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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117화 (116/229)

117화. 34th. 물 밑 경쟁 (2)

지금껏 미국에 쌓아둔 자금을 동원해서라도 아도자동차를 먹겠다고 결심한 내게 행동은 순식간의 것이었다. 나는 바로 박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태진입니다. 누구시죠?]

여전히 정중하면서도 딱딱한 우리 형. 나는 박태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미소가 그려졌다.

“형, 잘 지내고 있죠?”

[도련님?]

“네, 저예요. 홍콩 음식, 입에 맞아요?”

[맞을 리가 있겠습니까, 도련님. 전주댁 여사님 밑반찬이 그립더군요, 하하. 인수입찰 결과는 잘 나왔습니까?]

“원하는 대로 가져왔어요. 그런데···.”

아도그룹 문제와 인수입찰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힌 나는 박태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좋은 기회라고 봅니다.]

“근거는요?”

[회장님과 금석호 회장님, 오래된 바둑친구입니다. 도련님께서 깨어나셨을 때···.]

박태진에게서 할아버지와 금석호의 이야기를 듣고 입이 떡 벌어졌다.

“이천억이요? 겨우 바둑돌 여섯 점 더 받고?”

[회장님께서 금 회장님 상대로 포커나 화투는 이기시는데 바둑은 매번 지시거든요, 하하.]

“아하하하···.”

나는 그저 어색한 웃음소리만 흘렸다. 나중에 나올 ‘리니즈’ 때문에 양산될 수많은 ‘린저씨’들도 우리 할아버지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 것 같았다.

[물론, 우리 그룹과 아도그룹의 거래관계가 더 중요한 이유였죠. 회장님께서 장 회장님을 싫어하는 것도 있었고요.]

“아··· 그러겠네요.”

박태진의 이어지는 대답을 듣고 입맛을 다셨다.

냉정하게 보면 부모님의 사망사고는 아버지의 실수 때문이었지만 할아버지는 그 원인을 장호건에게 돌렸었다. 장호건 때문에 아버지가 자동차에 열광하지 않았나? 그러니 장호건이 아도자동차를 먹는 것을 곱게 볼 리 없었다.

[조만간 금 회장님이 회장님을 찾아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단은 형님, 형수님과 만나서 의논해보시죠.]

“알겠어요, 형. 고마워요.”

전화를 끊은 나는 곧바로 선해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 주는 클레어가 서울에 오는 주라서 한창 깨를 볶고 있을 텐데··· 미안하지만 사태가 사태인 만큼 염치불구하고 통화가 연결되길 기다렸다.

[누구시죠?]

“삼촌, 만나서 의논할 게 있어요. 숙모도 있죠?”

[무슨 일이냐? 주말이면 전화 한 통 안 하던 놈이?]

안 그러던 놈이 그래서인가 선해철의 목소리에서 불안감이 느껴졌다.

“태현하고 신성에서 조만간 아도그룹 집어먹으려고 덤빌 거예요.”

[뭐? 확실해?]

“네.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요.”

[알았다. 클레어! 얼른 일어나!]

[우우웅··· 썬, 나 힘들어···.]

“풋!”

다급하게 소리치는 선해철과 달리 잠이 덜 깬 클레어의 잠꼬대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음을 터뜨리기가 무섭게 선해철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고, 나는 얼른 웃음기를 지웠다.

“죄송합니다, 삼촌.”

[죄송하긴. 다 큰 성인인데. 우리도 지금 준비해서 갈게. 사무실에서 보면 되지?]

“네, 삼촌. 1시간 뒤에 사무실에서 봬요.”

전화를 끊은 나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두 사람의 화끈한 늦깎이 신혼생활을 부러워할 틈도, 여유도 없었다.

***

여의도 스탠더드 캐피털 한국법인 사무실에서 선해철과 클레어를 맞은 나는 두 사람에게 드립커피를 내주고 아도그룹 문제를 들려줬다.

“Really? 그 말, 사실이야?”

“네. 우리 집 사돈 될 곳에서 알려준 정보니까 확실해요.”

굳은 표정으로 대답한 나를 보며 클레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 여기도 월스트리트 뺨치네.”

월가보다 작을지언정 한국 재계도 만만찮은 정글이다. 그 정글 속에서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군림해야 내 복수를 완성할 수 있었다.

“태진이가 알려준 게 사실이면 접근은 쉽겠어. 회장님과 금석호 그 양반이 친구인데다 해동종금에 있는 아도자동차 채권을 주식으로 바꾸면 우리가 그 주식을 사서 나서면 되겠네. 그런데···.”

선해철이 잠시 말끝을 흐리며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정말로 100퍼센트 다 사들일 거냐? 해동물산까지 끌어들여서?”

“네. 스탠더드와 해동물산이 50퍼센트씩 인수하려고 합니다. 나중에 계열분리하면 50퍼센트는 숙부님 몫이에요.”

선해철은 나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명진이 이 자식, 복도 많지. 아도자동차 지분 50퍼센트를 분가 축하 선물로 미리 받다니.”

말은 이렇게 했지만 8.3 사채동결 때 우리 집안 뒤통수를 친 태현그룹이나 신성그룹이 공적자금을 받고 살아날 아도자동차와 아도그룹을 집어삼키는 꼴을 보는 게 싫었다.

국민들 혈세를 끌어들여 살린 기업을 헐값에 인수하려는 건 분명히 쓰레기 같은 짓이지만 어차피 눈 먼 돈이면 내가 먹는 게 낫지 않겠나? 욕심의 크기만 다를 뿐, 서민이나 부자나 다를 건 없으니까.

무엇보다.

우리 집안이 아도자동차를 손에 넣으면 고만고만한 지금에 안주하지 않을 거다. 공적자금 썼다고 욕하는 게 무색할 만큼 물을 주고 비료를 뿌려서 거대한 나무로 키울 테니까.

잠시 손을 꼽던 선해철이 침음성을 멈췄다.

“아도그룹 자회사들이야 아도자동차 100퍼센트 자회사로 두거나 해동중공업에 붙이면 되긴 하는데··· 자금이 만만치 않을 거다. 헨리 쪽에서 보내준 돈, 거기에 안 쓸 거잖아?”

“그렇죠. 장호민 코 꿰는 데 쓰고 남은 돈은 해동그룹 계열사에 투자하라고 부탁받았으니까요.”

헨리와 그가 이끄는 파벌은 우리 집안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호주와 파나마 광산 개발로 쏟아질 건설일감만 수십억 달러이니 눈이 안 돌아가겠냐마는···.

“인수비용은 어떻게 할 거냐? 공적자금으로 빨간약 발라주고 반창고 붙여주면 아도자동차 지분 50퍼센트만 인수해도 1조 5천억은 줘야 할 텐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신성이나 태현은 그 정도도 앓는 소릴 내겠지만 100퍼센트면 3조 이상은 줘야겠죠.”

커피를 한 모금 축인 나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우리 유동자금, 얼마나 돼요?”

선해철이 내 얼굴을 살펴보고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미국 증시에서 돌리고 있어. 원하면 뺄 수 있긴 한데 아도자동차에 투자하기엔 기회손실이 너무 커.”

“썬 말이 맞아, 조니. 우리가 미국 증시에서 돌리는 주식들, 액면분할해도 분할 전 주가까지 금방 오르고 난리잖아.”

클레어도 난색을 드러냈다. 죽음의 강을 거슬러 올라온 내가 찍은 주식들이니 오죽하겠냐마는··· 박태진만큼이나 내게 소중한 동업자 부부가 반대하니 방법은 딱 하나였다.

“우리 쪽 야후 주식 반절, 헨리한테 넘기죠.”

“뭐?”

“조니?”

선해철과 클레어의 눈이 커졌다. 나는 그런 둘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분명히 야후 투자 실적이 좋긴 해요. 그런데, 물량이 너무 많아요.”

“그러긴 해. 언젠가는 처분해서 현금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매물이 크긴 하지. 한꺼번에 시장에 풀기도 꺼림칙하고.”

“그러겠네요, 썬.”

잠시 고민하던 선해철의 대답에 클레어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쥐고 있는 야후 지분은 총 30퍼센트.

현재 주가를 반영하면 그 가치만 30억 달러다. 반절이면 15억 달러인데 그만한 물량을 안전하게 받아내면서 주가 상승세를 유지하려면 헨리 같은 초대형 큰손이 나서줘야 한다.

잠시 고민하던 선해철이 내게 물었다.

“후회 안 할 자신 있냐? 나중에 주가 오르면 엄청 손해 볼 텐데?”

“15퍼센트만 남겨도 15억 달러잖아요? 헨리가 원하면 바로 넘기겠다고 하세요. 헨리, 저한테 사돈어른이나 마찬가지잖아요.”

헨리와 그의 파벌에겐 충분히 남는 장사다. 수십, 수백억 달러를 굴리는 그들에게 몇 배를 버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 않나? 이참에 물량을 분산시켜서 아도자동차 인수에 쓸 총알도 장전하고, 헨리에게도 빚 하나를 지워놔야겠다.

내 대답을 듣고 선해철이 피식 웃었다.

“하여간, 말은 청산유수야. 그렇지, 클레어?”

“그러게요. 우리 자식 낳으면 조니처럼 키워야겠어요, 후훗.”

정답게 웃는 두 사람을 보니 괜히 가슴이 울렁거렸다. 나도 슬슬 결혼할 시기가 다가와서 그런가?

“오케이. 주식 처분하면 세금 떼고 13억 달러쯤 될 거야. 필요한 총알이 얼마나 돼?”

“현재 환율이 달러 당 약 900원··· 20억 달러까지 채워두세요. 때 되면 바로 보내주시고요.”

“총알 많은데 패 꺾긴 싫다는 거지?”

“물론이죠. 할아버지가 아시면 혼날 거예요, 흐흐.”

낮게 웃는 나를 보며 선해철과 클레어의 눈이 커졌다.

“서, 설마 너?”

“조니?”

“이번 인수전, 할아버지와 손잡고 나설 겁니다. 할아버지 힘 빌리려면 당연히 오픈해야죠.”

아도그룹처럼 재계 10위 안에 들어가는 대기업을 인수하는 일은 경제의 영역을 넘어 정치의 영역까지 얽힌 문제다.

아수라장 같은 대한민국 정관계를 어르고 달래야 아도자동차 인수를 성사시킬 수 있으니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권력자인 할아버지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할아버지를 설득하려면 나와 스탠더드 캐피털의 관계도 밝혀야 한다. 수조 원이 움직이는 빅딜인 만큼 인정만으로 당신의 힘을 써줄 할아버지가 아니니까.

입을 떡 벌리던 선해철, 손으로 입을 가리던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밝혀야 할 때다.

***

이성민과 그의 동업자 부부가 아도그룹을 접수하기로 결정했을 무렵, 신성과 태현의 먹잇감이 된 그 아도그룹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신문사 쪽은 뭐라고 하던가?”

“술까지는 먹였는데 돈도 여자도 거부했습니다. 다들 미꾸라지같이 빠져나갔습니다.”

“이런 썩을···.”

여론을 조종하는 놈들은 빠져나갔다. 악문 이빨 틈새로 욕을 내뱉던 금석호가 다른 임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행 놈들은?”

“그, 그게···.”

“시간이 썩어나는 줄 알아! 할 말 없으면 냉큼···!”

금석호가 고성을 터뜨리자 질문을 받은 임원이 벌떡 일어나 허리까지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은행 놈들, 우리 쪽 전화는 한 통도 안 받고 있습니다.”

“뭐?”

금석호가 황망함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에도 임원들은 비보를 쏟아냈다.

“놈들이 냄새를 맡은 것 같습니다. 하청업체 사장들을 시켜서 알아봤더니 우리 쪽 대출금을 회수하려고 한답니다.”

“정부 관료들이나 여당 정치인들도 우리와의 만남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받아먹은 돈이 얼만데···.”

쿵!

“빌어먹을!”

금석호가 소파 팔걸이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아랫자리에 앉은 임원들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지난 월요일부터 아도그룹 비난 기사가 조국일보와 한양일보를 시작으로 전 언론사에서 쏟아낸 지 6일째다. 경영진들의 방만한 경영과 비자금 조성, 노조 지도부가 하청업체에서 뇌물을 받고 불량 부품을 쓴다는 등 신나게 씹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금융권, 정관계 할 것 없이 아도그룹 담당자들, 심지어 금석호의 면담 요청까지 거부하고 있다. 마치 누군가의 지시라도 받은 것처럼 말이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금석호가 모를 리 없었다.

“명진호, 명선구, 장호건···.”

태현그룹이나 신성그룹이나 아도그룹을 탐낼 이유가 충분하다. 태현그룹은 국내 자동차 시장을 독식하고, 신성그룹은 신성물산 자동차사업본부를 기사회생시킬 기회가 아닌가?

둘 다 한양일보와 조국일보를 수족처럼 부리는 데다 오래된 역사만큼 정재계 인맥이 쌓여있다. 아도그룹의 전문경영인 출신인 금석호는 절대로 그 인맥을 앞지를 수 없었다.

“이대로 망해야 하는 건가···.”

금석호가 자조적인 목소리를 흐렸다.

지금처럼 아예 손 쓸 곳이 없으면 지금까지 잔뜩 쌓아둔 비자금 5,487억 원을 쓸 기회도 없다.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고 자리를 지키기 위해 만들었건만 신성이나 태현이 아도그룹을 접수하면 그들의 목을 조를 올가미가 된다.

모두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한 임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장님.”

“뭔가? 묘안이라도 있는 건가?”

고개를 번쩍 든 금석호를 보고 임원이 머뭇거렸다.

“뭐라도 좋아! 빨리 말해!”

금석호의 다그침에 임원이 입을 열었다.

“삼청동에 찾아가보심이 어떠십니까?”

“삼청동?”

“지금 상황에서 회장님 손을 잡아줄 곳은 삼청동의 이대수 회장님뿐입니다. 회장님 체면 때문에 해동종금에는 아직 연락을 넣지 않았잖습니까?”

임원들이 해동종금에 연락을 하지 않은 이유는 금석호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다. 4년 전, 신성그룹의 마수를 막아야 할 때 경영권 방어를 위해 2천억 원이나 되는 거금을 선선히 빌려준 이대수 때문이 아닌가?

이자까지 쳐서 갚았다고 해도 이대수가 빌려준 돈 2천억 원은 꼬리표 없는 차명자금이다. 그 돈은 통장에 찍히는 돈과 액면가만 같은 뿐 실제 가치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런 돈을 겨우 바둑돌 여섯 점만 추가담보로 받고 내준 이대수이기에 금석호 본인도, 다른 임원들도 또다시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이대수에게 손을 내밀어야 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끄응···.”

“방법이 없습니다, 회장님. 우리를 비롯한 5만 임직원들과 그 가족들 목숨이 회장님께 달려 있습니다.”

정확히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임원들의 목이 걸려 있지만 금석호도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임원들에게 말하지 않은, 이대수에 대한 자신의 잘못이 있었지만 지금은 살아남아야 용서도 구하고 반성도 할 수 있었다.

금석호가 침음성을 멈추고 눈빛을 굳혔다.

“알겠네.”

금석호는 마른침을 삼키고 수화기를 들었다. 그가 누르는 전화번호는 삼청동 서재로 연결되는 전화번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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