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31th. 또 다른 거인과 만나다 (1)
파나마에서 뉴욕으로 돌아오고 하루가 지났다.
“건배!”
우리는 대낮부터 바비큐 펍에서 회식을 하고 있었다. 파나마 구리광산 개발권을 따냈으니 며칠 간 편히 쉬라는 할아버지 지시 때문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법인카드로 맘 편하게 식당에서 폭립을 뜯으며 수제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크으~! 이번만큼 통쾌한 일도 없었습니다, 이사님! 호주법인 마 이사 소식 듣고 부러웠는데 꿈만 같네요, 하하!”
해동물산 뉴욕법인 김동석 이사가 입에 묻은 맥주 거품을 훔치며 호쾌하게 웃었다. 같은 회사라도 세계 각지의 법인장들끼리 실적 경쟁이 치열한 게 내가 우리 회사에서 일을 한다는 게 피부에 와 닿고 있었다.
김동석과 맥주컵을 가볍게 부딪친 나는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 그에게 선물을 건네줬다.
“앞으로 파나마 구리광산은 뉴욕법인에서 관리하게 될 겁니다, 법인장님.”
“저희가 말씀이십니까?”
맥주를 마시던 김동석이 입에 대고 있던 컵을 내려놓고 눈을 깜빡거렸다. 나는 그를 보며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네. 광산 지분은 편의상 홍콩을 경유해서 보유하겠지만 실질적인 광산 관리는 뉴욕법인 몫이 될 겁니다.”
내 말을 듣고 김동석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코브레파나마가 얼마나 대단한 광산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카자흐스탄 구리광산의 반절만 되면 바랄 게 없겠습니다, 하하.”
김동석은 내 말을 듣고 껄껄 웃었지만 나중에 가면 입이 벌어질 것이다. 코브레파나마는 연간 최대 35만 톤의 구리 정광물을 30년 이상 뽑아낼 노다지가 될 테니까.
더 큰 거인이 될 해동그룹의 미래에 나는 미소를 머금고 혼자만의 자축주를 마셨다.
***
해동물산 식구들과의 식사를 마친 나는 낮잠을 잔 뒤, 헨리의 연락을 받고 박태진과 함께 그의 저택에 들어갔다. 선해철과 클레어는 뉴욕 맨해튼 5번가에 마련할 펜트하우스에 놓을 가구들을 고르느라 저녁을 먹고 오겠다고 했다.
“어서 오게, 조니. 파나마 일은 잘 하고 왔는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헨리가 나를 반겨줬고, 나 또한 그를 보며 미소를 펼쳤다.
“도와주신 덕분에 잘 해결됐습니다, 헨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일이 성사된 데는 트라이엄프 캐피털, 정확히는 헨리의 어시스트가 큰 몫을 차지했다. 할아버지 비자금을 세탁해준 덕분에 박병준에게 그 돈을 넘겨주면서 인맥을 넘겨받고 로비를 성사시키지 않았나? 헨리는 고개를 든 나를 보며 겸연쩍은 미소를 띠었다.
“겨우 4천만 달러 정도로 고맙단 인사를 들으려니 민망하군. 우리도 자네 조부님 자금을 운용하면서 수수료를 받으니 그 정도는 해줘야지. 자! 들어가세.”
헨리가 내 어깨에 손을 얹고는 다른 손으로 식당을 가리키며 함께 걸어갔다. 나를 가운데에 두고 헨리의 반대편에서 나란히 걸어가던 박태진이 나를 보며 미소를 띠었다.
식당에 들어간 우리는 그간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양념 삼으며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덜어먹었다.
“···정말 고맙네, 조니. 하나뿐인 내 딸, 언제 시집가나 걱정했는데 자네 도움이 컸어.”
“아닙니다, 헨리. 막상 저질러놓고 클레어에게 실수한 게 아닐까 했는데 당사자들이 반겨서 감사할 따름이죠, 하하.”
흐뭇해하던 헨리가 로마네 콩티 한 모금을 마시고 입을 닦았다.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내 자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은데··· 집사장.”
“네, 주인어른.”
헨리가 집사장을 향해 든 손을 튕기자 집사장이 식당 밖을 나갔다가 손에 서류철 하나를 은쟁반에 들고 왔다.
“그거, 조니에게 넘겨주게.”
“네, 주인어른.”
집사장이 나에게 걸어와서는 은쟁반을 어깨 높이에 맞춰 내밀었다.
“받으시지요, 미스터 리.”
“네···.”
보통 선물이 아닐 것 같아서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서류철을 집었다. 슬쩍 눈치를 보자 헨리가 미소 띤 얼굴로 나이프를 내려놓은 손을 내밀며 읽어볼 것을 권했고, 나는 조심스럽게 서류철을 펼쳤다.
“이건···?”
믿을 수가 없었다. 로이스 가문과 휘하 물주들이 운용하는 자금에서 30억 달러를 스탠더드 캐피털에 넣어주겠다니?
게다가 연 20퍼센트의 수익을 초과한 나머지 수익은 전부 스탠더드에 넘겨주겠다는 계약서였다.
계약서에서 눈을 뗀 나는 크게 뜬 눈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그런 나를 보며 헨리가 푸근한 미소를 띠었다.
“우리 딸과 썬의 혼사를 도와준 것에 대한 조그만 보답일세. 맘에 드는가? 하하.”
조그만 보답이 아니었다. 1달러가 아쉬운 내게 30억 달러는 큰 선물이었다.
“그래도 30억 달러면···.”
“아아, 걱정 말게. 엔고투기 때 벌어들인 돈이 180억 달러나 되니 30억 달러 정도는 큰 부담이 아닐세. 그 엔고투기 덕분에 모두들 생각이 달라졌더군.”
“아···.”
“자네 회사에 맡길 거라고 했더니 1달러라도 더 투자하겠다고 서로 성화였다네. 스탠더드에 맡겨둔 것까지 트라이엄프 주식을 40퍼센트 가까이 쥐고 있는 내 말을 누가 무시하겠나? 하하.”
헨리가 껄껄 웃는 모습을 보니 로이스 가문도 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과정이 어찌됐든 능력을 보여준 가주의 지시, 실력을 확실히 보여준 동업자에게 투자하라는 지시이니 무시할 수 있겠나? 결국엔 서로가 득을 보는 일이었다.
헨리는 고개를 탄성을 흘리던 내게서 박태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미스터 박? 조니의 보호자 겸 스탠더드 캐피털의 주주로서 말이네.”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로이스 경. 이렇게 관대한 도움을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박태진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자 헨리가 껄껄 웃었다.
“고맙긴. 조니만큼 좋은 친구도, 뛰어난 투자자도 없으니 이렇게라도 해둬야 연을 이어나가지 않겠나? 마저 들고 두 사람 맞을 준비나 하세.”
***
좋은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친 우리는 식사가 끝날 때쯤 도착한 선해철, 클레어를 맞았다.
“삼촌! 클레어!”
“야아! 우리 조카, 허여멀건 얼굴이 새까매졌네? 하하!”
나와 선해철은 서로를 부둥켜안은 뒤,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고마워요, 삼촌. 덕분에 잘 풀렸어요.”
“고맙긴. 회장님하고 네 덕분에 클레어 잡았는데 그 정도는 껌이지, 하하.”
껄껄 웃던 선해철이 박태진을 보며 미소를 띠었다.
“성민이 돕느라 고생했어. 용케 구워삶았나 보네? 흐흐.”
“건설사 출신들이 다 그렇죠, 흐흐. 술 몇 병에 4천만 달러로 이번 건 물꼬 텄으니 싸게 먹혔습니다, 하하.”
두 손을 잡으며 웃던 두 사람을 보며 클레어가 살풋 미소를 띠었다.
“피보다 의리가 더 진하네요, 후훗. 이런 날 술이 빠지면 안 되겠죠, 아버지?”
“그래야지. 역전의 용사들이 모처럼 모였으니 술이 빠지면 쓰나? 다들 식사도 했으니 코냑이나 한 잔 하세.”
헨리와 함께 응접실로 간 우리는 소파에 앉아 레미 마르탱 VSOP의 달큰한 맛과 향을 즐기며 이야기를 나눴다.
“···식기도 다 맞췄고, 가구도 맘에 드는 걸로 골랐어요. 이제 식만 올리면 돼요, 아버지.”
클레어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며 헨리가 흐뭇한 표정을 띠었다.
“잘했다. 그래도 식 준비하는 건 네 어머니하고 같이 준비하거라. 하나뿐인 딸 시집보내는 일 아니냐, 하하.”
“그럴까 봐요. 드레스는 조니가 톰 포드한테 말해뒀으니까 그쪽에서 맞추고···.”
나는 클레어가 하는 이야기를 유심히 새겨들었다.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미소를 머금은 박태진과 눈이 마주쳤지만 겸연쩍어할 겨를도 없어서 집중에 집중을 거듭할 때 헨리가 선해철을 불렀다.
“썬, 자네 혼주는 회장님이시겠지?”
“네, 헨리. 미주사업 점검 차원에서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나와 박태진이 파나마에 머물고 있던 사이에 결혼식 준비가 꽤나 많이 진행된 것 같았다. 할아버지께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뉴욕에 오면 장호건 쪽에서 미행이 붙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출장으로 포장한 듯했다.
“잘 됐군. 자네나 미스터 박 같은 남자를 키운 분이라 꼭 한 번 뵙고 싶었는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코냑을 한 모금 마신 뒤, 헨리가 입을 열었다.
“조니 자네 말을 듣고 한국 쪽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영 좋지가 않더군. 반도체 시장이 하락세인데다 역 플라자 합의 때문에 대미수출경쟁까지 일본에 밀린다지만···.”
말끝을 흐리던 헨리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 종금사라는 얼치기들이 겁 없이 단기외채를 끌어들여서 2년 이상의 고리대를 동남아나 러시아에 놓고 있더군. 자네 말이 맞았네.”
“어쩔 수 없죠. 한국은 아직도 엉성한 나라니까요.”
나를 도와주는 사람 앞이지만 씁쓸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기업이고, 정치인이고 제정신 박힌 놈이 한국에 얼마나 되는가? 모든 걸 아는 나조차 그걸 이용하려 들고 있으니.
그 모든 씁쓸함을 씻어내고 싶어 입 안 가득 머금은 코냑을 삼켰다. 식도를 훑고 위벽으로 퍼져나가는 코냑의 찌릿한 느낌이 사라질 무렵, 나는 굳은 표정으로 헨리에게 말했다.
“올해 안으로 채권이든, 주식이든 한고그룹과 아도그룹에서 모든 자금을 철수시키는 게 좋으실 겁니다, 헨리.”
박태진의 눈이 커졌고, 내 말을 들으며 박태진의 표정까지 본 헨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두 곳에 문제라도 있나?”
“한고그룹은 올해까지입니다. 지금의 그들로서는 채권은커녕 어음 상환도 불가능하니까요. 한고가 무너지면 아도그룹도 지금껏 숨겨온 2조 이상의 분식회계가 터질 겁니다.”
클레어와 선해철의 혼사를 앞두고 초치기 싫었지만 알게 될 문제라면 지금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숨길 수 없었다.
“그럼···.”
“가장 좋은 건 헨리 당신의 반대파에게 한고그룹과 아도그룹의 채권과 주식을 전부 떠넘기는 거죠.”
어차피 망할 회사의 채권과 주식이라면 헨리의 적에게 팔아치우는 게 좋다. 대한민국 국고채에 이어서 한고그룹과 아도그룹이라는 폭탄 두 개를 비싼 돈 주고 팔아치우는 일이 아닌가?
나를 바라보던 헨리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30억 불에 대한 보답인가? 하하.”
“약소하지만 유용한 선물이 되길 바랍니다, 하하.”
선해철과 클레어, 박태진까지 유쾌하게 웃는 가운데 헨리가 코냑 한 모금을 축이고 물었다.
“해동그룹은 어떤가, 조니? 노스 리미티드 인수부터 호주 철광, 파나마 구리광산 때문에 꽤 많은 자금을 썼을 텐데.”
핏줄로는 안 이어졌어도 선해철의 아버지 같은 할아버지 때문인지 헨리가 걱정을 드러냈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띠었다.
“괜찮습니다, 헨리. 유동현금도 충분하고 부채도 적은 데다 자산 재평가 작업 결과 장부상으로나마 자산 가치도 올랐습니다. 미국 증시에 묻어둔 돈도 불어나고 있고요. 그 중에서도···.”
딜로이트 본사에서 실사를 마친 카자흐스탄 구리광산과 호주 아연광산의 가치를 알려주자 헨리가 탄성을 흘렸다.
“역시 조니 자네의 안목은 빗나가질 않는군. 해동물산과 해동종금이 비상장기업이라는 게 아쉬울 정도일세. 한고그룹, 아도그룹에서 철수하면 상장된 해동그룹 계열사 주식이라도 사둬야겠어, 하하.”
“감사합니다, 헨리.”
껄껄 웃던 헨리가 웃음을 그치고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구리나 아연은 수요가 늘어날 자원이니 담보 가치로 충분하지. 원한다면 우리 쪽에서 맡아뒀다가 다시 넘겨주는 계약서라도 써줌세.”
“아닙니다, 헨리. 사실 이번 출장은···.”
파나마 구리광산 인수 건 외에도 그룹 수뇌부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알려주자 헨리가 나지막이 탄성을 흘렸다.
“호오··· 록펠러 가문의 후예들이 제대로 한 방 먹겠군.”
“어쩔 수 없지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며칠 뒤면 ‘록펠러 가문의 후예’들은 내가 쓸 가면을 보고 복장이 터질 것이다.
***
며칠 뒤.
스탠더드 캐피털에서 나머지 절차를 마친 우리는 곧바로 체이스맨해튼 은행 본점에 갔다.
“묘하네요.”
앞에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고 무심코 말하자 선해철이 나에게 물었다.
“이름 때문에?”
“네. 아직도 록펠러 가문이 지배하고 있잖아요?”
체이스맨해튼 은행.
록펠러 가문이 최대주주였던 체이스 내셔널 뱅크와 맨해튼 컴퍼니, 이어서 1991년에 케미컬 뱅크와의 합병으로 탄생한 미국의 초대형 상업은행이다.
드러난 세상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우리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록펠러 가문은 아직도 천문학적인 규모의 실명자산과 차명재산, 5대에 걸쳐 다진 미국 상류사회의 인맥으로 체이스맨해튼 은행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 체이스맨해튼 은행 본점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록펠러 가문의 뿌리였던 스탠더드 오일과 이름이 겹치는 스탠더드 캐피털의 주인인 나, 스탠더드 오일을 세운 존 데이비슨 록펠러와 같은 영어이름을 쓰는 내가 아닌가?
감회에 젖은 나를 보며 클레어가 싱긋 미소를 띠었다.
“그래도 오늘은 스탠더드 캐피털의 오너 존 데이비슨 리가 아니라 해동그룹의 장손 ‘존 성민 리’가 될 텐데, 괜찮겠어?”
“아무렴 어때요? 수많은 배역을 맡아도 그 배역을 내가 연기하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인데.”
배우들은 종종 자신들의 배역에 심취한 나머지 그 배역이 속한 작품이 끝나면 우울증에 걸리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비극을 맞는다.
그럼에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연기라는 가면을 쓰는 진짜 배우들에 비하면 내가 쓰는 가면은 한없이 가벼울 뿐이다. 그 모든 가면은 공통된 목적을 위해 쓰는 것이니까.
그 가면들의 무게에 짓눌리면 진짜 배우들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 신성그룹을 집어삼키려는 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담담하게, 조금은 심드렁하게 보일 만큼 대꾸한 나를 보며 선해철이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들어갈까? 석유왕의 후예들 코 꿰러.”
“이번 일, 꽤 재밌을 것 같습니다, 하하.”
박태진과 함께 웃음을 터뜨린 우리는 당당하게 체이스맨해튼 은행의 본점 현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