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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106화 (105/229)

106화. 31th. 또 다른 거인과 만나다 (3)

통화가 연결되자 이를 악물던 윌슨이 턱근육에서 힘을 뺐다.

“윌슨입니다, 행장님.”

[무슨 일인가? 해동인지 뭔지 하는 원숭이들과 다 놀아주기라도 한 건가?]

“아닙니다, 행장님. 이놈들이···.”

윌슨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피식 웃는 소리가 윌슨의 귀를 때렸다.

[재미있군. 아주 재밌어.]

“행장님?”

윌슨이 당황했지만 은행장에게서 돌아온 목소리는 매우 태평했다.

[망설일 게 뭐가 있나, 윌슨? 대출, 내주도록 해.]

“그래도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대출 만기 연장을 받아들이면 10년 간 원금만 40억 달러에 이자까지 묶이는데···.”

윌슨이 망설이는 가운데 은행장이 윌슨의 말을 끊었다.

[회수가 확실한 대출을 거부하면 은행이 존재할 이유가 뭐가 있나, 윌슨? 얘기를 들어보니 그 원숭이 놈들, 채권도 발행할 기세 같은데··· 어음놀이로 큰 잡종들이나 코주부 영감의 핏줄들한테 빅딜을 넘겨줄 건 아니겠지?]

은행장의 책망 섞인 질문에 윌슨의 표정이 굳었다.

어음할인 사업으로 시작한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 코주부로 유명했던 존 피어폰트 모건이 세운 JP모건에게 40억 달러 대출을 뺏기면 체면이 서겠냐는 지적이 아닌가?

윌슨 또한 이 은행에서 말단부터 시작해 부행장까지 올라왔고, 차기 은행장을 노리는 야망남이었다. 그런 윌슨이기에 골드만삭스나 JP모건에게 40억 달러나 되는 빅딜을 뺏기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아닙니다, 행장님! 그딴 놈들에게 빅딜을 뺏길 수는 없잖습니까?”

각오를 굳힌 윌슨의 대답에 은행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됐네. 당장 대출 내주도록 해. 록펠러님께는 내가 말씀드리지.]

“예, 행장님.”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끊겼고, 윌슨이 수화기를 내려놨다.

“행장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록펠러님께 말씀드릴 테니 대출해주라고 하시더군. 가세.”

윗사람이 총대를 메주겠다는데 뭐가 두려울까. 윌슨과 임원들은 회의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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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과의 통화를 마친 은행장이 새 전화를 걸었다.

체이스맨해튼뿐만 아니라 엑슨, 모빌, 셰브런 등 스탠더드 오일에서 갈라져 나온 석유회사들, 그 외 대기업들의 대주주인 록펠러 가문의 수장 아이작 록펠러에게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누굽니까?]

“아이젠버그입니다, 록펠러님.”

케일러 아이젠버그 체이스맨해튼 은행장의 목소리에 ‘록펠러’라고 불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오랜만입니다, 케일러. 체이스맨해튼은 당신에게 일임한다고 했는데 무슨 일입니까?]

“이번에 40억 달러 대출을 해주게 됐는데···.”

아이젠버그의 보고가 끝나자 록펠러가 껄껄 웃었다.

[재밌는 친구군요. 내 집에 초대하고 싶을 만큼요.]

“그래도 록펠러님 가문을 욕되게 한 놈입니다. 골드만삭스 그 잡종들이나 JP모건 코주부 놈들에게 뺏길까봐 대출을 해줬습니다만 어떻게 그런 애송이 원숭이를 록펠러님께서···.”

[아닙니다, 케일러. 우리 집안을 상대로 그런 배짱을 부린 걸 보면 보통내기가 아닐 것 같습니다. 대출 계약 끝나면 우리 집으로 초대하죠.]

“예, 록펠러님.”

그 말을 끝으로 통화음이 끊겼고, 아이젠버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거 참···.”

케일러는 아이작 록펠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자를 시조로 둔 집안의 가주가 동양에서 온 애송이 원숭이에게 호기심을 보이다니···.

***

윌슨이 나간 사이에 우리는 우리대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될까요, 삼촌? 대출, 해줄까요?”

“안 빌려주고 배기겠어? 회수가 확실히 보장되는 거랜데.”

선해철은 걱정 말라는 듯 나를 보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어서 클레어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맞아, 조니. 스탠더드에서도 보증을 서겠다고 했으니까 안 될 수가 없어.”

“미세스 로렌스 말이 맞습니다, 도련님. 회수가 확실한 거래를 거부하면 은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세 사람의 말이 맞았다.

40억 달러 대출에 담보로 내민 해동그룹 주식 가치만 100억 달러, 그와 비슷한 자산을 굴리는 스탠더드 캐피털이 보증까지 섰다. 돈이 없지 않고서야 회수가 확실한 대출을 거부할 정신 나간 은행 따윈 절대 없을 것이다.

“그러겠네요. 조 대표님도 이런 대출은 해주실 테니까요.”

한국에 있는 조영찬을 떠올리며 잠시 여유를 찾던 중 윌슨을 비롯한 임원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그를 보며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결정, 하셨습니까?”

“물론입니다, 미스터 리. 귀측에서 제안한 조건 모두 수용하겠습니다.”

됐다!

이걸로 최대 10년 간 대출이라는 이름으로 내 돈처럼 쓸 40억 달러가 생겼다!

책상 밑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있던 내게 윌슨이 찬물을 끼얹었다.

“대신에 담보처리 우선권은 체이스맨해튼이 가져갔으면 합니다. 괜찮으시겠죠, 미스터 리?”

입은 웃고 있되, 눈은 살기로 번뜩거리는 윌슨을 보니 독이 단단히 오른 것 같았다. 나는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얼마든지요.”

그래봤자다.

체이스맨해튼은 우리 집안의 주식 한 주도 못 가져가고 돈만 챙기는 데 만족해야 할 것이다. 어딜 감히!

***

며칠에 걸쳐 꾸민 대출 계약서에 서명을 마친 나는 체이스맨해튼 은행을 나오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그렇게 좋냐?”

“당연하죠. 10년 동안 40억 달러가 생겼잖아요, 흐흐.”

선해철은 씩 웃는 나를 보며 혀를 찼다.

“그래도 지금 연준 금리를 생각하면 절대 만만한 액수가 아니야. 10년 내내 연 9퍼센트면 만기 때 94억 달러를 갚아야 해. 감당할 수 있겠어? 스탠더드가 갚아준다고 해도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현재 금리를 고려하면 선해철의 타박은 타당했다.

하지만.

새천년이 시작되면서 IT버블이 붕괴되면 클린턴 행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연준을 압박해서 금리를 끌어내린다. 그 다음 해에 당선될 조지 워커 부시 정권도 금리를 떨어뜨리니 2004년 5월까지 1퍼센트 수준으로 떨어진다.

향후의 금리인상을 고려해도 불어날 부채총액은 80억 달러다. 대출 원리금이 불어나는 속도보다 더 많은 돈을 벌 내게는 94억 달러든, 80억 달러든 무의미하지만 말이다.

이런 사실을 알려줄 수는 없어서 선해철에게 다른 이유를 댔다.

“걱정 마세요, 삼촌. 꿔온 것보다 더 많이 벌면 되니까요.”

“인마, 그래도···.”

선해철이 말을 하다 말고 헛웃음을 흘렸다.

“네가 말한 대로 맞아떨어지는 걸 보면 절대 손해 볼 일은 없겠지. 알겠습니다, 오너님.”

선해철을 보며 미소를 띠던 나는 헨리가 보내기로 한 리무진을 기다렸다. 먼발치에서 길다란 승용차가 우릴 향해 다가오고 있었는데··· 헨리의 벤츠 리무진이 아닌 링컨 컨티넨탈 리무진이었다.

그 리무진은 우리 앞에서 멈춰 섰고, 조수석에서 정장차림의 대머리 남자가 내렸다. 굵직한 몸을 보니 운동선수나 보디빌더 같았다.

“존 성민 리, 맞으십니까?”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죠?”

그 근육질의 대머리가 정장 재킷을 바로잡고 입을 열었다.

“록펠러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록펠러면··· 아이작 록펠러이십니까?”

옆에 있던 클레어가 조심스럽게 묻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며칠 전 방문 때문에 케일러 아이젠버그 은행장의 보고를 받고 록펠러님께서 미스터 리를 보자고 하셨습니다.”

뒷말은 필요 없었다.

미국은 부자들이 지배하는 나라. 법도, 정치도 모두 그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난다. 내 우군인 로이스 가문만 해도 워싱턴 정가를 흔드는 집안이 아닌가? 이 남자의 요청을 거절하면 대출 취소를 시작으로 온갖 압박이 시작될 것이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대머리 남자를 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대신, 일행들도 함께 가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타시죠.”

그 남자는 문을 열고 안쪽으로 한쪽 손을 뻗었고, 우리 넷은 리무진에 몸을 실었다. 문이 닫히고 차가 출발했고, 나는 클레어에게 물었다.

“아이작 록펠러가 누구죠?”

“록펠러 가문 가주야. 다른 록펠러들과 달리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사람인데···.”

클레어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록펠러 가문의 부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그런 걸까?

“록펠러 가문, 어때요?”

“우리 집안보다 더 많은 재산을 쥐고 있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엑손, 모빌, 셰브런 지분도 꽤 갖고 있고 다른 재산도 많을 거야.”

엑슨과 모빌은 훗날 엑손모빌로 합병될 세계 7대 석유메이저다. 셰브런 또한 미래의 세계 7대 석유메이저 중 하나로 그들의 자회사인 칼텍스가 GK정유 주식 50퍼센트를 쥐고 있었다.

‘얼마 전에 GK정유 주식을 매각했어도 셰브런에서 GK그룹과의 전략적 제휴는 유지하기로 했는데··· 잘못하면 나 때문에 죄다 파토날 것 같군. 젠장···.’

인상을 구기던 나는 수 시간 뒤에 리무진이 멈출 때쯤이 돼서야 얼굴을 펴고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리자 칙칙한 지하주차장이 눈에 펼쳐졌다.

“따라오시죠.”

함께 내린 대머리 남자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우리는 50층이 되어서야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 끝의 방으로 걸어갔다.

“록펠러님, 도착했습니다.”

[모시게.]

“네. 들어가시죠.”

우리는 대머리 남자가 열어준 문을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있는 가구들은 하나같이 수수하다 못해 투박했지만 세월이라는 도료 때문인지 은은한 광택을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이 방의 주인처럼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우리 앞에 서 있었다.

콧수염과 턱수염에 은발머리의 정장차림을 한 그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품 안에 금줄이 달린 걸 보니 회중시계를 넣어두고 다니는, 전형적인 중년의 유럽 신사였다.

“아이작 록펠러라고 합니다. 누가 존 성민 리입니까?”

록펠러의 질문에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존 성민 리입니다, 미스터 록펠러.”

“윌슨 부행장과 아이젠버그 은행장에게 들은 것처럼 젊은 친구군요. 그대가 해동그룹이라는 한국 기업의 오너입니까?”

고개를 갸웃하는 록펠러를 보며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미스터 록펠러. 해동그룹의 오너는 제 조부님이신 이대수 회장님입니다. 저를 비롯한 나머지 가족들은 주주일 뿐이고요.”

“흐음··· 실례지만 해동그룹이 올해로 몇 년이나 됐습니까?”

턱수염을 매만지던 록펠러의 질문에 나는 겸연쩍은 미소를 띠었다.

“71년입니다. 스탠더드 오일에 비하면 짧은 역사죠.”

“호오··· 흥미롭군요. 아시아에서 그렇게 오래된 대기업, 그것도 모기업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은 대기업은 손에 꼽힐 텐데···.”

“가족기업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많이 노력했죠. 우리 집안의 신념대로 가업을 키우기 위해서.”

힘이 풀릴 것 같은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며 말하자 록펠러가 나지막이 탄성을 흘렸다.

“대단합니다. 진심으로요. 우리 록펠러 가나 다른 가문들이야 워싱턴 D.C와의 협력을 통해 차등의결권이나 기부 등을 통해 부를 이어가고 있는데···.”

“패밀리 오피스(Family office, 특정 가문의 부를 영속시키기 위한 자산관리회사)가 빠지면 안 될 것 같습니다만, 하하.”

너스레를 떠는 나를 보며 록펠러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우리 세계에 대해 꽤 많이 아는 것 같군요. 그러니 40억 달러 대출을 요구할 때 그런 까다로운 조건을 내밀고 우리 집안을 입에 올렸을 것 같습니다, 하하.”

“그런 조건으로 계약하려면 어쩔 수 없었지요. 록펠러 가문을 진심으로 모욕하고 싶지는 않았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한 내 어깨에 록펠러가 손을 얹었다.

“그 정도 배짱도 없으면 우리 체이스맨해튼에서 40억 달러나 되는 돈을 그런 조건으로 빌릴 자격이 없죠. 얘기로만 듣던 고조부님의 수완을 본 같았습니다, 하하.”

나는 소탈하게 웃는 록펠러의 모습을 보면서 위화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 무자비했던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의 후예가 이렇게 대인배라니?

잠시 호감이 생기려던 찰나에 록펠러가 내게 말했다.

“윌슨에게서 들었겠지만 담보처리 우선권은 우리 체이스맨해튼이 가져갈 겁니다. 괜찮겠습니까, 미스터 리?”

역시나 내 착각이었다.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이 사람도 정글 같은 미국 재계에서 몇 대에 걸쳐 부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속이지 못했다.

“알고 있습니다, 미스터 록펠러. 담보가치 재조정도 계약서에 포함됐는데 알고 계시겠죠?”

“당연히. 그래도 달러 대출인데 환율이 폭등하면 감당, 할 수 있겠습니까?”

맞받아친 내게 록펠러가 다시 펀치를 날렸지만 그 펀치는 훅이 아닌 잽, 그것도 약한 잽에 불과했다.

어차피 외환위기가 터지면 환율은 폭등하고 두 번 다시 달러당 800원대라는 환율은 찾아오지 않는다. 내가 준비한 모든 계획은 달러당 900원을 마지노선으로 잡고 짠 계획이니 수지타산이 안 맞을 수 없었다.

“물론입니다, 미스터 록펠러. 열심히 벌어서 10년 뒤에 갚겠습니다.”

‘10년 뒤’라는 단어가 나오자 록펠러가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당신, 10년을 바라보고 대출 받은 거였군요.”

“모든 사업은 적어도 10년은 바라보고 짜야 하니까요. 당신의 고조부님께서 영면하실 때까지 갤런 당 6센트를 받았던 것처럼요.”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미국 석유시장을 독점할 때까지 당시 시세의 5분의 1인 갤런 당 6센트를 유지하며 경쟁사들을 말려 죽였고, 자신이 죽을 때까지도 그 가격을 지켜나갔다.

독점을 향한 록펠러의 욕심 덕분에 소비자들은 싼 값으로 석유를 사용할 수 있었고, 내연기관이 발전하며 문명이 진보했으니 탐욕의 아이러니였다.

잠시 그 시절의 역사를 떠올리던 내게 록펠러의 미소가 보였다.

“이유야 어찌됐든 10년은 기다려달라는 거군요, 미스터 리.”

“그렇습니다, 미스터 록펠러. 40억 달러, 10년 뒤에 원금과 이자까지 빳빳한 달러로 갚아드리죠.”

그 말을 끝으로 손을 내밀자 나를 바라보는 록펠러의 눈이 잠시 날카로워졌다가 무뎌졌다.

“좋습니다, 미스터 리. 당신에 대한 대출은 최대 10년으로 잡아드리죠.”

록펠러가 내 손을 잡았다. 손에 전해지는 힘은 나쁘지 않았는데··· 이 사람, 중년남성이라기엔 손등에 주름이 너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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