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30th. 파나마의 오리알 (5)
박병준은 자신을 파나마로 쫓겨나게 만든 이성민이 자신과 같은 호텔에 투숙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객실에 돌아왔다.
“젠장.”
박병준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짤막한 푸념을 늘어놨다.
“장호민 이 새끼, 연락한지가 언젠데···.”
박병준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장호민에게 살려달라고 SOS 요청과 함께 파나마 구리광산 정보까지 넘긴지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그런데도 장호민에게서는 전화 한 통 없으니 속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한숨만 푹푹 내쉰 박병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찌는 더위에 스트레스까지 날리기엔 맥주밖에 기댈 게 없었다.
캔을 따고 맥주를 마시던 박병준에게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박병준은 캔을 입에서 떼고 전화를 받았다.
“···Yes. I’ll go there.”
박병준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떤 놈이 날 보자는 거지···.”
익명의 한 남자가 바에서 자신을 보자는 연락에 박병준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현장에 파견된 임직원들도 자신을 슬금슬금 피하는 마당에 누가 보자고 한 걸까?
“에라, 모르겠다. 가서 공짜 술이나 얻어 마셔야지.”
어차피 끈 떨어진 연 신세이기에 박병준은 침대에서 엉덩이를 떼고 방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가 있는 층에서 내린 박병준은 웨이터의 안내를 받으며 한 테이블에 도착했다.
“누구···십니까?”
박병준의 질문을 받고 테이블 앞에 앉아있던 두 남자 중 젊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해동그룹 이성민이라고 합니다.”
그 순간, 박병준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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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준의 구겨진 얼굴을 보고 옆에 있던 박태진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나는 그에게 손을 뻗어 진정시킨 뒤, 박병준을 보며 미소를 띠었다.
“제가 반갑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신성물산 건설부문 박병준 대표이사님.”
“반가울 리가 있겠나? 자네 숙부 덕분에 물 먹고 이 밀림에 유배된 지 3년짼데.”
박병준의 퉁명스러운 대꾸에도 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의도는 안 했지만 성수대교 건은 미안하게 됐습니다, 박병준 사장님. 하지만 우리 숙부님도 당신 끌어내리려고 그런 게 아니라 어떻게든 먹고 살아보겠다고 그런 겁니다.”
“뭐라고?”
박병준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눈도 치켜 올라갔지만 내 말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 절대 안 무너질 거라고 호언장담하지 않았습니까? 무너지면 당신 목을 걸겠다고 했으니 자업자득 아닐까요? 그걸 왜 우리 숙부님 탓으로 돌리는 겁니까?”
박병준이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자 박태진이 일어났다. 나는 박태진을 오른팔로 막으며 진정시키고 박병준에게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지금은 앞으로의 미래를 도모하는 게 피차 생산적일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말이 끝나자마자 박병준이 코웃음을 쳤다.
“웃기는 친구로군. 해동그룹이 몇 년 간 컸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건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박병준 씨 당신이 당신을 버린 주인의 뒤통수에 칼을 박아 넣으려고 했다는 걸 나와 여기 있는 박태진 이사가 알고 있는 게 중요하죠.”
한쪽 입꼬리를 올린 내게 박병준의 눈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무, 무슨 소리야?”
“당신이 장호건 회장님에게 엿 먹이겠다고 장호민 부회장하고 손잡은 거 다 알고 있습니다, 박병준 씨.”
잠시 움찔하던 박병준이 나를 보며 큰소리를 쳤다.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증거, 있죠. 코브레파나마 구리광산, 아닙니까?”
싸늘한 목소리로 증거를 알려주자 박병준의 눈이 커졌다.
“그, 그걸 어떻게···?”
“얘기하자면 복잡합니다. 한 가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장호민 부회장까지 당신을 버렸다는 거죠.”
사람이라는 존재는 마지막 희망이 사라질 때 절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 지금 내 눈 앞에서 다리가 힘이 풀려 주저앉은 박병준처럼.
고개를 떨군 박병준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입에서는 끄흐으 소리가 나왔고, 바닥에는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사방으로 부서져 퍼졌다.
한참동안 이어지던 박병준의 흐느낌을 보며 나와 박태진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박쥐처럼 살던 인간이라도 오너가 아닌 이상 월급쟁이로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랬을 테니 그를 보니 마음이 불편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박병준이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그의 뺨에는 눈물자국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날 비웃겠다고 여기까지 온 건가?”
“한 잔 드시면서 얘기하시죠. 당신과 마시겠다고 좋은 놈으로 한 병 준비해뒀습니다.”
“···그러지.”
나와 박태진은 혼자서 일어나기 버거워하는 박병준의 양 팔을 하나씩 잡았다. 박병준은 우리의 부축을 받으며 우리 자리의 맞은편 좌석에 앉았다.
“글렌리벳 25년이라··· 오래된 놈이군.”
“글렌리벳에서 파는 술 중 가장 오래된 놈이죠. 당신이 신성에 뼈를 묻은 시간보다는 짧지만요.”
박병준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지금 마실 술보다 5년 이상 긴 세월 동안 신성을 위해 손에 묻힌 먼지와 흙, 오물이 생각나서일까? 그런 자신을 시궁창에 처박을 구실을 장호건에게 준 우리 집안일까? 아니면 두 번이나 자신을 버린 장 씨 가문 때문일까?
이유야 어찌됐든 박병준이 더 분노하고 더 배신감에 치를 떨수록 좋은 일이다. 그 분노와 배신감의 근원은 피니쉬를 날린 것에서 찾기 마련이고, 그 두 가지 감정만큼 자기합리화에 직빵인 마약은 없으니 말이다.
나는 포장을 뜯고 코르크 마개를 딴 병을 두 손으로 잡고 박병준 앞에 놓인 유리컵에 술을 채워줬다. 내가 술을 따르려고 할 때 박병준이 손을 들었다.
“잠깐.”
“왜죠?”
“술은 자작하는 거 아니야. 끈 떨어진 놈에게 술을 사줬으니 따라주기라도 해야 술값이 되겠지?”
박병준이 이런 사람일 줄은 몰랐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줄만 알았는데···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겠다는 건가?
나쁜 제스처는 아니었기에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술병을 넘겨주고 박병준이 따라주는 술을 공손히 받았다. 이어서 박태진도 박병준이 내민 병 끝에 컵을 받치고 술을 받았다.
건배 없이 술을 한 모금 들이켜고 박병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는 게 참 더럽더군. 소작농에서 마름으로 올라가니까 더 피곤해. 마름에서 지주로 올라갈 수는 없으니 지주들 눈치나 봐야하고 말이야.”
박병준은 그렇게 술을 비우며 신세한탄을 늘어놨다.
“···내가 자네들 꼬맹이일 때부터 중동에서 벌어온 달러가 수억 달러야! 그런데, 흐꾹! 날 버려? 이런 씨부랄 개새끼들···!”
술기운에 벌개진 얼굴로 딸꾹거리며 욕지거리를 내뱉는 걸 보니 건설회사 출신이라는 걸 속이지 못했다. 나와 박태진은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그 욕지거리를 담담히 듣기만 했다.
“개 같은 새끼들··· 나 때문에 빼돌린 비자금만 수억 달러나 되는 주제에 단물 다 빨아먹고 씹던 껌처럼 내뱉어? 니들이 생각하기엔 어떠냐? 그게 맞다고 봐? 흐꾹!”
“아니죠. 저희 집안도 그렇게는 안 했습니다.”
적당히 맞장구를 쳐준 나를 박병준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래, 이성민! 너희 집안은 감옥소 다녀온 놈들, 임원 자리 못 주면 대리점이나 인력사무소 잘만 차려주더만? 그런데 장병호나 장호건, 장호민은··· 에이, 개새끼들!”
신성그룹 장 씨 집안은 그런 보상을 소수에게만 챙겨줬다. 신성과 해동의 덩치 차이를 감안해도 신성그룹이 인색한 건 사실이기에 박병준의 욕지거리는 타당했다.
그 뒤로도 박병준은 장호건, 장호민이 들으면 기함할 소리들을 좔좔 늘어놓으며 술을 들이켰다.
쿵!
테이블에 빈 술병이 세 병쯤 쌓였을 때 박병준이 술기운을 못 버티고 테이블 위에 쓰러졌다. 나는 그대로 코까지 고는 박병준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양반, 대단하네요. 혼자서 양주를 세 병이나 비우다니.”
건설회사 출신들이 말술이라는 건 알았지만 환갑을 바라보는 인간이 양주 세 병을 쉬지도 않고 들이키다니··· 기가 질린 나와 달리 박태진은 씁쓸한 표정으로 박병준을 바라봤다.
“일하면서 마시다보니 주량이 늘었을 겁니다. 그만큼 몸이 부서져라 일했을 사람을 여기로 쫓아내다니···.”
“그래도 이걸로 하나 건졌네요. 내일 안에 쇼부 치면 될 것 같아요.”
나는 테이블 밑에 숨겨둔 녹음기를 챙긴 뒤, 박태진과 함께 박병준을 부축하며 바를 나갔다.
***
다음 날 저녁.
나와 박태진은 박병준의 객실에서 룸서비스로 저녁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서 틀어진 녹음기 소리를 들으면서.
[개 같은 새끼들··· 나 때문에 빼돌린 비자금만 수억 달러나 되는 주제에 단물 다 빨아먹고 씹던 껌처럼 내뱉어? 니들이 생각하기엔 어떠냐? 그게 맞다고 보냐? 흐꾹!]
박병준은 손에 쥔 나이프로 죽일 것처럼 우릴 쳐다봤지만 나와 박태진은 태연하게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
“어떻습니까, 박병준 씨? 이거, 장호건 회장님과 장호민 부회장님 사이좋아지라고 하나씩 보내드릴까요?”
입에서 우물거리던 스테이크 한 조각을 삼키고 냅킨으로 입을 닦은 내게 박병준이 소리쳤다.
“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아무 것도 없는 나한데!”
“아무 것도 없긴요. 지금껏 파나마에서 쌓은 인맥이 있는데.”
공성필이 인터셉트해서 넘겨준 자료와 장호민이 넘겨준 자료 모두 박병준이 지금껏 코브레파나마 구리광산을 위해 자신의 해외 개인비자금 2천만 달러까지 써가며 만든 인맥이 나와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 인맥이었다.
“페르난도 레나레스, 후안 디아스, 시몬 블랑코··· 파나마 정관계에서 힘 좀 쓰는 분들이더군요. 그것도 광산개발권 관련해서요. 그렇죠, 형?”
내 질문을 듣고 박태진이 입에 대고 있던 와인 잔을 사뿐히 내려놨다.
“맞습니다, 도련님. 그 사람들 인맥이면 광산개발권 취득뿐만 아니라 환경영향평가 기간도 단축될 겁니다.”
“이, 이···!”
박병준은 테이블에 얹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 어제의 술주정 때문에 우리에게 목줄이 채워지지 않았나?
“어떡하시겠습니까, 박병준 씨? 그 인맥, 우리에게 팔고 돈을 챙기겠습니까, 아니면 장호건 회장님이나 장호민 부회장님 손에 가마솥에서 삶겨질래요?”
두 사람 성격상, 아니 모든 재벌 오너들의 특성상 이런 배신자를 처리하는 건 토사구팽뿐이다. 광산 자료를 넘겨준다고 해도 절대로 곱게 살려둘 위인들이 아니니 말이다.
박병준은 날 노려보더니 옆에 있던 와인 병의 목을 붙잡고 병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입에서 넘쳐흐르든 말든 와인 한 병을 비우는 꼴을 보니 피에 굶주린 뱀파이어 같았다.
셔츠까지 와인에 물들어 섬뜩해 보이는 박병준이 날 노려보며 물었다.
“얼마에 살 거지?”
“원하는 값을 불러보시죠. 어제 일이 녹음된 테이프를 감안해서요.”
마냥 호구 잡히지는 않겠다는 경고를 섞어 제안하자 박병준이 침음성을 흘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박병준의 침음성이 멈췄다.
“2천만. 미국 달러로 2천만 불.”
그의 가격을 듣고 나는 나이프를 내려놓은 손을 들어 엄지만 접은 손을 들어보였다.
“4천만 불.”
“사, 사천만 불?”
눈이 커진 채 말을 더듬는 박병준을 보며 피식 웃었다.
“버진 아일랜드 계좌에 넣어 드리죠. 인맥을 넘겨받은 뒤에요. 어떻습니까?”
박병준은 잠시 머뭇거리던 걸 그만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박병준과의 협상에 쓸 비자금은 할아버지가 트라이엄프에 숨겨놓은 돈이었다. 맥시멈 5천만 불까지는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왔으니 1천만 불은 킵한 셈이었다.
양 손에 쥐고 있던 식기를 떨어뜨린 박병준을 보며 한마디 말을 더 보탰다.
“한국에 있는 재산, 전부 처분해서 미국으로 옮기시죠. 그 편이 당신에게 좋을 겁니다.”
박병준에 대한 마지막 배려를 끝으로 나는 와인을 비운 뒤, 입술을 닦은 냅킨을 툭 내려놓고 박태진과 함께 방을 나갔다.
***
그 날의 미팅 뒤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우리는 선해철에게 연락을 넣어 버진 아일랜드에 계좌를 만들면서 할아버지 비자금 중 4천만 불을 세탁해 넣는 한편, 박병준의 소개로 그가 쌓은 인맥들을 인수인계했다.
우리가 만난 파나마의 실력자들은 처음엔 고개를 갸웃했지만 해동그룹이 그간 쌓은 자원개발 사업의 성과를 듣고는 코브레파나마 구리광산 개발권 양도에 협력하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만든 비자금 중 총 4천만 불을 써야 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20년 뒤에는 100억 달러 가치의 초대형 구리광산을 손에 넣는 일이 아닌가?
로비가 끝난 걸 알리자 해동물산 담당자들은 파나마 정부에 접촉을 시도했고, 협상 결과 2억 달러에 광산 지분 100퍼센트를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박병준은 우리에게서 계좌를 넘겨받자마자 관련 자료를 모두 파기하고 신성물산 뉴욕법인에 사표를 제출, 파나마를 떠나 버진 아일랜드로 갔다.
공성필도 그 즈음에 맞춰서 흔적을 지우고 신성그룹에서 퇴사했으니 장호건은 우리가 자신이 떨어뜨린 황금 오리알을 주운 것을 영원히 모를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뉴욕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회사일도 챙기고 개인사도 챙겨야 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