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34th. 물 밑 경쟁 (1)
순식간에 얼어붙은 서재. 그 주범인 고승주는 핸드폰 수신부를 손으로 막았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아닐세. 마저 통화하고 얘기하지.”
“예.”
숙였던 고개를 든 고승주는 할아버지가 손을 흔드는 걸 보고 다시 전화를 받았다.
“응. 신성? 태현? 알았어. 계속 알아보고 연락해.”
고승주는 통화를 마치자마자 할아버지 옆으로 가서 몸을 낮추고 귓속말을 했다. 귓속말이 진행되는 시간만큼 할아버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고, 탁자 위에 얹어진 손이 터질 것처럼 꽉 쥐어졌다.
귓속말을 마치고 몸을 반듯이 세운 고승주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할아버지도 굳은 얼굴로 외쳤다.
“실사 들어가서 깎을 수 있는 건 최대한 깎을 준비해. 자네들은 가 봐.”
할아버지가 말한 그 ‘자네들’인 중공업 계열사 사장들은 전부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리고 서재를 나갔다. 서재에 남은 사람들 중 내가 자리를 땡겨앉은 걸 보고 할아버지가 고승주에게 물었다.
“사실이냐?”
“확실합니다, 회장님. 정보팀 애들이 동양일보 기자들한테 전달받았는데 그쪽에서도 한양일보와 조국일보 양쪽 기자들 내용을 확인하고 넘겨준 정보입니다.”
한고그룹 인수전 때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얘기에 따르면 동양일보는 우리 집안의 사돈이 될 곳이다. 그런 곳에서 전해준 정보라면 틀릴 수가 없었다.
쾅!
“이런 우라질!”
고승주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할아버지가 책상을 내리치며 고성을 질렀다. 부들부들 떨리는 할아버지의 주먹을 보고 너, 나 할 것 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일이십니까, 회장님?”
“진호 형님하고 장호건이가 대형사고 칠 것 같다.”
할아버지가 낙담이 넘치는 목소리로 내놓은 대답에 뒷골이 쌔해졌다. 태현과 신성이 대형사고를 쳤다면···설마?
“하,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흔들리는 내 눈을 보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성민이 네 생각이 뭔지 모르겠지만 태현그룹은 한양일보, 장호건이는 조국일보 시켜서 아도그룹을 공격할 계획이다. 아도그룹을 잡아먹겠다는 게지. 육시럴 것들!”
극단적인 생각이 딱 맞아질 줄은 생각도 못했다. 자동차에 대한 집착이 강한 두 집안이 이런 초강수를 쓸 줄이야!
“말도 안 됩니다, 회장님! 양쪽 모두 아도그룹을 인수할 여력이 없을 텐데 무슨 배짱으로 그런 짓을 한답니까? 뒷수습이 안 되면 정권에서도 마지막 힘을 짜내서 반격할 텐데···.”
배재훈의 말이 맞았다. 재벌그룹들이 줄줄이 무너지고 있는 마당에 아도그룹처럼 거대한 기업이 무너지면 레임덕을 맞은 정권이라도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모두들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을 비치는 가운데, 나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태현과 신성이 뭘 믿고 그런 짓을 했는지.
수능 시험 칠 때보다 더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중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젠장!
이를 악문 나를 보고 할아버지가 물었다.
“짚이는 게 있느냐?”
“당한 것 같습니다.”
분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안이했다니!
“당했다고?”
“네. 신성은 몰라도 태현에서 연막을 친 것 같습니다. 실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질문을 받고 고승주가 고개를 숙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승주가 고개를 번쩍 들고 나를 쳐다봤다.
“혹시?”
“실장님 생각이 뭔지는 몰라도 그게 맞을 겁니다. 신성은 모르겠지만 태현그룹에서 돈 나올 곳은 하동 제철소 공사뿐일 겁니다.”
고승주는 말을 마친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고승주의 생각이 빌어먹을 만큼 맞아떨어졌다. 젠장!
이상하다 했다. 불도저 같은 태현그룹에서 제철소 짓는데 토목공사만 1년 가까이 질질 끌더라니···.
결과에 맞춰서 해석한 결론이지만 태현그룹의 하동 제철소 공사는 공사대금 명목으로 현금을 묶어둔 게 분명했다. 우리가 당장 개발하지도 않을 해외 광산이나 CMA 포트폴리오 조정을 핑계로 달러를 쟁여둔 것처럼!
씩씩거리던 할아버지가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물 좀 가지고 오너라! 어서!”
나는 잽싸게 유리컵에 물을 채워서 할아버지에게 내밀었다. 할아버지는 내 손에서 유리컵을 낚아채듯 잡더니 순식간에 컵을 비웠다.
텅 소리를 내며 유리잔을 내려놓은 할아버지가 숨을 고르고 고승주를 불렀다.
“고 실장!”
“네, 회장님.”
“태현그룹에서 하동 제철소 공사에 묶어둔 돈 빨리 알아보라고 해! 그쪽 유동현금도 파악하고! 장호건이도 숨겨놓은 돈 있는지 알아봐!”
고승주와 할아버지의 대화를 듣고서야 견적이 나왔다. 멀거니 손 놓고 당할 수는 없지.
***
해동그룹 수뇌부에 초비상이 걸리게 만든 두 인간 중 한 명인 장호건.
그는 지금 성의원 집무실에서 이수한을 비롯한 자신의 참모들과 아도그룹 인수 작업을 챙기고 있었다.
“자금 문제는 없겠지?”
“네, 회장님. 다음 달 초에 니콘, 도쿄 일렉트론과 맺은 반도체 설비 계약을 해지하고 자금을 들여올 겁니다. 양쪽 모두 계약에 따라 설비 생산도 안 했고 커미션 조로 위약금도 받을 테니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닐 겁니다.”
“신성물산 반도체 재고 처리는?”
“순조롭습니다. 지난 엔고투기 때 우리 측에서 만든 비자금을 투자받은 해외 바이어들에게 떠넘겨서 현금화할 계획입니다. 시장가보다 20퍼센트 싸게 파는 게 걸리지만 재고처리 차원에서 불가피했다고 보도 자료를 배부하겠습니다.”
임원들의 보고를 듣고 장호건이 이수한에게 물었다.
“설비 계약 해지하고 반도체 재고 처리하면 얼마나 되지?”
“1조 5천억 원까지 준비될 겁니다. 자금은 충분합니다, 회장님.”
이수한의 대답을 듣고 장호건이 흡족한 표정을 띠었다.
“초격차 전략 덕분에 재미 좀 봤군, 흐흐.”
“그런 셈이죠. 다들 우리가 반도체에 올인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흐흐.”
“그렇지. 장기적으로는 그렇게 할 생각이지만 먹을 수 있는 건 먹어둬야지, 으하하.”
장호건은 통쾌하다는 표정으로 호탕하게 웃었다.
반도체에 대한 자신의 애착이 크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초격차 전략을 명분으로 1조 5천억 원이나 되는 돈을 숨겨놓지 않았나? 아도그룹의 모기업인 아도자동차 인수를 위해서.
자금을 숨겨놓느라 날릴 돈이 자그마치 3천억 원이지만 장호건에겐 안중에도 없었다. 공적자금 투입으로 환골탈태할 아도그룹의 모기업인 아도자동차만 인수하면 신성물산 자동차사업본부를 살릴 수 있지 않은가? 합병이라는 방법으로.
“정치권하고 은행 놈들, 확실히 서포트하겠지?”
“예, 회장님. 정치권에서도 한고그룹 사태를 시작으로 다른 재벌들이 무너져서 흉흉해진 여론에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은행 놈들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아도그룹 대출 회수 타이밍을 재고 있었고요.”
분위기 만드는 놈들도, 돈 대주는 놈들도 모두 아도그룹과 금석호, 그 밑의 떨거지들을 놔버렸다. 장호건을 막을 장애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장호건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사업도 사업이지만 이수한은 알고 있을지언정 다른 참모들은 모를, 먼저 간 친구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으니 말이다.
충분히 흥분되고 기대되는 일이었지만 신성그룹의 회장이기에 장호건은 음흉한 미소로 그 감정을 감췄다.
“우리 호민이··· 한고제철 인수한다고 지 손으로 키운 석유화학까지 담보로 잡히고 돈 꿨는데 내가 아도자동차 인수하는 거 보면 울화병 걸려서 죽겠어, 흐흐.”
“그거야 장 부회장 사정이지요. 이번 기회에 아도자동차와 아도그룹만 합병하면 자동차 사업도 살리고 중공업 분야 확장도 순조로울 겁니다, 흐흐.”
이수한으로서도 간절히 원하는 일이었다.
장호건이 거느린 계열사가 많아지고 커질수록 장호건의 최측근인 자신의 위상도 높아질 일이 아닌가? 장호건이 그토록 자동차에 매달리는 이유를 이해하기에 인간적으로도 지지하고 있었다.
“오늘부터 시작하지. 방송쟁이, 신문쟁이, 은행원, 금뱃지, 판검사 가리지 말고 접촉해. 술이든, 돈이든, 여자든 넣어줄 수 있는 건 다 넣어서 아도그룹 흔들어.”
죄다 이 나라에서 한다하는 파워 엘리트들이지만 장호건에게는 장기판에서 부리는 말에 불과하다. 그의 선친 장병호가 그랬던 것처럼.
***
장호건이 팔을 걷어붙이고 본 게임에 들어갔을 때, 태현그룹 또한 아도그룹 인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확실하냐?”
“네, 회장님. 제철소 공사 자금 회수하고 계열사마다 갹출하면 1조 5천억 원은 만들 수 있습니다.”
태현그룹 회장실 소파 상석에 앉은 명진호 태현그룹 회장.
그는 장남이자 태현자동차서비스, 태현정밀, 태현개발의 대표이사인 명선구의 자신 있는 대답을 듣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됐다. 그만하면 우리가 아도자동차를 인수하는 데는 문제없겠어, 으허허.”
명진호가 입이 찢어질 것처럼 껄껄 웃었다.
태현그룹이 국내 자동차 시장의 7할을 차지할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독과점’만큼 사업가들에게 매혹적인 마약이 없으니 그 마약은 술담배를 멀리해온 명진호도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동 제철소 계획을 변경하길 잘했습니다, 회장님. 대한제철에 경고장도 날리고 아도자동차도 인수하게 됐으니까요, 흐흐.”
명선구는 하동 제철소 공사를 강조하며 음침하게 웃었다.
명선구가 밀어붙인 하동 제철소 건설은 철강 수요가 많은 태현그룹이 대한제철에 고개를 숙이며 강판을 사와야 하는 꼴이 싫어서 준비한 사업이었다.
그러던 중 작년 가을부터 명동 사채시장에 돌기 시작한 아도그룹 문제를 듣고 명선구는 계획을 변경했다. 급조한 계획이지만 제철소 사업권도 손에 넣고 아도자동차도 인수하게 됐으니 곰 같다는 자신의 평가를 높일 절호의 기회였다.
“암, 그렇고말고. 제철소 부지가 도망가는 것도 아니니 고로는 나중에 올려도 돼. 하지만 아도자동차 같은 매물은 두 번 다시 안 나올 테니 그거부터 잡아먹어야지, 으흐흐.”
“그렇습니다, 회장님. 공적자금까지 듬뿍 끼얹어서 인수하면 더더욱 탐스러운 매물이 될 겁니다, 흐흐.”
명진호, 명선구를 비롯한 임원들이 껄껄 웃었지만 단 두 명만 웃지 못했으니 명세호 태현자동차 회장과 그의 아들 명선규 태현자동차 사장이었다.
태현그룹 계열사들이 나서서 아도자동차를 인수하고 그 아도자동차를 태현자동차와 합병하면 자신들의 지분이 대폭 줄어드니 태현자동차 경영권을 뺏길 건 불 보듯 빤한 일.
그렇다고 그룹이 클 수 있는 기회를 대놓고 반대할 수도 없으니 두 부자는 속이 타들어갈 것 같았다.
***
선해철에게 부탁해서 무기한 휴가를 낸 나는 집에 틀어박혀서 머리를 쥐어짜내고 있었다. 장호건 이 인간이 무슨 돈이 있어서 아도그룹을 자빠뜨리려는지, 돈이 있다면 얼마나 되는지.
5분 내내 끙끙거리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되겠어.”
내 철칙 중 하나가 5분 이상 고민해서 답이 안 나오면 깔끔하게 접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태현그룹이든 장호건이든 생각 없이 일을 치를 인사들이 아니니 최악을 상정하고 아도자동차 인수합병을 준비하는 게 효율적이었다.
“아도자동차라···.”
좋은 회사다.
분식회계 3조 원을 포함한 부채만 11조 원 가까이 되지만 임직원 5만 명, 매출 약 14조 원의 아도그룹의 지주회사이고 국내 2위의 자동차회사니까.
그런 아도자동차 인수합병의 ABC는 정해져 있다.
대규모의 기존 주식 감자(減資).
공적자금 투입을 통한 부채탕감과 출자전환.
이 계획은 전생에 태현그룹이 아도자동차를 인수할 때 써먹었던 방법이다.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탤 생각이었다.
“아도자동차 주식 전량 매수···.”
말끝을 흐리던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예전이었으면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깎으려고 꼼수를 썼을 텐데 이제는 모든 주식을 거둬들일 생각부터 하고 있다니···.
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해내야 한다.
한고그룹 인수전에서도 드러난 ‘압도적인 지배력’이라는 할아버지의 경영철학을 완벽하게 만족시킬 기회다. 후계자의 자격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다.
여기에 자동차에 대한 애착이 강한 장호건이 나를 탐내게 만들 기회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아도자동차 주식 100퍼센트를 우리 집안이 집어삼켜야 한다.
가능성이 아주 없는 계획도 아니다.
할아버지와 금석호 아도자동차 회장의 친분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기대를 거는 것은 할아버지, 아버지를 거쳐 내가 물려받은 아도자동차 대형세단이 1호차라는 것이다.
푸조에서 부품을 수입해 조립했어도 1호차의 상징성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런 1호차가 우리 집안에 있는 걸 보면 두 분의 친분관계가 보통 이상일 터. 내부협력을 얻어낼 가능성도 높다.
여기에 해동종금은 작년에 아도그룹에 물린 어음 2천억 원을 아도자동차 채권 2천억 원으로 바꿨다.
그 채권을 주식으로 출자전환하면 적어도 5퍼센트는 손에 넣을 수 있다. 3퍼센트만 넘어도 회계장부열람을 청구할 수 있으니 내부정보에 접근할 법적 권리도 확보된다.
남은 건 내 동업자들의 찬성여부다. 나는 곧바로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