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33rd. 겨울과 봄, 시작과 끝의 경계선에서 (5)
잠시 쉬는 시간이 되자 이명진이 밖으로 나갔고, 그 뒤를 장호민이 따라나섰다. 이명진이 흡연실에 들어가 불을 붙였고, 장호민도 따라 들어가서 그를 노려봤다.
“야, 이명진! 너 미쳤어?”
눈에서 불길이 치솟은 장호민과 달리 담배 한 모금을 빨던 이명진은 무심한 눈길로 응대했다.
“뭐가?”
“한고제철! 하청업체까지 살리자는 게 말이나 돼? 지금 나 엿 먹이자는 거야, 뭐야!”
“하청업체 없으면 어떻게 대기업이 돌아가? 숨은 붙여놔야 할 거 아냐! 그럴 각오도 없이 질렀어? 한심하긴!”
장호민의 고함소리를 맞받아친 이명진의 일갈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버지, 우리 집안이 유한양행처럼 완전무결하진 않더라도 사람이자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명진은 전경련회관에 오는 길에 도의적인 책임과 사업적 실익을 근거로 건실한 계열사 몇 개와 건실한 하청업체들은 반드시 살려야 한다고 이대수와 고승주를 설득했다.
[부회장 생각이 그렇다면야··· 고 실장, 자네 생각은 어떤가?]
[지난 몇 년간 초대 회장님의 숙원을 이룰 바탕은 충분히 확보됐습니다. 지금은 국내에서의 입지를 넓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회장님.]
세 사람의 합의에 따라 방금 전 회의실에서 해동그룹의 2세인 이대수, 3세인 이명진이 스플릿(split, ‘블랙잭’에서 숫자가 같은 카드 두 장을 나눠서 배팅을 두 배로 하는 것)을 한 것이었다. 살려야 할 사람들도 살리고 해동그룹에 뒤통수를 치려고 했던 장호민에게서 한 푼이라도 더 많은 판돈을 우려내기 위해서 말이다.
이명진은 머릿속에 떠오른 잠시 전의 일을 접고 장호민을 싸늘하게 쳐다보며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보아하니 한고제철 인수할 모양인데 그 다음엔 뭐 할 거냐?”
“무슨 소리야?”
장호민이 눈 하나 꿈쩍 안 하고 말했고, 이명진은 그런 장호민을 보며 또 한 번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였다.
“후우우, 후판은 고로에서 만든 열연강판으로만 만들 수 있지. 한고제철 인수해서 고로 올리면 후판 공장 만들고 우리 쪽 거래 끊으려는 거, 아니었냐?”
“내가 그런 치사한 짓거리까지 할 거라 생각해? 우리가 지금껏 해동제강 후판만 쓴 거 몰라서 그런 소릴 해?”
“네 성격에 고로 만들고 열연강판만 뽑는 데 퍽이나 만족하겠다, 흐흐.”
장호민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강변했지만 이명진은 비웃음을 흘리고 고개를 저었다. 장호민은 그런 이명진에게 숨겨둔 카드를 내밀었다.
“너희 후판 공장에서 쓸 열연강판은 우리가 공급해주지. 해동제강에서 만들 후판은 신성중공업에서 소화해주고. 어때?”
“풋! 지금 그걸 제안이라고 하냐?”
이명진이 터뜨린 짧은 웃음에 장호민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이명진은 그런 장호민의 시선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나지막이, 서늘하게 말했다.
“처음엔 해동제강에 열연강판 팔아주고 후판 가공 하청으로 쓰겠지. 그러다 대한제철과 해동제강 거래가 끊어지면 열연강판 공급 줄이면서 후판 가격 후려치고. 그래서 내가 못 견디면 마지못해 손 내밀면서 우리 공장 가져갈 테고! 아냐?”
이명진의 날카로운 추궁에 장호민은 속이 뜨끔했다. 자신의 한고제철 인수 후 계획을 손바닥 보듯 말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후판 가공은 너희 회사가 잘하는데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더 탐낼 거라는 거지! 후판 사업은 대한제철과 태현제강 빼면 우리가 최고니까!”
장호민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소리쳤지만 이명진 또한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다른 놈들이 덩치 불리기에 정신없을 때 해동그룹은 연구개발과 생산효율 향상에 집중했다. 해동제강 또한 규모는 작아도 기술력, 생산성 모두 뛰어났기에 장호민은 입도 뻥긋 못하고 이명진을 노려보기만 했다.
“나도 이 판에 다 걸었다, 장호민. 니가 제철소 가져가겠다면 우리는 건설, 조선, 에너지, 제약까지 다 가져가겠어.”
“뭐?”
이명진의 선전포고에 장호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다른 계열사는 몰라도 해동그룹이 한고그룹의 한고제철에 대동조선까지 가져가겠다는 건 자신과 마주서겠다는 것이 아닌가? 화를 못 참은 그가 이명진에게 소리쳤다.
“야! 너, 나하고 아예 거래 끊겠다는 거야, 뭐야! 조만간 고로도 짓겠다? 하!”
“그러니까 주판알 잘 튕겨보라는 거다. 우리 집안 적으로 돌리기 싫으면.”
뜬금없는 이명진의 대답에 장호민의 눈이 커졌다.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뉘앙스를 비치다니?
“이명진?”
“뭐가 득이 될지 잘 생각해라, 장호민. 간다.”
그 말을 끝으로 이명진은 장호민을 보며 필터 끝까지 쭉 빨아들인 담배꽁초를 바닥에 떨구고 구둣발로 콱콱 밟은 뒤, 긴 연기를 내뿜으며 흡연실을 나갔다. 장호민은 이명진의 뒷모습을 쏘아보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
전경련회관에서의 회동이 끝나고 이대수, 이명진, 고승주는 바로 삼청동으로 들어갔다.
“너도 오늘 보니 내 아들이구나, 으허허.”
서재에서 홍차를 마시던 이대수가 이명진을 보며 껄껄 웃었다. 늘 기술만 파고 들어서 우직해보이던 아들이 전경련회관에서 보여준 연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아버지. 아직도 멀었습니다, 하하.”
올해야 오십대에 접어들었지만 부모의 칭찬은 언제나 들어도 좋은 법. 겸손하게 웃으면서도 이명진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있었다.
“그래, 장호민이는 잘 긁어놨고?”
“전부 다 먹을 거라고 하니까 눈이 뒤집히더군요. 그래도 적당히 떡밥을 던졌으니 물까 말까 고민할 겁니다, 하하.”
이명진이 후련한 표정으로 껄껄 웃었다. 늘 자신을 아래로 여기고 내려다보던 놈의 콧대를 인정사정없이 눌러줬으니 얼마나 속 시원한 일인가?
이명진이 흡연실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자 이대수가 가벼운 침음성을 흘렸다.
“흐음··· 어떨 것 같나, 승주야?”
“장호민의 성격상 명진이가 던진 패 중 어느 게 본심일지 고민할 겁니다. 현재 장호민이 준비한 자금으로는 우리 그룹의 드러난 자금력을 따라올 수 없으니까요.”
“40억 불 대출은 제외하고 말이지?”
“그것까지 보여주면 장호민이 따라올 리 없잖습니까? 흐흐.”
“그렇지. 호구를 털어먹으려면 히든은 마지막까지 아껴두고 레이스를 치는 법이니 말이야, 으허허.”
고승주의 말대로 해동그룹과 체이스맨해튼 은행 간의 40억 달러 대출 계약은 대한민국에서 아무도 모르는 그들만의 히든카드였다. 껄껄 웃던 이대수가 홍차 한 모금을 마시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
“한고제철은 나중에 먹어. 장호민 입질 들어오면 적당히 딜 치고 한고건설, 한고에너지, 대동조선, 상하제약만 가져와. 지분 희석되는 거 최대한 막고.”
“예, 회장님.”
한고건설은 송파와 강남에 도합 5만 평의 땅이 있고, 한고에너지는 이르쿠츠크 코빅타 가스전 지분 27.5퍼센트를 쥐고 있다.
대동조선은 진해 조선소가 있고, 상하제약 또한 흑자를 내고 있다. 네 회사 모두 지금 이 시점에서 다른 그룹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적당하게 그룹의 규모를 키우기 좋은 매물이었다.
지시를 내린 이대수나 대답한 고승주, 이명진이 이번에 열린 도박판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판돈을 딸지는 몰라도 해동그룹의 운명을 바꿀, 그것도 아주 좋게 바꿀 도박이 될 것이란 예감이 그들의 피를 달구고 있었다.
***
회사로 돌아온 장호민은 회의실에 간부들을 불러놓고 논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협상이 최우선이란 말인가?”
장호민이 굳은 표정으로 던진 질문에 임원 한 명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부회장님. 현재 우리 자금력으로는 해동그룹에 상대가 안 됩니다.”
“현재 해동그룹의 가용현금은 적게 잡아도 해동물산 17억 달러, 중공업 계열사들이 쌓아둔 8억 달러 플러스 4천억 원입니다. 여기에 해동물산이 거래처 신용장을 떠안느라 굴리는 10억 달러와 1조 원까지 투입하면··· 승산이 없습니다.”
“···빌어먹을.”
장호민과 임원들의 표정이 썩어문드러지고 있었다. 최대한 헐값에 한고제철을 주워오려고 했더니 해외 사업에 정신이 팔려 있던 놈들이 나설 줄이야···.
“그럼, 어떡해야 좋을까? 최대한 싼값에 한고제철을 가져올 방법 말이야.”
“이명진 부회장이 한 말을 토대로 추측한다면 해동그룹은 한고건설, 한고에너지, 대동조선, 상하제약을 노리는 듯합니다. 이 점을 중심에 두고 협상을 준비해야 합니다.”
10억 달러 대출 아이디어를 낸 막내 임원의 제안에 다른 임원들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장호민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은 듯했다.
“지금 우린 내전을 앞두고 있어. 그렇다면 해동그룹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좋지 않을까?”
“부회장님 말씀대로만 된다면 최상의 시나리오가 될 겁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우리 쪽에서 뭔가를 더 넘겨줘야 하는데···.”
말끝을 흐리는 막내임원을 보며 장호민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앞으로 10년 간 해동제강, 해동시멘트에서만 철강재, 시멘트 납품받겠다고 해. 한고제철 먹고 고로 지으면 열연강판도 10년 간 해동제강에 우선공급 하겠다고 하고. 한고제철 부산 공장도 넘기겠다고 해.”
“부회장님?”
임원들의 눈이 커졌다. 저 욕심 많은 장호민이 차포를 떼어주겠다니?
“우선 공급권을 주는 대신, 싸게 팔라고 해야지. 공장 팔아서 쥘 돈은 고로 건설 때 세탁할 거고. 안 그러나?”
“아···!”
임원들은 일제히 탄성을 내뱉었다.
저렴한 자재를 확보하고 공사비를 부풀려서 비자금을 만든다. 그 비자금으로 신성전자와 신성물산 주식을 차명으로 확보한다. 참모들인 자신들이 냈어야 할 아이디어였기에 임원들은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기죽을 필요 없어. 결정권은 내가 쥐고 있잖나? 책임도 내가 져야지.”
장호민의 위로에 임원들은 한시름 크게 덜었다. 장호건이었으면 ‘그거 하나 생각 못하냐?’라는 호통소리부터 온갖 인신공격이 쏟아지지 않았겠나?
그렇다고 장호민이 임원들을 마냥 풀어주는 사람이냐면 절대 아니었다.
“큰 틀은 잡았으니 디테일은 자네들이 짜도록 해. 적절한 균형점을 잡아서. 알았나?”
“네, 부회장님!”
대답을 들은 장호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갔다. 자신의 상황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 적을 알기 위해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
선해철은 전화 한 통 없이 회사에 찾아온 장호민을 마주하고 있었다.
“해동그룹에 대해서요?”
“난 그저 한고제철만 인수해서 고로만 올리고 싶을 뿐인데 회장님과 명진이가 오해한 것 같더군요. 이거야 원.”
낯빛 하나 안 바꾸고 뻔뻔하게 늘어놓는 장호민의 거짓말에 선해철은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욕심 많은 장 씨 집안의 후계자를 누가 믿겠냐마는 선해철은 홍차 한 모금을 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협상에 내밀 카드는 있으십니까?”
“한고그룹 네 개 계열사는 해동그룹에 깨끗이 넘길 생각이오. 우린 제철만 먹어도 충분하니까요.”
“그것만으로는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다른 건 더 없습니까?”
선해철의 시큰둥한 반응에 장호민의 눈썹이 잠시 들썩거렸다. 감히 누구 앞에서!
하지만, 한고제철을 싼 값에 손에 넣으려면 참아야 했다. 장호민은 홍차 한 모금을 마시며 속에서 치미는 화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해동제강과 해동시멘트에 10년 간 우선 납품 계약을 줄 생각이오. 향후 한고제철에서 생산될 열연강판도 해동제강에 우선공급하고 한고제철 부산공장도 시가보다 저렴하게 매각할 생각이고.”
장호민이 던진 카드에 선해철이 눈을 크게 떴다.
돈놀이만 하는 자신조차 후한 조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자신과 해동그룹의 관계를 알고 있는 장호민을 의식하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 정도면 혹하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말끝을 흐리던 선해철은 장호민의 질문에 손가락으로 턱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한고제철 부산공장 매매가가 문제 같은데··· 그 부분은 부회장님이 직접 만나서 협상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선 대표가 명진이와 자리 좀 마련해주면 좋겠습니다. 물론, 협상이 잘 되게 설득해주면 더 좋고요.”
장호민의 부탁에 선해철이 역제안을 걸었다.
“좋습니다. 대신, 10억 달러는 지금 대출하시죠.”
“선 대표?”
“중매쟁이들도 소개료 받고 일합니다. 우리도 돈 벌자고 이 일하는데 수수료는 받아야죠. 10억 달러야 어차피 대출해야 할 돈인데 아까우십니까?”
장호민의 표정이 굳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신의 부탁은 대출계약 외의 일이고 10억 달러도 결국엔 써야 할 돈이 아닌가?
“알겠소. 대신, 명진이와 만날 때 협상이 성사되게 해주시오.”
“좋습니다. 만약에 협상이 틀어지면 대출이자는 내년부터 받도록 하죠.”
선해철은 장호민을 보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었으나 그 미소속에 자신의 팔다리를 한 짝씩 잘라내게 됐다는 뜻이 숨겨져 있음을 장호민은 모르고 있었다.
***
장호민이 간 뒤, 나는 소파에 앉아서 맞은편에 있는 선해철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떠냐?”
“삼촌, 증권맨 안 됐으면 사기꾼 됐을 것 같아요.”
“뭐, 인마?”
선해철이 발끈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실실 웃었다.
“그런데 삼촌. 제가 삼촌이라도 사기 쳤을 것 같아요.”
완벽한 사기였다.
대출을 시작한 순간부터 장호민은 우리에게 신성정유와 신성석유화학, 신성정밀화학의 지분 전량을 담보로 잡힌다. 추가 담보 제출로 한고제철까지 털어올 생각을 하니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협상만 성사되면 해동제강, 해동시멘트도 10년 치 매출은 충분히 확보될 거야. 부산 공장이야 해동제강 현금으로도 충분히 인수할 테고.”
“거기에 한고건설, 한고에너지, 대동조선, 상하제약까지 인수하면 더할 나위 없겠죠.”
압도적인 지배력을 강조하는 할아버지의 경영철학 상 그 네 개 회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해동물산과 해동건설, 해동중공업이 그 네 개 회사의 괜찮은 임직원들과 모든 자산을 흡수하고 껍데기만 남은 회사를 청산할 테니까.
입바른 소리 좋아하는 놈들은 재벌의 횡포라고 하겠지만 암세포도 생명이라는 수준의 개소리다. 자선사업가도 아닌데 그대로 둘 이유가 있나?
주주들이야 자산 인수 가격만 적절하면 해동그룹의 결정을 더 환영할 것이다. 10여년 뒤에는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그날이 다가오길 꿈꾸며 선해철과 함께 홍차 한 잔의 여유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