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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108화 (107/229)

108화. 32nd. 혼인, 그리고 동맹 (2)

헨리와의 만남을 마치고 스위트룸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함께 들어온 나를 보며 물었다.

“헨리 그 사람, 우리 집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상견례 자리에서 드러난 만큼만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그 이상은 나도 알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숨겨둔 비자금이 얼마나 되는지, 그 비자금의 규모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니 말이다.

대답을 듣고 침음성을 흘리던 할아버지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알았다. 그래도 헨리의 녹안(綠眼)을 보니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게 있더구나, 허허.”

“저도 그 점이 좋았습니다, 할아버지.”

“그런 사람이 널 어여삐 여긴다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앞으로도 더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거라.”

할아버지는 나를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며 다독여줬지만 헨리와 로이스 가문은 현재의 미국 정재계에서 내가 손잡은 사람들 중 가장 든든한 동맹자다. 아직은 알려줄 수 없지만 때가 되면 드러낼 진실에 할아버지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알겠습니다, 할아버지.”

3개월 뒤에 펼쳐질 미래를 떠올리며 나는 할아버지에게 미소만 드러냈다.

***

며칠 뒤.

클레어와 선해철의 결혼식은 뉴욕 주 변두리의 한적한 교외에 있는 조그만 성당에서 열렸다.

미국과 한국의 최상류층에 속하는 이들의 결혼식이라기엔 조촐하다 못해 초라해 보이겠지만 클레어와 헨리의 관계가 공개되면 트라이엄프와 스탠더드, 나아가 로이스 가문과 우리 가문의 동맹에 미국 정관계가 어깃장을 놓을 수 있다.

때문에 클레어와 선해철은 두 가문의 장기적인 상호협력과 발전을 고려하여 일부러 가장 가까운 이들만 하객으로 초청한 스몰 웨딩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 대신.

결혼식의 내용만큼은 어떤 부자들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삼촌, 제 선물은 맘에 들어요?”

“글쎄다··· 결혼식에 입는 옷이라기엔 너무 도발적인 디자인이라··· 하하.”

선해철은 면장갑을 낀 손으로 턱시도 재킷을 쓰다듬고는 나를 보며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그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내가 톰 포드에게 부탁해서 그가 직접 디자인한 웨딩 턱시도였다. 결혼예복이라도 톰 포드 특유의 섹슈얼한 감성 덕분인지 선해철이 그간 관리해 온 몸과 맞물리며 남성미를 뿜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턱시도에 쓴 원단은 3대 나폴리 원단 제작사인 로로피아나(Loro Piana) 사가 독점 생산하는 비쿠냐 울 원단이다. 2,3년에 한 번씩 비쿠냐 한 마리당 120그램만 채취되는 털로 짠 원단을 톰 포드의 디자인에 맞춰 지었기 때문에 선해철이 입은 턱시도의 가격은 3만 달러였다.

내가 해준 결혼선물들 중 하나가 맘에 들었는지 선해철이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클레어가 앞이 짧아서 각선미가 드러나면서도 뒤를 길게 낸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걸어왔다. 이 또한 톰 포드가 직접 디자인해준 옷이었다.

“어때요, 클레어?”

“너무 맘에 들어. 이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톰 포드한테 맡기길 잘했어. 고마워, 조니.”

클레어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보니 톰 포드에게 부탁하길 잘했다 싶었다. 우리 집안과 로이스 가문 때문에 비밀리에 치르는 결혼식이라지만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 아닌가?

겉보기엔 허름해보여도 속은 꽉 찬 결혼식을 선물해주고 싶어서 양가 어른인 할아버지와 헨리 못지않게 찬조했는데 결혼예복에 만족하는 두 사람을 보니 내 마음이 뿌듯했다.

클레어가 선해철의 한쪽 팔을 두 팔로 꼭 껴안자 스탠더드 캐피털의 이사진들 중 한 사람이 껄껄 웃었다.

“두 분 보니까 부럽습니다. 우리도 이제 곧 결혼해야 하는데 좋은 레퍼런스가 될 것 같습니다, 하하.”

하지만, 옆에 있던 다른 이사가 껄껄 웃던 이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저었다.

“꿈 깨, 우린 죽어도 두 사람 결혼식 흉내 못 낼 걸?”

“맞아. 조니가 5천만 달러나 기부금 내고 추기경님 모셔왔는데 어떻게 흉내를 내냐?”

“그래. 혼인성사 연습한 거나 까먹지 말고 잘해. 모르면 지금이라도 손바닥에 적어놔, 흐흐.”

이사진들의 시시덕거림대로 이 결혼식의 주례는 가톨릭 뉴욕 대교구의 추기경이었다. 로이스 가문은 독일 본가와의 연결고리를 지우고자 미국에 정착하면서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선해철의 혼주인 우리 집안도 증조부님 이래로 가톨릭 신자인지라 양가 어른들이 어렵게 모신 분이었다.

그에 따른 합당한 사례가 필요했기에 5천만 달러를 스탠더드 캐피털의 명의로 뉴욕 대교구에 조용히 기부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가톨릭 신자인 클레어와 선해철에게 의미 있는 결혼식을 만들어주기 위해 쓴 돈이라 나는 아깝지가 않았다.

혼인성사를 시작할 시간이 되자 모두들 자리에 앉았고, 중앙통로로 추기경을 비롯한 사제들이 들어왔다.

이어서 혼인성사의 순서에 맞춰 추기경의 해설이 시작됐고, 선해철과 클레어가 순서대로 입장하면서 경건한 음악이 성당 안에 울려 퍼졌다.

“형제 여러분, 신랑 해철 선 알폰소와 신부 클레어 로렌스 안젤리나의 거룩한 혼인미사가 있습니다. 거룩한 혼인미사를 합당하게 봉헌하기 위하여···.”

추기경의 참회 해설에 맞춰 식에 참석한 모두들 참회의 기도를 올렸고, 수많은 순서를 거쳐 혼인동의 및 서약이 시작됐다. 선해철 측 증인으로는 박태진, 클레어 측 증인으로는 내가 나선 가운데 두 남녀의 혼인서약이 이뤄졌다.

그 다음으로는 양측이 예물로 준비한 반지를 교환하면서 두 사람의 혼인이 영원하길 기원했고, 예물기도와 주님의 기도, 영성체 등을 마친 끝에 혼인성사가 끝났다.

“축하드립니다, 헨리.”

“감사합니다, 추기경 전하. 둘도 없을 영광입니다.”

추기경의 손을 두 손으로 잡으며 악수를 한 헨리의 얼굴에는 후련함과 허탈함, 뿌듯함이 얽혀 있었다.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심정이 저런 걸까?

이어서 추기경은 할아버지에게도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다.

“지구 반대편에서 이곳까지 오셔서 혼주를 서주시다니··· 마르코 형제님께 하느님의 은총이 내리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추기경 전하.”

할아버지와의 인사를 끝으로 추기경을 비롯한 사제들이 뒤를 이어 나갔고, 그 모습을 보던 나와 박태진도 얼른 제의실로 들어가 증인서명을 했다. 사인을 마친 나는 제의실 밖으로 나와서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묘하네요, 형.”

“저도 신기합니다, 도련님. 바람 같던 분이 이렇게 가실 줄은··· 하하.”

나와 박태진을 서로를 보며 겸연쩍은 미소를 띠었다. 이제 우리 집안에서 하루 빨리 장가가야 할 남자들은 우리 둘뿐이었다.

“형은 유 과장하고 잘 되고 있어요?”

“종종 만나고 있습니다, 도련님. 도련님은 아가씨와 잘 되고 계십니까?”

“저도 잘 되고 있어요. 슬슬 때가 다가와서 부담되네요, 흐흐.”

방금 전에 끝난 선해철과 클레어의 결혼식은 나와 박태진에게 모범 교과서와도 같았다.

남자가 좋은 배경을 최대한 많이 깔아주고 여자가 그 배경 속에서 원하는 것을 고르게 하거나 다른 걸 가져와서 하는 것. 그것만큼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결혼식은 없을 것이다.

내가 깔아주고 장하연이 골라서 꾸밀 결혼식을 보면 장호건이 얼마나 놀랄까?

***

혼인성사에 이어 피로연까지 마친 뒤, 선해철과 클레어는 바하마로 2주간의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들을 배웅해준 나와 박태진은 할아버지, 고승주와 함께 해동물산 뉴욕법인에 방문해서 사업을 점검한 뒤, 한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에 돌아와서 며칠 간 여독을 푼 우리 둘은 할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삼청동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서재에 있는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리고 소파에 앉았다.

“해철이 그놈이 이제야 가장이 됐구나, 허허.”

할아버지의 너털웃음을 들으니 평소 때와 달리 푹신했던 흑단 소파가 가시방석처럼 따가웠다. 나와 박태진은 할아버지 입에서 다음에 나올 말이 뭘지 생각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네놈들은 언제 장가 갈 게냐? 태진이 네놈은 불혹까지 몇 년 안 남았지 않았더냐?”

아니나 다를까 할아버지의 잔소리가 시작됐다. 첫 빠따를 맞은 박태진은 말할 것도 없고, 옆에 있던 나까지 덩달아 이마 가장자리에 식은땀이 맺혔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죄송할 건 없고 참한 처자만 이 방에 데리고 와. 이 늙은이가 네 배필이 누군지만 확인해주마, 으허허.”

얼굴이 빨개진 박태진을 보며 껄껄 웃던 할아버지가 웃음을 멈췄다. 할아버지는 이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놈은 언제 갈 게야? 정인(情人)도 보통 정인이 아니라 네놈보다 두 살은 더 많은 정인이 아니더냐?”

미치겠다, 우리 영감님.

영등포 재개발 관련 회의 때만 해도 네 마음 가는대로 하라고 하신 양반이 선해철과 클레어의 결혼식을 보고나니 변덕이 생긴 걸까?

나와 장하연의 결혼식은 적어도 내년 말이나 내후년 초에 올려야한다. 내 속을 알고 놀리는 건지, 아니면 모르고 저러는 건지···.

할아버지의 짓궂은 미소를 보니 전자 같았다. 뉴욕에 머물렀을 때 헨리에게서 아시아 금융위기 가능성을 들었으니 나를 놀리고 있는 게 확실했다.

어쩔 수 있나.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이니 납작 엎드려야지.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저도 지금 노력 중이니 내년 중에 소식을 올리겠습니다.”

사지육신 멀쩡하고 못난 구석 하나 없는 장손,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이 집안의 장손으로서 결혼소식을 올리지 못하는 건 죄나 마찬가지다.

집안과 그룹 어른들 앞에서 결혼 상대를 밝혔음에도 일을 핑계로 차일피일 미뤄왔으니 죄질이 너무 나빠서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다. 대신, 내년을 넘기면 안 될 것이야. 너는 둘째 치고 너만 바라보는 그 아이한테 죄 짓는 일이니 말이다. 알겠느냐?”

“네,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장난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후년 초에는 무조건 식을 올려야겠다.

***

그 뒤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꼽을 일은 해동그룹의 유례없는 강행군이었다. 할아버지의 지시로 원로 대표이사 세 명과 이명진은 임원들을 혹독하게 몰아세웠다.

당연히 임원들도 휘하 관리자들을 독려하며 불필요한 지출과 위험대출 등을 자제하면서도 해외공사 수주, 해외 수출 등으로 달러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바쁘게 돌아가는 그룹 내부와 달리 나와 박태진은 각자의 파트너들과 매주 금요일마다 데이트를 하며 그녀들의 생각을 확인해갔다. 장하연이나 유현정이나 결혼에 집착하지도 않았지만 아쉬움을 숨기지도 않아서 우리 둘 다 난감 그 자체였다.

나와 박태진은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면 각자의 연애사를 털어놓으며 한숨을 내쉬었고, 그 사이에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선해철은 빨리 결혼하라며 우리를 신나게 약 올렸다.

그런 우리의 청춘사업과 별개로 한국 증시는 점점 변하고 있었다. 10월 말이 되어 외국인 투자한도가 기존의 10퍼센트에서 20퍼센트로 확대된 것이었다.

이에 스탠더드 캐피털은 기존에 인수한 해동물산 채권을 담보로 은행권에서 현금을 융통하여 한국 증시에 투입, 신성전자, 신성물산, 태현자동차, SG에너지, GK전자, GK화학 등 국내 주요 대기업 주식들만 골라서 매입했다. 일시적인 손실이야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으니 사두는 게 장땡이었다.

12월로 접어든지 얼마 안 지난 오늘도 어김없이 주식을 매입하던 나는 시계가 6시를 가리키자마자 컴퓨터를 끄고 선해철에게 말했다.

“삼촌, 저 퇴근할게요.”

“저도 퇴근하겠습니다, 형님.”

나뿐만 아니라 박태진까지 책상을 정리하고 코트를 걸치고 가방까지 챙기자 선해철이 장난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 그래. 둘 다 애인 보러 가는 거지? 흐흐.”

진짜 얄미워 죽겠다. 뉴욕과 서울 양쪽에 신혼집을 차리고 한 주 걸러서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클레어와 꿀 같은 신혼을 보내는 선해철이 정말 미웠다.

‘젠장··· 복수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결혼하고 싶어 죽겠네.’

속으로 투덜거리던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선해철에게 말했다.

“다녀올게요.”

“다녀오겠습니다, 형님.”

박태진까지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선해철에게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마친 우리는 얼른 사무실을 나왔다.

“서러워 죽겠네요. 빨리 내년이 오던가 해야지.”

“그러게 말입니다, 도련님.”

우리 둘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지하 1층에서 문이 열렸고, 나와 박태진은 엘리베이터와 건물 밖을 나와서 지하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형은 유 과장 보러가죠?”

“네. 기존에 출점한 점포들로 보낼 신입들 교육에 내년에 출점할 영등포점 때문에 야근이 많다고 하는데 가서 일이라도 도와주려고 합니다.”

박태진의 말을 듣고 해동마트, 아니 하이마트 식구들이 떠올랐다. 나창석, 유현정, 그리고 다른 팀원들과 회식을 하며 웃던 게 작년 12월이었는데···.

“다들 본지 1년이 다 돼가네요.”

쓴웃음을 짓던 내게는 마지막 회식 때 나창석이 들려준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했다.

[···그룹 경영 챙길 때 해동마트도 꼭 챙겨주면 좋겠습니다. 성민 씨 친정집 아닙니까, 하하.]

기회가 되는대로 한번은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내년이 되면 향후 몇 년간 부진에 빠질 백화점을 대신해서 유통부문을 뒷받침할 하이마트가 아닌가? 그 하이마트를 위한 사업이 떠오른 나를 보며 박태진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다들 열심히 잘 하고 있느니 걱정 놓으십시오, 도련님. 유 과장도, 나 부장님께는 안부 인사 잘 전해드릴 테니 아가씨와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고마워요, 형. 집에서 봐요.”

나와 박태진은 각자 끌고 온 차를 타고 건물을 빠져나갔다. 회사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 둘 다 청춘사업 진도를 빼는 게 시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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