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37th. 그 여름, 뜨겁게 움직이는 때 (1)
차를 마시던 나는 잔을 내려놓고 벽걸이 달력을 봤다. 벌써 5월이니 뜨겁게 움직여야 할 때였다.
“삼촌.”
“왜?”
“아도자동차 인수입찰 참가 발표는 제가 한국 뜨고 나서 하세요.”
선해철이 마시던 차를 내려놓았다. 그는 눈을 껌뻑거리며 내게 물었다.
“시나리오에 없던 일이잖아? 한국을 뜨겠다니?”
“우리도 연막 쳐야죠.”
“연막이라···.”
의아해하던 선해철이 말끝을 흐렸다. 아마도 내가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겠지만 정확하게 알려줬다.
“제가 있는 상태에서 인수입찰을 발표하고 우리가 가장 유리할 때 할아버지를 끌어들이면 신성과 태현이 어떻게 볼까요?”
내 질문을 받고 선해철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 문제가 걸리긴 했어. 어느 쪽이든 우리하고 해동그룹 관계를 의심할 테니까. 무기한 휴직이라도 내줄까?”
“휴직 말고 출장 보내주세요. 홍콩으로요.”
“홍콩?”
“해동증권 사람들하고 항셍지수 좀 만져야겠어요. 스탠더드 본사 자금도 1억 달러 끌어들여서 굴리고요.”
선해철이 잠시 턱을 매만지던 손으로 소파 팔걸이를 가볍게 내리쳤다.
“그게 좋겠다. 그 친구들 전부 스탠더드에서 굴렀으니까 그쪽에서 SOS 요청했다고 하면 명분은 충분하겠네.”
“그 조건으로 우리도 돈 넣고 굴리면 더더욱 좋은 시나리오가 되겠죠. 해동증권에 운용보수도 주고요.”
이번 기회에 내 실력을 해동증권 사람들에게도 보여줘야겠다. 홍콩에서 또 한 번 대박을 치면 해동증권 멤버들은 나를 우러러 볼 테니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선해철은 조금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도 나 혼자 총대 메라니··· 어째 좀 그렇다?”
“해동증권도 제 회사잖아요? 앞으로 삼촌만큼 오래 볼 사람들인데 어깨에 힘 좀 넣어줘야죠. 이해해주세요, 삼촌. 네?”
되도 않는 앙탈을 부리자 선해철이 질겁했다.
“징그러워, 인마. 앙탈로 땜빵 칠 문제가 아니야. 아도자동차 인수, 뒷거래도 껴 있잖아?”
“비자금 뿌리는 거요?”
“아는 놈이 눙치고 넘어가려고 했어? 승주 형님하고 세탁한 아도자동차 비자금 뿌리려면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냐. 배달꾼이야 회장님 사채조직에서 구한다고 해도 자리 만들고···.”
선해철이 구구절절 말하는 것 모두 전생에 신성그룹을 재결합한 뒤부터 나도 했었던 일이다. 각 사안에 맞게 전현직 임원들 인맥을 동원해서 실국장급부터 총리까지 접촉하고 골프백이나 차 트렁크에 돈 먹인 적이 한두 번이던가?
옛날의 추억 아닌 추억들을 떠올리는 사이에도 선해철의 하소연은 계속됐다.
“게다가 돈 먹일 곳은 좀 많아? 여당에 제 1야당, 제 2야당, 정부 관료들, 청와대, 검찰, 법원, 언론, 채권단··· 다 합쳐서 1,500억이나 뿌려야 하잖아?”
선해철의 굳은 표정을 보니 단순히 엄살이 아닌 것 같다. 무기명 채권도 쓰겠지만 오만 원 권이 없는 이 시절에 1,500억 원을 뿌리려면 만만찮게 품을 팔아야 할 테니 부담이 큰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선해철의 고생을 줄일 제안을 내놨다.
“손이 많이 필요하겠네요. 필요하신만큼 신입사원 뽑으세요.”
“진짜?”
“물론이죠. 실력, 인맥, 인성만 기준으로 잡으시고요. 업종에 상관없이요.”
폭풍전야 같은 지금처럼 사람의 값어치가 떨어져 있을 때야말로 최적의 스카우트 타이밍. 평소라면 끌어들이기 힘든 인재들도 좀 더 후한 조건을 내걸면 쉽게 데려올 수 있다.
“오케이. 채용공고 내면 올 사람이야 넘쳐나니까 일손문제는 해결됐고··· 다른 건?”
“나중에 장호민 계열사 뜯어 와서 해동물산에 되팔 때 우리가 챙길 차익은 전부 삼촌 몫이에요. 어때요?”
큰 맘 먹고 내놓은 인센티브 제안에 선해철의 눈이 반짝거렸다.
“최소 수천억 원은 될 텐데 괜찮겠어?”
“물론이죠. 오너 권한으로 약속드리는 선물입니다, 흐흐.”
다시 한 번 확답을 내주자 선해철의 입이 쫙 찢어졌다.
“오너님이 성과급 두둑이 챙겨주겠다는데 뭔들 못할까? 걱정 말고 다녀와라, 흐흐.”
순식간에 씩 웃는 선해철을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선해철은 내 얼굴을 보더니 어느 새 웃음을 거두고 헛기침을 했다.
“흠흠··· 돈이라는 건 말이야, 나한테 성과지표 같은 거야. 내가 이만큼 열심히, 잘 일했다는 증거랄까? 음, 그런 거지.”
자못 진지하게 목소리까지 깔고 말하며 고개까지 끄덕이는 선해철.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피식 웃었다.
“뭐라고 안 했습니다, 삼촌. 헨리를 장인어른으로 모시는 분께서 돈에 연연하실 리 없잖아요? 흐흐.”
“짜식, 흐흐.”
아버지의 친구이자 내 동업자인 선해철을 공짜로 부려먹을 생각은 없다. 이번 거래 말고도 앞으로 더 크고 더 많은 선물을 선해철에게 안겨주고 싶었다.
***
선해철과의 합의를 마친 나는 곧바로 삼청동에 들어가서 할아버지에게 홍콩으로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어떠세요?”
“영악한 놈. 알리바이도 만들고 돈도 벌려고 가는 게지?”
눈을 가늘게 뜬 할아버지의 질문에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고?
“네?”
“너하고 하연이 돈 말이다. 홍콩에서 굴리는 돈 35퍼센트는 너희들 돈 아니냐? 거기다 미국에 있는 네 돈까지 끌어들이면 절반이 넘겠구나, 흐흐.”
말과 달리 흐뭇해하는 표정을 보니 할아버지도 내 계획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나는 좀 더 가벼워진 마음으로 편하게 말했다.
“겸사겸사죠. 제가 한국에 남아있어 봐야 좋을 건 없으니까요.”
“그럴 게다. 신성이나 태현이나 다들 만만치 않은 상대들이니 말이다.”
“그러니 제가 한국을 뜨고 나서 스탠더드가 나서야 어느 쪽이든 우리 집안과 스탠더드의 관계를 추궁할 때 할아버지께서 항변하실 근거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흐흐.”
“그래서 네놈이 영악하다는 거다. 어찌 이리 변했을꼬? 으허허.”
껄껄 웃던 할아버지가 차 한 모금을 마시고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태진이도 혼자 지내느라 적적했을 테니 다녀와.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인수입찰은 이 할애비가 최대한 늦춰놓으마. 어여 가봐.”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소파에서 일어난 나는 인사를 하고 문으로 걸어갔다. 문고리를 돌릴 때 등 뒤에서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헌데, 태진이 고놈은 언제 장가 간다더냐?”
“네?”
뒤로 돌아선 내게 할아버지가 말했다.
“할애비가 듣기로는 하이마트 본점 유현정 차장이 태진이와 사귄다고 들었다. 맞느냐?”
“할아버지가 그걸 어떻게···?”
순간 식겁했다. 늘 삼청동 서재에 머무르시는 분께서 두 사람 연애를 알고 있다니?
할아버지는 나를 보며 콧방귀를 꼈다.
“이 나라 곳곳에 할애비 눈과 귀가 쫙 깔려있어, 이놈아. 하물며 막내아들로 여기고 키운 놈이 우리 회사 안에서 좋은 처자와 정분 난 걸 모르겠더냐? 흐흐.”
소름이 쫙 끼쳤다. 우리 할아버지, 적어도 해동그룹 내에서는 빅 브라더가 따로 없었다. 잠깐, 혹시 나도···?
당황한 내 얼굴을 보고 할아버지가 짓궂은 미소를 띠었다.
“네놈이 지난겨울에 하연이 그 아이하고 호텔방에서 자고 나온 것도 알고 있지. 재미는 잘 봤더냐? 으허허.”
껄껄 웃는 할아버지를 보던 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 영감님이 진짜!
“재미라뇨, 할아버지!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어떻게 잠을 자요?”
혼전관계는 절대 원치 않았다. 모태신앙 때문이 아니라 장하연이라는 여자를 지켜주고 싶어서였다.
가끔씩 욕지기처럼 밀려올라오는 욕구도 꾹꾹 누르면서 지금껏 한 번도 안 했건만 할아버지는 나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며 혀를 찼다.
“에라이, 쑥맥 같은 놈아. 누가 상열지사(相熱之詞)를 얘기했더냐? 그냥 어깨 베개 해주고···.”
“할아버지!”
소리치는 내 모습이 재미있는지 할아버지는 박수까지 치면서 껄껄 웃었다.
“으허허허. 우리 큰 강아지 얼굴이 홍당무가 됐구나. 어여 가봐.”
하여간 우리 영감님, 연세에 안 맞게 너무 오픈 돼있어서 적응이 안 된다.
이런 열린 사고가 경영으로도 이어져서인지 내 의견을 받아들여줘서 쾌속항진을 해왔다지만··· 알다가도 모를 분이었다.
어쩌면 내가 오십 대 아저씨라도 스물일곱의 거죽을 둘러쓴 탓일 수도 있겠다. 몸 따라가는 게 마음이라더니···.
할아버지도 박태진과 유현정이 잘 되길 바라는 것 같으니 유현정부터 만나서 다독여줘야겠다. 가는 김에 하이마트도 점검해보고 인터넷 쇼핑몰 사업 기획서도 건네줘야지.
***
같은 시각.
삼청동 저택에서 연막작전을 결정했을 때, 한남동의 성의원 또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외환은행에서 전자에 대출해준 2,500억, 어떻게 됐어?”
“내년 12월로 연장됐습니다, 상무님.”
“생명, 화재에서는 뭐라고 해?”
“다른 그룹에 나간 대출 회수하면 신성물산 대출 2,700억 원은 더 떠안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전무님.”
아도자동차 인수를 위해 차출된 장호건 계열의 각급 담당자들은 성의원 별관에 꾸며진 사무실에서 자금 현황 점검에 여념이 없었다.
전부 은행과 다른 그룹에 피해를 입히는 짓이었지만
유난 떠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아도자동차 인수는 손에 꼽히는 빅딜이다. 오너가 애지중지하는 자동차 사업만 살리는 것을 넘어 재계 8위의 아도그룹을 흡수하는 일이 아닌가?
그 때문에 며칠째 성의원에서 합숙하고 있는 실무진들은 정원 구석에 마련된 흡연장에서 담배를 뻑뻑 태우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빨리 끝나면 좋겠군. 밥은 집밥보다 맛있긴 한데 집사람하고 애들 얼굴이 가물가물해, 유 상무.”
“그뿐만이 아닙니다, 전무님. 빤스, 런닝, 양말 가지러 집에 갈 때도 경호원들 앞에서 챙겨 넣어야 하니···휴우-.”
아도자동차 인수에 투입된 신성그룹 실무진들은 성의원에 마련된 야전침상에서 자고 고려호텔에서 공수되는 음식들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견딜 수 있지만 성의원을 나갈 때마다 신성그룹 경호원들과 움직여야 했다. 혹시 모를 정보 유출 때문에 집에 갖다 주거나 가져오는 속옷조차 경호원들이 일일이 검사할 정도였다.
이해는 되지만 지나치다 싶은 조치에 그들은 대놓고 불평할 수 없었다.
총수인 장호건부터 성의원 집무실에 야전침상을 깔아놓고 숙식을 함께 하고 있지 않나? 인수합병 준비 상황까지 실시간으로 챙기고 있으니 죽을 맛이었다.
“진행상황은?”
“1조 4천억 원은 전부 은행에 예치해뒀습니다. 영등포 재개발 공사대금 중 하청업체들에게 지급할 돈은 현찰 대신 어음을 뿌려뒀고요. 대출 연장도 순조롭습니다.”
이수한의 보고에 장호건이 살펴보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유동현금을 회사에 묶어두는 데는 어음만한 게 없다. 현금이 급한 하청업체들이야 현금을 구하려고 손해를 보며 어음을 할인받겠지만 두 사람은 안중에도 없었다.
“생명, 화재 쪽 자금은?”
“아도그룹 채권과 대출은 전부 회수했습니다. 다른 그룹에 나간 대출도 회수 중이고요. 그 돈을 전자와 물산에 돌리면 그룹 내부의 자금문제는 거의 다 해결될 겁니다. 그런데···.”
이수한이 잠시 흐렸던 말끝을 이었다.
“해동종금에서 쥐고 있는 신성전자 회사채 3천억 원이 문제입니다.”
“역시··· 그게 문제군.”
“예. 만기가 오는 6월인데 앞으로 한 달 밖에 안 남았습니다. 거래였다고 해도 시중금리보다 이자를 내려준 데다···.”
하소연에 가깝게 설명하던 이수한이 잇지 못한 말을 장호건이 받아냈다.
“성민이가 얽혀있으니 내 결정이 필요하다는 거겠지?”
“···예. 만기를 연장하든 채권을 상환하든 둘 중 하나는 해야 합니다. 만기가 연장된다고 해도 금리인상은 불가피할 겁니다.”
“흐음···.”
장호건의 침음성이 길어졌다.
보통 때라면 신성생명이나 신성화재에 신성전자나 신성물산의 채권을 떠넘길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도자동차 인수를 위해 모든 자원을 투입해야 하는 때가 아닌가?
장호건의 눈치를 보던 이수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신성전자 회사채 문제, 하연이에게 맡기는 게 어떠십니까?”
“뭐?”
장호건의 눈에서 쌍심지가 켜졌다. 자신의 숙원사업이라지만 가장 미안하고 가장 고마운 딸을 팔아먹자니!
장호건의 잔뜩 굳은 얼굴을 보고 이수한은 얼른 자신의 생각을 풀어냈다.
“그냥은 아닙니다, 회장님. 회사채 만기를 연장시키면 고려호텔을 하연이에게 넘겨주시겠다는 조건을 내거셔야죠.”
“고려호텔이라···.”
침음성을 흘리는 장호건의 눈에서 불길이 사라지는 걸 보고 이수한은 얼른 설득을 이어갔다.
“고려호텔, 하연이 몫으로 정하셨어도 사모님이나 처가 분들 때문에 미루고 계셨잖습니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3년 전에 처가 놈들을 탈탈 털어놨지만 완전히 적으로 돌릴 수 없어 장하연의 상속을 미루고 있지 않았나?
“흐음···.”
“아도자동차를 인수하면 수연이는 몰라도 용재와 민재 몫이 커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회사채 만기를 연장시키면 회장님 처가 분들도 고려호텔 상속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건 그렇지. 게다가 마누라나 용재, 수연이, 민재는 절대 그 일을 못해낼 테니까.”
이대수가 조국일보 황 씨 일가를 벌레만도 못하게 여기는 건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
그 피가 반이나 섞인 장호건의 자식들은 이대수와 좋은 인연도 없으니 채권 만기 연장은 절대 해낼 수 없었다.
“역시 자네답구만. 맘에 들었어.”
껄껄 웃던 장호건이 책상을 가볍게 내려쳤다.
“좋네. 하연이한테는 내가 말해둘 테니 자넨 자금계획 다시 짜봐. 해동종금 채권 만기가 연장됐다는 전제 하에서.”
“예, 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