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112화 (111/229)

112화. 33rd. 겨울과 봄, 시작과 끝의 경계선에서 (4)

“그렇다고 나나 대표님께서 해동증권 업무를 하나하나 봐주지는 않을 겁니다. 실적 체크도 확실히 할 거고요. 안 그렇습니까, 대표님?”

고개를 돌리며 물은 내게 조영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큰 줄기 외엔 자네들 스스로 해동증권을 키워야 할 걸세.”

“각오하고 있습니다, 대표님. 그래서.”

민주형이 멈췄던 말을 이었다.

“저희들이 포기한 만큼의 스톡옵션은 그룹의 모든 식구들이 나눠가졌으면 합니다.”

‘오호, 이건 또 신선한데?’

민주형의 역제안에 흥미가 당긴 나는 이유를 물었다.

“왜죠?”

“앞으로 해동증권은 대한민국, 아니 아시아 금융시장을 누빌 최고의 마차가 될 거라 확신합니다. 저희가 말, 이사님과 대표님이 마부가 될 테니까요.”

“누가 보면 블랙기업이라고 손가락질 할 것 같군요, 하하.”

내 입에서 나온 ‘블랙기업’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하던 민주형이 겸연쩍은 미소를 띠었다.

“그래도 지분 0.5퍼센트를 받았으니 열심히 일해야죠. 여하튼, 해동증권이라는 최고급 마차의 티켓을 우리 그룹 식구들에게도 나눠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하.”

소탈하게 웃는 민주형과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주승빈 외 18명을 보니 흐뭇했다. 오너로서 가만있을 수 없지.

“그럼 저도 제 지분 80퍼센트 중 20퍼센트는 해동종금에 증여하고 5퍼센트는 임직원 복지기금으로 출연하겠습니다. 여러분들처럼 소중한 인재들을 얻은 건 전부 해동그룹 덕분이니까요.”

이렇게 되면 해동물산과 해동종금도 해동증권 주식으로 배당수익이나 주가 차익을 볼 수 있고 앞으로의 해동그룹 임직원들에 대한 복지를 챙기는 것도 수월해진다. 내 얘기를 듣던 민주형이 주승빈을 비롯한 다른 직원들과 눈빛을 주고받은 뒤,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럼 저희도 임직원 복지기금에 저희 주식을 출연하겠습니다, 이사님.”

“어떠십니까, 대표님?”

우리의 이목을 집중 받은 조영찬이 잠시 고민하고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이유가 있겠나? 자네들 애사심에 눈물이 날 것 같군. 앞으로도 끝까지 잘해보세. 이번엔 자네가 선창하게, 이 이사.”

“네, 대표님. 다들 잔 채우시죠.”

다시 한 번 우리는 잔을 채우고 높이 들었다.

“해동증권을!”

“위하여!”

건배를 끝으로 마지막 준비가 시작됐다. 내년 이맘때면 해동증권은 국내 최고의 증권사가 될 것이다.

***

얼마 뒤.

나와 조영찬은 홍콩으로 떠나는 해동증권 일행과 박태진을 배웅해주러 김포공항으로 나왔다.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히 돈만 벌자고 하는 일이 아니고 해동증권, 아니 해동그룹 금융부문을 이끌 인재들인지 검증하는 일도 겸했다. 나는 계속 한국에 남아있어야 했기에 현장 평가관 역할은 박태진이 맡게 됐다.

“잘 다녀오게. 돈 아낀다고 먹는 거 아끼다가 몸 상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대표님.”

조영찬은 고개를 숙인 민주형의 팔을 쓰다듬어주며 미소를 띤 뒤, 뒤로 물러났다. 조영찬은 미소를 띤 얼굴로 내게 눈짓을 했고, 나는 박태진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잘 다녀와요, 형.”

“다녀오겠습니다, 이사님.”

그렇게 나와 조영찬은 나머지 멤버들에게도 미리 조사한 정보를 토대로 격려의 메시지를 전달했고, 출국장으로 나서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남은 건 저 친구들이 잘 해내는 것뿐이군.”

“그러게요.”

처음으로 박태진과 헤어지는 일이라 기분이 묘했다. 유현정과의 연애사업도 챙겨야 할 사람인데··· 씁쓸해하던 나를 보며 조영찬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걱정마라, 성민아. 태진이 저 녀석도 이번 기회에 제 가치를 입증할 기회라고 생각해.”

처음으로 조영찬이 내게 건네는 반말이었지만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할아버지에게서 위로를 받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네··· 대표님.”

그렇게 우리는 공항 밖에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갔다. 잘하고 돌아오길.

***

다음 날 아침.

홍콩에서 하룻밤을 보낸 해동증권 일행들은 자신들이 일하게 될 사무실에 첫 출근을 하게 됐다.

오늘부터 그들은 이곳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홍콩 증시라는 합법적인 카지노에서 큰 판을 돌리게 됐다.

“묘하네. 본점이 아니라 지점에 먼저 출근하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이사님.”

사무실에 들어온 사람들은 정갈하게 세팅된 컴퓨터와 대형 디스플레이 등을 둘러보며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박태진은 별천지를 구경하는 것처럼 감탄하는 민주형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희들 고생할 거 생각해서 대표님하고 이사님께서 신경 쓰셨다. 스탠더드하고 비교했을 때 어때?”

“이 정도면 준수하지. 돌아가면 대표님하고 이사님한테 고맙다고 해야겠다, 흐흐.”

입사 동기인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승진은 박태진이 빨랐지만 입사 시절부터 절친했던 두 사람인지라 두 사람은 편하게 말을 놓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오기 전에 사온 홍콩식 프렌치토스트에 밀크 티 등으로 아침을 해결한 그들은 회의실에 모여서 화이트보드에 뭔가를 쓰며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요는 레드 칩(Red chip : 홍콩 증시에 상장된 중국 본토의 국영기업 주식)이라는 거지?”

“예, 이사님. 중국 본토의 국영기업들이든, 홍콩 증시의 투자자들이든 악어와 악어새 같은 관계가 될 겁니다. 저희도 오기 전에 분석했는데 저희 의견도 대표님과 박 이사님, 이 이사님께서 넘겨주신 기획서와 동일합니다.”

주승빈이 민주형의 질문에 대답하고 나자 박태진이 입을 열었다.

“보면 알겠지만 중국 본토의 국영기업들은 상해 증시보다 홍콩 증시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게 훨씬 이익이라 판단했을 거야. 공신력은 홍콩이 우위에 있으니까.”

“그건 그렇지. 빨갱이 짱깨 놈들을 누가 믿고 본토 증시에 투자하겠어? 가뜩이나 증시 규제도 빡빡한데.”

민주형이 어깨를 으쓱하며 신뢰도가 낮은 중국의 정치와 보수적인 경제정책에 대해 비아냥거렸고, 박태진이 피식 웃으며 브리핑을 이어갔다.

“그런 것도 있는데 투자자들도 홍콩 증시에 등록된 중국 국영기업을 믿을 거야. 정확히는 그 국영기업들이 중국 고위층과의 꽌시가 좋을 거라 믿겠지.”

“꽌시가 보장되니 성장 또한 보장됐다, 그런 말씀이십니까?”

주승빈은 내심 내키지 않은 눈치였지만 박태진은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주승빈이 객관적인 데이터를 토대로 투자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박태진은 그를 다독여줬다.

“어쩔 수 없어, 주 부장. 나도 이번에 기획서 준비하면서 공부했는데 ‘레드 칩’은 객관적인 데이터로 투자하면 안 돼. 사람들의 기대와 욕망에 베팅하는 거니까.”

“이거 완전 카지노에 입장한 것 같은데? 흐흐.”

주승빈을 비롯한 열 명이 찜찜해하는 것과 달리 민주형을 포함한 열 명은 벌써부터 주먹을 불끈 쥐거나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민주형 그룹은 미국에서부터 동물적인 감각을 드러낸 이들이 아닌가?

그렇게 문답을 주고받으며 의견을 정리한 끝에 민주형이 결론을 냈다.

“현재 항셍지수가 13,200포인트. 지금은 홍콩, 싱가포르, 런던, 뉴욕, 도쿄 증시에서 차익거래 돌려. 5퍼센트 이상 오르면 현물 매도-선물 매수, 5퍼센트 이상 내려가면 반대 포지션 잡고.”

“네, 이사님.”

같은 항셍지수라도 각 증시마다 미세한 가격 차이가 있고, 국가별 환율 차이를 고려하면 그 가격 차이는 더 벌어진다. 확실한 시그널이 보일 때까진 안전하게 자금을 불리자는 민주형의 지시를 모두들 찰떡 같이 알아들었다.

큰 틀을 짠 그들은 방침에 따른 업무 분장과 조직 구성을 끝냈고, 곧바로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합법적인 도박’을 시작했다.

그들과 달리 박태진은 회의 중에 남긴 메모를 토대로 각자의 특징을 정리했다. 처음으로 이성민과 떨어져서 아쉬웠지만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기회이기도 했기에 인사기록을 정리하는 박태진의 눈에는 의욕이 넘치고 있었다.

***

해동그룹이 홍콩에서 새로운 미래를 그리며 판을 벌이고 있을 때 한국은 점점 미래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여당에서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다음날 새벽에 국회에서 기습적으로 노동법 개정안과 안기부법을 통과시키면서 그 유명한 ‘노동법 날치기’가 이뤄졌다.

이에 모든 노동자들이 양대 노총의 지휘 하에 총파업을 개시했고, 전국의 거의 모든 공장들이 마비 상태에 빠졌다. 해동그룹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지만 이유는 달랐다.

[자네들도 파업에 참가하게.]

[예?]

해동그룹 노조 대표들은 계열사 대표이사들의 제안을 믿을 수 없었다.

규정에 없는 휴식은 불허해도 종신고용에 성과급, 각종 복리후생까지 챙겨줘서 87년 노동자 대투쟁 때도 산별노조를 탈퇴하면서까지 회사와 공장을 지켰는데 파업에 나서라니?

[이번에도 자네들이 빠지면 우리 그룹만 재계에서 고립되네. 자네들 입지도 노동계 내에서 좁아질 테고. 그러니 적당히 장단만 맞추도록 해. 급여는 정상지급될 걸세.]

그룹 수뇌부를 포함한 해동그룹 고위 임원들은 재계와 노동계 양쪽에서 그룹이 고립될 것을 우려했다. 해동그룹 노조 지도부도 걱정하긴 매한가지였기에 거리낌 없이 파업에 참가했다.

그렇게 총파업이 일어나자 불안을 느낀 외국 투자자들은 점점 한국에서 자본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97년 1월 2일에 최악의 사태가 터졌다.

[긴급속보입니다. 오늘 아침 9시 5분, 한고그룹이 부도처리 됐습니다. 이는 만기가 돌아온 어음 15억을 부도처리한 제일은행을 시작으로 다른 은행들이 일제히 한고그룹의 어음을 부도처리하면서···.]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던 나와 선해철은 굳은 표정으로 모닝티를 들이켰다.

“장호민 짓이겠지?”

“그러겠죠. 제일은행에서 어음 던졌으면 볼 것도 없어요.”

장호민이 기어이 일을 냈다. 장호민의 사주를 받고 했다지만 은행들로서도 한고그룹의 부도처리에 대해서는 할 말이 아주 많으니 이 사태의 주범인 ‘소통령’, 그리고 그 ‘소통령’을 아들내미로 둔 청와대 주인장은 아무 말도 못할 터.

물론.

한고그룹은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해 처먹었다. 4조 5천억 원에 12억 달러까지 끌어 쓰고도 겨우 2천억만 제철소 공사에 썼다니!

하지만.

한고그룹 부도가 외환위기의 도화선이 될 것은 정택주 일가든 장호민과 그 공범자들도 예상치 못했을 터.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 나를 보며 선해철이 위로를 건넸다.

“네 잘못 아니다, 이놈아. 망할 놈들이 망할 짓 한 건데 왜 네가 죄지은 표정을 지어?”

그래. 내 잘못이 아니다. 어차피 썩은 놈들 죄다 쓸어버리고 새 판을 짜는 게 이 나라에 도움이 될 거다.

죄책감을 지워버리려고 옅은 미소를 띤 나를 선해철이 부드러운 미소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이제 회장님과 부회장님만 나서면 되는 건가? 흐흐.”

“그러겠죠? 장호민이 한고제철에 쌩돈 처박게 말이죠.”

우리 숙부님, 잘 할라나 모르겠네. 성수대교 작살 낼 땐 할아버지 핏줄다웠지만 오늘은 블러핑을 잘해야 하는데···.

***

이성민이 여의도의 스탠더드 캐피털에서 걱정하고 있을 때 전경련회관 앞은 한고그룹 사태 수습 때문에 소집된 각 그룹 총수들이 대형세단에서 내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길 반복하고 있었다. 워낙 큰일이었기에 이대수도 고승주와 이명진을 데리고 전경련회관에 나왔다.

“특혜든 대출이든 일을 잘할 놈한테 퍼줬을 것이지··· 에잉, 우라질 놈들.”

이대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고승주와 이명진 또한 한고그룹을 경멸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전경련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대회의실 앞에 도착하자 고승주와 이명진이 양쪽 문을 열었고, 이대수가 들어가는 뒤를 따라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늦어서 미안하이, 채 회장. 늦어서 미안하오.”

회장석에서 일어난 채정현을 보며 손을 흔든 뒤, 이대수는 중절모를 벗으며 다른 회장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이명진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이대수가 자리에 앉은 걸 보고 채정현이 의사봉을 가볍게 두들겼다.

“다들 오셨으니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한고그룹이 부도처리 됐습니다. 우리 전경련에서는 이에 따른 여파에 대한 대응방안을 모색하고 정부와 협조해야 할 것입니다.”

“채 회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벌써 제일은행은 자본이 잠식됐고 산업은행, 조흥은행, 외환은행 등 우리와 거래하는 은행들까지 여파가 미쳤습니다. 수습이 늦어지면 우리까지 위험해질 겁니다.”

이어지는 오현무의 발언에 얼굴이 거무죽죽해지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그룹들은 은행권의 대출로 덩치를 키웠는데 한고그룹 사태로 은행권에 6조 원 가까운 부실이 생겼다. 대출 연장은 고사하고 회수에 나서면 연쇄부도는 피할 수 없었다.

자리에 앉은 한 재벌 총수가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은 뒤, 오현무에게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닙니다. 아닌 말로 정택주 같은 놈들에게 돈을 퍼준 건 저기 있는 기와집 주인장 자제님이 아닙니까? 책임을 지려면 그 집에서 져야지요.”

그 재벌 총수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은 북악산 방향. 다시 말해 청와대였다.

“맞습니다! 점쟁이 말 믿고 사업하던 놈들한테 6조 가까운 돈을 빌려주는 게 가당키나 했습니까? 게다가 그 대출에는 12억 달러나 되는 외화대출이 껴있어요!”

“이 일은 우리 재계가 잘못한 게 아닙니다! 똥 싸는 놈 따로 있고, 치우는 놈 따로 있으면 누가 이 나라에서 사업하겠습니까?”

평소라면 몰라도 이 사태의 공범자가 대통령의 차남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 자리에 모인 재벌 총수들은 큰소리로 청와대와 정부를 씹고 뜯었다. 비난 일색의 분위기를 바꾼 건 장호건과 함께 신성그룹의 대표로 참석한 장호민이었다.

“그럼, 한고그룹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어차피 망한 회사지만 저대로 놔두기엔 아깝습니다. 살려낼 건 살려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어떡하자는 겁니까? 6조 가까운 부채를 끼고 제철소를 지을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다른 재벌총수의 반문에 장호민이 미소를 띠었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리들 중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고그룹의 자산을 적절한 값을 주고 인수하는 겁니다.”

“방법이 있습니까?”

“예. 한고그룹의 알짜배기 계열사들을 매각한 자금으로 한고제철의 부실을 최대한 메우고, 그러고도 넘치는 빚은 일부 공적자금 지원을 받아서 털어낸 뒤에 입찰을 하는 겁니다.”

“흐음···.”

정택주 일가나 정치권의 의사와 상관없이 썩고 곪은 한고그룹을 국민들의 혈세로 치료하고 멋대로 나눠먹자는 소리였지만 누구 하나 장호민의 제안에 반발하지 않았다.

의자에 앉은 모두들 이 사태의 주범들이 책임을 지는 게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침음성을 흘렸다.

장호민은 자신에게 기울어지는 분위기를 보면서도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한고제철을 먹을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계획이라는 걸 아무도 알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장호민의 꿍꿍이를 아는 건 이 회의실에서 오직 해동그룹의 대표 세 사람뿐이었다. 그 중 한 명인 이대수가 옆에 있던 이명진에게 눈짓을 줬고, 이명진이 손을 들었다.

“발언하세요, 이명진 부회장님.”

“감사합니다, 회장님.”

채정현에게서 발언권을 얻고 이명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또한 장호민 부회장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대기업만 살리는 공적자금이 되면 국민들이 우릴 보는 눈이 사나워질 겁니다.”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살려야 한다면 한고제철에 연관된 하청업체들까지 살려야 한다고 봅니다. 다는 아니더라도 괜찮은 하청업체들은 살려둬야 한고제철을 인수할 곳을 뒷받침하지 않겠습니까?”

이명진의 폭탄 발언에 장호민의 눈이 커졌다가 날카로워졌다. 자신의 계획에 대놓고 똥물을 끼얹다니!

장호민이 책상 밑에서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이번에는 이대수가 발언권을 얻고 앞에 있는 마이크를 켰다.

“그간 내 부친 때부터 내려온 과업에 열중하다보니 이 땅에 참으로 무심했소이다. 가격만 맞으면 한고제철 외의 다른 계열사도 인수하겠소.”

발언을 마친 이대수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고, 장호민은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이대수와 이명진을 쳐다봤다. 부자지간에 쌍으로 무슨 수작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