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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126화 (125/229)

126화. 37th. 그 여름, 뜨겁게 움직이는 때 (3)

황나연은 모처럼만에 집에 들어온 남편을 위해 가정부들을 시켜서 상다리가 휘어지게 식사를 준비했다. 그 황나연의 정성이 무색하게 만들 말이 장호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고려호텔을 신성물산에 합병시킬 거다. 기존 고려호텔 사업에 신성물산 리조트 사업부, 그룹 내 모든 골프장, SH자산개발의 지분 전부를 묶어서 자회사로 만들 거고. 그 자회사 지분 100퍼센트는 하연이 몫이다.”

장호건의 충격적인 상속 통보에 황나연과 장용재, 장수연, 장민재가 경악했다. 1조 가까운 재산을 밖에서 데리고 온 계집에게 전부 넘겨주겠다니!

“여, 여보!”

“아버지!”

“아빠!”

빗발치는 아우성에 장호건이 손바닥으로 식탁을 내리쳤다. 쿵 소리와 함께 입을 다문 가족들에게 장호건이 소리쳤다.

“하연이가 해동종금에 갚아야 할 대출 3천억을 연장시켰다. 20년 만기에 연이율 7퍼센트로!”

“···네?”

황나연은 말할 것도 없고 세 남매까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하연과 이성민의 관계가 보통이 아니라지만 이대수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해동그룹에 호구를 씌워놓다니?

낙담이 번지는 네 사람에게 들으라고 장호건이 말했다.

“너희들 중에 그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채권 만기 연장해오면 하연이에게 줄 거, 그대로 넘겨주마. 어떠냐?”

장호건의 제안에도 세 남매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자신들이 무슨 수로 그런 거래를 만들어온단 말인가? 자신들의 외가인 황 씨 가문을 경멸하는 해동그룹 이 씨 가문을 상대로.

그 황 씨 가문의 사람인 황나연도 참담하게 구겨진 자식들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문 가운데 장호건이 말했다.

“난 절대 공짜가 없는 사람이다. 하연이가 그만큼 회사에 공을 세웠으니 합당한 보상을 주는 거고. 물론.”

잠시 숨을 가다듬고 장호건이 말했다.

“하연이에게 줄 건 그걸로 끝이다. 하연이가 막은 3천억 원 덕분에 아도자동차 인수가 수월해질 테니 나머지는 너희가 물려받겠지.”

장용재와 장민재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도그룹을 먹으면 장호건의 계열사들은 더 커질 테고 자신들이 물려받을 게 많아진다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다들 그만 해. 아도그룹만 먹으면 하연이가 가져갈 몫보다 너희들 몫이 더 커질 텐데 그렇게 아까운 게냐?”

장호건의 질책에도 장용재와 장민재는 식탁 밑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차피 레저사업이나 부동산 개발 따위, 자신들의 관심사 밖이 아닌가?

오빠나 동생과 달리 레저사업에 욕심을 내던 장수연만이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장하연을 노려볼 뿐이었다. 그런 장수연에게 장호건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수연이 너.”

“네? ···네, 아버지.”

“올해 지나기 전에 박남준이하고 식 올려.”

“네?”

장수연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결혼이라는 무덤에 집어넣겠다니?

“이번 인수전, 우선 협상자 돼도 가격 깎으려면 무진 로펌까지 끌어들여서 밀어붙여야 한다. 하연이도 밥값을 하는데 너도 해야지?”

“아, 아빠!”

장수연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장호건도 물러서지 않았다.

“하라면 해! 벌써 그놈하고 그렇게 놀아난 지가 2년이 돼 가는데 언제까지 네 뒤치다꺼리 해주랴? 어!”

“아, 아···.”

장수연이 말을 더듬는 모습을 보고도 장호건은 작심한 듯 질책을 퍼부었다.

“지금껏 네가 박남준이하고 놀아난 거 감추려고 애비가 얼마나 고생한지 알긴 하는 거냐? 비서실, 홍보실 시켜서 언론사 놈들한테 술 먹이고, 돈 던져주고, 거기에···!”

차마 딸 앞에서 여자까지 붙여줬다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한숨을 내뿜으며 말을 멈췄던 장호건이 장수연을 차갑게 쏘아봤다.

“더 이상 말하지 않으마. 연말까지 결혼해.”

장수연은 아무 말도 못했다. 좋은 날이 이렇게 끝나다니!

장호건은 얼음처럼 굳은 장수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장하연에게도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연이 너도 얼른 결혼해. 네 나이 벌써 스물아홉이다. 외손주 생각도 해야지.”

“네, 아버지.”

장하연의 담담한 대답을 끝으로 장호건은 식당을 나가서 지하차고로 내려갔다. 장하연도 장호건의 뒤를 쫓아갔다.

“무슨 일이냐, 하연아?”

“성민이 때문에요.”

“성민이?”

“네, 사실은···.”

장하연은 신성전자 채권 상환 문제를 해결하면서 들은 이성민의 홍콩 출장 이야기를 장호건에게 들려줬다.

“허어··· 거 참 난처하게 됐구나. 그렇다고 남의 회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도 없으니.”

탄식과 함께 아쉬워하는 장호건에게 장하연이 말했다.

“성민이도 열심히 노력해서 빨리 돌아오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알았다. 기다려주마. 대신에.”

장호건은 장하연의 긴장한 표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놈이 1년 지나도 못 돌아오면 내 손으로 너 데리고 홍콩 가서 식 올릴 거다, 하하.”

“아버지도 참.”

장호건은 긴장이 풀린 장하연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차에 올라탔다. 장하연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

장하연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간 나는 서류작업을 마친 뒤, 하이마트 은평점에 도착했다.

텅텅 빈 냉장고도 채울 겸 카트를 밀며 매장을 돌아다니던 나는 살가운 목소리에 귀가 쫑긋 세워졌다.

“라면 드시고 가세요, 고객님!”

고개를 돌아보니 두건에 앞치마, 위생마스크까지 쓴 아주머니, 아니 판촉사원이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미니 인덕션과 그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라면이 있었다.

‘이걸··· 벌써 했다고?’

예전과 달리 시식 판촉사원들이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아직 안 알려준 아이디어였는데?

“한 입만 먹어볼게요.”

“네, 고객님!”

한 입 분량의 라면이 담긴 종이 소주컵을 받은 나는 그대로 라면을 입에 털어 넣었다. 국물도 시원하고 면발도 적당하게 익은 게 맛이 괜찮았다.

“이거, 어디에 있나요?”

“이 안쪽 매대에 있습니다, 고객님.”

판촉사원이 공손히 가리킨 매대를 본 나는 라면 멀티팩 두 개를 넣었다.

‘혹시?’

불현 듯 일어난 생각에 카트를 밀며 냉동식품 매대로 갔더니 역시나였다. 군만두나 새우튀김까지 판촉사원들이 나와서 시식을 권하고 있었다.

“출출한데···.”

판촉사원들이 권하는 새우튀김과 군만두를 먹고 나니 내 카트에는 내가 먹은 냉동식품들이 채워져 있었다.

그밖에도 육류, 수산, 청과, 푸드코트 등을 돌아보며 장을 보던 나는 첫 개점 때처럼 위상상태가 좋은 걸 확인하고 계산을 마친 뒤, 사무실로 갔다.

“다들 잘 지내셨죠?”

“이 이사님?”

문을 열고 들어가서 인사를 건네자 일을 하던 직원들 몇몇이 일어나서 나를 알아봤다. 그들은 손에 들려 있던 서류를 든 채 내게 달려왔다.

“얼마만이십니까, 이사님! 우리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하하!”

“미안해요. 그동안 일이 너무 바빠서요.”

그간의 해후를 푼 나는 뒤에 있던 나창석에게 인사를 올렸다.

“축하드립니다, 부장님. 이번에 상무로 승진하셨다면서요?”

“이 이사님 덕분이죠. 그런데··· 손에 드신 건···?”

나는 내 손에 들린 봉투에서 내 얼굴로 시선을 올린 나창석을 보며 겸연쩍은 웃음을 흘렸다.

“매장 둘러봤는데 여사님들한테 당했습니다, 하하.”

“역시나였군요. 유 차장 아이디어였는데 이사님까지 당했으니 더 볼 것도 없겠습니다, 하하.”

“유 차장님이요?”

소탈하게 웃는 나창석과 달리 나는 눈이 커졌다. 시식 판촉이 유현정의 아이디어였다니?

“네. 유 차장이 매장 내에서 시식 판촉을 하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푸드코트에서 나는 냄새가 식욕을 자극하니까 그걸 매장에서 파는 상품에 적용해서 구매 욕구를 자극하면 좋을 것 같다고요. 안 그래, 유 차장?”

나창석의 부름에 유현정이 쑥스러운 미소를 띠며 우리 곁으로 걸어왔다.

“아닙니다, 부장님. 여사님들 처우 방침이나 다른 아이디어는 부장님이나 다른 동료들 아이디어였잖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유 차장이 그 아이디어 안 냈으면 생각도 못했을 거야, 하하.”

두 사람을 보던 나는 입이 벌어졌다.

시식판촉은 내년쯤에나 풀려고 했던 아이디어였는데 본인들이 알아서 하다니··· 한국형 할인점의 틀을 일찍 적용해서일까? 좋은 나비효과였다.

“제 생각에 여사님들 처우는 부장님께서 짚어주셨을 것 같은데··· 맞나요?”

조심스럽게 추측을 던지자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그걸 어떻게···?”

“재작년 축하파티 때 부장님께서 걱정하셨거든요. 현장직원 분들 저녁식사요.”

“아···.”

그때 있었던 일을 들려주자 직원들이 나창석을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나는 잔잔한 미소를 띠며 그들에게 말했다.

“좋은 겁니다, 여러분. 외부에서 왔어도 우리 매출 올려주려고 고생하는 분들이니 우리 식구로 대하세요. 상생이라는 거, 그런 거부터 시작합니다.”

갑의 횡포 문제가 가장 많이 터지고, 가장 민감한 업종 중 손에 꼽히는 게 유통업이다.

사기업인 이상 적자를 낼 수는 없어도 야박하게 굴면 고객들의 발걸음을 끊는 꼴이 되니 나창석의 상생경영을 밀어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들고 온 비닐봉투를 잠시 사무실 냉장고에 넣어둔 나는 하이마트 원년 멤버들과 테이블에 앉았다. 막내 직원들이 세팅해준 커피를 마시던 나는 나창석에게 서류봉투를 건네줬다.

“이게 뭡니까, 이사님?”

“인터넷 쇼핑몰 사업 기획안입니다. 맘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빙긋 웃는 내 얼굴을 보고 나창석이나 다른 식구들의 얼굴에 기대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창석은 봉투를 열고 서류를 꺼내 살펴봤다.

“앞으로 컴퓨터 보급률이 올라갈 테니 이사님 기획서대로 쇼핑몰로 시작해서 오픈 마켓으로 넓히면 해볼 만할 것 같습니다. 대표님께 말씀드려서 백화점과 마트의 상품코드부터 통합하고 홈페이지도 만들겠습니다.”

“이번에 작업해두면 다른 채널로 넓힐 때도 그 코드를 쓰세요. 지금부터 안 잡아놓으면 나중에 지불할 비용이 더 커질 겁니다.”

‘‘로엘온’이나 ‘신성커머스’도 상품코드 전산통합 때문에 고생했었지. 1만 개가 넘는 상품코드를 통합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전생에 두 그룹이 전산통합 때문에 치른 홍역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대로 놔두면 몇 배의 고역을 치러야 하니 규모가 작은 지금부터 상품 코드를 하나로 합쳐놔야 전산관리와 재고관리에 유리했다.

그밖에도 하이마트 현황에 대해 듣고 앞으로의 전략에 대해 의논하던 나는 쉬는 시간을 두고 유현정과 잠시 옥상으로 나갔다.

“박 이사님, 내년에 전무로 승진할 겁니다. 유 차장님.”

“저, 전무라고요?”

유현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태진이 할아버지의 최측근이라도 상무는 아예 건너뛰고 전무로 승진하니 얼마나 놀랄 일인가?

“네. 지금 홍콩에서 고생하는 거, 전무 승진 때문에 그런 거니까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유 차장님.”

“아, 아닙니다, 이사님. 서운하긴요. 회사 일인데다 아직 그이하고 식도 안 올렸는데···.”

말끝을 흐리는 유현정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평소에는 씩씩한 여자가 이런 모습을 보이니 박태진이 안 빠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유 차장님. 박 이사님만한 남자 없는 거 아시죠?”

“그럼요, 이사님. 그이 같은 사람, 절대 없을 거예요.”

유현정이 확신이 가득한 대답을 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앞으로 조금만 더 버티면 나나 박태진 모두 각자를 믿어주는 여자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것 같았다.

***

며칠 뒤.

출장 준비를 마친 나는 비행기를 타고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형!”

“이사님!”

입국장을 나온 나와 박태진은 반가운 표정으로 서로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뭐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하늘 위에서 20분이나 돌았지 뭐예요?”

악명 높은 카이탁 공항의 착륙 딜레이를 이렇게 겪을 줄은 몰랐다. 전생에 홍콩에 왔을 땐 카이탁이 문을 닫고 첵랍콕 공항이 개항됐던 시절이라 말로만 들었는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나를 보며 박태진이 빙긋 웃었다.

“홍콩 정부와 영국 본토에서도 그 때문에 불편해하고 있습니다. 내년이면 첵랍콕이 개항될 테니 괜찮아질 겁니다, 하하.”

“영국도 대단하네요. 떠나야 하면서도 새 공항을 지어주다니.”

“그만큼 영국에서 홍콩에 거는 기대가 크다고 볼 수 있겠죠. 정확히 말하자면 런던 롬바르드 가에서 거는 기대겠지만요.”

“더 시티 말이군요.”

시티 오브 런던이라고도 불리는 더 시티.

영국의 실지왕 존 때 마그나 카르타가 선포된 이래로 고유의 자치권을 가진 치외법권 지역이다.

그 시티 오브 런던의 롬바르드 가에는 수많은 투자회사들과 은행들이 있다. 죄다 돈놀이 하는 놈들이니 중국 본토의 투자관문이 될 홍콩 증시에 기대도 크고 미련도 많을 터.

고개를 끄덕이던 박태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사님 오시기 전에 형님과 실장님께서 전화로 알려주셨습니다. 아도자동차 인수에 연막 치려고 오셨다고요.”

“내가 한국에 없어야 스탠더드 캐피털과 우리 집안의 관계를 의심받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캐리어를 열고 종이봉투 하나를 박태진에게 건네줬다.

“유 차장님이 형 보면 주라고 건네준 거예요.”

“현정···이가요?”

“네.”

눈을 껌뻑거리던 박태진이 봉투를 뜯어서 편지지를 꺼내 펼쳤다. 편지를 읽을수록 박태진의 얼굴이 씁쓸하게 변했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도련님. 회사 일이니 이해한다고 적혀 있군요.”

박태진의 얼굴에 쓴웃음이 맺혔다. 그 모습을 보고 나 또한 미안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앞으로 몇 달 간 열심히 해봐요. 빨리 돌아갈 수 있게요.”

“네. 저도 열심히 돕겠습니다, 도련님.”

나와 박태진은 서로를 보며 빙긋 웃은 뒤, 공항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쯤이면 선해철도 슬슬 선전포고를 준비할 텐데··· 내가 돌아가기 전까진 버틸 수 있겠지?

홍콩에서 한 몫 단단히 벌어 돌아가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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