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121화 (120/229)

121. 36th. 난무하는 뒷공작 (1)

할아버지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털어버린 내게 선해철의 탄성이 들렸다.

“아! 깜빡했다!”

선해철은 책상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서류봉투 하나를 가져와서 내게 건네줬다.

“이게··· 뭐예요?”

“클레어가 꽤 재밌는 회사를 발견했다고 해서 말이야. 저번에 왔을 때 줬는데 너 준다는 거 깜빡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서류봉투를 열어 안에 있는 서류를 살펴봤다. 서류 표지에는 ‘AMAZON’이라고 적혀있었다.

“아마존닷컴?”

“오오, 보자마자 촉이 팍 꽂히나보네? 흐흐.”

선해철이 웃거나 말거나 눈과 귀에 아무 것도 안 들어왔다. 지금쯤이면 슬슬 상장을 준비하고 있었을 텐데 이 회사를 물어다 줄 줄이야···.

“보면 알겠지만 인터넷서점 사이트인데 판매 품목을 늘리면 충분히 성장할 거야.”

“아하하하··· 충분하죠. 아주 충분해요, 흐흐.”

선해철의 말을 듣던 나는 잠시 섬뜩했다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전자상거래’라는 단어는 말하지 않았어도 방향을 정확히 짚어낸 건 대단했지만 시가총액 1조 5천억 달러를 훌쩍 넘길 아마존닷컴이 충분히 성장할 거라니?

선해철이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맘에 안 들어?”

“아뇨. 맘에 들어요. 저도 삼촌 말대로 품목을 늘리면 클 거라고 보거든요. 확실히.”

말끝에 힘을 주고 대답하자 선해철의 표정이 풀렸다.

“오케이. 투자 여부는 결정됐고··· 5월 15일에 상장할 거라는데 어떡할래? 예상 시가총액은 10억 달러 정도로 보고 있는데.”

“상장 뒤에 물량 풀리면 그때 사들이죠. 우리가 공모에 끼어들면 공모가가 지나치게 높아질 테니까요.”

지금의 스탠더드 캐피털은 이름값이 높아진 회사다. 우리가 공모에 달려들면 가격 요소든, 비가격 요소든 공모가가 폭등할 수 있으니 상장 이후에 쏟아질 물량을 받아 내거나 다른 기관투자자들과 만나서 거래하는 게 훨씬 싸게 먹힌다.

“목표 물량은?”

“35퍼센트. 헨리한테도 15퍼센트 정도는 담아두라고 추천해주시고요.”

그렇게 가져갈 물량의 합이 50퍼센트다. 내 주문에 선해철의 입이 벌어졌다.

“그렇게씩이나?”

“네. 2,30년 장기투자 한다 생각하시고 투자하면 좋을 것 같아요. 헨리도 다른 물주들 챙겨줘야겠지만 클레어하고 삼촌에게 물려줄 생각하라고 전해주세요, 흐흐.”

나중에 가면 그 15퍼센트 지분의 가치는 2천억 달러를 가볍게 넘는다. 아주 먼 미래가 되겠지만 지금까지 진 빚을 갚아주는 데 충분할 것이다.

그밖에도 아직은 비상장기업이지만 훗날 세계 최대의 자산운용사가 될 블랙록(BlackRock)에는 기존 유동자금을 돌려서 5억 달러에 신주 30퍼센트를 확보하기로 결정하는 등 미국 회사 일을 챙기며 오전을 보내고 점심을 먹었다. 식곤증도 쫓을 겸 핸드밀을 원두를 갈아서 만든 드립커피를 선해철과 마시던 내게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네, 네, 할아버지. 지금요? 네. 알겠습니다.”

커피를 마시던 선해철이 잔을 입에서 떼고 나를 바라봤다.

“회장님이셔?”

“네. 그런데··· 차를 보내줄 테니까 그걸 타고 오라고 하시네요?”

전화를 끊고 나서도 이상한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의 할아버지라면 그냥 오라고 하셨을 텐데···.

###

나와 선해철은 할아버지가 집사장 할아범을 시켜서 보낸 허름한 자동차를 타고 해동물산 인천 창고에 도착했다. 따뜻한 해가 내리쬐는 인천창고 앞에 내려서니 기분이 묘했다.

‘여기서 죽었는데 여길 또 오게 될 줄이야···.’

이곳에 온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죽은 곳에 오니 또다시 피가 끓어올랐다. 나와 박태진을 죽인 장용재, 장수연 그 연놈들이 떠올라서였다.

‘닭 모이로 뿌려도 시원찮을 것들···.’

앞으로 10여 년 뒤에나 나올 범죄영화의 남주인공처럼 그 연놈들을 머리통부터 분쇄기에 넣어서 갈아버리고 싶었다.

그럼에도 난 참을 것이다.

죽지 못해 살며 고통과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그 고통과 절망에 잡아먹혀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은 폐인으로 만드는 것보다 못할 테니까.

차에서 내려 이를 악물던 내게 집사장이 다가왔다.

“저 차로 가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도련님?”

집사장이 가리킨 건 사면이 모두 진하게 선팅 된 승합차였다.

“보는 눈이 많은가 보네요.”

이렇게까지 조심스럽게 움직인다는 건 뭔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거다. 할아버지는 내가 그룹에 관여한다는 것을 내보이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두 그룹 모두 회장님과 금 회장님 친분을 알고 있으니 불가피합니다. 이해해주십시오, 도련님.”

고개를 숙인 집사장을 보며 나는 빙긋 미소를 띠었다.

인천창고와 승합차를 보니, 새삼 그동안 내가 해왔던 일이 생각났다. 모든 것을 잃은 곳에서, 다시 해묵은 복수까지 해낼 수 있는 위치에 선 것을 생각하니 새삼스러웠다.

내가 선뜻 차에 타지 않고 감회가 남다른 얼굴로 인천창고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집사장이 내 눈치를 슬쩍 보며 물었다.

“혹시··· 아직도 3년 전 일을 마음에 두고 계십니까?”

“3년 전 일이요?”

뚱딴지같은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집사장이 뜸을 들이던 걸 멈추고 말했다.

“장하연 상무님과의 백화점 컨설팅 때 도련님 얼굴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말씀 안 드려서···.”

“아, 그런 일이 있었죠.”

그게 벌써 삼 년 전 일이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가끔 그런 일도 있어야 회장님께서도 웃으시죠. 그래서 그런 것 아니셨나요?”

“역시 도련님이십니다. 제 뜻을 헤아려주시다니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허허.”

우리 집안에서 수십 년 지낸 분 아니랄까봐 눙치고 넘어가는 솜씨는 일품이었다. 나는 겸연쩍은 미소를 띤 집사장을 보며 미소를 띠었다.

“앞으로도 할아버지께서 웃으실 일 많이 만들어드릴 거예요. 가시죠, 집사장님.”

옆에 있던 선해철이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씩 웃었다.

“효손 중의 효손이네, 흐흐. 그럼 타볼까?”

“그러시죠, 흐흐.”

나는 두 사람과 함께 승합차 뒷좌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삼청동으로 향했다.

***

잠시 시계를 뒤로 감아서.

화창한 아침햇살과 달리 소파에 앉은 금석호와 아랫자리에 앉아 있는 임원들의 얼굴은 거무죽죽하게 변해있었다.

“더 이상은 어렵습니다, 회장님. 해동종금에서 2,500억 원을 아도자동차 주식 5퍼센트로 바꿔줬다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입니다. 다음 달에 돌아올 어음과 채권을 못 막으면 1차 부도가 시작될 겁니다.”

“부도는 막아야 합니다, 회장님. 막지 못하면 2차 부도에 최종 부도··· 그땐 다 끝장입니다.”

“지금이라도 채권단과 부도유예협약을 맺어야 합니다. 비자금을 써서라도···.”

쿵!

빗발치는 임원들의 아우성에 금석호가 소파 팔걸이를 내리쳤다.

“비자금을 써? 어디에? 어디에!”

금석호의 고성에 모두들 입을 꾹 다물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정치권, 관료, 언론, 금융권 모두 아도그룹과의 접촉을 거부하는데 비자금을 어디에 쓴단 말인가?

무거운 적막함이 회장실에 있는 모두를 짓누르던 중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제가 받겠습니다, 회장님.”

“아냐. 내가 받지.”

손을 들어 임원을 자리에 앉힌 금석호가 수화기를 들었다.

“···회장님?”

금석호의 얼굴에서 그늘이 걷혔고, 그를 바라보던 임원들의 눈이 커졌다. 재계에서 손에 꼽히는 아도그룹의 수장이 회장님이라고 부를 사람이 이 상황에 누가 있겠는가?

“예. 예··· 아닙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무슨 일입니까, 회장님?”

“설마··· 이 회장님께서 도와주신다는 겁니까?”

“얼마나 도와주신다고 하셨습니까, 회장님?”

금석호가 밝은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자 임원들의 질문이 빗발쳤다. 이 나라에서 가장 현금이 많은 이대수가 나선다면 튼실한 동아줄 하나를 잡는 게 아닌가?

“회의는 삼청동 다녀와서 다시 하도록 하지.”

금석호는 재빨리 소파에서 일어나 회장실을 뛰쳐나갔다. 회장이 되고 처음으로 뛰는 그의 발걸음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

금석호는 이대수가 보냈다는 허름한 자동차를 타고 아도그룹 사옥을 나섰다. 보안 문제 때문에 서울 시내의 한 요정에서 승합차로 바꿔 탄 금석호는 삼청동으로 들어갔다.

차 안에 준비된 허름한 점퍼와 선글라스, 빵모자, 마스크까지 쓴 금석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본관 서재까지 한달음에 도착했다. 소파에 앉은 그는 이대수를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저흴··· 도와주시겠습니까, 회장님?”

“아니. 난 지금 자넬 도울 형편이 못 되네. 내 앞가림 하는 것도 부치는데 어떻게 자넬 도와줘?”

빙긋 웃는 이대수의 거절에 금석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와주지도 않으실 거면서 왜 부르셨습니까? 지금 누구 놀리십니까?”

씩씩거리는 금석호와 달리 이대수는 그를 보며 혀를 찼다.

“거, 성질머리하고는. 바쁜 사람 불러다 장난칠 만큼 내가 한가하게 보이나? 그것도 자넬 상대로?”

아닌 말로 금석호 눈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태평한 사람은 이대수밖에 없었다. 다른 그룹들이야 돈이 말라서 픽픽 쓰러지고 있지만 해동그룹은 달러를 비롯한 현금이 넘치도록 쌓여 있지 않나?

그렇지만.

자기 집 사정이 더 급했던 금석호는 원하는 답을 듣고 싶었다. 어찌나 속이 타들어 가는지 뜨뜻한 찻잔이 순식간에 비워졌다.

“그럼···?”

“난 지금 못 도와주겠지만 먼저 나서줄 대타를 찾았네.”

“정말이십니까?”

“그래. 내 그 친구 설득하느라 잔뜩 애먹었어, 허허.”

금석호는 새삼 놀랐다. 천하의 이대수가 어렵게 남을 설득하다니?

“누굽니까, 회장님?”

“그 전에··· 자네들이 모은 비자금, 나한테 맡기게.”

“예? 그, 그건···.”

또다시 나온 비자금 얘기에 금석호가 말끝을 흐리자 이대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싫은가? 그럼 자네들이 갈 곳은 감옥소밖에 없어. 그 친구가 안 나서면 신성이든, 태현이든 아도를 인수할 게 확실한데 자네들 비자금은 고사하고 모가지까지 남아나겠나?”

심드렁한 표정 속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눈매로 금석호를 쳐다보던 이대수가 혀를 찼다.

“쯧쯧쯧···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먼. 하나만 골라도 될까 말까야, 이 사람아.”

“···알겠습니다, 회장님. 전부 넘겨드리겠습니다.”

자유와 돈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돈을 포기하는 게 낫기에 금석호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비자금 5,487억 원, 10원 한 장 빠뜨리지 말고 줘야 할 걸세. 그 돈, 때 빼고 광내서 광화문, 서초동, 여의도에 뿌릴 거고 남은 건 아도그룹에 재투자하게 하지. 아까워 말게.”

“···예, 회장님.”

“자네만큼은 10년짜리 회장 자리 보장해줌세. 임원들도 적절히 임기 보장할 테니 앞으로는 절대 삥땅치지 마.”

그럼에도 비자금이 아까웠는지 금석호가 마지못해 대답했고, 그를 위로하면서 엄중히 경고한 이대수가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들어오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고, 응접실로 들어온 남자를 본 금석호의 눈이 커졌다.

“다, 당신은?”

금석호는 말을 더듬었다. 해동그룹과 거래를 트면서 대한민국에 데뷔한 선해철이 아닌가?

“스탠더드 캐피털의 선해철 대표. 먼저 간 내 장남 절친이고 내가 아들처럼 키운 친구지.”

이대수가 직접 키웠다는 소리에 금석호의 눈이 더 커졌다.

“그럼···?”

“스탠더드는 내 회사가 아니네. 그랬으면 내가 뭐 하러 이런 수고를 하겠나? 앉게, 선 대표.”

“예, 회장님.”

자리에 앉은 선해철이 금석호를 보며 빙긋 웃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금석호 회장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선 대표. 작년부터 열심히 뛰고 있다는데 이제야 만나게 됐군요, 하하.”

금석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해철과 악수를 나눴다. 가볍게 악수를 주고받은 뒤, 선해철이 가방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내 금석호에게 내밀었다.

“저희 쪽에서 준비한 아도그룹 인수 시나리오입니다. 살펴보시죠.”

금석호는 선해철이 받은 서류철을 펼쳐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석호의 손이 덜덜 떨렸다.

“회, 회장님?”

“놀랄 거 없네, 금 회장. 8.3 사채동결 때 병호 형님, 진호 형님이 내 뒤통수 갈기고 회장나부랭이들 모아서 술판 벌였던 거 기억하지?”

금석호가 어떻게 모르겠나? 이따금씩 이대수의 부름을 받고 주말에 와서 낮술 한 잔 할 때마다 심심찮게 들었던 얘긴데.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회장님. 그래도 지금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스탠더드에서 왜 이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나서려는 겁니까?”

금석호는 도저히 이 시나리오를 이해할 수 없었다. 스탠더드 캐피털이 신성그룹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장호건의 달러를 죄다 원화로 바꾸게 하려고 혈안인가? 자신들의 20억 달러를 원화로 바꾸면서까지.

이대수는 입을 떡 벌린 금석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해가 안 되면 그냥 받아들이게, 이 사람아. 그래도··· 이 시나리오대로면 자네도 구조조정 하느라 손에 똥 묻히고, 피 묻혀야 할 테니 알아두긴 해야겠구먼. 선 대표, 알려주게.”

“예, 회장님.”

이대수의 주문에 선해철이 표정을 갈무리하고 입을 열었다.

“스탠더드 캐피털의 총 운용자산이 150억 달러입니다.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서라면 20억 달러 정도는 가볍게 태워버릴 수 있죠.”

“배, 백오십억 달러요?”

태연하게 대꾸한 선해철과 달리 금석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도자동차 부채를 모조리 털어내도 남을 돈이 아닌가? 하지만 금석호가 놀라기엔 너무나도 일렀다.

“20억 달러쯤이야 미국 물주들에게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해동종금을 제외한 종금사들이 달러대출 갚느라 정신없는 판국에 달러를 원화로 바꾸고 한국에 투자하면 그만한 신고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하.”

분명히 종금사들이 달러대출 상환에 혼이 빠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그렇지 한 방에 20억 달러를 원화로 바꿔서 아도자동차 인수전에 나서겠다니···.

차원이 다른 신고식에 허탈해하는 금석호와 달리 선해철이 홍차 한 모금을 마시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것도 있지만 우리 스탠더드 캐피털은 아도자동차를 인수하고 나면 향후 10년 간 흑자에 집착할 생각이 없습니다.”

“무, 무슨 소리요? 흑자를 안 챙기겠다니?”

“공적자금을 수혈하고 나면 아도자동차는 분명히 좋은 회사가 될 겁니다. 오히려 더 투자해서 회사를 키워야죠.”

선해철의 태연한 대답에 금석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투, 투자금 회수는 어떡할 거요?”

“걱정 마십시오, 금 회장님. 아도자동차가 충분히 커졌다 싶을 때 상장시켜서 거둬들여도 됩니다, 하하.”

금석호에게는 껄껄 웃는 선해철이 미친놈으로 보였다. 어떤 미친 투자회사가 제조업 회사에 돈을 퍼부어 회사를 키운 뒤에 투자금을 회수한단 말인가?

얼빠진 금석호의 표정을 즐기듯 쳐다보던 이대수가 느물느물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 그리 놀라나, 이 사람아? 야후라고 미국서 잘 나가는 인터넷 회사가 있는데 스탠더드가 처음부터 수천억 원을 투자해서 키운 회사야. 안 그러나, 선 대표?”

“그밖에도 픽사나 소프트뱅크, 오라클, 시스코 등에도 꽤 많이 투자하고 있죠, 하하.”

“들었지? 우리 해동도 자네 회사에 투자하겠지만 이만한 물주가 어디 있겠나?”

입을 다문 금석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이대수가 말했다.

“아무튼 자네는 필요한 계열사들만 남기고 전부 정리해. 비자금도 전부 고 실장하고 세탁해서 스탠더드로 보내고. 진호 형님 구워삶아서 호건이 놈 달러를 원화로 바꾸게 하는 건 내가 하겠네.”

시나리오대로면 되면 금석호로서는 땡큐였다. 자신을 자빠뜨리려는 명진호 영감과 여우같은 장호건을 메칠 수 있으니 말이다.

그 대신에 해동그룹 휘하로 들어가야 했지만 오히려 그로서는 그 편이 속 편한 일이었다. 이대수의 해동그룹이라면 자신을 다잡아줄 단단한 고삐가 아닌가? 욕심에 눈이 멀어 다시는 실수하지 않도록.

어차피 물러설 곳도, 의지할 곳도 없다. 금석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회장님.”

금석호가 90도 인사를 하는 걸 보고 이대수와 선해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