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30th. 파나마의 오리알 (4)
한참동안 계약서를 확인하던 장호민이 파일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선 대표. 회사에 돌아가서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죠. 계약서,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이 자리에서 다시 뵙길 바라겠습니다, 하하.”
장호민은 선해철과 악수를 나눈 뒤, 곧장 회사로 돌아왔다.
“어떤가?”
장호민의 호출을 받고 회의실에 들어온 임원들은 계약서를 살펴보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이걸··· 진짜로 받으신 겁니까, 부회장님?”
“너무 좋은 조건입니다. 국내 은행들보다 이자도 저렴하니 부담도 훨씬 적을 겁니다, 부회장님.”
지금까지 이런 계약은 없었다. 만기가 1년 단위로 갱신되고 환율 변동에 따라 추가담보를 제공해야 하는 게 걸렸지만 이쪽도 사용처 비공개를 조건으로 세 회사의 담보가치를 8천억 원으로 잡아서 10억 달러 대출을 요청하지 않았나?
외자 유치도 잘 되고 있고 환율도 달러 당 800원 꼴이며 국민소득도 1만 불을 넘기고 있으니 환율 변동에 따른 추가 담보는 요식행위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 계약서를 공개하면 한고제철을 손에 넣는 건 물 마시듯 쉬운 일이었다.
임원들의 얼굴이 상기된 가운데 장호민이 피식 웃었다.
“호들갑 떨 거 없네. 우리 쪽도 준비가 철저했잖나?”
임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출 협상 준비를 위해 주 단위로 연준금리를 체크하고 담보로 제시한 세 회사의 가치를 최대한 ‘공정하게’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나? 누구의 기준에서 공정할지는 모르겠지만.
“이걸로 됐어. 적당히 시간 끌고 나서 계약해.”
장호민은 자신이 을이라도 절대 쉽게 보일 생각이 없었다. 이대수의 장손을 이용해서 판을 깔려고 하는 스탠더드 캐피털이니 더더욱 높은 위치를 점할 생각이었다.
“예, 회장님.”
“계약 끝나면 적절한 때에 한고제철 터뜨리고 들어갈 준비해. 고로에서 쇳물 끓이는 날, 해동제강에서 후판 받는 것도 끝이야.”
“그게 싫으면 우리에게 후판 공장을 넘겨야 할 겁니다, 하하.”
장호민과 임원들은 해동제강을 내칠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
나는 사무실로 들어온 선해철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떻게 됐어요?”
“그 새끼 왜 그렇게 뺀질뺀질하냐? 나 간 보던데? 장호건도 그렇고 그 집안 내력이냐?”
선해철은 소파에 털썩 앉으며 투덜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박태진이 피식 웃었다.
“장호민 부회장이 좀 그렇죠. 그게 가면이라고 회장님이나 승주 형님, 부회장님께서 알려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긴 한데··· 형이고, 동생이고··· 장 씨 것들, 맘에 안 들어.”
박태진을 보던 선해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분위기도 띄울 겸 그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누나는 예뻐해 주세요, 삼촌. 나중에 조카며느리 될 사람이니까요.”
“너도 내 와이프 잘 봐주세요, 오너님.”
나와 선해철이 서로 자기 여자 잘 봐달라고 하는 모습을 박태진이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네, 스탠더드 캐피털 이성민입니다.”
[나다, 성민아. 계약은 잘 됐냐?]
고승주였다. 늘 차분하던 양반이 먼저 전화한 걸 보니 우리 쪽 계약이 잘 됐는지 몸이 달아오른 것 같았다.
“네, 백부님. 삼촌한테 들었는데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고 합니다.”
[검토는 무슨. 그 조건이면 사무실에서 임원들하고 입이 찢어져 있을 거다, 흐흐.]
“그러면 더 좋죠. 계약할 때까지 적당히 속아주겠습니다, 흐흐.”
이렇게 우호적이다 못해 저자세일 정도로 보이는 계약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나? 금년 들어서 문을 연 탓인지 아니면 해동그룹에 우호적인 조건으로 돈을 빌려줘서인지는 몰라도 장호민이 우릴 만만하게 보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았다.
기분이 묘했다. 전생에는 어떻게든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해도 더 뽑아먹지 못해 아쉬웠는데 지금은 당장이나마 손해 보는 계약을 체결해도 즐겁다니···.
1년 뒤를 생각하며 미소를 그리고 있을 때 고승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출계약 체결하고 나면 파나마 출장 가기 전에 회사 들러. 지난 그룹 수뇌부 회의 때 부탁한 거 준비해뒀다.]
“위임장 말씀이시죠?”
[그래. 회장님, 부회장, 네 사촌동생들에 세 분 대표님들, 그리고 내 것까지 모두. 네 주식 증서 사본도 챙겨뒀어.]
가장 기본이 될 준비물은 오케이. 나는 다른 준비물 상태도 괜찮을지 고승주에게 물었다.
“카자흐스탄 구리광산과 호주 아연광산 지분 가치는 얼마나 되죠?”
[얼마 전에 딜로이트 본사에서 확인서 보내줬는데 배 대표님 예상치보다 훨씬 높아. 대표님도 보시고 깜짝 놀랐다, 하하.]
얼마인지는 확인서를 받아봐야 알겠지만 세계 최대의 회계법인에서 인증해줬으니 두 광산의 가치는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다. 얼마나 값이 나와서 배재훈이 놀랐을지 궁금했다.
“감사합니다, 백부님.”
이번에는 출장이 꽤 길어질 것 같았다. 한두 달 정도는 지구 반대편에 있어야겠군.
***
며칠 뒤.
장호민이 선해철과 10억 불 대출 계약을 체결한 뒤, 우리 셋은 뉴욕으로 넘어갔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스탠더드 캐피털 본사 대표이사실이었다.
“웰 컴, 조니!”
“안녕하세요, 숙모님.”
두 팔을 벌리며 달려오던 클레어가 잠시 멈칫하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조니 너, 나 놀리는 거지?”
“아니에요, 숙모님. 삼촌하고 혼인신고까지 올렸는데 어떻게 이름을 불러요?”
너스레를 떨며 되물어도 클레어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동생뻘 되는 애한테 숙모 소리 들으니까 묘해서 그래. 그냥 클레어라고 불러줘, 후훗.”
싱긋 웃던 클레어가 옆에 있던 박태진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태진 씨. 회사 생활은 어때요?”
“이중스파이 하는 것 같아서 즐겁습니다. 그런데···.”
잠시 멈칫하던 박태진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저도 클레어에게 형수님이라고 부르면 안 될 것 같군요, 하하.”
박태진이 이런 농담을 할 줄은 몰랐다. 전생에는 늘 무겁기만 했던 양반이었는데··· 그룹 살림에 여유가 생기니 마음에도 여유가 생긴 건가 싶었다.
“태진 씨도 참. 우리 남편은 어때요?”
“수도사가 됐거나 보디빌더 대회라도 준비하는 줄 알았습니다. 아침 일찍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하고 저녁때는 저나 도련님과 운동을 하고 집에 들어갑니다. 술은 말 그대로 한두 잔 정도만 마시고요.”
박태진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선해철은 클레어와의 혼인신고를 마친 뒤로 사람이 바뀌었다. 늘 아침 7시에 헬스장에서 전문 트레이너의 지도를 받으며 운동한 뒤에 출근했고, 저녁이면 우리 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셋이서 태권도나 유도, 검도 연습을 하곤 했다.
클레어는 박태진의 말을 듣고 선해철을 곱게 흘겨봤다.
“떨어져 산다고 풀어져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빨리 법원에 끌고 갈 걸 그랬나봐요, 후훗.”
“나도 노력하고 있어, 클레어. 이젠 가장이 됐는데 열심히 일해야지. 나 자신을 포함해서.”
선해철이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클레어가 그에게 푹 안겼다.
“고마워요, 썬. 식은 10월 초에 올릴 거예요. 괜찮죠?”
“얼마든지, 클레어.”
그렇게 한 부부의 상봉을 끝으로 우리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펑! 펑!
우리에게 떠밀려 문을 열고 들어간 선해철은 요란하게 터지는 폭죽소리에 눈을 껌뻑거렸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썬!”
폭죽소리의 정체는 입구에 서 있던 우리 회사의 이사진들이었다.
“너, 너희들이 어떻게?”
말을 더듬는 선해철을 보며 이사진들이 씩 웃었다.
“섭섭합니다, 썬. 어떻게 우리한테 한마디 말도 안 하고 혼인신고부터 올리십니까?”
“클레어하고 헨리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법원부터 가셨다면서요? 흐흐.”
“결혼식 때도 우리 빼놓으시면 그냥 안 넘어 갑니다? 하하.”
이사진들이 선해철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스탠더드의 초창기 멤버로서 헨리와 썬이 키운 루키들, 이제는 각자 팀을 꾸려 10억 달러 단위의 자금을 굴리는 이들이지만 트라이엄프에서 쌓인 정은 여전한 것 같았다.
“···고맙다, 얘들아.”
선해철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늘 유쾌하던 양반이 처음 보인 모습이었지만 보는 나도 코끝이 찡해졌다.
OB들 간의 해후가 끝나자 이사진들이 나를 보며 미소를 띠었다.
“감사합니다, 조니. 우리 썬, 언제 장가가나 걱정했는데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니에요. 저희 할아버지께서도 삼촌이 언제 장가갈지 걱정이라고 하셨거든요, 하하.”
너스레를 떨던 나는 웃음을 그치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먼저 사과드릴 게 있어요. 자금 사정 빡빡할 텐데 제 요청 들어줘서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아무리 오너라도 이들에게 한마디 언질도 없이 독단적으로 자금을 움직인 건 잘못한 일이다. 그런데도 군소리 없이 내 요청을 받아줬기에 사과와 감사인사를 올렸다.
“아닙니다, 조니. 호주 사업 덕분에 신규 사업 모델까지 확보했으니 오히려 저희가 감사드려야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미션 임파서블’과 ‘더 록’, ‘인디펜던스데이’가 대박 친 덕분에 시네마 펀드 수익률이 플러스로 돌아섰습니다.”
“야후도 벌써 시가 총액이 80억 달러가 목전입니다. 구찌도 펜디와 보테가 베네타, 이브 생 로랑을 인수해서 상장만 하면 시가총액이 50억 달러가 넘을 겁니다. 초창기부터 투자해 온 종목들도 순환매매로 보유물량이 늘어났고요.”
“조니가 아니었으면 우리 같은 아웃사이더들이 이렇게 성공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조니.”
회사 이야기를 들려주던 이사진들이 나에게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일 이야기 위주인 걸 보니 내 실력 때문에 인정하는 것 같아서 조금은 아쉬웠지만 밝은 표정으로 감사인사를 전하는 이사진들을 보니 이들과도 점점 정이 쌓일 것 같았다.
“고마워요. 그럼, 앉아서 얘기할까요?”
회의실 책상 앞에 앉은 우리는 프로젝터를 틀어 현재의 자산운용 현황을 면밀히 체크한 뒤, 해동종금에서 파견된 인원들의 연수로 넘어갔다.
“찰리 민, 그러니까 민주형 씨 그룹은 공격적인 투자로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죠?”
“시장의 대세와 수급을 읽고 트레이딩 하는 능력은 월가 펀드매니저들 중에서도 상위 20퍼센트 안에 들어갈 겁니다. 50개 중 5개 정도는 마이너스지만 그 5개의 손실을 나머지가 커버 하고도 수익률이 21퍼센트니까요.”
다른 이사들의 평가도 마찬가지였으니 민주형 그룹은 창처럼 날카로운 직관적 투자에 강한 것 같았다. 확인을 마친 나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주승빈 씨 그룹은요?”
“제이슨 주, 다시 말해 주승빈 씨 그룹은 회사의 재무제표 분석 능력과 리스크 관리가 좋습니다. 개별 종목 수익률은 크게 높지는 않지만 100개의 종목 모두 플러스이고 평균 수익률은 20.6퍼센트입니다.”
주승빈 그룹은 화끈하지는 않아도 안정적인 폼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갈 때 관련 자료들을 가져가서 해동증권 조직구성에 대해 조영찬과 상의해야 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비자금 문제를 확인했다.
“현재 케이맨 제도나 라부안, 버진 아일랜드, 네덜란드, 스위스 등을 거쳐서 세탁한 자금은 미국 달러 기준으로 1억 달러입니다. 앞으로도 스탠더드의 사업 확대나 조니의 본가 사업을 고려해서 매년 1,2억 달러씩은 준비하겠습니다.”
이 모든 게 불법이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우리가 안 쓰면 다른 놈이 먹이고 사업을 따갈 텐데.
작년 국고채 문제 이후로 해동그룹은 비자금 조성을 그만뒀지만 해외사업이 늘어날수록 비자금은 더 많이 필요해진다. 건설공사, 자원개발, 인수합병 등등 죄다 각국 정치꾼들의 입김이 들어가는 일이 아닌가?
더 많이 필요해질 돈을 한국 법에 안 걸리게 마련하려면 할아버지 비자금 외에 스탠더드에서도 만들어둬야 한다.
합법적인 로비는 몰라도 해외사업 때문에 비자금 만드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을 것이다. 신성그룹 계열사에 해동의 간판을 붙이거나 장 씨 집안을 신성그룹에서 내쫓을 때까지 해동그룹에는 오물 한 점 안 튀어야 하니까.
***
스탠더드 캐피털에서의 미팅을 마친 뒤, 나와 박태진은 해동물산 뉴욕법인 사람들과 합류, 파나마의 수도 파나마시티로 넘어갔다.
파나마라는 나라는 파나마 운하 때문에 생긴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에서 파나마 운하를 독점하기 위해 파나마 독립군을 후원, 콜롬비아에서 독립시켰기 때문이다.
내가 노리는 코브레파나마 구리광산은 전생엔 10여 년 뒤에 정부에서 투자했다가 적폐로 몰려 철수될 운명의 사업이었지만 이번 생에는 초대박 노다지 사업이 될 것이다.
“후우, 벌써부터 숨이 막히네요.”
그와 별개로 한국의 여름만큼이나 습한 공기에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숨이 턱턱 막혔다. 해동물산 뉴욕법인 담당자들도 눈살을 찌푸리는 게 습한 여름에 불쾌지수가 급상승하고 있었다.
그들을 보던 나는 혹시나 해서 일행들에게 물어봤다.
“말라리아 약, 다들 먹었죠?”
“네, 이사님. 본사 연락 받자마자 먹어뒀습니다.”
파나마는 파나마 운하 건설 당시에 말라리아 등에 걸려 죽은 노동자만 2만 8천명이나 되는 곳이다. 돈 버는 일이 좋아도 건강 버리면 말짱 꽝이니 미리 조심해둬야 했다.
해동물산 뉴욕법인 담당자들과 노스 리미티드 담당자들의 대답을 들은 나는 예약해둔 호텔의 일반 객실에 들어가서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었다.
“박병준 사장, 이 호텔 묵고 있다고 했죠?”
함께 객실을 쓰게 된 박태진에게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도련님. 부회장님께서 장호민에게서 받은 정보에 따르면 이 호텔 1012호를 쓴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장호민은 친절하게도 박병준이 머무르고 있는 호텔의 객실까지 파나마 구리광산 자료에 끼워서 이명진에게 넘겨줬다. 공성필이 넘겨준 자료와 더블체크를 한 결과, 파나마 구리광산 자료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재미있네요. 우린 분명히 공성필 시켜서 박병준 쪼아대라고만 했을 뿐인데 이렇게 돌고 돌아올 줄이야··· 후후.”
박병준과 장호민과의 관계도, 장호민의 성격도, 그가 장호건과의 내전을 준비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 일들을 생각할수록 재미있어서 웃음이 새어나오자 박태진이 나를 보며 미소를 띠었다.
“도련님이 철저히 관리하셨으니 가능한 일이죠. 이번에 박병준까지 포섭해두면 그룹 내에서 도련님 능력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러겠네요. 이번 일, 쉽게 풀릴 것 같아요, 흐흐.”
돌고 돌아서 분 나비효과에 박병준이라는 오리알을 줍게 됐으니 땡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