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33rd. 겨울과 봄, 시작과 끝의 경계선에서 (6)
얼마 뒤.
장호민은 선해철의 연락을 받고 자기 이름으로 전세를 낸 일식집에서 이명진을 만났다.
“잘 지냈냐?”
“잘 지내긴. 인수 준비하느라 마누라하고 애들 얼굴 못 보고 있는데.”
퉁명스러운 이명진의 대꾸에 장호민이 피식 웃었다.
“하여간 일에 꽂히면 앞뒤 못 보는 건 여전하네. 앉아서 밥부터 먹자.”
“그러지.”
장호민은 이명진의 어깨를 밀다시피 하며 자리에 앉히고 상에 깔린 회와 술을 먹었다.
“한고제철, 진짜로 인수할 거냐?”
청주를 비운 장호민이 잔을 내려놓고 묻자 이명진이 새삼스럽다는 눈매로 쳐다보며 대꾸했다.
“가짜로 인수할 줄 알았냐? 아버지께서 제철에 건설, 에너지, 조선, 제약까지 전부 챙겨오라고 난리다.”
그 말을 듣고 장호민은 혀를 내두르며 탄성을 흘렸다.
“햐아, 아저씨 진짜 무서운 분이네. 10여 년을 누워계시더니 회춘하셨냐?”
“칩도 넉넉한데 못 낄 이유 없지. 나도 성민이 나이 차면 슬슬 분가할 준비해야 하니까 이번에 밑천 마련해서 챙겨주시려는 것 같다.”
이명진이 지나가듯 집안 사정을 흘리고, 술잔을 비웠다. 그와 달리 장호민은 젓가락으로 집은 회를 입에 넣다 말고 앞접시에 내려놨다.
“분가?”
“그래. 원래대로였으면 형이 물산, 종금 가져가고 내가 중공업 가져가기로 했으니까 분가하는 게 맞지.”
“그럼, 계열분리라도 하겠다고?”
“못할 것도 없지? 해동물산에서 중공업 계열사 지분에 해동물산 현금 일부만 떼어내서 분리하면 되니까. 지금이라도 분리할 수 있긴 한데 언제 하실는지 모르겠다.”
장호민은 이명진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쩌면 협상이 먹힐 것 같았다.
“그럼 우리, 협상하자.”
“무슨 협상?”
“이거부터 봐봐.”
장호민은 잽싸게 자기 뒤에 뒀던 가방을 열고 서류철 하나를 꺼내 이명진에게 내밀었다.
“이게 그 협상?”
“그래. 넘치지는 않아도 부족하지도 않을 거다.”
자신만만한 장호민의 표정과 달리 이명진은 뚱한 표정으로 서류철 표지를 펼쳤다. 자신이 이번에 챙겨야 할 게 뭔지 정확히 알고 있는지라 계속해서 장호민에게 진실과 거짓을 뒤섞어서 말했고, 협상이 끝날 때까지 구라를 쳐야했다.
내용을 살펴보던 이명진이 점점 입꼬리를 올렸다. 장호민 또한 자신이 큰맘 먹고 던진 떡밥이 먹히는 걸 보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지막장까지 꼼꼼히 살펴본 이명진이 서류철을 덮고 옆자리에 내려놨다.
“이걸 다 지키겠다고?”
“그렇다니까? 뭐, 납품가격은 조금 낮아도 10년짜리 거래면 회사 자금흐름에는 도움될 거 아니냐? 한고제철 부산공장이야 너희 후판공장 옆이니까 연결성도 좋고.”
큰맘 먹고 내민 제안에도 이명진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숙이는 걸 보고 장호민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4년 전만 해도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저놈을 구워삶아놓지 못하면 내전이 힘겨워질 가능성이 높았다. 고로 공사 과정에서 만들 비자금으로 신성전자와 신성물산 주식을 차명으로 사들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장호건의 뒤통수를 치려면 반드시 이명진을 한고제철에서 손 떼게 만들어야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명진이 고개를 들었다.
“콜.”
“콜?”
장호민의 동공이 커질 틈도 없이 이명진이 단서를 달았다.
“대신, 열연강판 공급가격은 국제시세의 90퍼센트. 부산공장 부지는 현 시세의 반절. 비자금으로 거래하는 건 불가.”
“야! 그건 너무···!”
장호민이 소리치자 이명진은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하나 더. 나머지 네 개 계열사 인수비용은 다 합쳐서 4천억. 채권단하고 쇼부 치는 건 우리가 할 텐데 넌 한고제철 하청업체 맡아.”
장호민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여력만 있으면 탐냈을 회사들을 단돈 4천억 원에 쓸어가겠다니!
장호민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이명진은 자신이 내줄 것을 알려줬다.
“그 건만 허락하면 네가 살릴 하청업체에 자금 수혈하는 건 해동종금에서 돕도록 하지. 살려야 할 업체는 우리 쪽에서 선정하고. 어때?”
“흐음···.”
장호민이 턱을 쓰다듬으며 침음성을 흘렸다.
거치적거리기는 해도 이대로 무너지면 한고제철에 타격을 줄 하청업체들이다. 그 업체들을 해동그룹에서 살려주겠다면 자금 부담이 줄어들 테니 장호민으로서는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콜.”
협상을 마무리한 두 사람은 표정을 풀고 술잔을 채웠다. 누가 남는 장사를 했는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었다.
***
이명진은 장호민과 헤어진 뒤, 나에게 전화를 넣고 삼청동으로 오라고 했다. 삼청동에 들어간 나는 할아버지, 이명진과 함께 차를 마시며 장호민과의 협상 이야기를 들었다.
“어떠냐, 조카야?”
“좋은데요?”
괜찮은, 그것도 아주 괜찮은 협상이었다. 알짜배기 계열사들을 4천억에 가져오고 해동종금의 잠재적 우량고객들이 될 협력업체까지 확보했다니?
우리가 한고제철을 인수해서 되살리면 하청업체들도 살아날 테니 살릴 업체들을 선정하는 권리를 우리가 가져온 것까지 완벽했다.
이명진이 새롭게 보였다. 죽으나 사나 기술에 매달리던 양반이라지만 이런 딜을 만들어낸 걸 보니 할아버지 아들이라는 건 속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거 봐라. 네 장조카도 좋아할 거라 하지 않았느냐? 에잉, 쯧쯧.”
“아이고, 아버지. 그래도 해동종금은 성민이 회사인데 의견은 들어봐야죠, 하하.”
혀를 차던 할아버지는 이명진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인자는 부회장 됐다고 한 마디도 안 지는구나, 으허허.”
“아닙니다, 아버지.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하하.”
한 차례의 주고받는 칭찬과 겸손이 끝나고 할아버지가 편안한 표정으로 홍차 한 모금을 축였다.
“이걸로 우리가 챙길 건 다 챙긴 것 같다. 정치꾼, 채권단 만나는 건 고 실장하고 명진이 네가 해. 동양일보 조 사장한테 전화 한 통 넣으마.”
“네, 아버지.”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할아버지가 전화를 걸었다.
“아, 조 사장? 이번에 나온 회사들 중에서 우리 집안이 괜찮은 거 몇 개 건지려고 하는데···.”
조국일보 2중대였던 동양일보가 이젠 우리 집안의 스피커 노릇을 하다니··· 세상 참 오래, 아니 두 번 살고 볼 일이었다.
***
다음 날 아침.
[해동그룹, 한고그룹 계열사 인수 의사 밝혀
해동그룹 이대수 회장과 이명진 부회장은 대한민국 경제에 암운을 드리운 한고사태의 수습을 위해 최소 4개 사에 대한 인수의사를 밝혔다. ···다만 한고제철은 그 규모가 크므로 신중히 검토를 하고···.]
회의실 상석에 있던 장호민은 자신이 보고 있는 기사가 보이게 접은 오늘자 동양일보를 탁자 한가운데에 툭 던졌다.
“이 정도면 확실하겠지?”
선문답 같은 질문이었지만 임원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동양일보에 박힌 기사는 해동그룹이 장호민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사인이 아닌가?
“네, 부회장님. 해동그룹이 빠져준다면 한고제철 인수는 수월해질 겁니다.”
“이렇게 되면 12억 달러 외화대출은 몰라도 원화로 지불할 부분은 8천억 원까지 줄일 수 있을 겁니다.”
대답한 임원들이나 대답을 들은 장호민 모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난적 중의 난적인 해동그룹이 선을 그어준 덕분에 한고제철이라는 매물을 손에 넣게 되지 않았나?
“하늘이 도우셨습니다, 부회장님. 잘못했으면···.”
“신성생명 주식까지 죄다 담보로 잡혀야했겠지.”
장호민은 최악의 경우까지 치달으면 자신과 자기 계열의 돈줄 중 하나인 신성생명 주식까지 담보로 잡힐 작정이었다. 불도저로 막아야 할 걸 가래로 막은 셈이니 장호민과 휘하 임원들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내일 협상할 테니까 오늘까지 우리 측 제안 정리해.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적당히 시간 끌다가 못 이기는 척하고 맞춰주고. 해동그룹에 진 빚은 내전을 끝낸 뒤로 미룬다.”
“예, 부회장님!”
장호민의 지시에 임원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
다음 날 아침.
양쪽 실무진들은 인천항의 한 요트 안에서 탁자 하나를 마주보며 협상을 시작했다.
“우리 해동그룹에서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국제 철강시장에서 열연강판의 시세 전망은···.”
“무슨 소립니까? 우리 쪽에서 알아본 자료에는 그거보다 10퍼센트 이상 비싸요! 그리고 시멘트, 철근, H빔 가격은···.”
양쪽은 물러섬이 없었다. 온갖 그래프와 숫자로 뒤덮인 자료들을 들먹이며 목소리를 높이는 건 기본에···
“당신, 학교 어디 나왔어! 나, 서울대 경제학과 나왔어!”
“서울대 경제학과면 다야! 너, 회삿밥 몇 년 먹었어!”
가방끈은 말할 것도 없고 부모님, 조상님까지 들먹이며 멱살까지 잡길 수차례나 반복했다.
하지만.
양쪽 모두 알고 있었다.
오랜 동면을 깨고 비상하는 해동그룹이고, 대한민국의 3대 재벌로 군림하는 신성그룹이기에 자존심과 자부심, 오너들을 향한 충성경쟁 때문에 시간을 끄는 것임을.
때문에 그들은 점심시간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식사를 했다.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었다.
“고생하십니다? 흐흐.”
“고생은 무슨. 우리 같은 머슴들, 윗분들한테 잘 보여야 더 올라가지는 못해도 회사에 붙어 있을 거 아뇨? 흐흐.”
양쪽 협상 실무진 대표들은 커피 한 잔에 담배를 태우며 직장인들의 동병상련을 위로해줬고···
“장 부회장님 쪽에서 넘겨주신 정보 덕분에 파나마 건이 쉽게 풀렸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하하.”
“별 말씀을. 우리도 사정이 사정인지라 넘겨드렸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하시니 다행입니다, 하하.”
이해관계가 맞물려서 사업적인 일로 합이 맞았던 것에 대해 감사인사를 주고받기까지 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끝났고, 설전을 거듭하던 양측 실무진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 발짝씩 물러서며 조율을 시작했다.
그 결과, 아침부터 시작된 협상, 아니 충성경쟁은 저녁 7시쯤이 돼서야 끝났다.
“어쩔 수 없군요.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지.”
“그럽시다. 가장 좋은 협상은 양쪽 모두 반절씩만 만족하는 협상이니까.”
양쪽 실무진 대표들은 귀빈실에 있던 이명진과 장호민에게 찾아가서 ‘계약서’라는 이름의 충성경쟁 결과를 내밀었다.
“흐음···.”
두 사람은 각자가 받아본 최종계약서를 살펴보고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자신들이 정해놓은 틀 안에서 더 이상 충성경쟁을 시키는 건 시간낭비에 불과했다.
“이 정도에서 끝냅시다, 장 부회장.”
“그럽시다, 이 부회장.”
무게를 잡으며 합의를 한 두 사람은 곧바로 탁자에 각자가 들고 있던 계약서들을 딱 붙여서 놓고는 한 장씩 돌아가며 가운데에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동그룹 부회장과 신성그룹 부회장의 도장이 순서대로 찍혔고, 마지막 장 하단의 서명란에 각자의 서명을 하고 도장까지 찍고서야 두 사람은 한 부씩 각자의 실무진 대표들에게 내밀었다.
“수고했어.”
“수고했네.”
이명진과 장호민이 각자의 측근들을 다독이며 계약서를 건넨 것을 끝으로 밀약이 체결됐다. 훗날 서로의 뒤통수에 칼을 박아 넣겠다는 속내는 숨긴 채.
***
이명진과 장호민 간의 밀약이 체결되고 얼마 뒤.
해가 바뀌어 1997년이 됐지만 해동그룹과 신성그룹 중화학 계열은 여전히 한고그룹을 두고 아옹다옹했다.
양쪽 모두 앞에서는 신문사들을 내세워 날 선 발언을 주고받았지만 뒤에서는 손을 잡고 여야 유력 정치인이나 은행장들을 상대로 인수가격을 후려치고 있었다.
두 재벌이 앞 다르고 뒤 다른 모습을 보이며 검은 거래들을 수없이 진행하는 사이, 한고사태라는 먹구름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어제 삼민그룹 부도난 거 들었어?”
“특수강에 무리하게 투자했다가 망한 거잖아. 우리도 미국 본사 지시 받고 자금 계획 다시 짜는 중이야, 누나.”
저녁시간에 맞춰 모처럼만에 미사리 카페에서 식사를 마친 우리도 그 먹구름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삼민그룹 사태가 뭔지도 몰랐겠지만 재벌가 사람들로서 이를 걱정하지 않으면 멍청이였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장하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한고그룹이 무너진 것도 충격이었는데···.”
“솔직히 재계 어른들 중에 제대로 회사 키운 분들이 몇이나 돼? 대부분 부채비율이 기본 사오백퍼센트잖아. 우리 집안이나 우리 외가, 신성, 태현, SG 빼고.”
해동그룹 부채비율은 많아봐야 이삼십 퍼센트 남짓이지만 신성, 태현, GK, SG조차 300퍼센트가 넘는다. 퉁명스러운 내 대꾸에 장하연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말없이 차만 마시던 나는 장하연에게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제안 하나를 던졌다.
“누나, 돈 얼마나 있어?”
“350억. 너희 회사 CMA에 들어있어.”
참으로 알뜰한 여자였다. 타이타닉에 투자한 2천만 달러를 감안해도 380억 원을 재작년부터 해동종금 CMA에 넣었다는 걸 고려하면 20억도 안 쓴 게 아닌가?
“너는?”
“500억.”
“그렇게나 줄었어?”
“쓸 데가 많았거든. 트라이엄프에 돈 맡기고, 상속세 연부연납 내고, 해동증권 세울 때 돈 대고, 타이타닉 투자까지··· 하하.”
말끝을 흐리던 나는 깜짝 놀란 장하연을 보며 겸연쩍은 웃음을 흘렸다. 돈이 늘어나면 뭐하나? 돈 쓸 곳이 더 많아졌는데.
잠시 말없이 커피를 마시던 나는 장하연에게 말했다.
“누나, 이번에 해동증권 홍콩지점에서 돈 굴리고 있는데 2천만 달러만 투자할래?”
“너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눈을 반짝이는 게 내가 걸 돈에 맞춰서 결정할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5천만 달러. 성문이, 성우, 성아한테도 천만 달러씩 더 끌어오려고 해.”
이번 기회에 국내용 내 주머니에 장하연과 사촌동생들 재산까지 뚠뚠하게 불려놔야겠다. 몇 년 안 있으면 이명진도 계열분리를 피할 수 없으니 최대한 많은 실탄을 장전해놔야 사촌동생들도 상속에 부담이 덜할 테니까.
잠시 고민하던 장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좋아. 그런데···.”
잠시 말끝을 흐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용재, 수연이, 민재 돈도 조금씩 끌어들이면 좋겠어.”
“응?”
가장 웬수 같은 인간들을 끌어들이자니···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