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35th. 서로에게 털어놓는 비밀들 (1)
7시부터 시작된 회의는 두 시간째 계속 되도 명쾌한 답이 안 나왔다. 결정된 것은 해동종금이 쥐고 있던 아도자동차 채권을 아도자동차의 주식 5퍼센트로 바꾸는 것뿐이었다.
“다들 고생했어. 가봐.”
모두들 굳은 표정으로 나갔지만 나와 선해철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가라는 말 못 들었느냐? 오늘은 할애비 심기가 불편하니 이만 돌아가거라.”
할아버지의 얼굴에 처음으로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비쳤다. 당신이 가장 아끼던 장남 내외를 죽게 만든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에 왜 그렇게 미련을 보이는 걸까? 우리 그룹과 제휴하는 사업도 크지 않아서 미련을 가질 이유도 없는데···.
궁금증을 뒤로 한 채 나는 선해철과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인 뒤,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그래도 이놈이? 맘에 안 드는 말이면 혼날 줄 알어?”
우리 할아버지, 진짜로 골이 단단히 난 모양이다. 평소와 달리 짜증까지 내다니.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할아버지의 얼굴에 드리워진 안 좋은 감정들을 걷어낼 자신이 있었다.
내 정체를 밝힌 뒤, 이번 인수전에서 내가 총대를 메고 손해를 떠안겠다고 하면 해동그룹은 손해 없이 아도자동차 지분 50퍼센트를 인수할 테니까.
나는 가방에서 청심환 갑을 꺼내들고 할아버지에게 가서 내밀었다.
“이게 뭐냐?”
“우황청심환입니다, 할아버지.”
“뭐라? 우황청심환?”
쿵!
목소리를 높인 할아버지가 의자를 뒤로 밀치며 일어났다. 나만큼이나 큰 할아버지는 내 눈을 한 뼘 거리만 사이에 두고 쏘아봤다.
“네놈이 지금 이 할애비를 희롱하는 게냐? 그간 네놈이 집안 살림을 키운 걸 믿고 나대는 게야?”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무서워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한두 번씩 겪었을 저 위압적인 모습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할아버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보며 말했다.
“희롱하는 것도, 나대는 것도 아닙니다, 할아버지. 지금부터 제가 올릴 말씀을 들으시면 놀라실까봐 드리는 겁니다.”
“뭐라? 놀랄 거라고? 내가?”
할아버지의 얼굴이 점점 사나워졌지만 난 그 얼굴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 할아버지께서 제게 가장 궁금하실 한 가지, 그 한 가지에 대한 답을 드릴 테니까요. 아도자동차 인수에 대한 이야기는 그 다음에 올리겠습니다.”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4년 전, 스탠더드 캐피털 창립 초창기에 내가 해동종금에서 트라이엄프 캐피털로 보낸 3백억 원에 대해 고승주가 직접 물은 적이 있었다.
고승주 혼자서 그랬을 리 없다. 분명히 할아버지와 조영찬도 돈이 옮겨간 사실을 알았을 터. 그 돈의 행방도, 스탠더드 캐피털에 대한 조사도 안 했을 리 없다. 눈은 절대 못 속이는 법. 할아버지의 눈빛을 보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나와의 눈싸움을 끝내고 책상 앞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그쪽에 앉거라.”
“우황청심환은···.”
내게 말을 다 하기도 전에 할아버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럼에도 마음을 나는 마음을 놓지 못해서 발을 못 뗐고, 할아버지는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이 나이 먹고 이 짓까지 해야 하나···.”
나지막이 중얼거린 할아버지가 왼손 소매를 겨드랑이까지 걷어 올리고 이두박근에 힘을 줬다. 나보다 더 크고 단단한 팔근육을 보고 나와 선해철은 입을 떡 벌렸다.
“봤느냐? 이 할애비, 하루에 이백 근 역기 서른 번씩 친다. 잔말 말고 어여 앉어.”
“네···.”
등 뒤로 돌아서면서 입을 삐죽 내민 나를 보고 선해철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가 내렸다. 나는 옷매무새를 바로잡은 할아버지와 마주 볼 수 있게 의자에 앉았다.
“말해봐라. 그 답이 뭔지 말이다.”
“네, 할아버지.”
나는 숨을 고르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뭐라고 떨리는지···.
마음의 준비를 마친 나는 할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스탠더드 캐피털, 제 회사입니다. 총 운용자금 중 100억 달러, 회사 주식의 91퍼센트가 제 재산이고요.”
가장 기본적인 사실만 알려줬는데도 할아버지의 입이 떡 벌어졌다.
“뭐, 뭐라고? 그냥 발만 걸친 게 아니라 아예 네 회사라는 게냐?”
“네. 지분율이든, 운용자금 규모든 확실한 제 회사입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을 이제야 이 자리에서 밝혔다.
“앞으로 스탠더드 캐피털은 우리 집안, 우리 그룹의 자금을 운용하는 회사가 될 겁니다, 할아버지.”
“허면··· 네가 돈을 굴려서 집안 살림을 늘리겠다는 말이냐?”
“네, 할아버지. 열심히 불려서 우리 집안과 해동그룹을 키우겠습니다.”
지금 한 말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내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복수와 야망의 청사진에서 가장 밑바탕이 될 일이었다.
그 많은 돈으로 최고의 인재들을 끌어들이고 산업 트렌드를 주도할 해동그룹으로 신성그룹을 삼켜야 장 씨 것들이 처절한 절망과 대중들의 비교질을 맛보게 될 테니까.
말하는 나조차도 소름이 끼쳤다. 망상 같은 계획에 할아버지가 무슨 대답을 할지 몰라서일까, 몇 년째 속에 담아두고 있던 것들을 털어놔서 후련하다 못해 오싹한 걸까?
“이 집안 장손으로서 할아버지께 드리는 선물이자 약속입니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할아버지.”
“허어···.”
할아버지의 떡 벌어진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책상에 얹어진 손까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흐허허허허허··· 으하하하하하!”
어느새 할아버지의 손이 멈추고 너털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웃음은 소름끼칠 만큼 무서운 웃음으로 바뀌었다. 나도, 선해철도 마른침을 삼키고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웃음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쿵!
책상까지 손바닥으로 두들긴 할아버지가 눈가에 맺힌 이슬을 닦아냈다.
“과연 내 장손답구나! 암! 우리 집안 장손이면 그만한 호연지기는 있어야지!”
흐뭇한 표정으로 박수까지 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앞으로 10여 년 뒤에 박수 애드립을 남길 명배우의 그것과 같았다. 나와 선해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할아버지?”
“회장님?”
“다른 놈들이 말했다면 당장에 요절을 냈을 것이야. 하지만 넌 네 돈 3백억 원과 내가 준 3억 달러를 4년 만에 백억 달러로 불린 놈이 아니냐? 으허허.”
역시나였다. 지금껏 내가 보여준 실력이 있었기에 할아버지가 믿어준 것이었다. 껄껄 웃는 할아버지를 보며 나와 선해철은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칠순 넘게 살아오면서 지금처럼 즐거운 적도 없었다. 이 할애비도 어느 정도는 짐작했다만 100점 만점에 100점을 더 주고 싶을 만큼 훌륭하구나, 으허허.”
놀라기는커녕 흐뭇한 표정으로 껄껄 웃는 할아버지. 역시 재계의 기인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분이었다.
***
그 뒤로 나는 스탠더드 캐피털 창립부터 지금껏 투자해 온 건들과 지금껏 쌓은 인맥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아버지에게 들려줬다. 할아버지는 그때마다 동그랗게 모은 입에서 탄성을 흘리거나 껄껄 웃는 등 처음 보는 모습을 보여줬다.
“해철이 자네, 조카 하나는 잘 뒀구먼. 으허허.”
“그렇습니다, 회장님. 덕분에 클레어도 저도 늦게나마 결혼했으니 고마울 따름이죠, 하하.”
푸근한 표정으로 선해철을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웃음을 멈추고 나를 보며 말했다.
“지금 네가 한 말, 아무에게나 알려주지 말거라. 네 숙부, 네 사촌동생들, 이 탁자 앞에 앉는 사람들에게도 말이다.”
“할아버지?”
깜작 놀란 나를 보며 할아버지가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이란 나태해지기 쉽고 박약해지기 좋은 동물이야. 그래도 네 입으로 스탠더드 캐피털을 우리 집안과 해동그룹의 화수분으로 만들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거면 충분해.”
“그러긴 하지만···.”
“때가 되면 알려줘야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너도 투자한 만큼은 회수해야 하지 않겠느냐? 적어도 당분간은 너와 선 대표, 태진이, 그리고 이 할애비만 아는 게 좋을듯하구나.”
할아버지 말씀이 맞았다.
인간은 여유가 생기면 게을러지고 의지할 곳이 생기면 나약해지기 마련이다. 또한, 호의가 반복되면 권리로 아는 게 인간이 아닌가?
끝없이 노력하는 인간상을 추구하고 남에게 빚지는 걸 싫어하는 할아버지다운 주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아버지.”
“오냐. 그래도 지금껏 집안 살림 키우겠다고 네가 날린 기회가 수십억 달러나 될 텐데 안 아깝더냐?”
“돈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니까요. 저는 투자가이기도 하지만 할아버지의 뒤를 이을 만큼 좋은 기업가가 되는 게 더 큰 목표입니다.”
진심을 담아 대답했지만 할아버지는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틀렸다. 너는 내 뒤를 이으면 안 돼.”
“네?”
깜짝 놀란 나를 보며 할아버지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 할애비가 살아온 세월과 네가 살아갈 세월은 다르단다, 성민아. 그 시절은 지금과 비교도 안될 만큼 추하고 더러웠지. 그 탁류에 덜 섞이고 싶어서 군바리들, 정치꾼들이 시키는 만큼 회사를 키우고 원하는 만큼 돈을 던져줬어.”
“할아버지···.”
“내 돈으로 돕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도 돕지 못했던 적이 부지기수였다. 기껏해야 교구청에 기부금 내는 게 전부였지. 덕분에 강남터미널 공사가 잘 풀려서 신 회장은 도와줬다만···.”
이제야 우리 집안이 가톨릭 사회에서 입지가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정권의 눈치 때문에 못 도왔던 신호진 같은 이들에 대한 괴로움을 기부로 풀었고, 그 덕분에 강남터미널 수맥 찾기가 쉽게 풀린 것이었다.
그럼에도 할아버지의 표정이 지금처럼 씁쓸하고 쓸쓸해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그토록 단단하고 강해보이던 분이 보이는 약한 모습··· 나와 선해철은 숙연한 표정으로 할아버지의 말을 듣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총칼로 겁박하는 놈들이 없으니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 더구나 이 할애비는 앞으로 길어봐야 10여년이지만 넌 내가 살아온 만큼 살아가야 하지 않더냐?”
할아버지는 잔잔한 미소를 품고 당신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을 계속했다.
“네가 필요한 건 이 할애비에게서 배워도 좋다. 조건이 맞으면 권세도 빌려주고, 사람도 빌려주마. 그래도 너는 네 나름의 경영을 해야 할 게야. 해동그룹을 너와 네 숙부에게 나눠준다고 해도 그걸 키우는 건 너희들 몫이니 말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선물을 주면서도 숙제까지 줬다. ‘내 나름의 경영’이라는, 내가 복수를 끝내고도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끝나지 않을 숙제를 말이다.
하지만 그 숙제는 할수록 즐거울 숙제였다. 조건이 맞아야겠지만 당신의 권세와 사람으로 내 숙제를 도와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그럼 이제 눈앞에 닥친 문제를 의논해보자꾸나. 네 깜냥이면 아도자동차를 충분히 인수할 게 아니냐? 흐흐.”
할아버지의 음침한 웃음소리에 묘한 서운함이 밀려왔다. 벌써부터 손자의 돈을 당신 돈처럼 여기시는 건가? 조금 토라진 내 얼굴을 보고 할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이 할애비를 뭘로 보는 게야, 이놈아? 손주 호주머니 털어먹는 영감탱이인 줄 아는 게냐?”
“아닙니다, 할아버지! 그럴 리가요? 흐흐.”
씩 웃는 나를 보며 할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조건이 맞으면 내 권세도, 사람도 빌려주겠다고 했다. 조건이 맞는지 얘기해보자꾸나, 흐흐.”
우리 할아버지, 사람 들었다 놨다 하는 솜씨는 일품이다. 나는 슬쩍 눈치를 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도자동차 인수, 어떻게 할 거냐? 해도 문제고 안 해도 문제가 될 텐데.”
그때였다. 선해철이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제가 먼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회장님?”
“말하게, 선 대표.”
“스탠더드 캐피털에서 20억 달러를 만들어뒀습니다. 전부 성민이 돈이고요.”
“허면··· 자네도 나서겠다는 건가?”
“네, 할아버지. 선 대표님도 돕기로 했습니다.”
선해철의 눈짓을 받고 대답한 나를 보며 할아버지가 침음성을 흘렸다.
“흐음··· 지분은 얼마나 가져올 생각이냐?”
“100퍼센트입니다.”
“100퍼센트?”
“네. 할아버지께서 승낙만 해주시면 숙부님과 함께 아도자동차에 해동의 간판을 달고 건실한 회사로 키우겠습니다.”
눈이 휘둥그레진 할아버지가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이놈아, 키우고 자시고는 나중의 문제다. 피 같은 국민들 돈으로 살려놓으면 그 지분을 다 가져오는 데 못 줘도 3조는 줘야 할 텐데 참말이냐?”
“압도적인 지배력. 할아버지 경영철학이잖습니까?”
“그렇지만 액수가 너무 커.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인수는 시작일 뿐입니다, 할아버지. 흑자는 고사하고 돈을 더 넣어야 합니다.”
할아버지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뭐라? 버는 족족 재투자하는 것도 모자라서 추가 투자를 하겠다고?”
“아도자동차, 우리 집안이 물 뿌리고 거름 대서 키울 회사입니다. 다른 주주들이 있으면 그조차도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겠습니까? 회사 말아먹겠다는 것도 아닌데 더러운 꼴 안 보려면 비상장으로 돌려야죠.”
다른 놈들은 편하게 사업을 키우려고 상장을 하지만 우리 집안은 편하게 사업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인수할 회사들까지 상장폐지 시켜야 한다. 상식을 뛰어넘는 경영방식 때문일까, 할아버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질문을 계속했다.
“나머지는 어찌할 게냐? 아도그룹 계열사들 말이다.”
“공적자금을 투입해서 쓸 만한 계열사들만 지분 전량을 아도자동차에 묶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포장된 아도자동차 주식을 해동물산과 스탠더드가 50퍼센트씩 인수하고요.”
“으허허허, 이런 독한 놈을 봤나!”
할아버지가 책상을 탕탕 치며 껄껄 웃었다.
국민들 혈세를 함부로 끌어다 쓰는 건 미안하지만 앞으로 우리 집안이 퍼부을 돈으로 국내에 만들 일자리, 회사가 크면서 낼 세금으로 충분히 보상되고도 남는다.
무엇보다 압도적인 지배력을 중시하는 할아버지의 경영철학에 100퍼센트 맞는 인수합병이다. 그것도 재계 8위의 아도그룹을 상대로 벌일 일이니 얼마나 즐거울까?
할아버지의 입에서 웃음이 잦아들었다. 차를 한 모금 축인 할아버지는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스탠더드 캐피털을 화수분으로 만들겠다는 말이 헛소리가 아닌 게로구나.”
“물론입니다, 할아버지. 열심히 벌어올 돈으로 회사를 키우면 우리 집안과 그룹도 키우고 공적자금을 끌어 쓴 데 최소한의 속죄도 될 겁니다.”
선해철도 이 딜을 성사시키기 위해 내 옆에서 장단을 맞춰줬다.
“지금껏 제가 봐온 성민이라면 충분히 해낼 겁니다, 회장님. 이 녀석이 돈을 대고, 전략을 세우고, 명진이와 명진이 아이들이 기술을 개발하면 못 할 게 없을 겁니다, 하하.”
“자네 말이 맞네, 선 대표. 성민이 애비가 먼저 가서 포기했던 그림이 이렇게 이뤄질 줄이야···.”
할아버지가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숨을 가다듬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눈가에 맺힌 물기를 닦아내고 할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우리 장손이 이렇게까지 나서주겠다니 이 할애비는 어떻게든 인수입찰 발표일을 최대한 늦춰야겠구나. 그렇지?”
“네, 할아버지. 제 살점 도려내도 금세 아물 테니까 걱정 마셔요, 흐흐.”
“너, 설마?”
할아버지와 나를 보고 선해철의 눈이 커졌다. 나와 할아버지의 계획을 알아챈 건가? 나는 그의 시선을 모른 체하고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종이 한 장만 써도 되죠?”
“오냐. 원하는 대로 맘껏 써 보거라.”
나는 할아버지가 건네준 종이와 펜을 받고 자리에 앉아서 계획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선해철이 나를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본 건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