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36th. 난무하는 뒷공작 (2)
사랑채에서 차를 마시던 나는 집사장의 부름을 받고 본관으로 넘어가 서재로 올라갔다. 서재에서는 할아버지와 선해철이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잘 되셨어요?”
“잘 되다마다. 금석호 그 친구, 입이 귀에 걸려서 돌아갔다. 너도 차 한 잔 할 텨?”
“홍차에 코냑 넣어서 마실게요. 괜찮죠?”
“허허, 고 녀석 참.”
껄껄 웃던 할아버지가 인터폰으로 주문을 넣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 고용인 한 명이 서재로 들어와서 내 앞에 찻잔을 내려놨다.
고용인이 나가는 걸 보고 차를 마시자 홍차의 향과 코냑의 향이 섞이면서 입 안 가득 퍼졌다.
“그런데 금석호 회장님은 어떤 분인가요?”
찻잔을 내려놓은 내 질문에 할아버지가 침음성을 흘렸다.
“흐음··· 고삐를 채워서 몰면 최고의 명마지만 고삐를 풀어주면 망아지만도 못한 사람이다.”
“전문경영인은 몰라도 오너는 절대 안 된다는 말씀이군요.”
잠시 고민하던 내 대답을 듣고 할아버지가 벙긋 웃었다.
“징글징글할 만큼 척척 맞는구나, 흐흐.”
실제 나이가 오십대 중반인데 이런 선문답을 모를까. 빙긋 미소를 띤 나를 보며 할아버지가 금석호에 대한 품평을 이어갔다.
“금석호 그 친구는 바깥살림만 맡기는 게 좋을 게다. 안살림 틀어쥘 사람이 옆에 있으면 최고의 경영자가 되겠지만 그런 사람이 없으면 이번 같은 일이 반복될 게야.”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긴 하다.
전문경영인일 때는 최선을 다해 일해도 막상 오너가 되면 욕심에 눈이 머는 사람들.
어쩌고 보면 인간이란 동물의 보편적인 특성일 수도 있다. 초심을 망각하는 데서 모든 문제가 시작되지 않는가?
당신의 오랜 친구인데도 저리 냉정하게 평하는 걸 보면 할아버지도 보통 독한 분이 아니다. 감식안 하나는 귀신같은 분이니 그에 맞는 솔루션을 내놔야겠다.
“인수를 마치면 회계, 인사, 감사는 손에 쥐어야겠네요.”
“그렇지. 시어머니, 시누이 노릇 톡톡히 해줘야 제대로 일 할 게다. 스탠더드에 대한 이야기도 안 하는 게 좋을 게야.”
“네, 할아버지.”
대답은 했지만 할아버지의 뒤를 잇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다. 저 냉정한 판단력··· 평생 배워도 부족할 것 같다.
그나저나 우리가 나서면 태현그룹이 뒤집어질 것이다. 당연히 할아버지와 해동그룹에도 여파가 미칠 터.
걱정스러운 기색을 지우지 못하는 나와 달리 할아버지는 짓궂은 미소를 띠며 내게 말했다.
“내 걱정은 말거라, 이놈아. 내가 연기는 기가 막히게 하지 않느냐?”
“그럼···?”
할아버지의 느물느물한 웃음에 기대가 생기고 있었다. 그 기대는 할아버지에 의해 확신으로 바뀌었다.
“진호 형님, 호건이 할 것 없이 죄다 이 할애비한테 속아 넘어갈 게다, 흐흐.”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이번에 드러날 할아버지의 진가는 어느 정도일까?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았다.
***
해동그룹과 스탠더드 캐피털이 아도그룹과 비밀동맹을 체결하고 아도그룹 비자금을 세탁하고 있을 때 태현그룹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 꽂혔다.
“뭐라고? 장호건이가?”
명진호는 회장실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 보고를 한 임원을 쳐다봤다.
“예, 회장님. 방금 전에 총 17억 달러가 신성전자와 신성물산 계좌로 입금됐다고 들었습니다.”
“급살 맞을 놈, 우리가 써먹은 방법을 똑같이 썼을 줄이야···.”
명진호가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태현그룹이 하동 제철소 공사로 연막을 쳐서 1조 5천억 원을 숨겨둔 것처럼 신성전자와 신성물산도 돈을 숨겨뒀다니!
“이렇게 되면 양쪽 모두 1조 5천억 원이라는 건데···.”
자리에 앉은 명진호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태현전자가 가전 사업을 못하게 막은 빌어먹을 신성그룹에게 자동차 사업에서 똑같이 되갚아줄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턱에서 징징 소리가 날 만큼 이를 갈던 명진호에게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오?”
[나요, 형님. 잘 지내셨소?]
이대수의 안부인사에 명진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번 인수전에서 강 건너 불구경할 이대수인지라 그 느물느물한 목소리가 오늘 따라 더 기분 나쁘게 들렸다.
“이 회장 자네가 무슨 일인가? 바쁜 일 아니면···.”
[장호건이가 아도그룹 인수한다고 나대서 형님 심기 불편하게 만든다고 들었소.]
자신의 굳은 얼굴을 보고 당황한 임원에게 명진호는 손을 흔들어 나가게 했다. 임원이 나가면서 문을 닫는 사이에도 이대수의 목소리가 명진호의 귀에 들렸다.
[괜찮겠소? 그 우라질 놈이 국민들 돈 잔뜩 빨아먹고 기운 차릴 아도자동차를 훌러덩 가져갈 판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 자네에겐 미안하지만 아도그룹은 우리가 가져갈 걸세!”
눈 먼 돈이면 내가 먹는 게 낫다는 건 명진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버럭 소리친 명진호와 달리 수화기에서는 이대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해할 거 없소. 금 회장 그놈이 내 말 안 들어서 망한 거니까. 그래도··· 선처는 베풀어주시오.]
“그래야겠지. 자네 봐서라도 교도소까지 보낼 생각은 없네.”
이대수와 금석호의 사이가 나쁘지 않은 건 명진호도 알고 있다. 금석호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붙이면 ‘삼청동 호랑이’가 날뛸 수 있으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었다.
[고맙소, 형님. 내 형님한테 도움 될 말을 드리고 싶은데··· 인수입찰 조건을 바꿔보시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인수입찰 조건을 바꾸라니?”
[그놈이 지금 들고 있는 돈이 미국 달러인데 형님은 원화로 현찰박치기 할 거 아니오? 그러니 원화로 결제하는 쪽에 가점을 주게 하라, 이 말이오.]
이대수의 제안에 명진호의 눈이 번쩍 뜨였다.
대량의 달러를 원화로 교환하면 환율도 낮아지고 수수료도 떼어야 한다. 잘하면 아도자동차를 두고 벌이는 싸움에서 장호건이 쏘아댈 총알과 포탄을 한 발이라도 줄일 수 있었다.
명진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와중에도 이대수의 설명이 계속됐다.
[종금사 놈들 때문에 달러가 계속 빠져나가고 있소. 이런 판국에 17억 달러를 꿀꺽할 기회가 생기는데 정치꾼이나 공무원 놈들이 마다하겠소?]
“역시 자네 같은 사람이 없으이. 어찌 그런 비책을 짜냈나?”
[먼저 간 우리 장남 때문이오. 장호건이 그놈 때문에 자동차에 환장해서 나보다 먼저 가지 않았소? 불쌍한 놈···.]
이대수의 한이 섞인 목소리에 명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있었으면 또래 재벌 후계자들 중 가장 두각을 드러냈을 이대수의 장남 이명우가 아니었나?
명진호 자신조차 이명우가 자기 아들이었으면 태현그룹을 통째로 물려주고 싶을 정도였으니 같은 부모로서 이대수의 마음을 모를 수가 없었다.
“알겠네, 이 회장. 내 자네 한은 철저히 풀어주도록 하지.”
[고맙소, 형님.]
순수한 마음만은 아니었지만 명진호는 이대수에 대한 공치사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곧장 그룹 중역들을 전부 대회의실로 불러 모은 그는 재빨리 대회의실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회의실에 명진호의 형제들과 자식들, 조카들을 비롯한 수십 명의 그룹 중역들이 모였다. 명진호가 자신이 짜낸 것처럼 이대수의 훈수를 풀어놓자 모두들 감탄했다.
“묘안입니다, 회장님!”
“당장 은행 놈들부터 만나서 수수료를 높이겠습니다!”
“정치권과 공무원들부터 만나야죠! 나라에서 먼저 방침을 정해야 모양새가 좋게 나오지 않겠습니까? 하하!”
앞 다투어 세부 방안을 내놓는 중역들을 보며 명진호가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웃음이 넘치는 회의실. 그 속에서 웃지 않은 건 명세호뿐이었다. 태현그룹 계열사들이 아도자동차를 먹고 태현자동차에 붙이면 자신이 일군 태현자동차를 명진호의 장남 명선구에게 뺏기는데 어찌 웃을 수가 있겠나?
또한.
명세호는 잘 알고 있었다.
밀어붙이기만 할 줄 아는 ‘큰형님’이 절대 그런 꾀를 짜낼 수 없다는 것을.
이 나라에서 이런 꾀를 짤 사람이 자기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딱 한 명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과 친한 사람이라는 것을.
***
명진호의 지시를 받고 활짝 편 얼굴로 공작에 나선 중역들과 달리 명세호는 굳은 얼굴로 직접 차를 몰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차를 세운 명세호는 눈앞에 서 있는 대문을 바라봤다. 성문처럼 크고 웅장한 한옥 대문··· 심심찮게 드나들었던 대문이지만 오늘 따라 어색해보였다.
“누구십니까?”
“태현자동차 회장 명세호요. 이 집 주인장 뵈러 왔소.”
성문처럼 거대한 한옥 대문 앞의 조그만 검문소에서 나온 고용인은 명세호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눈살을 찌푸렸다. 지가 태현자동차 회장이라도 이 저택의 주인이 누군지 알고!
“집사장님, 태현자동차 명세호 회장님이라고 합니다.”
[안으로 뫼시게.]
고개를 모로 꼬던 고용인은 명세호의 쏘아보는 눈빛을 보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죄송합니다, 명 회장님. 금방 열어드리죠.”
“수고하게.”
명세호는 건성으로 인사를 건넨 뒤, 끼리릭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마자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서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린 그는 빠른 발걸음으로 자신이 갈 곳을 향해 걸어갔다.
거대한 건물 안으로 들어간 명세호에게 집사장이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명세호 회장님.”
“미안하지만 오늘은 인사를 받을 기분이 아니오. 이만.”
명세호는 이빨을 꽉 깨문 채 대꾸하고는 쿵쿵 소리를 내며 계단을 올라갔다. 2층에 도착해서도 거칠게 걷던 그는 노크도 없이 서재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어떻게 이럴 수 있소, 형님! 내가 태현자동차 키우려고 얼마나 죽을똥을 싸가면서 고생했는지 형님이 더 잘 알잖소! 그런데 날 죽이려고 큰형님한테 훈수를 둬준 거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명세호가 피를 토하듯 절규한 상대는 책상에 앉아있던 이대수였다. 아무 말도 없는 이대수의 무표정한 모습이 명세호는 야속하기만 했다.
“우리 태현이 크면서 큰형님 대신에 어르신, 형님 뵌 지가 벌써 40년이오! 내가 지금껏 어르신과 형님을 얼마나 깍듯이 모셨는지는 형님이 더 잘 알잖소!”
“그랬지. 8.3 사채동결 때 병호 형님과 진호 형님이 술판 벌인 거 알려준 게 GK그룹 큰 사돈과 자네뿐이었잖나. 자네가 해외출장 다녀올 때마다 선물로 준 양주도 그대로 있어.”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고저 없는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이 이대수이기에 명세호는 더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잘 아시는구려. 큰형님께 밉보일 각오하고 형님께 그 더러운 술판을 알렸고, 끼지도 않았소. 이 집 마당에 개처럼 엎드려 용서해달라고 빌었던 나한테 어찌 이럴 수 있소!”
이대수에게 속에 쌓인 감정을 쏟아내던 명세호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서 눈물을 흘렸다.
“나 좀 살려주시오, 형님. 태현자동차, 포드와 제휴했을 때부터 내가 키운 회사 아니오? 그런데 그걸 새파란 조카 놈이 후려치는 걸 볼 수는 없잖소?”
“명 회장···.”
이대수의 표정이 착잡하게 변했지만 명세호는 그의 표정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방금 전과 달리 정신 나간 사람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이대수를 애처롭게 바라봤다.
“큰형님이 그룹 계열사들 돈으로 아도자동차 먹고 태현자동차와 합치면 나하고 내 아들 지분은 휴지쪼가리가 됩니다, 형님. 나 좀 살려주시오, 응? 내 이렇게 부탁하겠소!”
명세호는 그대로 이대수를 향해 엎드려서 울부짖었다. 자신의 평생을 다 바쳐 일군 태현자동차를 지킬 수만 있다면 20여 년 전 그날 밤처럼 이대수 앞에 개처럼 엎드리는 건 백 번, 천 번이라도 할 수 있었다.
“후우···.”
그 모습을 보고 이대수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서 일어나 명세호에게 다가왔다. 한쪽 무릎을 꿇은 이대수가 바닥에 엎엎드린 명세호의 등을 두드려줬다.
“마음 좀 가라앉히고 얘기하세. 집사장.”
이대수가 문 밖을 향해 외치자 집사장이 올라왔다.
“예, 주인어른.”
“골든팁스 두 잔 내오게. 따뜻하게 데운 까뮤 반절 섞어서.”
“주, 주인어른?”
사실상 홍차에 브랜디를 넣는 게 아니라 데운 브랜디에 홍차를 우려내라는 것과 다름없는 지시에 집사장의 눈이 커졌다. 잠시 멍했던 집사장은 이대수가 말없이 눈살을 찌푸린 채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알겠습니다, 주인어른.”
집사장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고, 이대수는 명세호를 일으켜 세워서 소파에 함께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장이 내 온 홍차 두 잔에서 홍차 향인지 코냑 향인지 모를 향이 서재 안에 퍼졌다.
“들게.”
“예··· 형님.”
몸이 잔뜩 굳은 명세호가 홍차를 마셨다. 입에서 식도, 식도에서 위로 퍼지는 술기운에 명세호의 몸이 풀렸다.
‘형님이라면 날 도와줄 수도 있겠어.’
명세호는 자신을 배려해주는 이대수의 모습에서 희망을 봤다. 성질 급한 명 씨 집안사람 아니랄까봐 명세호는 그 희망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비운 찻잔을 내려놓고 이대수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부탁드립니다, 형님. 어떻게 안 되겠소?”
“힘 들 것 같네.”
“형님!”
명세호가 목소리를 높여도 고개를 저은 이대수는 그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자네 돕다가 우리 집안까지 박살나면? 자네가 책임질 겐가? 그리고 자네, 나한테 담보 맡겨 놓은 거 있어?”
이대수의 목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았지만 그 목소리에 실린 말은 서늘하게 날이 서있었다.
“혀, 형님···.”
그 목소리에 얼어붙은 명세호는 잊고 있던 사실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평소에는 호인 중의 호인이지만 그 성질 더러운 주한그룹 진주호 회장조차 꼬리를 말게 만드는 ‘삼청동 호랑이’가 아닌가? 이대수라는 남자는.
“아도자동차, 내가 인수한다고 침세. 그럼 자넨 나에게 뭘 해줄 건가?”
“그, 그야 체급별 가격을 서로 맞추거나 기술···.”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명세호가 엉겁결에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담합이라면 몰라도 기술까지 내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대수는 낭패가 가득한 명세호의 얼굴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자넨 나한테 달라고 할 생각만 가득했지, 정작 줄 건 없었나보구먼, 흐흐.”
“그, 그렇지 않습니다, 형님!”
명세호가 황급히 두 손까지 들어 흔들었지만 때는 늦었다.
“아니긴 뭐가 아닌가? 내가 자네 맘대로 쓸 수 있는 물건인 줄 아나? 내가 그리도 우스워!”
서재가 울리도록 쩌렁쩌렁 소리친 이대수의 고성에 명세호의 얼굴에서 술기운이 달아났다. 명세호는 황급히 소파에서 바닥으로 내려가 이대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 죄송합니다, 형님!”
“무슨 방식으로 돕던 간에 자네는 태현자동차도, 나도 못 지킬 걸세. 자네 큰형님 인맥, 자네가 이길 인맥이 아니지 않나?”
이대수의 싸늘한 질문에 명세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포로 문지른 피부에 소금을 문대는 것보다 쓰라리면서도 한 글자도 틀리지 않은 지적이기에 수치심과 치욕감이 밀려들었다.
“진호 형님을 상대로는 나도 버겁네. 인맥이라면 몰라도 그룹 대 그룹으로 충돌하면 승산은 더 떨어지겠지.”
이대수의 자조적인 목소리에 명세호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해동그룹의 재무구조가 탄탄해도 현재의 태현그룹을 상대로 싸우는 건 열차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드는 자동차와 다를 바 없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죄송할 거 없네, 이 사람아. 내가 먼저 나서면 문제가 될 거란 말이었네, 흐흐.”
이대수는 사과를 하고 고개를 숙인 명세호를 보며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자신의 뒤통수를 친 신성과 태현에게 복수극을 시작하려니 절로 음산한 웃음이 나오는 것이었다.
명세호는 이대수가 그의 장손 이성민과 머리를 맞대고 짠 20여 년만의 복수극을 시작하는 데 아주 좋은 장기 말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