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30th. 파나마의 오리알 (1)
삼청동의 이대수가 사업과 가정사 모두가 순탄하게 진행되어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 성의원의 장호건은 신성그룹 대회의실 본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회장의 불시출근에 비서실이 뒤집어졌고, 비서실의 콜을 받은 신성물산과 신성전자 사장 이하 핵심 임원들이 황급히 대회의실로 집합했다.
“오늘 아침 기사 봤나?”
장호건의 싸늘한 질문에 임원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오늘 아침 기사를 보고 일진이 사나울 거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터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장호건의 말은 그들의 예상과 달랐다.
“문책할 생각은 없네. 전부 내 잘못이니까.”
“회, 회장님?”
이수한을 비롯한 임원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질책을 시작으로 책임자들을 문책할 줄 알았는데 장호건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하다니?
“내 욕심이 너무 컸네. 내전을 앞두고 욕심을 크게 부렸어.”
장호건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임원들 하나하나를 살펴봤다. 처음으로 듣는 장호건의 사과인지라 임원들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닙니다, 회장님! 저희가 부족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이수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용서를 구하고 허리까지 숙였다. 그 모습을 본 신성물산 상사부문 임원들뿐만 아니라 모든 임원들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이수한처럼 한 목소리로 용서를 구했다.
“아닐세. 대신, 다가올 내전에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똘똘 뭉쳐야 할 걸세. 알겠는가?”
“네, 회장님!”
임원들은 장호건이 베푼 자비에 감격한 표정으로 충성을 맹세했지만 이게 모두 장호건과 이수한이 꾸민 쇼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장호건은 한 차례의 쇼를 마친 뒤, 이수한과 함께 회장실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한 방 제대로 먹었군.”
“죄송합니다, 회장님.”
장호건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툭 내뱉자 이수한이 얼른 사죄를 구했다. 장호건은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내 욕심이 큰 건 사실이었으니까.”
신성그룹, 정확히는 자신이 실패한 사업을 해동물산이 해내는 걸, 더 크게 해내는 걸 보면서 장호건은 여러 생각이 들었다.
“해동그룹은 지금 모든 자원을 하나의 전선에 집중하고 있어. 그걸 보니 내가 우스워지더군. 건설에 자원개발, 자동차, 반도체, 핸드폰, 가전까지··· 후후.”
장호건은 지금 쓴웃음을 흘리며 복기를 하고 있었다. 자신이 집중해야 할 전선이 무엇인지, 내전에서 이길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해동그룹도 손대는 사업이 많습니다. 백화점, 할인점에 건설, 철강, 중공업, 시멘트까지 하고 있잖습니까?”
이수한은 장호건을 위로하기 위해 황급히 되물었지만 장호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덩치만 크지 내실이 부족한 우리와는 달라. 덩치는 작아도 하나 같이 건실한 회사들이 아닌가? 모두 사업적으로 연관도 돼있고.”
이 대답은 이수한도 외면할 수 없었다. 해동그룹의 계열사들은 하나같이 동종업계 경쟁기업들과 달리 재무구조와 기술력도 좋고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성장하고 있지 않나?
“그러니 우리도 전선을 집중할 필요가 있어. 벌여놓은 사업들은 어쩔 수 없어도 지금부터는 집중이 필요해. 어디가 좋을까?”
장호건의 질문에 머리를 굴리던 이수한이 눈을 빛냈다.
“신성전자에 집중해야 합니다, 회장님.”
“신성전자라··· 이유를 말해보게.”
장호건의 승낙을 받고 이수한이 비장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신성전자는 지금도 경쟁자들의 공세에 밀리지 않고 꿋꿋이 버티며 앞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버티며 밀고 나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예. 경쟁사들보다 한 단계 더 먼저 앞선 제품을 양산하고, 두 단계 더 앞선 시제품을 완성해야 합니다. 세 단계 앞선 제품이나 기술의 개념을 연구개발해야 하고요.”
이수한은 기술적으로 문외한이었지만 전략적 관점에서 가장 가능성이 있는 전선으로 신성전자를 꼽았다.
단순히 경쟁자들을 상대로 여유 있게 버티며 한 뼘씩 밀고 나가는 참호전과 더불어 경쟁자들에 대한 기습타격까지 해낼만한 유일한 전선이기 때문이었다.
“흐음···.”
“신성전자만이 가능한 전략입니다. 신성전자가 크면 나머지 계열사들을 끌고 나갈 수 있습니다, 회장님.”
이수한도 욕심이 큰 사람이었다. 장호건의 힘을 빌려서라도 영토를 늘리고 싶지만 반년도 안 남은 내전을 생각하면 지금은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기에 목을 걸고 말하는 것이었다.
장호건도 공감하는 바였다. 내전과 별개로 신성전자가 경쟁에서 살아남고 앞서나갈 방법을 고민해왔는데 이수한이 구체적으로 풀어주니 복잡했던 실타래가 깔끔히 정돈됐다.
“하나만 더 묻지. 그 말, 신성전자만 바라보고 한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 전략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면 신성전자와 신성물산이 준비하는 작업을 가릴 수 있습니다. 잘만 하면 신성물산 자동차 사업까지 살릴 수 있을 겁니다.”
이수한의 대답이 끝나자 장호건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지금 말한 전략, ‘초격차 전략’이라고 하지. 홍보실 시켜서 적당히 보도자료 뿌리고 기술, 생산부터 사내문화까지 구체적으로 정비해.”
“예, 회장님.”
“금융은 신성생명 탈환에 집중하고 나머지 계열사들은 신성전자를 뒷받침하도록 해. 물산도 자동차 사업과 영등포 재개발 빼고는 마찬가질세. 그 작업 빼고.”
모든 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법.
장호건과 이수한은 가장 승산이 있는 전선인 신성전자에 모든 걸 걸기로 결정했다. 비장의 카드 한 장을 숨긴 채.
***
며칠 뒤.
신문을 보던 나는 섬뜩한 기사 하나를 봐야 했다.
[장호건 회장, ‘초격차 전략’ 선언.
신성그룹 장호건 회장은 지난 8월 1일에 ‘초격차 전략’을 선언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할 수 없지만 경쟁자들과의 격차를 압도적으로 벌리겠다는 것으로 요약된다고 신성전자 비서실에서···.]
신문을 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선해철은 내 눈치를 슬쩍 살피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삼촌, 이거 보세요.”
신문기사를 보여주자 선해철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초격차? 말이 된다고 생각해?”
선해철의 비웃음을 멍청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지금의 신성전자는 세계 전자업계의 변방에 있는 기업이니까. 그런 신성전자의 오너인 장호건이 초격차라는 말을 입에 올렸으니 얼마나 같잖게 보일까?
하지만.
초격차 전략은 신성전자가 기술과 양산을 중심으로 경쟁사들을 압살하겠다는 마스터플랜으로 치킨게임도 마다하지 않고 적들을 말려죽이겠다는 무시무시한 전략이다.
당연히 그룹의 인재와 자금을 비롯한 모든 자원은 신성전자에 우선 집중된다. 각 계열사들의 사업 또한 철저히 신성전자를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결론은 더 이상 중구난방으로 사업을 벌이지 않겠다는 거다. 앞으로 10년 뒤에나 장호건과 이수한이 마지막으로 머리를 맞대고 짜낼 작품인데 지금 발표되다니?
한 방 제대로 먹었다.
이렇게 되면 신성전자는 견고한 성으로 변한다. 신성전자를 지배하는 신성물산도 자체 사업 확장보다 신성전자 후방지원에 집중할 것이다. 영등포 재개발에 끌어들여 놓긴 했지만 허점이 많고 커져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길 텐데··· 젠장.
선해철은 굳은 내 얼굴을 보고 웃음을 멈췄다.
“이거, 그렇게 심각해?”
“네.”
내 눈치를 살피던 선해철을 보고 반대편 책상에 있던 박태진이 입을 열었다.
“도련님.”
“네, 형.”
“신성전자와 신성물산 동향부터 주시하는 게 어떠십니까? 사업구조상 신성전자가 생산과 기술을, 신성물산이 유통을 담당할 테니까요.”
“그래야겠죠?”
“네. 그리고 우리가 인수한 해동물산 채권을 담보로 은행권에서 자금을 융통해 증시에 투입할 준비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박태진의 의견이 내 생각이었다. 초격차 전략이 시작된 이상 오는 10월부터 외국인 투자 한도가 높아지는 대로 신성전자와 신성물산 주식을 사들여야 한다.
박태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선해철에게 물었다.
“어떠세요?”
“그게 좋겠다. 곧 있으면 외국인 투자 한도도 높아지니까 준비해두는 게 좋겠어. 장호건 쪽 마크는 내가 맡으마.”
“네.”
이를 악물며 각오를 다질 때 핸드폰이 울렸다. 외국에서 걸려온 전화번호인 걸 보니 누군지 짐작됐다.
“네, 이성민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공성필입니다.]
예상대로 공성필이었다. 이 시각이면 뉴욕은 한밤중일 텐데 왜 전화했을까?
“무슨 일이죠, 공 이사?”
내가 전화를 받는 걸 보고 박태진이 나를 보며 입모양만 만들며 물었다.
‘공성필입니까?’
나는 박태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박태진도 선해철을 보며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두 사람이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공성필의 보고를 들었다.
[파나마에서 특이한 정보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특이한 소식이요?”
[예. 해동물산에서 관심을 가질 만한 정보입니다.]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질 만한 정보라면 딱 하나뿐이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에게 물었다.
“어떤 거죠?”
[파나마에 있던 박병준 사장이 코브레파나마 구리광산 사업을 타진했습니다.]
올 것이 왔지만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장호건을 상대로 가로채기를 해냈으니 얼마나 좋지 아니한가!
그래도 체면이 있어서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물었다.
“사실입니까?”
[물론입니다, 도련님. 그 전에··· 계산부터 해주셨으면 합니다.]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역시 돈부터 찾았다.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이 자식이 신성물산에 정보를 넘기지 못하게 하려고 구워삶아뒀기에 선선히 대답했다.
“얼마면 되죠?”
[미국 달러로 4천만 불입니다. 제 몫으로 반절, 나머지 직원 다섯 명에게 4백만 불씩 챙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금은 신선했다. 파이가 크니 공범자들에게 절반을 떼어줘도 된다는 건가? 일단 이유는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왜죠?”
[본사에서 파견된 담당자들의 점령군 노릇이 도를 지나치고 있습니다. 제가 비록 사모님 쪽 사람이라도 회사를 위해 일한 게 얼만데···.]
그 뒤로 공성필은 나에게 신성그룹 본사에서 파견된 담당자들이 핍박하는 것을 하소연했다.
[···너무하지 않습니까, 도련님? 저도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럼··· 퇴사할 생각입니까?”
[예. 도련님께서 챙겨만 주시면 한국에 있는 와이프와 애들 불러다가 스위스에서 조용히 살 계획입니다. 다른 직원들도 해외로 뜰 거고요.]
다시 말해 공성필은 나에게 자신과 나머지 다섯 명의 퇴직금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세계에서 손꼽힐 규모의 구리광산을 싸게 먹을 기회이니 4천만 불이면 아주 싼 값이었다.
“알겠습니다. 뉴욕법인에 연락해서 접선 준비 시킬 테니까 자료 넘기도록 해요. 돈은 자료 확인하는 대로 넣어드리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도련님!]
공성필의 목소리에서 감격이 느껴졌지만 마지막으로 그에게 시킬 일이 있었다.
“대신, 박병준 사장한테 전해서 공사에나 집중하게 하세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련님?]
“오늘 신문 보니까 장호건 회장님께서 초격차 전략이라는 걸 발표하셨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아직 정보가 안 들어간 것 같았다. 내놓은 자식 취급하는지 시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알 바인가?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공성필에게 주문을 계속했다.
“네. 선성전자에 모든 리소스를 집중하겠다는 전략 같은데 괜히 나댔다가 고문 자리도 못 받아먹고 쫓겨나지나 말라고 전해주시죠, 흐흐.”
[알겠습니다, 도련님. 흐흐.]
통화를 마치자 선해철이 나를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 났네. 우리 조카, 사기꾼 다 됐어?”
“다 삼촌 보고 배운 거예요. 좋은 스승이 옆에 있으니 어떻게 안 배우겠습니까? 흐흐.”
“어휴-, 한마디도 안 져요, 흐흐.”
낄낄 웃던 나와 선해철을 보며 박태진이 입을 열었다.
“자료가 들어오는 대로 파나마 출장을 준비해야겠군요. 미스 로렌··· 아니, 형수님께 연락해서 비자금 움직일 준비도 해야 하고요.”
“그래야죠. 노스 리미티드에도 연락해야 하고요.”
박태진의 말이 맞았다.
본사로 자료가 들어오면 말라리아 예방약도 먹어둬야 하고 클레어에게 부탁해서 파나마 정관계에 뿌릴 돈도 준비해야 한다.
인수를 마치고 나면 해동물산의 해외 계열사가 된 노스 리미티드에도 연락해서 탐사인력 파견을 요청해야 하니 해동그룹은 또다시 분주해질 것이다.
***
며칠 뒤.
파나마시티의 한 호텔에서는 중년의 남성이 수화기를 붙들고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얼마나 고생고생해서 얻어낸 정본데!”
박병준은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떻게든 돌아가겠다고 온갖 방법을 찾다가 간신히 찾아낸 동아줄을 이사 나부랭이가 끊으려고 하다니?
[본사에 직접 연락해보십시오, 사장님. 지금 회장님께서는 초격차 전략 때문에 광산 개발에 투자할 여력이 없습니다.]
“초격차?”
[예. 앞으로 회장님께서는 신성전자에 모든 리소스를 집중하실 거라고 합니다. 계열사들 모두 신성전자를 뒷받침해야 하는데 가능성도 없는 광산에 눈길이나 주시겠습니까?]
박병준은 뉴욕의 사무실에서 에어컨을 쐬며 지껄이는 공성필의 주둥아리에 공구리를 부어버리고 싶었다. 결국, 그는 끓어오르는 화를 못 참고 수화기에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내가 너보다 10년은 먼저 신성에 들어와서 쇳가루 마시고 모래바람 맞았어! 너 같은 새끼가 사무실에서 고상 떠는 거, 전부 누구 덕인지 알고 떠들어!”
[그건 옛날 일이죠, 사장님. 사실상 현장 사무소장이시면서 저한테 소리치셔봐야 좋을 게 없을 텐데요?]
“이, 이···!”
사무실에 있는 공성필은 터질 것 같은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본사 측 담당자들이 오기 전에 사무실에 와서 까마득한 선배의 속을 긁고 있지 않나? 이성민이 입금해준 퇴직금 덕분에 막장 짓거리를 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끊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통화음이 끊어지자 박병준이 부술 듯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으아아-!”
머리를 쥐어뜯던 그는 씩씩 거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어떻게든 낙동강, 아니 파나마의 오리알 신세를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