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31th. 또 다른 거인과 만나다 (2)
체이스맨해튼 은행에 들어간 우리는 회의실에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던 담당자들을 만났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미세스 로렌스, 미스터 썬, 미스터 리. 체이스맨해튼의 부행장 로널드 윌슨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미스터 윌슨. 해동그룹의 존 성민 리입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미들네임에 아버지 세례명이 아닌 내 이름을 넣고 소개했다. 스탠더드 캐피털의 주인이라는 게 알려지면 나비효과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어서 해동그룹의 후계자라는 가면을 쓴 것이었다.
우리는 악수를 나누고 명함을 교환한 뒤, 회의용 책상을 가운데에 두고 마주 앉았다.
체이스맨해튼 은행에서 나온 담당자들은 한국으로 치면 윌슨이라는 부행장 한 놈에 전무나 상무 각각 두 명뿐이었다.
그런 주제에 나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넨 걸 보니 부사장도 클레어와 선해철 때문에 마지못해 나온 것 같았다.
하긴, 한국의 조그만 재벌, 그것도 국내 상장계열사 네 곳의 시가총액을 다 합쳐도 1조가 안 되는 해동그룹의 회장도 아니고 후계자 중 한 명이 왔으니 얼마나 같잖게 보이겠나? 오늘 일을 성사시키려면 참아야지.
억지로 접대용 미소를 띠고 바라보던 나를 보며 윌슨이 입을 열었다.
“해동그룹에서 우리 은행의 대출을 받고 싶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네. 지금 당장 빌릴 건 아니지만 언제든 40억 달러를 빌릴 수 있도록 대출 계약을 체결하고 싶습니다.”
40억 달러라는 말을 쉽게 내뱉은 나와 달리 담당자들의 눈이 커졌다. 쥐꼬리 같은 해동그룹에 가당키나 한 액수인 것을 아냐고 눈치 주는 걸까 나를 미친놈 보듯 쳐다봤다.
그 모습을 보고도 클레어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건 담보가 아닐까 합니다, 미스터 윌슨. 담보부터 확인하시고 결정하셔야죠?”
나긋나긋한 클레어의 질문에 윌슨이 겸연쩍은 미소를 띠었다.
“그 말이 맞군요, 미세스 로렌스. 담보는 무엇을 제시하시겠습니까, 미스터 리?”
“저를 비롯한 저희집안 사람들과 일부 주주들의 해동그룹 지분 전량입니다.”
그 말과 함께 나는 회의실에 들고 온 007 가방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양쪽 단추를 눌렀다. 지금부터 가면을 바꿔 쓸 시간이다.
***
나는 열어젖힌 가방 안쪽 가장 위에 있는 ‘Stock power of attorney’라고 적힌 서류철을 집어서 윌슨에게 건네줬다.
“이 안에 해동그룹 주요 주주들에게서 받은 주주 위임장과 저를 비롯한 주요 주주들의 주식 증서가 들어 있습니다. 살펴보시죠.”
내가 내민 서류철에는 할아버지와 이명진, 세 명의 사촌동생들, 그리고 고승주와 원로 대표이사 세 명의 계열사별 주식 위임장이 담겨 있었다.
극비로 진행하는 대출계약인지라 그룹 수뇌부를 제외한 전현직 임원들의 주식은 빠졌지만 그럼에도 해동물산 지분 94퍼센트에 해동종금 지분 95퍼센트 등 담보는 충분했다.
위임장을 하나씩 찬찬히 살펴보던 윌슨이 고개를 갸웃했다.
“4개 사는 상장사라서 담보 설정이 쉽지만 해동물산과 해동종합금융은 비상장이군요. 해동물산이 호주의 노스 리미티드 지분 60퍼센트를 취득했다지만 담보가치 책정에 꽤 많은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꽤 많은 시간이 걸려? 어디서 약을 팔아!
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나는 옅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왔다고 얕잡아보는 저 흰둥이들의 뻣뻣한 모가지를 90도로 꺾어 놓을 것이다.
“이해합니다, 윌슨. 하지만 해동물산은 국내외 상장계열사들의 지주회사이고 투자 자산을 포함한 유동현금만 미국 달러로 21억 5천만 달러에 한국 원화 1조 원입니다. 부채는 총 1조 3,721억 원에 전액 원화 표시 부채죠.”
윌슨을 비롯한 임원들의 눈이 커졌다.
순수 현금만 미국 달러로 30억 달러가 훨씬 넘는 회사의 부채가 1조 5천억 원도 안 되니 얼마나 놀랐을까? 해동물산의 극단적으로 우량한 재무구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사,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윌슨. 또한 해동물산은 카자흐스탄 구리광산과 제련소를 보유한 ‘카작무스’의 지분 50퍼센트, 호주 퀸즐랜드 주의 ‘뉴 센트리’ 아연광산 지분 100퍼센트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딜로이트 본사에 지분 가치 평가를 의뢰한 결과 각각 20억 달러와 10억 달러로 나왔는데 그 중에서도 카작무스는 앞으로도 계속 현지에서 구리광산을 인수할 겁니다.”
두 곳에 투자한 돈은 총 5억 5천만 달러.
투자한지 1년여 만에 다섯 배 이상 뻥튀기됐고 더 커나갈 예정이니 나와 식사를 하던 장용재가 배 아파할만했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저 흰둥이들의 입이 벌어질 만했다.
설명을 마친 나는 해동물산의 국내계좌 사본과 부채 현황 자료, 딜로이트 본사에서 보내준 확인서를 건네주고 자리로 돌아갔다.
“세상에···.”
포장지를 풀수록 황금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것처럼 서류를 확인하던 윌슨은 우리가 있는 것도 잊었는지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짱짱한 담보를 내밀었으니 윌슨과 임원들이 탐욕을 드러낼만했다.
‘뭐, 체면 때문에 태세 전환이 쉽지는 않겠지.’
그래서 나는 윌슨 등에게 해동물산의 물류사업과 유통사업, 변산, 여수, 중문에 있는 리조트 등의 부동산을 비롯한 기타 자산들의 자료를 보여주며 그들이 태도를 바꿀 수 있게 당근을 흔들었다.
“···이러한 국내외 자산에 노스 리미티드 지분까지 합하면 우리가 담보로 제시한 모든 주식의 가치는 100억 달러 가까이 될 겁니다.”
윌슨을 비롯한 체이스맨해튼 은행 임원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나를 쳐다봤다. 해동물산의 달러와 두 광산 지분만 54억 달러이니 당장이라도 대출을 해줄 것 같았다.
내 차례가 끝나자 클레어가 지원사격을 넣어줬다.
“만약에 해동그룹의 대출상환이 어려워질 것 같으면 스탠더드 캐피털에서 연대보증을 서도록 하죠.”
“무슨 말입니까, 미세스 로렌스? 스탠더드 캐피털이 왜 해동그룹에 연대보증을 서는 겁니까?”
윌슨과 은행 임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이 알기로는 제 3자인 스탠더드 캐피털이 해동그룹에 연대보증을 서겠다니 얼마나 뜬금없을까?
클레어는 그들을 보며 싱긋 미소를 띠었다.
“우리 스탠더드 캐피털은 한국에서 해동그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긴밀한 관계요?”
“네, 윌슨. 여기 있는 ‘존 성민 리’는 해동그룹의 후계자 중 한 명이기도 하지만 스탠더드 캐피털 한국법인의 이사이기도 합니다. 옆에 있는 내 남편 썬은 스탠더드 캐피털 한국법인의 대표이면서 해동그룹 회장님의 아들 같은 사람이고요.”
클레어가 손을 뻗어 가리키자 선해철이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때문에 우리 스탠더드 캐피털은 한국 시장에 수월하게 진출했습니다. 향후 해동그룹의 호주 철광 개발과 연계될 수십억 달러의 투자사업도 우리가 선점했죠, 하하.”
선해철의 말을 듣고 체이스맨해튼의 임원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한 글래스-스티걸 법 때문에 대출이 유일한 돈벌이 수단인 자신들에게 선해철이 돈벌이를 확보했다고 자랑한 꼴이니 약이 안 오르고 배기겠나.
허나 윌슨은 얼굴에 진 주름살만큼이나 관록도 쌓였는지 다른 임원들과 달리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자리에 미세스 로렌스가 오셨군요. 스탠더드가 보증을 서준다면 우리로서는 대환영입니다.”
스탠더드 캐피털의 보증에 안심한 윌슨. 그 윌슨과 임원들을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보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윌슨? 40억 달러, 어렵습니까?”
“아닙니다, 미스터 리. 언제든 가능합니다, 하하.”
윌슨은 처음의 거만한 태도를 헌신짝처럼 벗어던지고 접대용 미소를 띠었다. 처음과 달리 지금은 무조건 회수할 수 있는 대출이 되지 않았나? 해동그룹 40억 달러 대출은.
임원들도 고개를 끄덕인 걸 보고 나는 ‘Loan agreement’라고 표지에 적힌 서류철 하나를 윌슨에게 넘겨줬다. 나는 깍지 낀 손에 턱을 얹고 윌슨을 보며 말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언제든 대출이 가능해야 하고, 대출 시작 시점으로부터 이자가 붙으며 5년 뒤에 원리금 전액을 일시에 상환했으면 합니다.”
그 정도쯤은 수용할 수 있다는 듯 윌슨이 서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윌슨의 긍정적인 반응을 보며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 고비는 넘겼고··· 알맹이를 꺼내볼까?’
고작 40억 달러 대출을 위해 100억 달러 담보를 내민 이유는 지금 꺼낼 핵심 조건 때문이었다. 나는 윌슨에게 그 핵심 조건을 알려줬다.
“연이율은 연준 금리 변동에 3퍼센트를 가산 적용했으면 합니다. 중도상환과 최대 5년까지 대출 연장 수용, 그에 따른 담보가치 재조정도 필수고요. 그리고.”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가장 중요한 조건을 내걸었다.
“어떠한 경우라도 체이스맨해튼이 계약을 위반할 시 20억 달러를 배상해줬으면 합니다.”
윌슨을 비롯한 임원들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잘 나가다가 제일 어려운 조건, 아니 어처구니가 없는 조건이 아닌가? 미국에서 손꼽히는 상업은행인 체이스맨해튼을 상대로 강짜를 부리니 말이다.
“미스터 리, 그건···.”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되십니다, 윌슨. 연준 금리가 아무리 떨어져도 5퍼센트 대는 유지될 거라 봅니다. 마진은 충분히 확보될 텐데요? 안 그렇습니까, 미세스 로렌스?”
처음과 달리 전세가 뒤집혔다. 수틀리면 계약을 파토 낼 뜻까지 비치자 윌슨의 얼굴이 흔들렸다. 그 얼굴을 보며 클레어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설득 아닌 설득을 시작했다.
“게다가 미국 금융시장은 상업은행보다 투자은행에 돈이 쏠리고 있죠. 그런 마당에 40억 달러 대출이면 빅딜 아닐까요?”
S&P 500 지수가 1년 만에 30퍼센트 이상 오를 만큼 미국 증시는 돈의 블랙홀 그 자체.
고객들의 예금으로 대출 장사를 해서 먹고사는 은행들은 장사밑천이 자꾸 빠져나가고 있으니 주름이 늘어날 판국이다. 그런 상황을 푹 찍어서 건드리니 체이스맨해튼이라고 다를 게 없는지 윌슨 등의 표정이 흔들렸다.
“미, 미스터 리?”
‘내가 니들 머리 위에 있어, 이 흰둥이 새끼들아. 10년 뒤엔 내가 시키면 개처럼 오른다리 들고 오줌까지 갈기게 될 거다.’
시덥잖은 동양인 재벌 후계자라고 생각했다면 단단히 착각한 거다. 속으로 잔뜩 비웃던 나는 당황한 윌슨 등 들을 무시하고 두 번째 돌직구를 날렸다.
“40억 달러를 융통해줄 수 있는 은행은 체이스맨해튼만 있는 게 아닙니다. JP모건, 씨티은행, 웰스파고, 뱅크 오브 아메리카도 거래대상으로 고려하고 있으니까요.”
체이스맨해튼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쟁사들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자 윌슨의 눈에 지진이 일어났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꼴이 아닌가?
“하지만 그들도 거절하면···.”
윌슨이 맞받아치려는 걸 보고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렇죠, 박 이사님?”
박태진이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세 번째 공을 날렸다.
“물론입니다, 이사님. 그들이 아니더라도 뉴욕 멜런이나 US 뱅코프, 뱅크원 등에 신디케이트론1)을 제안해도 됩니다. 그들 외에 다른 은행들도 많으니 조건을 조금 낮추면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자본주의의 천국인 미국에는 한국의 5대 시중은행만한 상업은행들이 수천 개나 널려있다. 신디케이트론이라는 대안을 선택하면 대출에 나설 은행들을 모집하고 각 은행마다 분담할 대출금 설정 등의 절차만 추가될 뿐이다.
이런 신디케이트론을 제안한 걸 보니 박태진도 많이 달라져있었다. 3년 전부터 나와 함께 월가를 겪어서인지, 할아버지와 세 원로 대표이사들, 그리고 고승주 밑에서 철저히 배워서인지 돈놀이로 협상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박태진의 대답이 끝난 뒤,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윌슨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윌슨? 지금 거절하시면 우리는 곧바로 다른 거래처를 찾을 생각입니다만.”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의사를 묻자 윌슨을 비롯한 체이스맨해튼 은행 임원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너희들 말고도 돈 빌릴 곳 많아!’라고 구구절절 늘어놓으며 속을 긁어도 반박할 방법이 있겠나?
나는 그들을 놀리듯 어깨까지 으쓱한 뒤, 마지막 핵폭탄을 던졌다.
“다른 은행들과 접촉하면 체이스맨해튼에서 대출을 거부당했다고 알릴 겁니다, 윌슨.”
“What?”
윌슨과 다른 은행 임원들이 합이라도 맞춘 듯 나를 보며 비명에 가깝게 소리쳤다. 나는 본체만체하며 입꼬리까지 올리고 그들의 속을 후벼 팠다.
“석유왕 록펠러의 후예들이 100억 달러 담보와 든든한 보증인까지 확보했는데도 40억 달러 대출에 몸을 사린다··· 다른 은행, 아니 월가에서 알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요?”
윌슨의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체이스맨해튼 은행의 지배자요, 긍지이자 자부심에 피부 누런 애새끼가 침을 뱉고 있는 꼴이 아닌가?
하지만.
자존심 문제와 별개로 경영상의 타격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대출이자로 먹고 사는 상업은행이 확실한 회수가 가능한 대출을 거부하는 건 장사를 안 하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소문이 퍼지면 누가 체이스맨해튼 은행과 거래를 하겠나?
저 노린내 나는 양놈들은 나를 동양의 이름 없는 재벌가 철부지쯤으로 알고 얕봤겠지만 그게 놈들의 패착이었다. 그들의 교만은 죽음의 강을 거슬러 올라온 나, 월가를 또 다른 전쟁터로 삼고 있는 내게 아주 큰 도움이 됐다.
터질 것처럼 얼굴이 붉게 물든 윌슨이 입을 열었다.
“10분 뒤에 다시 뵙도록 하죠.”
“그러시죠.”
나는 회의실을 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한쪽 입꼬리를 쓱 올리며 쳐다봤다.
***
옆에 있는 회의실로 들어간 윌슨이 소리쳤다.
“빌어먹을 애송이가!”
쿵!
책상을 내려친 윌슨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미국에서 손꼽히는 상업은행을 상대로 저런 미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 동양의 애송이 때문에 화를 누를 수 없었다.
“저 자식, 정말 그럴 것 같나?”
“예?”
자신의 질문에 되묻는 임원을 노려보며 윌슨이 소리쳤다.
“우리가 대출 거부하면 딴 놈들한테 까발릴 거라는 거!”
윌슨의 일갈에 임원 한 명이 우물쭈물하던 입을 열었다.
“저 애송이가 클레어나 썬과 함께 온 걸 보면 분명히 지껄인 대로 할 것 같습니다, 부행장님.”
“클레어와 썬이 누굽니까? ‘월가의 마녀’와 ‘월가의 커티스 르메이’가 아닙니까? 두 사람이 나불대면 우리 체이스맨해튼의 위신이 바닥에 떨어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끝을 맺지 못하는 다른 임원의 말을 윌슨이 퉁명스럽게 이어 붙였다.
“다른 놈들이 우리 체이스맨해튼을 얕보겠지. 고객들도 뺏길 테고!”
윌슨은 그 끔찍한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가뜩이나 주식시장으로 돈이 빨려 들어가서 예금 잔고가 줄어드는 마당에 대출까지 뺏기면 체이스맨해튼의 주가가 떨어지지 않겠나?
“그렇게 되면 록펠러님의 진노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부행장님. 은행장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부행장님. 그놈이 내민 계좌 사본과 딜로이트에서 확인해준 광산들의 가치만으로도 담보는 충분합니다.”
“맞습니다, 부행장님. 손해배상 20억 달러, 대출해주면 안 줘도 될 돈 아닙니까? 상환 여력이나 지급보증도 충분하고요. 오히려 회수가 확실한 거액의 대출을 해주면 우리 체이스맨해튼의 주가가 오를 겁니다.”
나머지 임원들도 대출을 종용하고 있었다. 건방진 태도와 각종 독소조항은 둘째치더라도 담보와 상환 가능성도 확실한 대출을 내주면 이를 역이용해서 주가도 올릴 수 있지 않은가? 자신들의 자리도 보전하는 건 물론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윌슨이 수화기를 들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통화가 걸리길 기다리는 동안 윌슨이 이를 악물었다. 저 옆방에 있는 건방진 애송이 원숭이를 씹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