할까요?”
“그러시죠, 하하.”
나는 박태진과 다시 한 번 캔 끝을 부딪치고 맥주를 들이켰다. 심신이 피곤해도 즐거운 기분 때문인지 오늘따라 맥주의 청량한 맛이 입 안에 생생하게 퍼졌다.
“후우-, 이번 일만 잘 풀리면 바랄 게 없겠네요. 하연 누나 때문에라도 잘 풀려야 할 텐데.”
마음에도 없는 엄살을 피웠지만 박태진이 내 옆에 앉아서 어깨를 토닥여줬다.
“잘 되실 겁니다, 도련님. 혹시나 해서 반절은 2차분으로 남겨두지 않으셨습니까?”
“그러긴 한데··· 어쨌든 잘 됐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형이나 나나 할아버지한테 그만 구박 받죠, 흐흐.”
씩 웃는 나를 보며 박태진이 미소를 띠었다.
“꼭 잘 돼야겠군요. 그래야 올해까지만 회장님께 구박 받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래야죠. 잘 될 거예요. 잘 되고 싶고, 잘 돼야 하고.”
거짓말을 치고 있어도 기분은 좋았다. 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아도자동차도 손에 넣고, 우리 둘의 혼사 문제도 잘 풀릴 테니까.
***
다음 날 아침.
회사에 출근한 나는 내 방에서 클레어와 전화로 얘기하고 있었다.
“···네, 클레어. 월가 쪽은 어때요?”
[이달 안에 태국에서 결판내면 싱가포르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로 흩어질 거라는 말이 나오고 있어. 홍콩은 말할 것도 없이 1순위고.]
역시나 헤지펀드들의 가장 큰 먹잇감은 홍콩이었다. 그놈들이 올 때에 맞춰서 모든 작업을 마쳐둬야 내가 돈을 벌 수 있었다.
“고마워요, 클레어. 이번에 돈 많이 벌어갈게요.”
방에서 나온 나는 해동증권 사람들에게 미국 쪽 소식을 알려준 뒤, 선물시장에서 빼낸 돈으로 풋옵션 매수를 시작했다. 다음 달에 만기가 돌아오는 8월물부터 9월물, 10월물, 심지어 11월물까지 분산투자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8월 10일이 되었다.
오전에야 1차분 3억 달러 투자를 마친 우리는 여느 때처럼 컴퓨터와 TV로 외환현물시장과 선물환 시장, 콜금리 추세를 지켜보고 있었다.
“현물환 거래는 어때, 주 부장? 선물환 쪽에서는 홍콩달러 매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민주형의 질문에 주승빈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대답했다.
“현물환 쪽에서는 매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사님. 헤지 놈들, 대체 돈을 얼마나 퍼붓는 건지 모르겠네요.”
홍콩 외환시장에 쳐들어온 헤지펀드들은 홍콩 달러 현물을 닥치는 대로 공매도해서 미국 달러로 바꾸면서도 선물환 시장에서는 홍콩 달러를 몽땅 매수하고 있었다.
“환율이 떨어지면 선물환으로 현물환을 갚아서 차익을 챙기겠다··· 엔고투기 때랑 다를 게 없네요. 진부한 놈들.”
풋옵션 매수를 결정한 날부터 별도의 방을 안 쓰고 밖으로 컴퓨터를 옮겨서 거래하던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내 모습을 박태진이 피식 웃었다.
“놈들 덕분에 우리만 돈 방석에 앉게 됐으니 잘 된 일이죠, 흐흐.”
멕시코 환투기와 엔고투기로 단련돼서인지 박태진도 이제는 ‘꾼’의 냄새가 제법 나고 있었다. 서로 마주보며 잠시 웃는 사이, 벽에 걸린 대형 TV에 긴급뉴스가 떴다.
[홍콩 통화당국은 투기꾼들로 인해 흔들리는 주식시장 방어를 위해 40억 홍콩 달러를 투입하겠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일회성 조치가 아닌 시작에 불과하며···.]
뉴스를 보던 나는 스파크가 일어난 것처럼 온몸이 찌릿거렸다.
“됐다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친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던 사람들 중 민주형이 가장 먼저 내 뒤를 이어 소리쳤다.
“···와아아!”
“와아아!”
해동증권 사람들은 하나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방 뛰거나 서류를 허공에 뿌리며 환호했다. 클레어의 소스가 있었다고 해도 우리 스스로 이 일을 해냈으니 얼마나 기쁠까?
쿵!
“남은 돈도 전부 질러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손바닥으로 책상을 세게 내려치며 내린 내 지시에 모든 사람들이 크게 대답했다.
“네, 이사님!”
홍콩 프로젝트의 핵심인 2단계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2단계만 마치면 이들과 당당하게 금의환향할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