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35th. 서로에게 털어놓는 비밀들 (2)
할아버지는 계획서를 보고 침음성을 흘렸다.
“흐음··· 우리 장손며느리가 알면 서운해 하겠구먼.”
이런!
가장 중요한 걸 놓쳤다.
내가 지금 꾸민 계획은 장호건의 뒤통수에 칼을 박아 넣을 짓이다. 장하연과의 관계가 파토날 일인데!
낭패감이 서린 얼굴을 보고 할아버지가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장손, 이제 보니 어쩔 수 없는 수컷이구나. 흐흐.”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고개를 숙인 내게 할아버지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내자식이 쉽게 고개 숙이는 거 아니다, 이놈아. 네놈이 황가 놈들한테 뉴욕에서 진 원한이 있는데 뭘 걱정하는 게냐? 에잉, 쯧쯧.”
할아버지의 혀 차는 목소리에 공성필 건이 이제야 떠올랐다. 할아버지가 아니었으면 떠올리지도 못할 뻔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핏덩이 같은 놈이 어찌 그리 정신이 없누? 집안 살림 챙기랴, 네 주머니 불리랴, 청춘사업 하랴··· 공사가 다망하니 그럴 법도 하겠다마는, 흐흐.”
낄낄 웃던 할아버지가 서랍을 열어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받아라. 때 되면 주려고 챙겨둔 거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책상으로 가서 할아버지가 내민, 빛바랜 봉투를 두 손으로 받았다. 재산문서라면 사양했겠지만··· 봉투에 지장 두 개와 아버지, 장호건의 사인이 있었다.
“어?”
“앉아서 열어 보거라.”
자리에 앉은 나는 봉투를 열고 안에 들어있는 종이를 펼쳤다. 종이를 보던 나는 눈이 커졌다. 이런 게 있었다니?
***
“이, 이건?”
종이에는 아버지와 장호건이 나와 장하연을 결혼시키겠다는 약속이 적혀 있었다. 법적효력은 없다지만 나와 장하연의 결혼을 약속해둔 정혼서약서가 있었다니!
내 이름과 장하연의 이름이 쓰인 정혼서약서를 쥔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게 있었다면, 이게 있는 줄 알았다면, 과거의 나는 그 고생을 하지 않았어도···.
“할아버지?”
“미안하구나, 성민아.”
할아버지가 죄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옆에 있던 선해철도 똑같은 표정으로 내 시선을 피했다.
“이게 뭐예요, 할아버지? 네? 말씀 좀 해보세요!”
“보다시피 네 아비와 장호건이가 너와 하연이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한 거다.”
처음으로 당신에게 목소리를 높였지만 할아버지는 화를 내지도 않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해줬다.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다. 대체 이걸 왜 숨겼단 말인가?
그 의문은 선해철이 풀어줬다.
“회장님께서는 네가 장 씨 가문에 잡아먹히는 걸 걱정하셨어.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 자리에 모이는 사람들이 직접 우리 집을 뒤져서 내가 들고 있는 정혼서약서를 찾아냈고, 그걸 할아버지가 숨겨둔 것을 알려줬다. 이럴 수가.
순식간에 힘이 쫙 빠져나갔다. 이걸 알았다면 내가 전생에 장수연 그 빌어먹을 여편네에게 시달릴 이유도, 장호건에게 미움 받을 이유도 없었다는 말이 아닌가?
“미안하구나, 성민아.”
나에게 사과하는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당신 장손이 장하연이라는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를 양반도 아닌데 이런 걸 왜 숨겨놓았단 말인가! 속 깊은 곳에서부터 설움과 원망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걸···!”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이놈아! 네놈이 그 아귀 같은 장 씨 집안에 잡아먹히는 걸 이 할애비가 보고 있어야 했단 말이냐? 널 잡아먹고 우리 집안을 파먹을 게 뻔히 보이는데?”
내 말을 끊고 호통을 친 할아버지가 숨을 가다듬었다.
“네놈이 이리 클 줄 알았다면 이 할애비는 진즉에 하연이 그 아이를 장손며느리로 받아들였을 게다. 아무리 이 할애비라도 앞날을 내다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앞날을 내다볼 수는 없다.’라는 할아버지의 하소연에 망치로 맞은 것처럼 머리가 얼얼해졌다.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병실에서 깨어나서 바뀐 이성민이지 죽음의 강을 거슬러 올라온 이성민이 아니다. 다시 말해 내 전생의 일은 더 이상 이 세상의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까지 성과를 낸 건 모두 내 전생의 고통과 경험 때문이니 할아버지도 지금에야 이렇게 사실을 털어놨을 터.
“그래요, 그래서···.”
나는 차마 말끝을 맺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의 냉정하지만 걱정이 어린 눈을 보니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이 맑아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정혼서약서가 있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나란 놈은 그대로 물러터진 놈, 자동차에 미쳐 사는 놈으로 남아서 장하연과 이어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시절의 나는 유약한 놈이었으니까.
하지만.
정혼서약서를 몰랐던 덕분에 신성그룹에 기어들어가서 혹독하게 단련됐고, 장수연, 장용재에 의해 지금으로부터 4년 전으로 되돌아왔으며, 장하연과 뒤틀어진 일부터 모든 일들을 바꾸고 이런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
결과론적인 해석이지만 나는 새옹지마의 운에 당첨된 최고의 행운아다. 그러니 더 이상 불평하는 건 신에 대한 모욕이자 나 스스로를 갉아먹는 짓이다.
내 나름대로 결론을 정리한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그리고··· 감사합니다.”
“서, 성민아?”
허리까지 숙인 내 모습 때문일까, 할아버지와 선해철이 말을 더듬었다. 나는 숙였던 허리를 곧게 펴고 굳은 눈빛으로 할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지켜봐주세요, 할아버지.”
“성민아···.”
할아버지가 의자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고맙다, 내 손주. 이 할애비를 용서해줘서.”
할아버지가 두 팔로 날 끌어안았다. 고개를 숙인 내 머리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
다음 날 아침.
이대수는 이성민, 선해철을 집으로 보내고도 혼자서 밤늦게까지 눈물이 마르질 않았다. 그 바람에 퉁퉁 부은 눈을 가라앉히느라 이대수는 팔자에 없는 얼음마사지를 하고 있었다.
“어떤가, 집사장?”
“기상하셨을 때보다 쾌차하신 듯합니다, 주인어른.”
얼음주머니를 눈에서 떼고 거울을 보던 이대수는 집사장의 대답을 듣고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참으로 몹쓸 놈이었어. 저런 놈이 아니었어도 진즉에 잘 어르고 달래서 좋은 길로 이끌어줬을 것을 왜 모질게 굴어서···.”
말을 잇지 못하던 이대수에게 집사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인어른께서는 도련님의 할아버지시기 전에 삼청동 서재에서 이 나라를 내려다보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도련님도 이해한듯하니 괘념치 마십시오. 앞으로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집사장의 위로를 받고서야 이대수가 조금이나마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렇지. 앞으로도 갈 길이 먼데 나약해지면 안 되지. 고맙네, 집사장.”
이대수는 옷을 갖춰 입고 서재로 올라갔다. 시간이 되자 고승주와 세 원로 대표이사, 이명진이 들어왔고, 이대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탁자 앞에 앉았다.
“스탠더드 캐피털과 손잡고 아도그룹을 인수할 생각이다.”
“회, 회장님?”
다섯 사람의 눈이 커졌지만 이대수는 대형폭탄 한 발을 또 터뜨렸다.
“금 회장 시켜서 필요한 계열사들만 남기고 공적자금 끌어들여서 계열사 지분 전부 아도자동차에 묶을 생각이다. 그렇게 정리된 아도자동차 지분 100퍼센트를 해동물산과 스탠더드가 50퍼센트씩 인수할 거고.”
이대수의 선언에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떡 벌렸다. 그의 경영철학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이들이지만 아도자동차 인수는 지금까지의 사업들과 달리 비용도, 리스크도 크지 않은가?
“회, 회장님, 그렇게 되면 인수가격만 최소 3조 원에 우리가 부담할 몫만 1조 5천억이 넘습니다. 회장님께서 금 회장님을 도와주시려는 뜻은 알겠지만 그룹 내 유동현금을 고려하면 인수대금을 달러로 지불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고승주가 황급히 나서서 말리려 했지만 이대수는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은 뒤, 책상으로 가서 종이 몇 장을 가져왔다.
그 종이뭉치는 자랑스러운 손주가 초고를 만들고, 아들처럼 아끼는 선해철과 자신이 감수를 봐준 시나리오였다. 이대수는 재계 최고의 비서실장으로 꼽히는 고승주가 자신을 포함한 세 사람이 짠 시나리오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했다.
“살펴보게.”
“예··· 회장님.”
고승주는 이대수에게서 건네받은 종이뭉치를 꼼꼼히 살펴봤다. 내용 파악이 끝났는지 서류를 내려놓은 고승주가 이대수를 크게 뜬 눈으로 바라봤다.
“회장님?”
“어떤가? 맘에 드는가?”
“스탠더드가 먼저 나서준다면 우리 그룹의 기회손실은 없을 겁니다. 오히려 더 큰 이익을 볼 수도 있고요. 하지만···.”
고승주는 ‘스탠더드 캐피털의 주인이 누구이기에 장호건을 쥐어짜지 못해 안달인 겁니까?’라는 질문을 꺼낼 수 없었다.
금덩이가 될 20억 달러를 휴지쪼가리가 될 원화로 바꾸면서까지 장호건의 17억 달러도 원화로 바꾸게 하려고 하다니··· 어지간한 물귀신도 따라오지 못할 지독하고 악질적이며 미친 계획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처음으로 고승주의 멍한 표정을 보고 이대수가 짓궂은 미소를 띠었다.
“긴말 할 거 없어. 스탠더드가 판돈으로 20억 달러를 올릴 테니 우린 태현그룹을 움직여서 장호건이 쥔 달러까지 원화로 바꾸게 한다.”
다시 말해 차도살인이었다.
장호건이 17억 달러로 막대한 환차익을 보는 꼴을 볼 수도 없지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장손의 혼사가 틀어지는 불상사는 차단해야 하지 않겠나? 신성과 태현의 싸움을 더 치열하게 만드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이대수가 숨을 고를 겸 홍차를 마실 때 조영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스탠더드 캐피털에겐 미안하지만 우리에겐 둘도 없을 기회입니다, 회장님. 지금 종금사 놈들이 단기외채 갚느라 달러가 빠져나가고 있으니 정부와 청와대에서도 환영할 겁니다.”
종금사들은 점점 강해지는 달러대출 상환 압박에 은행에서 달러를 구해다가 대출을 갚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달러를 전부 원화로 바꾸고 아도그룹 인수입찰에 나서게 하는 것은 정부와 청와대, 그리고 태현그룹이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조 대표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회장님. 지금은 아도그룹 인수입찰 대금을 원화로 결제하는 쪽에 가점을 주게 만들어도 특이점이 오면 무용지물이 될 테니까요.”
“역시 고 실장답구먼.”
조영찬과 고승주의 분석이 이대수, 이성민, 선해철 세 사람의 노림수였다. 태현그룹을 움직여 아도그룹 인수입찰 대금을 원화로 결제하는 쪽에 가점을 주게 해도 환율이 급등하면 정부와 채권단에서는 달러를 갈구할 터.
물건이야 사고 파는 사람들의 마음에 달리지 않았나? 모든 불안요소가 해소됐기에 고승주와 조영찬 모두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이 넘쳤다.
“아도그룹이면 중공업 쪽이라 명확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회장님. 회장님과 부회장의 평가를 따르겠습니다.”
“저도 제 영역이 아니라 쉽게 말씀드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회장님. 회장님과 부회장 뜻을 따르겠습니다.”
자금 문제가 얽혀있어서 의견을 내놓은 조영찬, 고승주과 달리 배재훈과 태재호는 깔끔하게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고 이명진에게 공을 넘겼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이명진이 침묵을 깨고 고개를 들었다.
“인수, 해야 합니다. 회장님.”
“근거는?”
“공적자금을 끌어들이는 게 걸리긴 하지만 부채만 털어내면 아도자동차와 아도그룹은 충분히 경쟁력 있는 회사로 변할 겁니다.”
“그것뿐이냐?”
아버지의 질문 뒤에 ‘그런 근거는 풋내기 사원도 아는 사실이다.’라는 꾸지람이 숨겨진 것을 알기에 이명진은 차분하게 추가 근거를 들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회장님. 스탠더드 캐피털의 정확한 의중은 모르겠지만 아도자동차를 아도그룹 지주회사로 만들고 지분 전량을 우리와 50퍼센트씩 사자고 했다면 장기적인 안목으로 회사를 키우겠다는 뜻을 비친 걸 겁니다. 추가 투자에 따른 군소주주들과의 충돌을 배재하겠다는 뜻이니까요.”
“호오··· 그럴 수도 있겠군.”
본심을 숨긴 대답과는 별개로 이대수는 아들의 통찰력이 커진 것에 흡족해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이명진이 딱 그 말에 어울리지 않는가?
이명진은 아버지의 긍정적인 반응에 자신감을 얻고 추가의견을 피력했다.
“더군다나 우리 그룹도 다가올 고비만 넘기면 추가투자 여력이 충분해질 겁니다. 그러니 인수를 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다. 양아치 같은 IMF가 수많은 나라들의 빗장을 걷어내는 조건으로 구제금융을 해준 사례가 많으니 한국의 외환위기 또한 똑같을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환율이 폭등할 때 해동그룹이 보유한 달러를 원화로 바꾸면 환율이 안정되면서 천문학적인 환차익을 남긴다. 향후 해외광산 개발로 벌어들일 돈도 무시할 수 없으니 현금흐름도 문제없었다.
모든 계산을 끝내고 이대수가 다섯 사람을 둘러봤다. 타는 듯한 이대수의 눈빛을 마주한 그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쿵!
“이놈저놈 다 자빠질 때 치고 나가야 한다. 위기는 곧 호기(好期)야!”
“예!”
탁자를 내려친 이대수의 외침에 다섯 남자 모두 큰소리로 대답했다. 철저히 준비한 이상 이 나라에 닥칠 위기는 해동그룹에 둘도 없을 기회였다.
***
다섯 남자의 호기로운 대답을 들은 이대수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마지막 대형폭탄 하나를 터뜨렸다.
“올해 연말에 우리 장손, 하연이 그 아이한테 장가보낼 거다.”
“회, 회장님?”
또 한 번 얼이 빠진 다섯 사람들을 보며 이대수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놈, 더 이상 장 씨 집안에 잡아먹힐 놈 아닐세. 시험은 그만해도 되겠어.”
다섯 사람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지금껏 보여준 것들만 봐도 이성민이 신성그룹을 잡아먹으면 잡아먹지, 잡혀 먹힐 놈은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렇게 이성민과 장하연의 혼담 문제까지 시원하게 마무리되자 이대수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
회사에 출근한 나는 멍한 표정으로 컴퓨터를 쳐다봤다. 할아버지가 날 위해 팔을 걷어붙일 줄은 생각도 못해서였다.
“삼촌.”
“왜?”
“할아버지··· 정말 대단한 분인 것 같아요.”
태현그룹 명진호 회장과 아도그룹 금석호 회장을 움직여서 판을 짜주겠다니··· 돈으로도 만들기 어려운 그 엄청난 인맥은 정말로 대단했다.
“회장님께 고맙게 생각해. 네 혼삿길 돕겠다고 애쓰시는 거니까.”
“네.”
할아버지에 대한 서운한 감정은 이번 일로 싹 날려야겠다. 당신 손주를 위해 이만큼 발 벗고 나서주는 할아버지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