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34th. 물 밑 경쟁 (3)
다음 날 오후.
평소와 다름없이 이대수는 주일미사를 다녀와 점심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늘 그렇듯 전날 약속을 잡은 바둑친구 금석호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대마가 죽었군.”
소파에 앉은 이대수가 딱 소리를 내며 바둑판에 돌을 놓고는 무심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맞은편에서 바둑을 두고 있던 금석호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자네답지 않구먼. 평소에는 잘만 이기던 사람이 오늘 따라 왜 세 번이나 지다니. 이 늙은이를 우롱하는 겐가?”
“아, 아닙니다, 회장님. 오늘 따라 회장님을 따라가는 게 힘듭니다, 하하.”
금석호의 어색한 웃음에 이대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평소라면 바둑으로 금석호를 처음 이기는 것이기에 기뻐했을 이대수였지만 왜 자신이 내리 3연승을 하는지 뻔히 알고 있었다. 평소의 금석호라면 절대 놓치지 않을 틈도 내주고 있지 않나? 자신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참말인가, 거짓부렁인가?”
참다못한 이대수가 쏘아붙이자 금석호가 백기를 들었다.
“살려주십시오, 회장님!”
털썩 소리와 함께 바닥에 무릎을 꿇은 금석호. 그런 금석호를 이대수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살려달라고? 누굴? 자네를?”
“이 금석호와 아도를 살려주실 분은 회장님밖에 없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회장님! 살려주십시오!”
이대수의 비꼬는 목소리에도 금석호는 땅바닥에 이마가 닿을 만큼 절까지 올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태현그룹과 신성그룹의 공격에서 아도그룹을 살려줄 사람은 이대수뿐이 아닌가? 이대수는 그런 금석호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금 회장아.”
“네, 회장님!”
“내가 뭐라고 했나? 적당히 하라고 하지 않았나?”
몇 번이고 수담(手談)을 나눌 때마다 부채를 줄이고 내실을 기하라고 금석호에게 권했던 이대수다. 자신의 조언을 무시하고 덩치불리기와 비자금 조성에 급급했던 금석호에게 고운 말이 나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그룹들도···.”
“입 닥치고 듣게, 금 회장.”
이대수의 목소리에서 전에 없는 냉기가 넘실거렸다. 금석호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고, 이대수는 그를 차가운 눈초리로 쏘아보며 말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고 했네. 분수도 모르고 빚돈 끌어다 쓴 놈들 줄줄이 무너지는 거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아, 아닙니다, 회장님! 하지만···.”
다급하게 변명하려던 금석호는 이대수의 날카로운 눈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자네가 주인 없는 회사 지키려고 애쓴 건 이해하네. 그래도 이 사람아, 빚은 몰라도 분식은 정도껏 했어야지! 3조가 뭔가! 3조가!”
“회, 회장님?”
이대수의 쩌렁쩌렁한 호통소리에 금석호가 말을 더듬었다. 아무도 모르게 꽁꽁 숨겨놓은 분식회계 규모를 어떻게 이대수가 알았단 말인가? 이대수는 금석호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내 눈 노릇, 귀 노릇 하는 놈들이 이 조선 팔도에 깔려있어. 자네가 더 잘 알 텐데?”
해동그룹과 이대수의 인맥은 해방 이전부터 켜켜이 축적된 인맥이다. 볕 드는 땅과 그늘진 땅을 가리지 않고 퍼져 있는 이대수의 눈과 귀들이 살아있음을 깨닫고 금석호가 고개를 떨궜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됐네. 내 입으로 떠벌리려니 낯 뜨겁구먼.”
고개를 숙인 금석호를 보며 이대수가 손에 쥔 바둑돌을 만지작거렸다.
“그건 그렇고··· 뭐 때문에 3조나 분식을 한 건가?”
“그, 그게···.”
금석호가 말을 더듬는 걸 보고 이대수가 손에 쥐고 있던 바둑돌을 통에 던졌다.
“나가.”
이대수가 바둑돌을 던진 손을 검지만 뻗어서 들고 문을 가리켰다. 그 손을 보고 금석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회, 회장님!”
“어디서 대가리를 굴려? 이 방에서 허언이 없다는 건 자네가 더 잘 알 텐데?”
이대수의 거친 고성에 금석호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 나라에 거미줄처럼 퍼진 이대수의 정보망이면 며칠 내에 파악할 수 있지 않은가? 괜히 뜸을 들였다는 후회가 금석호의 얼굴에 드러났다.
결국, 금석호는 그간의 분식회계가 태현그룹이나 신성그룹에 잡아먹히지 않고자 적자를 숨기려고, 또한 다른 재벌 총수들처럼 비자금을 만들려고 꾸민 것임을 밝혔다. 그 말을 듣고 이대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게 왜 무리를 했나, 이 사람아? 자네가 회장 취임할 때 경영은 등수놀이가 아니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나! 내실을 다지라고 그리도 말했건만!”
이대수가 금석호에게 또 한 번 언성을 높였다. 아도그룹에서 오너 가문이 물러날 때까지만 해도 성실하고 명석했던 자가 오너 대신 총수 자리를 맡고 이토록 사리판단이 흐려졌다니, 참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 잡아먹혔군, 금 회장. 바보 같이···.”
“죄송합니다, 회장님!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도와주시면 다시는 이러지 않겠습니다!”
금석호는 자신을 보며 한탄하는 이대수에게 절을 올리며 읍소했다. 지금 이 나라에서 자신이 기댈 곳은 이대수 한 명뿐이지 않나?
“미안하이. 우리 해동이 달러를 쥐고 있는 건 지금 해외사업 때문일세.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어.”
돌고 돌아서 마지막으로 찾아온 삼청동에서마저 버림받는단 말인가? 금석호의 몸이 부르르 떨리는 걸 보고 이대수가 입을 열었다.
“대신, 해동종금이 갖고 있는 아도자동차 채권은 주식으로 바꾸라고 해둠세.”
“회장님?”
“조 대표나 내 장손과 의논해봐야겠지만 그것만 주식으로 바꿔도 급한 불은 끌 게야. 5퍼센트만 챙겨주게.”
총 11조에 이르는 부채에 비하면 턱도 없겠지만 원리금이 2,500억 원이나 되는 빚을 휴지조각 같은 아도자동차 주식 5퍼센트로 바꿔주겠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도움이다. 잘만 하면 다른 채권단들도 마음을 돌릴 여지가 생긴다.
또한, 지분율 3퍼센트부터는 임시주총 소집, 회계감사 등 아도그룹 사태에 개입할 법적권리가 생긴다. 금석호는 순식간에 이 점을 파악하고 한 가닥이나마 기대를 잡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속단하지 말게, 금 회장. 2,500억 원이 시작이 될지 끝이 될지는 그룹 수뇌부 회의를 해봐야 아니까. 가봐.”
해동그룹의 중대사가 이대수 혼자가 아니라 이 방 탁자 앞에 앉는 이들의 합의하에 결정된다는 걸 모르는 금석호가 아니다.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던 금석호의 눈이 번쩍거리자 이대수는 그 눈빛을 놓치지 않고 서늘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 방 탁자 앞에 앉을 사람들에게 헛수작 부리면 내 손으로 자네 목을 치겠네. 자네들이 만든 비자금 5,487억은 빼돌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대로 놔둬. 알았나?”
자신의 생각을 알아챈 것도 모자라서 자신과 동료들이 만들어놓은 비자금의 억 단위 액수까지 꿰고 있다니··· 이대수의 서슬 퍼런 엄포에 금석호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예, 회장님.”
힘없이 대답한 금석호가 문을 나섰다. 이대수는 축 쳐진 그의 뒷모습을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
딸깍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는 걸 보고 이대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불쌍한 놈···.”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더라도 금석호는 이대수에게 또 다른 아픈 손가락이었다.
초임 이사 시절부터 삼청동을 드나들며 바둑으로 이어진 인생친구이고, 자신에게 사업에 대한 조언도 구했으며 스스로 물러난 오너 가문 대신 자신의 권유로 아도그룹 총수를 맡고는 해동그룹과의 협업을 밀어붙인 자가 아닌가?
그런 금석호가 총수라는 자리에 먹혀서 귀머거리에 소경이 된 꼴을 보고 말았으니 이대수로서는 안타깝기만 했다.
또 한 번 한숨을 토해내고 이대수가 수화기를 들었다.
“나다, 승주야. 알아봤느냐?”
[네, 회장님. 장호건 쪽에서 나설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고승주의 설명을 듣고 이대수가 이를 악물었다.
“호건이 그놈이 나댄 이유가 있었군. 여우같은 놈.”
[아직은 확실치 않지만 그게 아니고는 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습니다.]
“알았다. 좀 더 알아봐.”
[예.]
그 말을 끝으로 이대수가 수화기를 내려놨다.
주먹을 번갈아 말아 쥔 이대수의 손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경기를 앞두고 손을 푸는 권투선수처럼.
***
며칠 뒤.
선해철과 함께 샌드위치와 홍차로 아침을 때운 나는 헨리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고맙네, 조니! 우리 쪽에서도 야후에 관심이 컸었는데 자네 물량을 반절이나 넘겨주겠다니! 정말 고맙네!]
귓가에 들리는 헨리의 목소리에서 환희가 넘치고 있었다. 나 또한 기분 좋은 목소리로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아닙니다, 헨리. 그 물량을 전부 받아주시겠다니 제가 감사드려야죠. 더군다나 프리미엄까지 후하게 쳐주셨으니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하하.”
[우리 딸하고 사위 이어준 오작교가 자네인데 그 정도 웃돈은 얹어줘야지. 게다가 벌써부터 우리가 넘겨준 돈으로 빅딜을 만들어놓지 않았나? 하하!]
주말에 미국으로 돌아간 클레어가 우리 쪽 상황을 전해주면서 야후 주식 거래를 제안한 덕분인지 헨리는 우리 쪽에서 제시한 15억 달러에 5억 달러를 더 얹어서 야후 주식 15퍼센트를 인수해줬다.
헨리와 그가 이끄는 파벌 덕분에 큰 이익을 봐왔지만 헨리의 배려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헨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아닙니다, 헨리. 이번에 베풀어주신 은혜는 꼭 갚아드리겠습니다.”
[은혜는 무슨? 서로 잘 되자고 하는 일 아닌가? 더군다나 나와 자네는 사돈일세. 부담 갖지 말고 잘하게, 하하.]
헨리와의 전화를 끊자 선해철이 나를 보고 씩 웃었다.
“어떠냐, 조카야? 우리 장인어른, 최고지? 흐흐.”
“최고예요, 흐흐.”
이걸로 아도자동차 인수전에 투입할 돈은 거의 다 마련됐다. 야후 매각대금에서 세금을 떼도 미국증시에서 돌리고 있는 자금 중 3,4억 달러 정도만 빼내면 20억 달러를 만들 수 있으니 유동자금 문제도 없었다.
“이제 어떡할 거냐? 정말··· 사실대로 말씀드릴 거냐? 회장님께?”
“네. 이제는 말씀드려야죠.”
조심스럽게 묻던 선해철은 내 대답을 듣고 굳은 표정을 풀었다.
“휴우, 큰일이네.”
“왜요?”
“이제 겨우 스물여섯인 장손 재산이 100억 달러나 되는데 안 놀랄 할아버지가 어디 있겠냐? 혹시 모르니까 우황청심환이라도 하나 챙겨둬.”
“에이, 설마요? 할아버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 많은 분인데···.”
믿기지가 않았지만 선해철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내 말을 끊었다.
“올해를 합쳐도 겨우 4년이다. 4년 만에 150억 달러를 굴리는 회사, 그 중 100억 달러가 네 돈이고 그 회사 주식의 91퍼센트가 네 거야. 회장님 재산은 반세기 가까이 쌓인 집안 재산인데 안 놀라실까?”
“아···.”
선해철의 반문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재산을 불린 속도는 상식을 아득히 넘으니 할아버지가 놀라서 쓰러질 지도 모른다. 선해철의 말대로 환약이라도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어떻게 이 사실을 말해야하나 새로운 고민이 생겼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네. 네, 백부님. ···네?”
고승주의 전화를 받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신성이 나선 이유를 찾았다니?
“···알겠습니다. 자세한 건 저녁 때 뵙고 듣겠습니다. 네.”
수화기를 내려놓은 내게 선해철이 물었다.
“뭔데 그래?”
“신성 쪽에서 나선 이유가 있었네요. 저녁 때 삼청동 들어가야겠어요.”
나는 말을 맺지 못하고 수화기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나, 장호건?
***
그 날 저녁.
회사에서 퇴근한 나와 선해철은 곧장 삼청동으로 들어갔다. 서재에 들어간 우리는 탁자 앞에 앉은 어른들에게 인사를 올리고 아랫자리에 앉았다.
“다들 왔으니 시작해.”
“예, 회장님. 장호건 측에서 아도그룹을 공격할만한 근거가 있었습니다. 먼저 관련 자료를 넘겨드리겠습니다.”
고승주는 의자 옆에 뒀던 가방에서 서류뭉치를 꺼내서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한 부씩 돌리고 자리에 앉았다.
“자세한 내용은 지금 나눠드린 서류에 있으니 생략하겠습니다. 신성전자는 반도체 생산 설비 계약, 신성물산은 미국법인에서 쌓아둔 반도체 재고로 돈을 묶어두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들은 내용이었지만 또 한 번 들으니 허탈하기만 했다. ‘초격차 전략’ 속에 아도자동차 인수를 위한 자금까지 숨겨뒀을 줄은··· 미래를 아는 게 무조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완벽한 내 실수고, 내 패배였다.
지독한 패배감에 이를 깨무는 와중에도 고승주의 설명은 이어졌다.
“···따라서 현금 회수가 끝나면 장호건 회장도 최소 17억 달러는 확보할 겁니다, 회장님.”
“썩을··· 골치 아프게 됐군.”
할아버지의 입에서 뿌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진 가운데 고승주가 보고를 계속했다.
“자금력에서는 우리도 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룹에서 보유한 원화는 거래처 지원과 내부 운영비로 잡혔습니다. 결국, 아도자동차를 인수하려면 달러를 써야 하는데 최소 17억 달러 이상은 투입해야 합니다, 회장님.”
고승주의 보고가 끝나자 할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굳거나 찌그러진 깡통처럼 구겨졌다. 환차익을 두둑이 챙길 때만을 기다리며 재작년 초여름부터 달러를 쟁여온 해동그룹의 수뇌부가 아닌가?
할아버지가 굳은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인수를 안 하면 장호건이나 진호 형님만 배불리는 꼴이 되는데··· 인수해도 지랄이고 안 해도 지랄이군.”
할아버지의 퉁명스러운 욕설에도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장호건이 아도자동차를 인수하면 신성물산의 짐 덩어리였던 자동차사업본부를 자회사로 쪼개서 아도자동차와 합병시킬 게 뻔하다. 나와 할아버지가 질색하는 장호건에겐 전자, 물산에 이어 자동차라는 또 다른 버팀목이 생기는 셈이다.
그렇다고 명진호의 태현그룹이 먹으면 자동차시장을 독차지하며 하청업체들에게 온갖 횡포를 부릴 터. 더군다나 아도그룹의 어지간한 하청업체들은 할아버지의 사채조직과 거래하고 있으니 유탄을 맞기 딱 좋다.
결정적으로.
누가 인수하든 할아버지의 친구인 금석호, 그리고 그의 측근들은 전부 잘려나가고 해동그룹과의 협업도 중단되거나 납품단가 후려치기를 당할 게 뻔하다.
아도자동차를 인수하든 안 하든 우리 집안은 무조건 피를 보게 된다.
그 피, 내가 전부 흘리겠다.
지금껏 내가 해동그룹 안팎에서 쌓아온 노력이라면
스탠더드 캐피털의 주인이 나라는 것도
내가 아도자동차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 인수하겠다는 것도
할아버지를 충분히 납득시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