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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115화 (114/229)

115화. 33rd. 겨울과 봄, 시작과 끝의 경계선에서 (7)

눈을 깜빡거리는 나를 보며 장하연이 피식 웃었다.

“어머니 쪽에서 트집 못 잡게 해야지. 안 그래?”

역시나였다. 사이즈는 다르지만 나와 우리 집안이 엔고투기 때 신성, 태현, GK를 방탄조끼 삼으려고 끌어들인 것처럼 장하연도 장용재, 장수연, 장민재를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얼마나 끌어들일 거야?”

“지금 환율이 달러 당 900원이니까···.”

손을 꼽던 장하연이 고개를 들었다.

“60만 불씩만 끌어들이자. 괜찮지?”

그녀의 제안을 받고 나도 잠시 머리를 굴렸다. 지금 내 계획대로 될 때 거둬들일 수익률, 그리고 그놈들이 먹어도 괜찮을 최대치가 어느 정도일지.

부지런히 머릿속 계산기를 두들기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콜. 딱 거기까지만 끌어들이자.”

푼돈 불려주고 우리 총알받이가 될 꼴을 생각하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나와 장하연은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

집에 돌아간 장하연은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가 서재 문 앞에 섰다.

똑똑 노크 소리에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를 감상하던 장호건은 황급히 TV를 끄고 서류철을 펼친 뒤, 문을 향해 외쳤다.

“누구냐?”

장호건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묻어났다. 몇 안 되는 취미생활을 방해받았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나?

[하연이에요, 아버지.]

하지만, 문 밖에서 들리는 큰딸의 목소리에 장호건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들어와.”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장하연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성민이하고 만났는데···.”

데이트 때 의논한 얘기를 들려주자 장호건이 탄성을 흘렸다.

“호오, 그래?”

“네. 해동증권 홍보에 도움 좀 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원금은 전부 보장해주겠다고 했어요.”

“흐음···.”

장호건이 가벼운 침음성을 흘렸다.

주식선물을 포함한 주식 파생상품이 위험한 투자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수한에게서 보고 받은 정보에 따르면 해동증권에서 홍콩 지점으로 보낸 스무 명은 1년이나마 스탠더드 캐피털에서 연수를 받고 돌아온 수준급의 인재들이다.

세계금융의 심장인 월가에서 단련된 인재들이라면 큰 수익을 내지는 못해도 원금을 까먹지는 않을 게 확실했다. 장호건으로서는 딸내미의 혼사를 도울 수도 있는 일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알았다. 용재, 수연이, 민재 명의로 애비가 5억씩 증여해주고 해동증권에 넣도록 하마.”

“고마워요, 아버지.”

장하연의 얼굴이 환해졌다. 세 남매의 코를 꿰어놓을 뿐만 아니라 이성민에게도 점수를 딸 기회가 아닌가? 장호건은 그런 딸의 속도 모르고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고맙긴. 너한테도 한 재산 뚝 떼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아버지. 예전에 저 믿고 돈 빌려주신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장하연이 반색하며 겸손을 부리는 모습에 장호건은 그녀를 더 애틋한 눈길로 바라봤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똑 닮은 딸이 오늘 따라 더 안쓰럽고 기특하기만 했다.

“고맙다, 하연아. 어여 가서 쉬거라, 허허.”

“네.”

다음 날 아침.

장호건은 식사를 마친 뒤, 숭늉을 마시고 어제 결정한 일을 온 가족들에게 알렸다.

“아버지?”

“아빠?”

장용재, 장민재, 장수연은 아버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푼돈이긴 하지만 그룹 밖으로 돈 나가는 일을 질색하는 양반이 해동증권에 자기들 명의로 돈을 맡기겠다니?

“그쪽 사람들, 월가에서 트레이닝 받고 온 사람들이다. 너희들 돈 넣어보고 실력이 좋으면 애비가 스카우트 할 것이야.”

장호건의 이어지는 설명을 듣고서야 세 남매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장하연도 장단에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증여세는 깔끔히 처리해줄 테니 애비가 하라는 대로 해.”

“네, 아버지.”

그렇게 집안 내부에서 첫 망치질을 마친 뒤, 성의원에 출근한 장호건은 이수한을 불러서 장하연의 부탁대로 지시를 내렸다.

“해동증권에요?”

“문제라도 있나?”

장호건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이수한이 재빨리 대답했다.

“아닙니다, 회장님. 그런데 왜 갑자기···?”

“우리 딸내미 혼삿길 도와줘야지. 내년이면 서른인데 언제까지 두 아이 밍기적거리는 거 볼 수는 없잖나?”

이수한은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그룹의 3세들이 소액이나마 해동증권에 투자금을 맡긴다면 충분한 홍보 소재가 될 수 있다.

신성그룹으로서는 손해 보는 일이지만 주식 파생상품이 대박을 내기 어려운 상품이기도 하고 그 돈을 깡그리 날려도 장하연과 이성민의 혼인이라는 커다란 ‘사업’에 비하면 15억 정도는 장호건이 얼마든지 던질 수 있는 돈이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해동증권에 연락해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게.”

***

“그래요, 이 실장. 이거, 장 회장님께 신세 진 것 같아서 참으로 고맙고 송구스럽게 됐소. 그래요. 우리 쪽 사람들한테 일러둘 테니 돈만 넣어주시오.”

소파 옆에 있는 전화기에 수화기를 내려놓고 조영찬이 날 보며 껄껄 웃었다.

“이 이사 자네, 정말 지독하구먼. 흐흐.”

“과찬이십니다, 대표님.”

조영찬은 겸손을 떠는 나와 함께 밀크티를 마셨다. 설탕을 별로 안 넣은 밀크티였지만 오늘 따라 밥숟가락으로 한가득 부어넣은 것처럼 달달했다.

“장 씨 것들을 죄다 수족 부리듯 하다니··· 장병호 그 영감이 지하에서 통곡하겠어, 으하하.”

“별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요, 후후.”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은 조영찬이 호탕하게 웃었고, 나 또한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대한민국 재계를 쥐고 흔들던 장병호 신성그룹 초대 회장.

매년 제사 때마다 날 개고생하게 만들었던 그 장병호는 조영찬의 말대로 지하에서 땅을 치고 대성통곡할 게 분명했다. 분을 참지 못해 두 번 죽을 만큼.

“덕분에 총알이 보충되겠군. 선물시장에 넣었던 돈이 1억 달러로 줄어들었다고 죽을 맛이라던데 1억 불이 추가되면 든든해지겠어, 하하.”

“우리 대신 뛰어주는 플레이어들인데 총알 걱정은 줄여줘야죠. 외부 변수 때문이라도 부담이 클 테니까요.”

박태진의 보고에 따르면 1,2월까지만 해도 고만고만하게 움직였던 홍콩 증시는 홍콩 반환 문제가 불거지면서 12,489포인트까지 떨어졌다.

그 바람에 민주형과 주승빈을 비롯한 모두가 자기 돈 잃은 것처럼 눈에 불을 켜고 복구할 방안을 찾느라 밤잠도 줄여가며 일한다고 하던데 그만한 책임감을 가진 인재들과 오래도록 함께 가려면 1억 불이 아깝지가 않았다.

담담한 목소리로 낸 내 대답에 조영찬이 웃음을 흘렸다.

“오히려 지금 같은 경우에는 더 사들일 기회일 수도 있겠지. 홍콩 반환 문제는 영국이나 중국 모두 이해관계가 얽혀있으니 말이야.”

“투자자와 투자처의 관계 때문이겠죠?”

조심스럽게 묻자 조영찬이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영국 경제를 돌리는 건 금융인데, 중국만큼 매력적인 투자시장이 어딨겠나? 앞으로도 꾸준히 성장할 텐데. 중국도 홍콩을 반환 받으면 영국이나 미국, 다른 선진국 자본을 끌어들일 창구가 하나 더 생기니 잘 해결될 게야.”

조영찬이 내놓은 해답은 매우 명쾌했다. 곁가지를 전부 쳐내고 본질만 딱딱 짚어내는 걸 보면 할아버지가 형제처럼 대하고, 나와 손발이 척척 맞을 거라 말한 이유가 차고 넘치는 양반이었다.

껄껄 웃으며 차를 마시던 조영찬이 찻잔을 내려놨다.

“자네, 정말로 홍콩 증시에서 옵션까지 돌리게 할 건가?”

“물론이죠. 총알이 불어나면 배당이 더 좋은 판으로 들어가야 겜블러 아니겠습니까?”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지만 조영찬은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내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 이번 기회에 해동종금과 해동증권을 대들보로 만들 작정이었구먼.”

“열심히 물건 만들어서 세계 곳곳에 팔아도 금융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번 기회에 그 사람들의 경험치를 쌓는 건 물론이고 더 큰 수익을 내서 제조와 유통을 뒷받침해야 합니다, 대표님.”

현대 자본주의에서 제조와 유통, 금융은 한 몸이나 마찬가지. 일본의 소니가 신성과 GK에게 밀려나는 와중에도 되살아난 밑바탕이 금융자회사인 소니 파이낸셜이라는 걸 알면 비금융과 금융의 분리는 얼치기들의 소리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금산분리를 종교처럼 떠받드는 정치꾼, 공무원들이 이 나라에 득실거리니 내가 지배하는 해동종금과 해동증권을 키우고, 나와 스탠더드 캐피털이 그룹 계열사들의 보증을 서야 한다. 기술개발 트렌드라면 모를까 디테일에 약한 나로서는 총알을 받쳐주는 게 최선이니까.

“역시 그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지. 돈 앞에 장사 없는 법이니까.”

“네, 대표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떠올리던 나는 조영찬의 대답을 듣고는 머릿속에 펼쳐진 청사진을 얼른 접고 그에게 대답했다. 조영찬은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딴 생각하고 있었구먼, 이 이사.”

“아하하··· 죄송합니다, 대표님.”

어색하게 웃는 내 모습에도 조영찬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지. 자네처럼 젊은 친구라면 맘껏 상상하는 게 좋아. 천운이 따르는 자네라면 더더욱 큰 그림을 그리고 착실히 앞으로 나아가야지, 하하.”

감사합니다, 대표님.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해동금융그룹 초대 회장으로는 반드시 대표님을 모시겠습니다.

라는 말을 숨긴 채 나는 조영찬과 마주보며 차를 마셨다.

***

1997년 올해의 봄은 잔인한 달이었다.

매일 아침과 밤에 틀어주는 뉴스를 봐도 오늘은 어디가 부도났다, 어디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는 뉴스가 태반이었다.

보다보다 질려버린 나는 TV 시청을 그만두고 방에 틀어박혀서 스탠더드 캐피털에 주문해서 받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이번의 위기를 넘기고 새 판을 짜는 데 골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박태진 없이 혼자 지키고 있는 이 집에서 주말 아침부터 오성식품의 3분 카레를 데워먹고 방으로 후다닥 올라가서 지금까지 내가 세운 계획을 점검했다.

“흐음···.”

서류를 덮고 책상에서 일어난 나는 침음성을 흘리며 벽 한 쪽에 걸어놓은 전지(全紙)를 바라봤다.

그 커다란 종이에는 내가 구상하는 미래의 해동그룹 지배구조와 사업군이 그려져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미쳤다고 손가락질 할 그림이지만 나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거 참···.”

볼수록 헛웃음이 나왔다.

전생에는 신성그룹의 지배구조 때문에 골머리를 싸매는 일이 많았는데 이제는 지배구조를 먼저 짜놓고 회사를 인수하거나 사업을 키우겠다니··· 두통을 달고 살게 만든 회사일이 이제는 레고블록 맞추는 것처럼 변해서 기분이 묘했다.

이 그림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신성그룹은 갈가리 찢어지고 우리 집안에 흡수될 것이다. 신성의 간판까지 몽땅 떼어버려서 신성이라는 기업이 1등이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나 찾아보게 만들 것이다.

전지를 보며 각오를 다지던 중 밖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1층으로 내려간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네, 이성민입니다.”

[할애비다. 오늘 정오에 한고그룹 인수입찰 발표할 거라는데 삼청동 넘어와서 볼 텨? 으허허.]

“할아버지 웃으시는 거 보니까 안 봐도 될 것 같은데요? 흐흐.”

능청을 떨며 튕기자 할아버지의 큰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예끼, 이놈아! 마지막 히든 깔 때까진 모르는 거다. 잔말 말고 넘어와서 할애비하고 밥술 떠. 이런 건 실시간으로 봐야 재밌는 게야, 흐흐.]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시간 맞춰서 갈게요.”

[오냐, 허허.]

전화를 끊고 하던 일을 마저 하던 나는 약속시간에 맞춰 삼청동으로 들어갔다. 주차장에 세워진 차들을 보고 알았지만 나는 기존의 그룹 수뇌부에 중공업 계열사 사장단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서재로 올라갔다.

“확실히 해뒀겠지?”

“예, 회장님. 한고건설, 한고에너지, 대동조선, 상하제약 모두 자산부채 이전 방식으로 인수할 예정입니다. 인수주체는···.”

질문을 하는 할아버지나 대답을 하는 고승주, 두 사람의 문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장단들은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단 한 주의 주식도 희석되는 걸 막으려고 한고건설은 해동건설, 대동조선은 해동중공업, 한고에너지와 상하제약은 해동물산에서 모든 자산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인수하다니···.

그 모든 인수합병에 쓴 돈이 겨우 3천억 원이었다. 빚이 절반이라도 1조 가까운 자산과 수천 명의 임직원들을 해동그룹에 붙이는 비용이 겨우 3천억 원인 것이었다.

고승주의 대답이 끝나자 할아버지가 홍차 한 모금을 축였다.

“잘했다. 앞으로 요 몇 년간은 힘들겠지만 농사꾼의 마음으로 잘 가꾸도록 해. 회사가 커지는 만큼 자네들 재산도 뚠뚠해지고 명패도 무거워질 게야, 으허허.”

할아버지의 웃음소리에 모든 사장단들이 껄껄 웃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부채 5천억 원이야 해동그룹에게 아무 것도 아니어서인지 모두들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12시가 되었고, 말석에 앉아있던 나는 얼른 TV를 켰다.

[한고그룹 인수입찰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가격 요소와 비가격 요소 모두를 검토한 결과, 한고제철 인수협상자는 1조 원과 12억 달러를 부른 신성중공업-신성건설 컨소시엄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가장 큰 매물이 웬수 같은 놈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에도 서재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기분 나쁜 표정도 아닌 걸 보니 나머지 4개 계열사는 우리 그룹이 가져가는 게 확실한 듯했다.

[이어서 한고건설과 한고에너지, 대동조선, 상하제약의 인수입찰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가격 요소와 비가격 요소 모두를 검토한 결과, 이상 4개의 기업은 해동물산과 해동건설, 해동중공업에서 인수하게 됐음을 알려드립니다.]

“와아아!”

사장단 모두가 소리 높여 함성을 질렀고, 할아버지도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 또한 손발이 짜릿했지만 그도 잠시, 고승주는 급히 걸려온 전화를 받고 구석으로 걸어갔다.

“뭐?”

고승주의 입에서 터져 나온 단말마에 서재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고승주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그런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듯 서재 안에 묘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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