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37th. 그 여름, 뜨겁게 움직이는 때 (4)
박태진과 함께 숙소에 가서 짐을 푼 나는 여독이 풀린 다음 날 아침에야 해동증권 홍콩 지점에 출근했다.
“다들 잘 지내셨죠?”
“이, 이사님?”
컴퓨터 앞에 앉아서 아침식사를 하던 민주형과 주승빈 등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주형과 주승빈은 나머지 직원들을 자리에 앉히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여기까진 어떻게 오셨습니까?”
“소낙비 좀 피하려고요. 들어가서 얘기해도 되죠?”
“물론입니다. 안으로 드시죠.”
유리벽으로 된 방에 들어간 우리는 주승빈이 내준 보이차를 마시며 한국에서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래서 홍콩에 오신 거였군요.”
“미국 본사에서는 지금이 한국에 투자할 기회라고 여기니까요. 그래서 손해를 감수하고 달러를 원화로 바꿨죠.”
대답을 마친 나를 보며 민주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탠더드 캐피털에서 1억 불에 이사님까지 보내주셔서 든든합니다, 하하.”
“별 말씀을요. 지금 투자는 어떻게 되고 있어요?”
빙긋 웃으며 손을 내저은 내가 던진 질문에 주승빈이 입을 열었다.
“레드 칩 덕분에 항셍지수가 오르는 걸 보고 현물 매도-선물 매수 포지션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수익률은 플러스고요.”
주승빈은 구두보고를 마친 뒤, 방을 나가서 현재 수익률 현황 자료를 가져왔다.
“초기 투자금을 고려해도 미국 달러로 3억 불이라··· 대단하네요, 하하.”
기분 좋게 웃는 나를 보고 민주형의 표정도 한결 가벼워졌다.
“별 거 아닙니다, 이사님. 지금처럼만 지수가 상승하면 그 이상의 수익도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주 부장?”
“물론이죠, 이사님. 3월까지 입은 손실을 반영해도 1억 불 가까이 벌지 않았습니까? 하하.”
불과 얼음처럼 상반되는 스타일이면서도 잘 어우러지는 민주형과 주승빈.
향후 해동그룹 금융부문에서 전방 투톱으로 내세울 만한 사람인지 잘 지켜봐야겠다. 아도자동차 인수에 쓸 돈도 벌면서.
***
이성민이 홍콩에 넘어가서 항셍지수를 만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한국에서는 재계를 뒤흔들 폭탄발표가 있었다.
[현 시간부로 우리 스탠더드 캐피털은 아도자동차 인수입찰에 나설 것을 밝히는 바입니다. 이번 인수입찰 참가 발표는 한국인들의 근면성실함에 기대를 건 미국 본사 이사회와 투자위원회의 결정으로···.]
TV를 보던 명진호의 눈에서 쌍심지가 켜졌다.
“저, 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화를 참지 못한 명진호가 TV를 향해 리모컨을 집어던졌다. TV와 부딪친 리모컨이 산산조각나자 막내 임원이 얼른 달려가서 TV를 끄고 자리에 앉았다.
“코쟁이 거간꾼 자식이 나하고 맞먹으려 들어!”
분을 삭이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명진호가 숨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저놈들 칩, 얼마나 돼?”
“은행권에 알아봤는데 20억 달러를 원화로 환전했다고 합니다. 그밖에도 미국에서 운용하는 자금만 100억 달러가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이런 염병할···.”
명진호가 이를 악물었다.
20억 달러를 원화로 환전했다면 1조 7천억 원에 육박한다. 자신들보다 2천억 가까이 더 많은데 그조차도 일부에 불과하다니··· 명진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우리 쪽 자금, 어떻게 되나?”
“현재로서는 최대한 쥐어 짜내도 1조 8천억 원이 한계입니다, 회장님.”
재무담당 임원의 보고에 명진호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대 태현그룹의 모든 힘을 끌어내도 1조 8천억 원이 전부라니?
분을 참지 못하고 이까지 갈던 명진호의 눈이 부릅떠졌다.
“전화기!”
“예?”
“전화기 달라고!”
“예!”
가장 옆에 있던 명선구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내밀었다. 명진호는 아들의 전화기를 낚아채서는 정신없이 번호를 누른 뒤, 임원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회의실을 나가게 했다.
“이 회장,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가? 나랑 한 판 하자는 건가!”
[백주대낮부터 낮술 드셨소? 전화하자마자 소리 지르는 건 어느 나라 예법이오?]
혼자만 남은 회의실에서 수화기에 대고 소리치던 명진호는 이대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네가 나한테 장호건이 자빠뜨리려고 한 거, 선해철 그놈 밑밥 깔아주려고 한 게 아니었냔 말이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형님도 좋다고 하지 않았소?]
“선해철! 엔고투기 때 네가 아들처럼 키운 놈이라고 하지 않았냐! 그런 놈이 내 밥상에 감히···!”
명진호는 수화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자신보다 더 큰 이대수의 고성에 말문이 막혔다.
[그놈이 내가 아들처럼 키운 놈인 거하고 그놈이 다니는 회사가 아도자동차 인수입찰에 나서는 게 대관절 무슨 상관이오?]
“스탠더든지 뭔지가 아도자동차 가져가면 네가 집어먹을 게 아니었냔 말이다!”
[내가 집어먹을 거였으면 왜 그리 복잡한 짓을 했겠소? 내가 직접 나섰지! 그리고! 내 큰아들 내외가 어찌 갔는지 그새 잊으신 거요?]
자동차 때문에 장남을 잃은 이대수다. 명백한 자신의 실수였기에 명진호는 인상을 구기고 침음성만 흘렸다.
“끄으응···.”
[우리 집안, 지금 호주하고 파나마 사업 때문에 달러 쟁여둔 거 뻔히 알고도 그런 소리 하시오? 한고그룹 인수입찰 때 한고제철 안 먹은 이유가 뭐겠소?]
그때서야 명진호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음만 먹었으면 장호민 따위 깨끗이 재끼고 한고그룹 계열사들을 전부 인수했을 이대수와 해동그룹이 아닌가?
“이, 이 회장···?”
[그리도 원하신다면 당장이라도 아도자동차 먹겠다고 동네방네 떠들어 주리다. 인수가격만 몽땅 올려놓고 빠지면 은행 놈들만 신나겠구려!]
“지, 진정하게, 이 회장! 내가 경황이 없어서 실수했네. 미안하이!”
명진호는 이를 악물고 자세를 낮췄다. 한 푼이라도 더 인수입찰 비용을 아낄 수만 있다면 이까짓 수모 정도는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말 나온 김에 하나만 물어봅시다. 해철이 그놈이 형님 밥그릇에 흠집을 내려고 했다면 일전의 엔고투기는 뭘로 설명할 거요? 입이 있으면 말해보시오!]
이대수의 질책에 명진호는 쓴맛을 잔뜩 머금은 표정으로 입맛만 다셨다. 그룹의 출발점이자 자신의 모든 걸 다 바친 태현건설을 살려놓고 하동제철소 공사까지 추진한 건 선해철과 이대수가 엔고투기에 끼워준 덕이 아니었나?
“미안하네, 이 회장.”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하시오. 에잉!]
쾅 소리를 끝으로 통화가 끊어졌고, 명진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쉬울 줄만 알았던 아도자동차 사냥이 순탄치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밀려들고 있었다.
***
명진호와의 통화를 끊고 이대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 집은 끝났군.”
각오한 일이었다. 오래 된 친구를 구하는 일이고, 집안과 그룹의 번영을 위해 장손과 함께 꾸민 일이 아닌가?
“망할 영감···.”
이대수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성질 같아서는 8.3 사채동결 때 장병호와 함께 벌인 술판에 대해 명진호에게 쏴붙이고 싶었지만 명진호에게는 아도자동차 인수입찰에 대해 훈수를 뒀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해동그룹이 스탠더드와 손잡고 아도자동차를 인수할 때 의심을 피하려면 조심해야 하지 않겠나?
물을 마시며 숨을 가다듬던 이대수에게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나머지 한 놈인가··· 흠! 흠!”
나지막이 중얼거린 이대수가 목청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이대수요. 누구···.”
[너무합니다, 아저씨! 그렇게 제가 싫으신 겁니까?]
호랑이인지 양반이 못되는지 다짜고짜 장호건의 고성이 들렸다.
“장 회장인가?”
[예, 저 호건이입니다! 아저씨 장남 친구 장호건이요!]
“백주대낮부터 목청 높이는 이유가 뭔가, 장 회장?”
[스탠더드 캐피털 소식, 잘 봤습니다. 제가 아도자동차 먹는 거 보기 싫어서 선해철 움직이신 거 아닙니까!]
“뭣이? 말은 똑바로 해라, 이놈아! 그 많은 돈을 굴리는 회사에 내 무슨 힘으로 감 놔라 배 놔라 한단 말이냐!”
쩌렁쩌렁 울리는 호통 소리와 달리 이대수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늘 해동그룹을 깔보고 물 먹였던 명진호에 이어 장호건까지 손자와 작당한 대로 되돌려주는 일이 아닌가? 이제 겨우 시작이지만.
“네놈이 아도자동차 처먹는 게 싫었으면 영등포 재개발 사업 합작에 신성전자 대출 연장은 뭘로 설명할 거냐! 대가리가 돌아가고 주둥아리가 달렸으면 말해봐라, 이놈아!”
[아, 아저씨?]
장호건의 당황한 목소리와 달리 이대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룹 밖에서는 늘 점잖게 말하던 자신에게서 쌍욕을 들어먹었으니 얼마나 당황했겠나?
지금껏 쌓아둔 명분도 있겠다, 이대수는 계속해서 호통을 터뜨렸다.
“네놈이 마음에 안 들어도 너 같은 짓은 안 한다. 호주에 찍어놓은 우리 사업 가로채려고 했던 놈이···! 적반하장도 작작해라, 이놈아!”
[호주 사업··· 성민이가 알려준 겁니까?]
장호건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이대수가 코웃음을 쳤다.
“그랬으면? 선 대표가 너한테 돈 빌려주려고 했던 걸 내가 두고 봤겠느냐? 그리고.”
이대수는 장호건의 가장 아픈 부분을 향해 비수를 던졌다.
“네놈이 그리도 마음에 안 들었으면 우리 집안에 네 딸내미 들일 생각도 안 했다!”
[···예?]
“네놈 새끼라기엔 과분한 그 아이 말이다. 참하디 참해서 내 새끼와 이어주려고 네놈에게 그리도 퍼줬건만 대낮부터 뭐하는 짓인 게야!”
거느린 그룹의 덩치만 보면 몰라도 가족관계만 놓고 보면 이대수가 장호건보다 위에 있었다. 이 씨 집안의 적법한 장손인 이성민과 달리 장하연은 장호건의 혼외자식이 아닌가?
이대수가 또다시 고성을 터뜨리자 장호건의 낮은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아저씨.]
“말 나온 김에 하나만 더 짚어보지. 선해철이 엔고투기로 돈 벌어다 준 건 뭘로 설명할 게냐!”
명진호에게도 써먹었던 한 방이지만 이대수는 또 한 번 우려먹는 게 이토록 즐거울 수가 없었다. 지금 이대수의 얼굴은 지금껏 차곡차곡 쌓아둔 총알을 난사하는 람보처럼 시원한 기분을 만끽하는 것 같았다.
“정신 차려, 장호건이. 생각 좀 하고 살어!”
마지막 호통을 끝으로 이대수가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놨다. 가볍게 숨을 내쉰 이대수의 얼굴에서 서서히 핏기가 가라앉았다.
“기대하시오, 병호 형님. 20여 년 전에 진 빚, 당신 핏줄들한테 이자까지 받아 내리다.”
어느 새 혈색이 정상으로 돌아온 이대수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음침하고 싸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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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가 끊어지자 장호건도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괜한 짓을 했군.”
혹시나 해서 찔러봤건만 역시나였다. 스탠더드 캐피털의 인수합병을 보고 지금껏 이대수가 자신의 사업에 훼방을 놓은 줄 알았는데···.
의심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이대수가 한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아무리 이대수라도 운용자산이 100억 달러가 훨씬 넘는 투자회사를 움직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거기에 영등포 재개발과 신성전자 대출 연장은 이대수가 크게 손해 보는 반면에 자신에게 유리한 일이 아니었나?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는 것도 아니건만···.”
후회막급이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늘 고맙고 미안한 딸이 시댁이 될 삼청동에서 시집살이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됐다. 얼마를 쥐여 주고 보내도 큰소리 칠 수 없는 시댁이 아닌가? 해동그룹은.
“선해철··· 직접 만나봐야겠군.”
중얼거리던 장호건이 의자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섰다. 선해철 그 작자를 직접 만나서 의도를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
“진짜요?”
[그래, 인마. 회장님께서 태현그룹에 한 방, 신성그룹에 한 방, 사이좋게 먹이셨다, 흐흐.]
홍콩 지점에서 선물 거래를 하던 나는 선해철의 전화를 받고 입꼬리가 귀에 걸릴 것 같았다. 그 콧대 높은 태현그룹 명 씨 가문과 신성그룹 장 씨 가문에게 소리를 높이다니!
내가 한 게 아니라 할아버지가 했다는 게 아쉽긴 했지만 아무렴 어떠리. 우리 집안을 지들 돈주머니쯤으로 알던 것들에게 맛보기나마 따끔한 맛을 보여줬으니 속이 후련했다.
낄낄 웃던 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을 선해철에게 던졌다.
“인수입찰 발표일은 언제까지인가요?”
[10월 31일. 천오백억 먹인 값은 한 것 같다.]
“돈 값 제대로 하네요. 돈 앞에 장사 없다더니···.”
[청와대 참모들은 올해가 끝이고 여당이든 야당이든 연말에 선거 치러야 하잖냐. 검찰, 법원, 언론, 은행권이야 권력으로 앵벌이 하는 놈들이고, 흐흐.]
이 나라에서 인정받는 엘리트라는 놈들 중 직분을 충실히 지키는 이들은 손에 꼽힌다. 그런 이들을 빼면 죄다 자신들의 힘으로 배를 채우기 급급한 버러지 중의 버러지들이다.
그런 버러지들을 부려서 아도자동차 인수입찰 날짜를 최대한 뒤로 미뤄놓은 게 내키지 않았지만 어쩌겠나. 우리가 안 부리면 우릴 죽이려는 놈들이 그놈들을 부려먹을 텐데.
쓴웃음을 짓는 내게 선해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튼, 이쪽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너도 홍콩서 열심히 잘 해. 이번에 20억 달러 원화로 바꾸면서 손실난 거 복구할 각오로. 알았지?]
“열심히 벌어가겠습니다, 흐흐.”
통화를 마친 나는 방으로 돌아가서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사님? 형님 전화 같던데.”
옆에 있던 박태진의 질문에 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명진호 회장님, 호건이 아저씨한테···.”
버럭버럭 호통을 쳐서 두 사람 입을 꿰매버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자 박태진도 빙긋 미소를 띠었다.
“회장님께서 조금이나마 속에 쌓인 것들을 털어내신 것 같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인수입찰 결과 발표는 10월 31일이에요. 그때까지 우리도 열심히 해봐요.”
최고의 명장은 절대 질 수 없는 판을 짜고 적을 끌어들인다고 했다.
우리가 절대 질 수 없는 판이 만들어졌으니 남은 건 홍콩에서 그 판에 쏟아 부을 총알을 모으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